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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대성당 가톨릭미술1부.역사.건축.전례
[가톨릭 미술 이야기] 천주교 서울 대교구 홍보위원회
1부
제1장: 명동성당의 역사(조한건 신부)
제2장: 명동성당의 건축(김진태 신부)
제3장: 명동성당의 전례(장긍선 신부)
2부
제4장: 명동성당의 성미술(정웅모 신부)
제5장:명동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정수경 교수)
유럽을 여행한 사람이라면 높이 치솟은 고딕식 성당에 들어가 본 경험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하지만 꼭 멀리 찾아가지 않더라도, 서울 한복판에서 아름다운 고딕식 성당을 만날 수 있다.
여전히 은은한 종소리가 들리고. 과거와 현재가 오묘한 조화들 이루는 명동대성당이 있기 때문이다.
명동대성당은 세속과 거룩함이 만나는 장소이자, 한국 교회의 요람이다. 이곳에 성당이 지어지기 전에는 1784년 이벽이 우리나라 최초로 세례를 받았던 수표교 인근 집터. 최초의 순교자라 할 수 있는 김범우의 명레방 공동체 터가 있었다. 이렇듯 유서 깊은 부지 매입하고, 정지 작업을 하고,청나라 인부를 불러와 벽돌을 만들어 성당을 짓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회생이 있었다. 모두가 한뜻으로 힘을 모은 끝에 명동 대성당이 완공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는 비로소 종교의 자유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었다. 최초의 세례가 미루어진 곳이자 처음으로 기도하는 공동체가 만들어진 곳, 성(聖)과 속(俗)이 만나고 창조와 생명의 근원이 만나는 곳. 명동대성당은 가장 밝고 분명하게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다.
제1장 명동성당의 역사
서울 대교구 조한건 프란치스코 신부
명동대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본당이자, 서울 대교구의 주교좌성당이다, 본당(本堂 )이란 교구장의 권위 아래 고유한 목자인 본당 신부에게 맡겨진 교구의 최소 행정 단위’이며, 상주하는 사제가 파견됨으로써 생겨난다.
한국 천주교회는 긴 박해 시기 동안 일정 지역에 상주하는 목자가 없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인 ‘종현본당(현 명동대성당)의 설립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1882년 4월22일 블랑 신부가 서울에 정착하여 사목 활동을 펼친 시점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같은 해에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시복 재판이 시작되었고, 인성붓재•에서 '인현서당(계성자교의 전신/을 열었으며, 무료로 장례를 치러 주는 ‘인애회'를 정비하였고, 블랑 신부가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블랑 신부가 상주하면서 체계적인 사목이 이루어졌던 종현본당을 최초의 본당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종현본당은 제7대 조선 대목구장이 된 블랑 주교의 ‘주교좌대성당’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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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교좌성당 교구장좌가 있는 성당. 한교구에는 하나의 주교좌성당이 있다.
• 본당(木堂. parisn) 본당을 뜻하는 또 하나의 개념 중에 건물을 증심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약현성당은 1892년 완공된 최초의 고딕식 성당으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바라보는 곳에 지어졌다. 본당 사목구의 관할구역 관점으로 본다면 명동대성당이 첫 번째이지만 성당 건물 기준으로는 약현성담이 최초라 할 수 있다
• 인성붓재 중구 인현동2가와 예관동 사이에 있던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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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현 언덕에 성당을 짓고자 토지를 본격적으로 매입한 시기는 한불 수호 통상 조약 이후인 1886년경부터이다. 이 조약으로 전교의 자유가 암묵적으로 인정되면서 종현 언덕의 토지 매입이 30여 차례 이루어졌고, 비로소 성당 부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처음에 조선 정부는 이 땅에 성당을 짓도록 허가를 내어 주지 않았는데, 이곳이 국유지이며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문제를 잘 해결하였다. 1887년 성당 부지 정지 작업을 시작하고 1889년 코스트(1842-1896) 신부에게 대성당 설계를 맡겨 성당 건축에 착수하였다. 1892년 정초식을 열고 1898년 5월 29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마리아’를 주보(主保)로 종현본당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코스트 신부는 성전 건립 중에 선종하였기 때문에 건축에 재능이 있었던 푸아넬(1855-1925)신부가 건축을 마무리했다,
명동대성당 관할 지역에는 ‘서울 속 천주교 순례길’ 제1코스인 '말씀의 길’의 주요 코스가 있다. 먼저,최초로 세례식이 열렸던 이벽 요한 세례자의 집이 수표교 인근에 있고, 천주교 집
회를 열다가 적발되어 유배지에서 선종하였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이 있다.‘
김범우가 최초의 순교자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은 천주교 창설 초기부터 있었던 문제이다. 순교자의 기준은 매우 엄격한데, 천주교를 박해하는 자의 타격에 의해 죽은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그런데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가 참수로 순교한 반면 김범우는 유배지에서 1〜2년 후에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분명하게 증명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현재 시복 대상자인 ‘하느님의 종’으로서 순교자 명단에 올라 있으므로 복자가 된다면 명실공히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라 불릴 것이다.
명동대성당에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은 ‘서울대교구 역사관’으로 쓰이는 ‘옛 사도회관’이다. 이 건물은 1890년에 지은 것으로, 건립 초기에는 주교관 겸 경리부 건물로 사용되었다. 후에 신자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할 목적으로 1927년 ‘경성가톨릭 학우회 회관 사회복지회관)’을 지었는데, 현재는 교구 문서고와 교구 법원, 회의실 등으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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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은 영조대 이후 5부 46방(坊)으로 나뉘었는데, 님부 명레방에 속하던 장악원(章樂院) 맞은편에 김범우의 집이 있었다. 이곳에서 이벽의 집 집회 이후 1785년경 시작된 ‘명례방 공동체’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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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성당에서는 보통 지하를 ‘크립트(Crypt)’라고 하여 유명한 이들의 무덤이나 성해를 모시고 조배하도록 한다. 마찬가지로 명동대성당 지하에도 소규모로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소성당과 성인 유해 안치실이 있다.
이곳에는 시복 준비 중에 발견한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그들은 앵베르 성인 주교, 모방과 샤스탕 성인 신부, 김성우 안토니오와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 순교자 푸르티에,프티니콜라 신부와 현재 시복 조사 중인 이에메렌시아 그리고 무명 순교자 1위이다. 많은 신자들이 언젠가 대면할 하느님을 생각하며 자신들의 마지막 때를 묵상하는 장소가 되고 있다.
명동대성당은 6.25전쟁 중에 공산군에게 탈취되어 훼손되었으나 다행히 대성당은 큰 피해를 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1961년에는 신축 성모병원(현 명동, 가톨릭 회관)과 루르드 성모 동굴을 완공하였다. 1970년대에는 대성당을 보수하였고 교황 방한을 준비하면서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를 복원하는 동시에 지붕 동판 보수 작업을 실시하였다.
1990년대에는 명동대성당이 구국 기도회 장소가 되는 등 민주화 운동의 중심 역할도 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100년이 넘는 성당의 역사성을 보존하기 위해 '본당 제 모습 찾기’ 운동을 시작하여 건물 보수 공사를 진행하였고, 명동 개발을 위한 장기적인 계획에 따라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명동대성당은 평신도를 중심으로 자발적인 신앙 공동체가 탄생한 장소이며, 최초의 순교자가 생겨난 곳이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바오로 대성당이 순교지에 건립된 것과 마찬가지로, 명동대성당은 신앙이 시작된 곳이자 신앙을 증거하며 온 생애를 봉헌한 이들의 피의 제대 위에 세워졌다, 성전을 축성한 제8대 조선 대목구장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는 “순교자들의 꽃을 피워라(Floicte flexes martynjirO.,’ 라는 자신의 문장처럼 순교 복자 탄생을 위해 일생을 바치며 명동대성당을 가꾸었다.
이처럼 한국 천주교회는 박해 시기와 일제 강점기, 전쟁과 독재 시기의 시련을 겪으며 성장해 나갔다. 명동대성당에 들르면 꼭 가 봐야 하는 곳들이 있다. 우선, 가장 핵심인 성전에서 성체 조배를 하며 고딕식 성당의 특징인 높은 천장을 바라본다. 성전을 높이 쌓아 올리는 것은 주님께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을 상징한다.
그리고 <14사도화〉를 바라보며 사도들에게서 이어 오는 교회 정신과 선교의 열정을 되새긴다.
대성전에서 조배한 후에는 지하 성당에서 성해 조배를 한다,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모방, 샤스탕 신부, 최경환, 김성우 성인, 그리고 성인이 되지 못했지만, 배론 신학교에 온 생애를 바친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순교자를 기억하자. 또한, 시복 조사 중에 있는, 하느님의 종’ 이에메렌시아와 무명 순교자도 함께 기억하자. 그리고 지하 성당 뒤편의 성모상 앞에서 성모 송을 외우며 잠시 머문 후에, 대성전 주위를 한 바퀴 돌아 나와 서울 대교구 역사관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보자,
관람을 마친 후에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우측으로 작은 성모 동굴이 있다. 그곳에서 성모송을 바치며 다시 한번 전구 기도를 청해 보자. 여유가 있다면 성물방에 들르거나 서점에서 영적 독서를 해 보는 것도 좋겠다. 그렇게 명동대성당 순례를 마친 후에는 김 범우의 집 터를 향해 방향을 바꾸어 서울 속 천주교 순례길 제1코스인 ‘말씀의 길’을 걸어 보자.
제2장: 명동성당의 건축
수원교구 김진태 신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본당이자. 아름다운 고딕 양식 건축물인 명동대성당을 바라볼때면 언제나 감회가 새롭다. 가장 낮은 곳의 벽돌 한 장에서부터 높이 솟은 종탑까지.명동대성당을 이루는 요소 하나하나에 많은 사람의 노력과 인내의 기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탄생했던 종현 언덕에서 성당 건축을 계획하고, 오랜 시간 성당 건립에 힘쓴 선교사 코스트 신부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해 본다. 고딕 양식을 재현하 면서도 궁궐과 도성 어디서나 종탑을 바라볼 수 있도록 역사성과 상징성을 반영한 그의 공간 설게 능력은 놀랍기만 하다.
청나라 기술자를 초빙하여 대성당을 건립해야 했던 열악한 환경과 건축 경험이 부족하여 수시로 공사 중단의 위기를 맞았던 어려운 상황에서도 마침내 1898년 5월 성당을 완공할 수 있있던 것은, 자원봉사를 자청했던 전국 신자들의 회생과 건축 성금 봉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선교의 사명을 안고 낯선 땅에 와 최초의 본당 건축에 힘썼던 코스트 신부를 기리며, 한양이 내려다보이는 종현 언덕에 교회의 절대적 신앙을 건축적으로 구현했던 명동대성당의 선교 의지를 다시금 되새겨 본다.
1) 고딕(Gothic)의 정의
성당 건축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고딕 양식은 1144년 파리 근교 왕실 수도원 부속 성당인 생 드니 성당 성가대석의 벽면 전체를 스테인드글라스로 증축하면서 최초로 출현했다.
이후 15세기 말, 16세기 초까지 유럽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에는 도시 국가와 시민 계급이 형성되면서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고, 교황권의 최고 통치력으로 신앙심이 강화되어 각 도시에서 고딕 대성당을 경쟁적으로 건립하였다.
고딕 대성당의 평면은 라틴 크로스로 제단 공간이 성당 중앙 교차부까지 확장되어 사제 공간이 중심을 이루고, 외부 입면은 서측 정면도가, 내부 입면은 ‘아케이드•-갤러리•- 트리포리움'-클리어스토리'’의 4단계가, 제단은 ‘제대 -성가대석 - 주교좌와 닫집 크립트’가 중심을 이룬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시각화하려는 목적에서 리브 볼트',첨두 아치,부축벽'을 구성하여 빛을 유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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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 크로스: 세로축이 가로축보다 긴 십자가 g 태
• 아케이드: 줄지어 늘어선 기둥 위에 만든 아치 또는 그것으로 조성된 공간
• 갤러리: 교회 등 건물 내 외벽의 2층 복도
• 트리포리움: 네이브에 면해 설치된 아케이드
• 클리어스토리,:지붕의 옆벽에 만든 채광 목적의 창으로. '광창'이라고도 한다.
• 리브 볼트:, 교차하는 볼트{아치형 천장,궁륭이라고도 한다.}의 교차선 아래에 리브《아치형 천장의 뼈대를부착한 것
• 첨두 아치 : 꼭대기에 뾰족한 형태의 아치
• 부축벽: 다른 벽이 쓰러지지 않도록 버티어 댄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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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코스트 신부의 건축 계획안
* 부지 매입의 중요 요인
1대 주임 블랑 신부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이었지만, 한국 천주교회 박해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중시하여 최초의 순교자인 김범우 생가 옆 종현 언덕 일대의 부지를 매입한다 .
(1883-1887년). 블랑 신부는 순교자와 성인 성녀에 대한 공경, 순례지에 성당을 건립한 프랑스 교회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대지를 구입하고 건축 계획을 적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 코스트 신부의 입국과 건축 계획
1868년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서품된 코스트 신부는 당해 극동 선교사로 파견되어 싱가포르 요양소 건축에 참여했고, 홍콩에서 프랑스 건축 기사들에게 고딕 건축 양식을 배워 설계 능력을 성장시 켰다. 1885년 11원 8일 조선에 선교사로 입국하였지만 고딕 건축에 관한 경험으로 1887년부터 1890년까지 종현 언덕 정지 및 대지 조성 작업의 감독직을 수행했고, 김요왕의 도움으로 다양한 종류의 벽돌을 제조하였다.
이후 코스트 신부는 종현 언덕에 한국 최초로 벽돌조 2층 규모의 H형자’ 주교관을 건립하였고, 용산 신학교와 소규모 고딕 양식의 약현성당(1892년)을 건립하면서 종현본당 건축을 위한 경험을 쌓았다. 1890년 조선으로 파견된 위텔 주교는 코스트 신부가 건축과 설계 작업에 참여했던 경험을 인정하여 종현본당의 설계와 건축 감독직을 지시하였다.
* 배치 계획
고딕 대성당은 보통 ‘동서축’으로 배치한다. 구약 성경의 천지창조 가르침에 따라 제단부는 해가 떠오르는 동쪽에,출입구는 서쪽에 배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코스트 신부는 종현 언덕의 지형적 여건을 고려해 북쪽에 진입로와 광장을 형성하는 ‘남북축’을 이례적으로 계획하였다.
교회의 권위를 상징하는 종탑은 북쪽 정면도 중앙에 배치하여 한쌍의 중심인 경복궁을 비롯한 여러 궁궐과 도성 어디서나 보일 수 있도록 하였다. 100여 년의 긴 박해를 겪고 마침내 승리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선포하는 상징성을 보여 주었다고 추정한다.
* 건축과정
1892년 5원 8일 한국 최초의 고딕 양식인 종현성당 기공식이 있었다. 그 후 자금난으로 인한 공사 중단(1892년),궁륭 천장과 기둥의 붕괴,1893년), 청국인 벽돌공의 파업1892년, 1894년)등의 우여곡절 끝에 1896년 2월 외부 공사가 마무리되었으나 코스트 신부가 장티푸스로 선종하는 아픔을 겪는다. 공사는 3대 주임인 푸아넬 신부에 의해 마무리되어, 1898년 5월 29일 성령강림 대축일에 3천여 명의 내외 요인과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봉헌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 건축 공간별 특성 분석
블랑 신부와 코스트 신부는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 프랑스에서 교회 건축의 완전한 모델로 완성된 고딕 양식을 종현성당의 건축 양식으로 선택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화한 라틴 크로스의 평면과 교회의 권위를 건축적으로 구현한 종탑, 내부공간의 상승감으로 빛의 처리를 표현한 고딕 양식은 선교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한 명동대성당에 걸맞은 건축적 구현이었다.
* 진입로와 광장 공간
2014년 명동 재개발이 있기 전 진입로는 동서축의 명동길(명동YWCA 앞 동서축)에서 성당 종탑 앞 광장까지 남측으로 50m의 완만한 상승 보행로가 구축되었다. 진입로에서 광장까지의 고도
차는 13m이며, 차량은 우측 공간으로 진입하는 구조이다.
성당 앞 광장은 남북 40m, 동서 80m 폭의 공간으로, 주님 수난 성지 주일 행렬과 성탄 구유 배치 때 사용된다.
* 고딕 양식의 정면도
일반적인 고딕 양식의 정면도는 삼위일체의 신앙적 표현으로 정면은 3등분 되며 좌우 쌍탑과 중앙 출입문 상단에 팀파눔* 과 장미 창이 있는 구조이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과 샤르트르 대성당이 그 전형을 보여 준다.
명동대성당의 정면은 단일 탑 형식이며 ‘탑신 구조(포치 긴 줄 창-시계실) - 종루(비늘창 여덟 개) 뾰족탑(팔각. 소첨탑 12개)’으로 구성된다. 하부 탑신은 세 방향(북 서 동)으로 개방된 공간이며 중앙 출입문이 북쪽에 배치되었다. 명동대성당 단일 종탑의수직 구성은 일반적인 고딕 성당에 비해 단순하여 상승감이 약한 편이다. 당시 고딕 양식 건립을 위한 기술자가 부족했고 건축자재 구입에노 어려음이 있어, 고딕 양식 정면도를 형태적으로만 구성한 한계가 보인다. 그럼에도 한국 전통 벽돌이었던 전(塼)돌의 일종인 회흑색 벽돌을 부축벽,기둥,창호 내 외곽,트리포리음, 궁륭 천장의 외곽선 등에 다양하게 사용함으로씨 수평, 수직 골조 윤곽은 물론 정면도와 전체 내외부 구조를 선적(線的) 고딕 구조로 돋보이게 한 독창성이 드러난다,
* 내부 공간
: 네이브(nave)와 아일(aisle)
고딕 대성당 중앙 천장 하부의 네이브는 의자를 배치하는 전례 공간이며, 아일은 순례자와 방문자블 위한 통로로 사용되는 빈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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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팀파농더wpanum:,성당 중앙출입문 상단에 구축된 반원형의 공간이며 보통부조로 장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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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대성당은 미사 전례에 참여하는 신자들을 위해 아일 공간에도 고정된 의자를 배치하였고, 동 서 방향에 두 개의 출입문을 두었다.
네이브는 빛의 유입을 위한 ‘아케이드-트리포리움-클리어스토리’의 구성이고, 궁륭천장 구조이다.
기둥 사이 여섯 개의 뾰족 아치와 내부 기둥, 트리포리움, 궁륭천장은 회흑색 벽돌로 구축하여 채광 면적을 확대하고 수직적 상승효과를 창출하는 공간 구성을 보여 준다.
그러나 내부 기둥 두께가 대단하여 전례 참여 시 제단의 시야를 차단하며, 빛의 유입을 위해
벽체와 기둥의 두께를 줄였던 고딕 양식의 특징을 감소시키는 측면도 드러난다.
* 중앙 교차부
축소된 트랜셉트• 공간에는 명동대성당과 관련된 교회 역사와 성경 내용을 배치하였다. 동쪽에는 스테인드글라스,〈79위 복자화〉,〈이승훈 베드로〉를,서쪽에는 스테인드글라스,〈명례방 천주교 집회도〉, 세례대를 배치하여 한국 최초 고딕 성당의 역사적, 장소적 가치를 적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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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랜셉트(Transit) 십자형 교회의 팔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네이브에 직각으로 교차하여 있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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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단 공간
전례의 중심 공간인 제단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사용했던 구 제대를 보존해 두었다. 구 제대 중앙 상단에 감실을 배치했고, 현재 미사를 집전하는 목조로 된 주 제대는 구 제대 앞에 두었다. 그리고 제대 좌측에는 주교좌와 닫집, 강론 대가, 우측에는 뮈텔 주교가 마련한 성 베네딕토상과 제대가 배치되었다.
제단 뒤 앱스* 공간 하단에는 사제석과〈14사도화>가 배치되었고,클리어스토리에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제작된〈로사리오 십오단〉이 빛을 유입시킨다.
크립트 공간 배치는 다른 대성당과 차이를 보인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과 스페인 산티아고 대성당은 크립트 공간은 제단 하부에 배치하며 순례객들이 성당 내부 통로로 진입할 수 있지만, 명동대성당은 제단 후면 우측 제의실 계단과 성당 외부 경사로를 따라 진입이 가능하다. 현재 명동대성당 크립트(crypt, 지하 소성당) 공간은 다섯 명의 성인과 네 명의 순교자 유해를 모시고 있다.
명동대성당의 고딕 양식은 이후 대구 계산동성당(1902년) 원주 풍수원성당(1907년), 아산 공세리성당(1922년)건축에 영향을 주었다. 한편 완주되재성당(1896년). 대구계산동성당(1899년), 고양 행주성당(1910년)등 한옥 성당도 동시에 건축되었다. 또한 안성 구포동 성당(1922년)에서는 동서양의 건축 양식을 절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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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앱스(Apse)제대 뒷면에 반원형으로 들어가 있는 공간
•대구 계산 동성당 1899년 목조 십자가 형태의 기와 한옥으로 건립되었으나, 1년도 채 되기 전 화재로 소실되어 1902년 라틴 크로스 형태의 고딕 성당으로 새로 준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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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명동성당의 전례
서울 대교구 장긍선 신부
명동대성당은 어느 한 지역이나 교구만을 대표하는 성당이 아니라, 한국 가톨릭의 심장과도 같은 소중한 성당이다. 200여 년이 넘는 역사 속에 이처럼 귀한 유산을 물려준 파리 외방 전교회와 신앙의 선조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동안 서울 대교구와 명동대성당에서는 성당 보존에 많은 노력과 정성을 쏟아 왔다.
하지만 보수 과정에서 첫 파이프 오르간, 첫 십사처. 본당 바닥 타일 등 초기 유물이 많이 사라져버렸다. 명동대성당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은 유산들이 한순간 파괴되고 사라지는 모습이 안타
까워 명동대성당에 관한 자료를 모으던 때였다. 마침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서울시민 문화 역사 교실'에서 명동대성당에 관한 강의를 진행할 기회가 있었고. 서울 대교구의 성 미술품 현황 파악 및 등록 작업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여기 수기된 내용은 바로 이 과정에서 그간 모은 자료를 다시금 정리한 것이다.
부족함이 많은 자료이기는 하나, 명동대성당의 성물과 미술품 하나하나가 한국 천주교회의 소중한 보물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제 더 이상의 파괴와 멸실 없이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기를 바란다.
전 례
* 주교좌
한 지역을 관할하는 교구장 주교의 의자, 즉 주교좌가 설치되어 있는 성당을 주교좌성당이라 하며, 이 성당을 중심으로 교구의 주요 행사가 거행된다. 명동대성당은 중앙 제단 왼쪽에 주교좌가 설치되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이전에는 주교좌에 대해 매우 상세한 규정이 있었다. 원래 주교좌는 성당 중앙 맨 뒤에 있었고 좌우로 성직자들의 좌석이 배치되어야 했다. 중세 이후에는 제대 앞으로 이동해 복음대 근처에 위치하게 되었고, 세 개의 계단이 있는 단 위에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는 성삼위를 통해 하늘 나라로 올라간다는 의미이다.
첫째 계단에는 차부제가, 둘째 계단에는 부제 또는 사제가, 셋째 계단에는 주례 주교가 위치하도록 하여 직위와 서열에 따라 무릎 꿇는 위치를 지정해 주었다. (1752년 수교 예절서 1권 7장2항,2권8장6항) 계단에는 카펫을 깔아야 했고, 주교좌에는 비단으로 만든 방석 등을 놓아야 했다. (1752년 주교 예절서 1권 13장 3항). 그 위에는 제단과 감실 위에 설치하던 닫집을 두어 교회와 공동체 안에서 주교의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를 드러내 주었다. 그리고 닫집 좌우에 커튼을 달기도 했으며, 추기경의 주교좌인 경우 금실 장식을 더하기도 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례 개혁을 단행하여 이러한 규정은 폐지되었으나, 신자 공동체를 관할하는 주교의 직무를 잘 드러내기 위해 주교좌를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1983년 주교 예절서 47항). 현재 명동대성당에 설치되어 있는 주교좌는 뮈텔 주교가 교구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현 혜화동 성당 부지에 있던 성 베네딕도 수도회 숭공학교 목공부에서 제작한 것이다.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바오로 주교의 착좌식에서도 지금과 같은 자리에, 같은 주교좌에 착좌한 모습이 사진으로 전해진다.
* 성직자 석
성직자석은 제단 주위의 둥근 벽을 따라 배치되어있다.
좌우로 세 벌씩 모두 6조이며, 등받이까지 모두 나무로 조각 되었다. 그 앞에는 주교좌 앞에 놓인 것처럼 무릎을 꿇거나 예식 서를 올려놓을 수 있는 장궤틀이* 설치되어 의자 앞부분을 가리고 있었으나 예식 중의 여러 불편함으로 인해 현재는 치워져 있다.
성 김대건 신부상과 성 베네딕토상이 있는 성당 좌우 공간은 별도의 제단이 있었으며, 벽으로 구분되어 있었다,현재는 중앙 제대 방향의 벽을 모두 제거하고 별도의 성직자석을 두어 중앙 제단을 보며 예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써 벽에 설치되어 있던 성직자석의 등받이 부분이 좌우로 한 개씩 철거되면서 현재 성직자석의 등받이는 좌우 두 개씩만 남아 있다.
* 닫집
주교좌 위에는 나무로 만든 거대한 닫집이 있다. 이것은 원래 1915년 당시 조선 대목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의 서품 25주년을 맞아 숭공학교 학생들이 조각한 것이다.
원래는 성당 오른쪽 측면 출입문 쪽의 신자석 첫 번째 기둥에 매달아 설치했던 강론대의 머리 위 닫집이었으나 이후 철거되어 상부 닫집은 주교좌 위의 장식으로, 하부의 부재들은 해체되어 중앙 제단 앞의 나무 제대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 중앙 제대
1898년에 흰 대리석으로 제작된 중앙 제대는 프랑스의 바론(Baronne A de Gargan) 부인이 기증한 것이다. 제대는 '살아 있는 돌<1베드2,4>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에, 자연석의 고정
된 형태로 설치하도록 되어 있다.(1984년 주교 예절서 38항,미사경본 총 지침298). 그러나 주교 회의의 결정에 따라 나무 등 다른 적절한 재료로도 제대를 만들 수 있다. 명동대성당은 제대 칸에서 제대에 오로는 계단이 세 개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규정에 따른 것이다. (1752년 주교 예절서 2권 8장 30항).
* 감실
중앙 제대 위에는 감실이 놓여 있다. 원래 감실은 성찬례 후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은 성체를 보관하기 위해, 그리고 성찬 례에 함께하지 못한 병자들에게 성체를 영해 주기 위해 보존하던 것에서 시작하여,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흠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초기에는 감실을 설치함에 있어 특정한 장소를 정하지 않았지만, 중세를 거치며 성체 신심이 강화되어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감실을 제대 위에 두도록 규정하였다. 이 규정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지켜졌기에 1898년에 세워진 명동대성당도 이 규정에 따라 중앙 제대 위에 감실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양, 옆의 성 김대건 신부상과 성 베네딕토상 아래에 있는 소 제대 위에도 감실이 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현재 규정은 감실을 제대에서 분리하여 신자들에게 잘 보이고 성체 조배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고결한 장소에 설치하도록 권고한다, 이전에는 사제가 벽을 향해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였으나 이제는 신자들을 향해 거행하며, 이에 따라 신자들의 시선이 제단으로 모여야 하기 때문이다(미사 없는 영성체와 성체 신심 예식서 9항).
* 도유십자가
명동대성당 내부의 중앙 통로에서 보면 양쪽 기능에 하나 건너 하나씩 둥근 바탕에 붉은 십자가가 칠해진 모양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성당 축성 시에 주교가 성유를 바르는 곳으로 교회의 기둥, 주춧돌이 된 성인들을 상징한다.
성당의 규모에 따라 열두 개 또는 네 개를 부착하는데, 각각 열두 사도, 4 복음 사가를 상징한다 '성당 축성 예식서 일러두기 16항). 현재 명동대성당에는 좌우로 여섯 개씩 모두 열두 개의 도유 십자가가 부착되어 있다.
* 난간
제단이 있는 부분과 신자석은 난간으로 구분해 놓았는데, 원래는 동(銅)으로 만들었으나 일제 강점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며 강제 징발당한 후 나무로 대체한 것이다.
현재 명동대성당은 중앙 부분에만 난간이 남아 있다. 원래는 양옆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과 성 베네딕토상이 있는 부분에도 설치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철거되어 볼 수 없고, 기둥과 바닥 돌에 난간이 설치되었던 흔적만 남아 있다.
* 종
명동대성당의 첫 번째 종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완성된 것이었다. 당시 뮈텔 주교는 자금난으로 인해 대성당의 위용에 걸맞은 종의 구입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프랑스 선교사들이 1897년 자발적으로 모금을 진행했고, 뮈텔 주교 모르게 주문, 제작하여 1898년 5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에 감동한 뮈텔 주교는 이 종을 ‘사랑의 증표’라 불렀다고 한다. 축복식에서 종의 대부, 대모를 세우는 관례에 따라 대부는 당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대모는 공사 비서의 부인 르페브르로 하여 축복 하였다.
같은 해 6월 종탑에 올리는 공사를 하여 설치하였다.
1965년 여름 첫 번째 종에 금이 가자 11대 주임인 이계중 요한 신부가 1966년 프랑스 제올즈 피카드사와 계약하여 두번째 종을 제작하였다. 1967년 1월에 축복하여 걸었으며 대부는 모병억 베드로였다. 이 종은 현재 문화관 3층 종탑에 걸어 보존하고 있다,
현재의 종은 세 번째 제작된 것으로 지름은 1.2m,무게는 1톤이며 오스트리아 그로마이어에서 저작하였다. 2001년 4원 8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식을 가졌고, 4월 14일 부활 성야에 처음으로 타종되었다, 이 종의 대부는 정동수 바오로이다.
* 파이프오르간
1924년 5월 24일 2단 건반과 600여 개의 파이프로 구성된 첫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었다. 당시 신자들은 뮈텔 주교의 서품 25주년이 되는 1915년에 설치하려 했었다. 그런데 뮈텔 주교의 고국 프랑스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이었으므로 은경축 행사가 취소되어 설치가 미루어졌다가, 1918년 프랑스 마르공(Margon) 의 주임 트롱쉐 (Troncher) 신부에게 선불금 15,000프랑을 보내 1920년 7월까지 인도해 주는 조건으로 파이프 오르간을 주문, 제작하였다.
이 선불금은 보댕(Bodin) 신부가 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어 참전했다가 독가스 중독으로 상이용사가 되면서 받은 연금 전액이었다. 그러나 트롱쉐 신부의 지속적인 인도일 지연 등 여러 문제점이 생겨 그와 계약을 깨고 1922년 카바예 콜(Cavaille-Call)사와 계약을 맺어 1924년 1월 제작이 완료되었다.
그러나 제대로 관리하고 연주하지 못하여 잦은 고장이 생겼고, 무엇보다 오르간을 연주할 때마다 사람이 뒤에 들어가 힘으로 바람을 불어넣어야 하는 불편함으로 인해 결국 방치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후 1958년 미국 피츠버그 성당에서 새 오르간을 기증받아 1959년 6월 29일 이문근 신부의 주도하에 설치되었으나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되었다,
현재 명동대성당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은 1983년 독일의 보쉬(Bosch)와 계약하여 1985년에 설치된 것으로 그해 7월 13일 김수환 추기경에 의해 축성되었다. 2,577개의 파이프로 구성된 이 오르간은 독일 쾰른 교구가 전체 금액의 절반 정도를 봉헌해 준 것이다.
* 성 베네딕토 상
블랑 주교는 성당 부지 선정과 건축에 있어 정부와 분쟁이 일어나자 1889년 베네딕토 성인께 특별히 청원하며 ‘모든 일이 잘 해결되어 성당이 건립되면 성 베네딕토의 제단을 봉헌하겠다.’ 고 약속했다. 성당이 건립된 후 그의 후계자인 뮈텔주교는 이 약속을 지켜 선 베네딕도의 성상과 제단을 설치하여 봉헌하였다.
청빈한 수도자였던 성 베네딕도는 대부분 단순한 검은색 수도복을 입은 모습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르네상스 중세 이후로 성인들의 천상 영광을 드러내고자 단순한 색의 수도복 위에 화려한 금박 무늬 장식을 올려 제작하기도 한다. 명동대성당의 성 베네딕토상도 이 방식을 따른 것이다.
성인은 십자가 지팡이와 ‘사탄아 물러가라"VADE RETRO SATANAS)’라는 라틴어 글귀가 적힌 흰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성 베네딕토는 십자가에 대한 깊은 신심을 가졌기에 십자성호를 그으며 많은 기적을 행했고, 특히 악마를 대적하며 하느님의 자녀들을 보호하는 기적을 많이 행했다. 그래서 블랑 주교는 성 베네딕토의 중재로 하느님의 축복과 보호를 청했던 것이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상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
대성당 왼쪽 측면 제 대위에는 현재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성상이 모셔져 있다. 이 자리에는 원래 파리 외방 전교회의 주보인 예수 성심 상이 모셔져 있었으나 6.2 5전쟁 당시 공산군의 성당 점령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후 다시 제작하여 모셨으나 다시금 파손되어 2002년 6월 19일 이춘만 크리스티나가 제작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모시게 되었다.
* 성 모자상
현재 중앙 제대 뒷벽 중앙 상단에 모신 성모자상은 성당 축성 직후 촬영한 사진에서도 볼 수 있어 성당 건립 당시부터 모셨던 성상으로 여겨진다.
그 후 성당의 주보인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자상이 새롭게 제작되어 중앙에 자리하면서, 이 성모자상은 1927년 왼쪽 아일에 설치된 순교 복자 제대 위로 옮겨졌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 현재와 같이 모시고 있다.
* 세례대
처음 설치되었던 세례대는 세례식 때 사용되던 것으로, 정진석 추기경도 이 세례대에서 세례를 받았다. 원래 나무로 제작되었으나 이후 현재와 같이 돌로 제작하였고, 나무로 된 뚜껑을 얹어 놓았다. 현재는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나무로 제작된 첫 세례대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보관 중이다.
* 무염시태 성모상
1948년 6월 2일 명동대성당 축성 50주년을 맞아 성당 정면의 계단 중앙 화단에 세워졌던 것으로 한국 초기 성물 제조 회사였던 찬미사의 최찬정 씨가 제작, 봉헌하였다.
6.25전쟁중에 공산군의 총에 손상되어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으로 옮겨져 보수되었다가 1971년 8월 15일 현재의 위치인 성당 뒷 마당에 성모 동산이 조성되며 재설치하였다.
* 루르드 성모 동굴
1960년 4.19혁명 등으로 나라가 어수선할 때 한국의 평화를 기원하며 I960년 5월 23일부터 조성하기 시작했으며, 같은해 8월27일 노기남 주교에 의해 봉헌되었다,
성모상은 1.818m의 흰색 대리석으로 제작되었고, 그 앞의 벨라뎃다상은 이석규 베드로의 기증으로 역시 흰색 대리석으로 제작되어 1961년.3 월 16일 봉헌되었다.
현재의 성모 동굴은 2011년 명동대성당 개발로 인해 원래 위치에서 조금 위쪽으로 옮겨 재조성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