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에서 온 택배
티브이를 통해 ‘자연인’을 시청한 남자들은 퇴직 후 로망이 생겼다고 한다.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인적 드문 산속에 땅을 일구며 자연인처럼 살아보는 거란다. 도시 생활의 편리함에 중독된 여자들한테는 절대 동조 얻지 못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온전히 뼛속까지 도시물이 들어있는 막냇동생이 갑자기 전남 고흥에다가 땅을 샀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분명 잠깐 불어온 바람에 한 번쯤 시골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 그러려니 하고 웃어넘겼다. 동생은 서울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낙향한 것은 아니지만 서울과 고흥을 오가며 집을 짓고 현재까지 농사를 짓고 있다.
얼마 전 주문한 것이 없는데 저온 창고 앞에 택배 상자 하나가 놓여있다. 상자 겉면에 전남 고흥이라 찍혀있는데 아무리 생각을 더듬어 보아도 아는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성급함이 앞서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 안에는 노랗게 잘 익은 유자가 가득 들어있다. 그러고 보니 작년부터 이맘때면 남동생이 늘 보내오던 거였다. 남동생은 고흥 바닷가가 있는 촌에 살면서 배와 유자를 가꾼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누나한테 보내기 전에는 서울 친구들한테 선물하곤 했었다고 한다. 시골 생활자랑도 할 겸 택배비를 들여 받는 사람의 마음에 기대치가 가득했는데 돌아온 대답은 이외였다고 한다. 농사지은 보람도 없이 친구 아내들한테 많은 유자를 보냈다가 혼만 났다고 했다. 유자청을 만들기 위해 칼질하면서 손 아파 죽는 줄 알았다고 만날 때마다 타박하더란다. 생각해서 베푼 배려가 젊은 아내들한테는 노동으로 작용한 거였다.
남편은 겨울이면 시중에서 파는 유자청을 서너 병은 기본으로 사서 먹는다. 동생이 유자 농사를 짓는다는 말에 귀가 나팔꽃처럼 열렸다. 공주에서 농부로 살고 있지만 유자를 실물로 본 적은 없다. 그래서 남동생한테 천대받는 유자를 누나한테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공주에서 밤농사를 짓고 있으니 유자와 물물교환하면 좋을 거 같았다. 그 뒤로 가을이면 동생에게 알밤을 보내고 동생은 겨울이면 유자를 수확해 보내오게 되었다.
유자청을 만들면서 동생 말처럼 여자들이 왜 그토록 유자 받는 걸 싫어하는지 알게 되었다. 유자 속에는 레몬보다 두 세배나 더 많은 씨앗이 들어있다. 유자 배를 갈라 씨앗 빼내는 일이 정말이지 장난 아니다. 유자를 여러 조각내어 씨를 빼내고 잘게 져 미고 하는 일은 시간 알기를 금처럼 여기는 사람한테는 최악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이일을 장시간 하다 보면 어깨 결리고 뒷골까지 당긴다. 올해 들어 두 번째로 유자를 받을 받고 보니 남동생 친구 부인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동생이 피땀 흘려 지은 농사지만 두 해 만에 나도 조금은 유자를 보면 내 얼굴이 노랗게 뜨고 만다.
마침 옆집 형님께서 올해 수확한 햇땅콩을 먹어보라며 볶아서 가져왔다. 나는 형님께 답례로 유자를 가져가실 거냐고 여쭤보았다. 형님도 전에 나처럼 유자청을 담아본 적이 없어서 아주 좋아하셨다. 나는 하마터면 손에 물집 나도록 썰어야 하는 유자를 형님과 반반 사이좋게 나누기하였다.
현관에 두었던 유자를 더 시들기 전에 오늘은 기필코 담가보리라 마음먹었다. 먼저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문지르고 물로 헹구었다. 반나절 동안 물기를 말리고 유리병도 소독해 두었다. 작년처럼 채썰기가 아닌 올해는 브랜드에 갈아보는 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밀고 들어왔다.
얼마 전 핸드폰에서 유자청 담그기가 나왔는데 설탕보다는 매실 엑스를 이용하면 당을 40%로 줄일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당뇨가 있기에 유자청은 먹지 않는데 당뇨환자도 먹게끔 만들면 감기에 좋은 유자청을 즐겨도 좋을 거 같다. 유자 씨앗을 빼고 브랜드에 매실 진액을 넣고 갈았다.
그리고 혹시나 설탕 농도가 적어 곰팡이가 날 수 있으므로 방치 차원에서 단맛은 그대로면서 몸에 당 흡수가 되지 않는 스테비아를 넣고 혼합했다. 끈적끈적 달콤한 것이 무척 좋았다. 올겨울에는 유자청을 맘 놓고 즐길 수 있을 듯하다. 동생 덕분으로 유리집은 유자청 풍년이다.
자연인을 통해 시골 생활을 동경하는 남자들 이것도 시대의 한 흐름인 듯싶다. 가교리만 해도 칠성산 곳곳에 컨테이너를 갖다 놓고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어가고 있다.
젊어서는 시선조차 가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면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나이가 주는 선물인 듯싶다. 농사를 지으며 점점 자연과 가까워지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사람들은 늘그막에 배워간다. 유리병에 담긴 노란 유자청을 볼 때마다 나는 남동생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