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언약의 기도들
옛 언약에서 기도의 예들을 위해서 새 언약에 사용할 때 많은 잘못된 적용들이 나타났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나은 시대, 더 좋은 언약 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옛 언약 아래의 삶은 예수님이 아직 오지 않으셨던 때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단과 악한 영에 대적해 더 많은 씨름을 벌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드디어 예수님이 오셨고, 골로새서 2:15은 그 권세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이 이미 사단을 이기셨기 때문에 옛 언약 아래 살아가던 사람들의 기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 가운데 그분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세를 성도들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21-22)
여기서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믿는 기도, 즉 믿음의 기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76 성경적 기도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이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생활, 즉 사람 나름의 상황과 환경에 적용이 가능한 기도입니다. 마가복음 11:24은 당신이 기도하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당신과 함께 기도하는 다른 누군가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경우라면 동의하는 기도, 즉 합심하여 구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 18:19).
하지만 마가복음 11:24는 당신과 합심하는 다른 누군가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네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바라는 무엇이든지]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기도하고 받은 줄로 믿으면, 당신이 바라던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종류가 다른 기도를 한 덩어리처럼 함께 뭉뚱그려 기도함으로써 잘못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 중 일부를 놓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지배하는 어떤 원칙이나 규칙, 즉 영적 법칙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각각의 법칙들이 모든 종류의 기도에 다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알아야 합니다.
예컨대, 게임마다 그것을 지배하는 일련의 규칙이 있습니다. 스포츠로 말하자면, 종목에 따라 다른 규칙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기도가 그 기도 종류에 따라 다른 규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기도의 종류가 한 가지 이상이라는 전제가 포함되는데, 에베소서 6:18 “모든 기모든 종류의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라는 말씀에서도 그런 맥락을 읽을 수 있습니다. 모든 기도가 다 기도입니다. 하지만 기도에도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기도가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게임마다 각각 나름의 규칙이 있습니다. 예컨대, 야구에서 적용되는 규칙이 축구에서도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한 경기의 규칙을 다른 게임에 적용하려고 하면 끔찍한 혼란만 초래할 뿐입니다.
나는 유럽에서 오락을 즐기러 미국에 온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뉴욕의 한 야구 경기를 보러 가게 되었습니다. 자국에는 야구 경기가 없기 때문에, 그는 야구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면서 경기의 흐름을 따라가려고 했지만, 사용하는 표현 중 일부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부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다른 종류의 기도를 지배하는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종류의 기도가 있지만, 모든 경우에 동일한 규칙이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모든 기도에 동일한 규칙을 적용하려고 하면 혼란만 가중될 뿐입니다.
정화의 기도 vs 믿음의 기도
기도할 때는 언제든지 “만약 주의 뜻이라면”이라고 하면서 기도를 마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러는지 물으면 아마도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셨기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매번 그렇게 기도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 그리고 한가지 종류의 기도를 할 때만 그렇게(아버지의 뜻이라면) 기도하셨습니다(눅 22:42).
6장 믿음의 기도 77
예컨대, 무덤에서 나사로를 일으키실 때 예수님은 무덤가에 서서 “주님, 주의 뜻이라면 나사로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라고만 아버지께 아뢰셨습니다(요11:41-42).
그런 후에 나사로에게 나오라고 말씀하시자, 그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이때 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상황을 변화시키는 기도였습니다. 무언가 기도 응답을 얻어야 하는 상황이거나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한 기도가 필요할 때에는 절대로 “만약”이란 말을 붙여서는 안됩니다. “만약”은 “의심의 명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이 기도한다면, 당신은 잘못된 규칙을 사용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에 기도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사실 너무나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만약 주의 뜻이라면”이라고 기도하셨을 때는 어떤 기도를 하고 계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정화와 헌신의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상황 가운데 주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없을 때 “만약 주의 뜻이라면”이라는 기도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정화의 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 22:42).
예수님은 상황을 바꾸기 위한 기도를 하고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화와 헌신의 기도를 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만약 주의 뜻이라면”이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단, 우리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 쓰임 받기를 원할 때 해야 합니다. 목사가 되었든 선교사가 되었든 아니면 그 밖의 어떤 다른 부르심이든 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라고 부르시는 일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부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우리는 기꺼이 할 수도, 또 갈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헌신과 정화의 기도를 할 때에는 “주님, 주의 뜻이라면”, 혹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황을 바꾸거나 그분의 뜻을 따라 구하는 바가 있을 때는 “만약 주의 뜻이라면”이라고 기도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성경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의 필요가 채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을 통해 그 필요가 채워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당신의 마음이 바라는 것을 받는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마가복음 11:24은 마음이 바라던 것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받는 것, 즉 “당신이 바라는 무엇이든지”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저주하시지 말라버렸던 무화과나무처럼, 이 구절은 자연 세계
78 성경적 기도
에서의 필요와 관련된 말씀입니다(막 11:14. 20-21).
마가복음 11:24 말씀에는 치유에 관한 것도 포함됩니다. 내가 병상에 있을 때, 마귀는 마가복음 11:24이 육체적인 문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말씀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이 말씀이 영적으로 바라는 것에만 한정된 말씀인 것처럼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마귀의 거짓말을 듣고 자신들에게 예비되었던 하나님의 축복을 뺏기고 마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당신이 바라는 무엇이든지”라고 말씀하십니다(막 11:24).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이런 바람들이 채워질 수 있다는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요 약속입니다.
이때 “내 바람들이 잘못된 것이면 어쩌죠?”라고 묻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잘못된 바람을 가지고 있다면 먼저,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으셔야 합니다. 혹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떠나있는 사람이라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떠난 사람들과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마가복음 11:24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할 수 없습니다. 이와는 달리, 구원받은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음에 바른 바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거하면서 자신의 육체를 쳐서 굴복시키며 살아간다고 하면 그 바라는 것들이 잘못될 수 없습니다! 자기 육신(flesh)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복음 11:24을 통해 하나님은 마음의 바라는 바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아니면 재정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이든, 우리의 모든 필요가 채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는 옛 언약 아래 살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약을 공부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뭔가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하신 약속들이 단지 영적인 부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순종하면, 재정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부요하게(복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신 28:1-14).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 중에서 병을 제거하며 그들의 날수를 채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출 23:26). 또 성경의 시편에서는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실 때, 그들 중에 약한 자가 없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시 10537). 하나님이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이스라엘 백성이 어림잡아 200만 명쯤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관련된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부분에 대해 완전한 준비를 갖춰 놓고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옛 언약 아래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그분의 명령을 지키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라고 이르셨습니다(신 28:1-14; 사1:19). 이 구절 “땅의 아름다운 소산”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이 물질적으로 잘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으로 넘어와서 살펴보면, 표현만 달라졌을 뿐 동일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요한삼서 2절에 요한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6장 믿음의 기도 79
주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겠다고 하셨고(마 7:11), 우리를 돌보신다고 하셨습니다(벧전 5:7). 또 마가복음 11:24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바라는 것을 주신다고 하시면서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는지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당신의 믿음의 기도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언제나 역사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을 두고 정해진 규칙을 따라 기도하도록 해야 합니다. 좀 다르게 말하면, 나는 마가복음 11:24 말씀을 사용해서 나의 믿음으로 나의 응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도 늘 응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의 대상인 상대방의 뜻과 믿음이 변수로 함께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동의(합심)하는 기도를 할 때, 한 사람의 불신앙이 다른 사람의 믿음을 무효화시킬 수 있습니다. 아직 영적 갓난아이인 성도를 위해 기도할 때는 우리의 기도와 믿음 위에서 그들의 응답을 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실제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이 스스로 나름의 기도 생활과 믿음을 발전시켜 가기를 기대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믿음의 기도가 늘 응답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믿음의 기초를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기도한다면,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응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목사로서 성도들을 섬기면서, 주로 나의 믿음에 의지해서 치유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개 이 사람들은 여러 다른 교단 교회의 성도들이거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새로운 회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치유에 관해서는 영적 갓난아이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주 쉽게 치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그리스도인들이 치유를 받기는 아주 힘들었습니다. 육신적인 나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어온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의 진리를 배웠던 사람에게서, 그리고 자신의 믿음이 성장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던 사람에게서 더 많은 것을 기대하십니다.
2차 세계대전 후에, 미국 내에서는 하나님의 치유에 대한 부흥 운동의 불길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습니다. 1947년 즈음에 시작되어 1957년, 1958년까지 쭉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나는 많은 치유사역자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다들 하나같이 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그들처럼 나도 같은 문제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대개가 교회에서 치유 집회를 한 경험이 있는 사역자들인데, 이 문제에 맞닥뜨리곤 했다고 합니다.
이들 치유 사역자들이 한결같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오순절 교회 성도들을 지나치지 않고서는 도통 사람들이 치유를 받도록 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치유사역자들은 오순절교회 성도들이 통과하고 나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했습니다. 왜냐구요? 대부분의 오순절 교회 사람들이 사역자의 믿음을 통해 치유받기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서 자신의 마음과 영에 새겨넣는 일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해
80 성경적 기도
야 함에도 그들 자신의 믿음을 발전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치유 사역자들의 믿음에 기초한 치유를 그들에게 더 이상 행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스스로가 믿음을 사용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탓에, 그들은 치유를 받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953년에 설교를 하러 갔던 한 대형교회에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오순절 교회 성도들이 치유를 받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만난 한 행정 장로님은 자신이 속한 오순절 교단에서도 동일한 문제를 겪은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얘기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는 그 전년도에 있었던 오럴 로버츠 목사님의 치유 집회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이것은 1953년 이전의 일이었습니다. 대부분 아주 유명한 오순절 교회들이 이 집회를 후원하고 있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6주가 지나자 그들은 참석했던 사람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적은 설문카드를 수천 통발송했습니다. 묻는 항목에 체크를 해서 다시 반송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서명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 카드에는 로버츠 목사님이 자신에게 안수하고 기도했을 때 치유를 받았는지 묻는 질문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머지 질문 하나는 치유를 받은 상태가 계속 지속되고 있는지 묻는 것이었습니다. 수천 통의 설문카드가 발송이 되었고 돌아온 카드가 약 6천 장쯤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6천 장의 카드 중에서 오순절 교회 성도들이 치유를 받았다고 답한 경우는 단 3퍼센트에 그쳤습니다. 오순절 교회 성도들의 경우 100명 당 3명만이 치유를 받았다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교단 출신의 성도들은 70퍼센트가 치유를 받았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6주가 지난 후에도 그 70퍼센트의 사람들은 여전히 회복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치유가 되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교단 성도들에서는 100명 당 70명 꼴이었습니다. 정말로 좋은 일이 아닙니까!
무엇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하나님은 치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오순절 교회 교인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치유 받기에 충분한 믿음을 키워가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젠 스스로의 믿음을 통해 치유 받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장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은 로버츠 목사님의 믿음에 근거해 그 사람들을 고치실 수 없었습니다.
이 오순절 교회 교인들은 말씀을 통해 믿음과 치유에 관해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순절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치유 집회에 참석한 다른 교회에 나가는 교인들은 믿음과 치유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버츠 목사님의 믿음에 기초하여 치유를 받기가 훨씬 더 쉬웠습니다.
보통 이렇게 그 대상이 영적 갓난아이이거나 치유와 관련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믿음의 기도가 쉽게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나의 믿음을 가지고 그들이 치
6장 믿음의 기도 81
유를 받도록 할 수가 있습니다. 아직 갓난아이와 같은 성도들이나 다른 교단에서 온 사람들이 기도를 받기 위해 나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이 치유를 진심으로 원하고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대체로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라도 나의 믿음을 통해 치유의 응답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주위를 보면 나름대로 성장 과정을 거쳤을 것도 같은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계속 영적 갓난아이로 있으면서 다른 누군가의 믿음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믿음을 사용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도 그들이 스스로 믿음을 사용해 하나님을 믿고 만나기를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지역 교회의 목사로 섬기면서, 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이 회복되는 모습을 많이 볼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1년 이상 지나면, 같은 사람들인데도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나는 이전과 마찬가지의 동일한 믿음으로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실제로는 그들을 위해 두 번째 기도할 때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들이 쉽게 치유를 받았던 2~3년 전보다 믿음이 더 성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나의 믿음은 자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사람들이 두 번째로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그들을 낫게 할 수 없었습니다. 목사로서 양무리를 돌보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이 일이 딜레마로 다가왔습니다.
목회를 하던 한 교회에서 우리는 매주 토요일 저녁이면 치유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 중에는 휠체어 생활을 하는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관절염을 앓고 있었는데, 몸의 관절들이 아주 뻣뻣했습니다. 그렇지만 휠체어로 움직여서 자신의 식사를 준비하거나 집안일을 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습니다. 그 성도가 감기 같은 것에 걸리면 내가 기도를 해 주었고, 그리면 언제나 쉽게 낫곤 했습니다. 그녀는 자질구레한 질병들에서 언제나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성도들과 함께 그녀의 집을 방문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녀의 관절염이 깨끗이 나올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할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하실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따라온 중보기도 팀을 그녀에게서 약간 떨어져 서게 했습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그 방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능력이 그녀를 휠체어 밖으로 일으켜 세우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마치 그녀를 공중에서 붙들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휠체어에서 섰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녀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한 순간 아래를 향해 손을 더듬거리더니 휠체어를 다시 붙잡았습니다. 그리고는 털썩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내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자매님, 조금의 믿음도 없으시군요.”
무심결에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예 없습니다. 저는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휠체어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한 말대로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녀를 위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이 임했는데도 치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
82 성경적 기도
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도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치유하시는 능력에 기대어 몸을 맡기기만 했다면 뻣뻣하던 몸이 풀어지고 관절의 마디마디는 회복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집회와 세미나를 개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의 믿음이 성장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믿음이 성장할 기회가 충분히 있는데도 전혀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이제는 스스로의 믿음으로 서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오래전 일로, 나는 여동생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나는 동생을 위해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나는 동생의 생명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 위에 믿음으로 서 있었고, 주님은 동생이 살 것이라고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침내 동생은 회복되었고, 남아 있던 암의 증상들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5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동생의 몸에서 다른 부분에 암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에 발생했던 암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이번에는 뼈 속에 생겼습니다. 동생은 점점 몸무게가 줄더니 36킬로까지 떨어졌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동생이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왜 나의 기도로 그 결말을 바꿀 수 없는지 거듭 물었습니다. 동생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자신의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는 5년이라는 시간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동생은 구원 얻은 성도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동생이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 동생이 자신의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해 무언가를 하도록 기대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참 안타까운 예지만,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을 발전시키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해 가기를 진심으로 원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대신 믿음의 짐을 져주는 영적 갓난아이로 남아 있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고, 또 실제로 돕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성도들은 계속 영적 갓난아이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에게 열 명의 자녀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그 모든 자녀가 계속해서 갓난아이 상태라면 어떨까요? 갓난아이들은 서로를 도울 수도 없고, 당신의 생활은 그야말로 뒤죽박죽 엉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자연 세계에서 아이들은 자라나기 마련이고, 더 나이가 들면 자기보다 어린 아이들을 도울 수가 있습니다. 영적인 부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자녀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성장하고 있는 교회라면 영적 갓난아이들이 계속해서 탄생할 것이고,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건강한 일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이 영적 갓난아이 상태로만 있으면, 새롭게 태어나는 갓난아이들은 누가 돌보겠습니까? 교회는 큰 어려움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다양한 사역의 은사들을 두셨습니다(엡4:11-12). 예컨대, 그 중에 복음 전하는 자라고 하면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으로 이끄는 데 주로 관심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 모두가 복음 전하는 자라면 사람들이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의 전부일 것입니다.
새로운 회심자들은 언제까지나 갓난아이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을 가르치거나 돌볼
6장 믿음의 기도 183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적 갓난아이들은 당연히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장하도록 도우려면 교회 안에 여러 다른 사역의 은사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영적 갓난아이들에게 목자가 필요한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목사를 세워주셨습니다(엡 4:11). 하나님은 자신의 양 떼가 좋은 꼴을 먹으며 잘 자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교사를 세워주셨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목사가 설교자와 교사의 역할까지 하기도 합니다.
어찌되었건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자녀가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우리를 두신 데는 그 한가지 이유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지역 교회에 잘 출석하면서 목사의 지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이 됩니다.
만일 우리의 자아가 원하는대로 하자면, 우리 자신은 여전히 영적 갓난아이로 남아 있으면서 다른 누군가가 영적인 짐을 대신해 주기를 바라기가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스스로를 위해 믿음의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은 할 수 없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이 당신에게 있음을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계속해서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11:24에서 예수님이 “너희”(you)라고 말씀하셨던 곳마다 당신의 이름을 넣으십시오.
마가복음 11:24 당신에 대한 개인적인 약속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내가 바라는 무엇이든지 내가 기도하면 받는다는 것을 나는 믿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받을 것이다!”
당신 스스로를 위해 믿음의 기도를 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기도한 것에 대한 응답을 얻으십시오.
(캐네스 E. 해긴 『성경적 기도』 정승혜 옮김. 서울: 베다니출판사, 2014. pp. 75-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