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선균의 죽음은 너무 뜻밖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연예인이나 유명인이 극단적 선택을 최후 수단으로 택한 사례는 너무 많아 뜻밖이라 할 수도 없다.
한 외신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오스카상을 석권한 '기생충'에 출연했던 주연 배우의 죽음을 논평했다.
양자역학에서는 초미세 광자 입자가 두 곳을 동시에 통과하다가
관찰자가 주시하는 순간 한 곳을 통과하는 평행우주론의 역설을 주장했다.
이선균 배우의 죽음도 이처럼 불가사의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꼭 그 길을 택해야만 했던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극복'해 낼 수는 없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복수 (複 數)의 마음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마음과 그것을 이겨내고 극복하는 마음.
그러나 우리가 한 마음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는 한 길밖에는 선택지가 없게 된다.
만약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면 다시 죽음을 선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래서 모든 죽음은 극단의 모험이다.
나는 또다른 의미에서 씨의 죽음이 의외였다.
지드래곤도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고 이선균씨도 무혐의로 풀려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무슨 일이 있어서 전도유망하고 한창 잘 나가던 배우를 죽음으로 몰아갔을까.
그런 만큼 먀약복용 혐의는 그의 배우 생명에 치명적이었던가?
나는 우리 사회의 불관용적인 문화로 볼 때 충분히 그럴 수 있었으리라 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꼭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을까.
까짓 배우 노릇 안 하면 어때?
그러나 당사자가 되면 도저히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 분위기이다.
우리 사회는 오로지 한 길만을 강요하고 나머지는 죄다 루즈의 삶으로 몰아세우는 극단적으로 기울어진 사회이다.
한 번 추락하면 다시는 기어오를 수 없는.
오늘 이선균 배우가 출연한 유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 '잠'을 본 것은 단순히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이 영화는 이선균씨의 비극을 예고한 것처럼 되었다는 생각을 떨칠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영화는 흔치 않은 불길한 예감을 담고 있었다.
젊은 부부에게 찾아온 파국을 그린 이 영화에서 이선균 배우는 몽유병에 걸린 남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몽유병 상태에서 갖가지 비행을 저지르는 남편으로부터 갓태어난 아기와 가정을 지키기 위해 급기야 아내는 무속에 의지하고 남편에게 빙의한 귀신을 몰아내기 위해 급격히 미쳐간다.
이 부부가 애초에 내세운 가훈이 '부부가 합심하면 극복 못할 일이 없다'이다.
그러나 아내는 평소 층간소음 문제로 다투다 사망한 아래층 할아버지가 남편에게 빙의했다고 단정짓고 현대의학으로 완치된 남편을 믿지 못 한다.
아래층에 들어와 살게 된 노인의 딸을 납치해 귀신을 쫓아내려는 아내의 광기에 견디다 못한 남편이
극적인 연기력을 발휘해 퇴마의식을 벌이고 부부는 마침내
위기를 넘기지만 뭔가 불길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였다.
인간이 생존하는 데 필수적인 잠이라는 것도 그렇고 그 잠을 방해하는 몽유병이라는 것도 뭔가 현실과는 다른 혼돈의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현실을 현실로만 집착할 때 우리는 혼돈의 세계에 기습을 받는다.
우리는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일의적인 가치관을 거부해야 한다.
그런 감수성만이 우리에게 비극을 피하게 하는, 혼돈과 더불어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