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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과 빛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2024년 1월 14일 / 마 5:13-16
마 5:13-16 / 너희는 세상을 맛있게 만드는 소금이다. 그런데 만일 너희가 그 맛을 잃어버린다면 어떤 일이 생기겠느냐? 너희는 아무데도 쓸모 없게 되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될 뿐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즉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밤에 불을 밝혀 둔 언덕 위의 마을과 같다. 15) 등잔에 불을 밝히고 됫박으로 그 등잔을 덮어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방안을 환하게 밝히려면 누구나 그 등불을 등잔대 위에 얹어 놓지 않느냐? 16) 너희 빛을 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에게 환하게 비추어라. 모든 사람에게 착하게 행동하라. 그래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
■ 옛날 세 딸을 둔 임금님이 있었다. 하루는 임금님이 세 딸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큰딸은 ‘황금’이라고 했고, 둘째는 ‘보석’이라고 했다. 그런데 셋째는 ‘황금이나 보석이 아니라 소금’이라고 했다. 임금은 셋째의 말에 의아했다. 그래서 ‘아니 소금이 무엇이 귀하단 말이냐? 구하기 쉽고 값싼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자, 셋째는 방긋 웃으면서 ‘소금이 귀한 것’을 알게 될 때가 올 것이라고 의미 있는 말을 하였다. 저녁 식사 때가 되었다. 셋째는 주방으로 들어가서 임금님의 식사에 일체 소금을 넣지 못하게 했다. 드디어 임금님이 식사를 하시는데, 도무지 심심해서 먹을 수가 없다. 국도 싱겁고, 나물도 싱겁고 도대체 간이 맞는 것이 없었다. 음식은 간이 맞아야 먹을 수가 있는데 …. 화가 난 임금님이 소리를 질렀다. ‘이것도 음식이라고 만들어 왔느냐?’고 역정을 내자 이때 셋째가 달려와서 하는 말이 ‘아바마마! 어떻게 임금님이 잡수실 음식에 값싸고 보잘 것 없는 것을 넣을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소금을 넣지 않고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임금님은 그때서야 ‘과연 그렇구나! 황금이 없어도 살고, 보석이 없어도 살지만 소금이 없이는 정말 못살겠구나.’ 크게 깨닫고 셋째 딸에게 큰상을 주며 칭찬해 주었다고 한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먼저 팔복을 말씀하셨다. 팔복은 신앙인에게 삶의 지침서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팔복의 말씀대로 사는 자에게 본문을 말씀해 주셨는데, 본문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세 가지의 상징적인 용어를 본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에 빛이다. 너희는 산 위에 동네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너희’라는 말은 ‘주여! 주여!’하는 사람도 아니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아니다. 거듭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한마디로 묶어서 해석한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제 구실을 하라’는 뜻이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금과 빛처럼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이 말씀 가운데서 ‘너희는’이라는 말씀을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소금이 아니어도 되고 너는 소금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너희는’이라는 말의 뜻은 다른 사람을 가리키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나 자신의 얼굴과 양심을 향하여 외쳐야 할 경고이며 자책이어야 한다.
■ 도산 안창호 선생이 남긴 말 가운데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자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그대가 먼저 건전한 인격자가 되라! 백성의 질병을 알거든 그대가 먼저 의사가 되라! 의사까지는 못되더라도 그대의 병부터 고쳐서 건전한 사람이 되라!’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민족개조론의 정신’이라고 했다. 나부터 고치고 나부터 바른 인격자가 된다면 민족은 치유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먼저 소금이 되고 빛이 되고, 산 위에 동네가 되면 이 세상은 썩지도 않을 것이고 어둡지도 않을 것이며 남들의 손가락질도 안 받을 것이다. 본문이 주는 의미를 생각하며, '소금과 빛의 구실'을 제대로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인데 그냥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면 어떨까? 신앙인의 모습이 사라지고 만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이다. 누구나 교회 안에서는 신앙인처럼 살기는 쉽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맛을 내고 제 구실을 하는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의 현주소가 꿈같은 이상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바닷물 속에 물고기가 살고 있는 것과 같다. 물고기의 현주소는 육지가 아니라 바다 속이다. 물고기는 바다를 떠나서는 더 이상 존재의 의미가 없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물고기가 짠 바닷물 속에 살지만 결코 짜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의 현주소는 '이 세상 속'이다. 천국이 아니다. 물고기가 짠물에 물들지 않듯이 우리가 세상에 오염되지 말아야 하고, 더 적극적으로는 소금과 빛처럼 맛을 내고 빛을 발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소금이 제구실을 못하면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어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했다. 사해 근처에서 생산된 소금에는 때때로 석고와 같은 이 물질이 섞여 있는 경우가 있었다. 석고의 색깔은 희니까 육안으로는 소금과 잘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석고는 짠맛을 내지 않고, 오히려 비위를 거슬리는 역겨운 맛을 낸다. 그래서 소금에 석고가 많이 섞여 있으면, 소금은 소금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다. 그럴 경우는 어쩔 수 없이 내다버릴 수밖에 없다. 그때 내다버린 소금이 밭이나 정원에 떨어져 식물들에게 지장을 주면 안 되니까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바닥에 내다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오가며 밟고 다니는 가운데 소금과 석고는 잘게 부셔져서 먼지처럼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렇다. 소금은 짠맛이 특징이다. 그 짠 맛 때문에 방부제 역할을 한다. 예수님이 사시던 그 당시 지중해 연안만 해도 온도가 꽤 높은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냉장고도 없던 시절, 식품을 오래 보관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런데 이 소금만 넣으면 적어도 한두 달은 신선하게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하늘의 태양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소금이었다. 헬라사람은 소금을 신과 같은 것으로 여겼고, 로마 속담에 ‘소금과 햇빛은 이 세상을 생기 있게 만들고 향기롭게 한다’고 했고, 시인 호머는 ‘소금은 신성하다’라고 했고, 플라톤은 ‘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 중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고 극찬을 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라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값진 존재이며,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것을 상기시켜주신 말씀이다.
1.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니'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냐?’라고 묻는다. 대답은 간단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소금처럼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❶ 세상에 필수품이 되라! / 소금은 필수품이다. TV는 없어도 살 수 있다. 냉장고도, 장롱도 없어도 된다. 그러나 필수품이 있다. 쌀 그리고 소금은 필수품이다. 소금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필수품이 되라는 말씀이다.
‘그 사람이 교회에 없으면 안 된다, 그 사람이 성가대에 없으면 안 된다. 그 사람이 그 회사에 없으면 안 된다. 그 사람이 그 나라에 없으면 안 된다.’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
❷ 세상에서 깨끗하게 살라! / 소금은 그 빛이 희기 때문에 순결과 관계되어 있다. 로마인들은 ‘소금이 가장 깨끗한 해와 바다에서 왔기에 가장 순결한 것’이라고 했다. 레위기 2:13에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라고 했다. 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사용되었다. 제물은 흠 없는 것이라야 한다.
소금에 순결성을 믿는 사람에게 적용해 보자! 언행심사가 깨끗해야 한다. 정직한 생활을 해야 하고, 바른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또 도덕적인 순결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이 사회의 양심이 되어야 한다. 사업을 하던, 직장생활을 하던, 무엇을 하던지 그리스도인은 구별되게 살아야 한다. 야고보 1:27에서 야고보 사도는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너희는 세속에 묻혀 살고 있으나 세속에 물들지 말라’라고 했다.
❸ 세상에서 방부제 역할을 하라! /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세상의 방부제가 되라는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다. 소금은 음식물 등이 변질되거나 부패되지 않도록 하는데 사용된다. 지금은 소금 외에도 방부제로 쓰는 약품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얼마 전에는 소금 외에는 없었다. 종종 TV에서 보면 어부들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간다. 고기를 잡자 말자 큰 통에 담아 넣고 소금을 붓는다. 생선을 썩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구약은 짐승피로 제사를 드리고, 신약은 예수의 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구약은 소, 양, 염소, 비둘기 중에 흠 없는 수컷을 하나님께 드렸다. 썩거나 상하지 않게 하려고 소금을 뿌렸다. 성전에는 소금 창고가 있었다. 소금은 방부제이다. 먼저 내 자신이 거룩해야 하고 나아가 이 세상이 썩지 않게 방부제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세상은 여러 가지로 변질되고 부패해 가고 있다. 우리는 세상을 외면하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세상으로 하여금 썩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람들 중에는 남을 부패시키고 썩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썩어져 가는 것을 막는 사람도 있다.
영국이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위기를 맞아 부패하고 있을 때 '요한 웨슬레' 목사가 일어나 새 바람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성결운동'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그래야 산다고 외쳤다. 잘못된 사상! 잘못된 학문이 대학에 들어가면 대학이 썩고, 지성인의 머릿속에 들어가면 지성인이 썩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는 곳에는 ‘너도 살고, 나도 살고, 우리 모두가 사는 역사’가 일어난다.
역사를 낙관적으로 볼 때가 있었다. ‘인간에게 교육을 시키면 인간은 변할 것이다. 제도를 바꾸고 환경을 바꾸면 세상이 밝아질 것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필요 없고, 인간 스스로 선한 노력을 가지고 힘쓰면 낙원을 만들 수 있다’라는 환상 속에 사로 잡혔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환상은 무참히도 세계 제1차 대전과 2차 대전으로 깨어지고 말았다. 죄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만든 역사는 항상 오류를 범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것으로도 인간은 변화시킬 수 없고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거듭나야만 변화될 수 있다. 변화 받은 그리스도인만이 세상의 방부제 역할을 할 수 있다.
1919년 기미년 독립운동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당시 우리 민족은 2천만이었다. 당시 중국은 4억이었다. 오늘 날 중국은 13억이고, 우리는 7천만이다. 그 때 우리 2천만 중에 기독교인은 겨우 1.5%이었다. 30만 정도로 기록되어 있다. 1%가 3.1 운동을 주도했다. 33인의 대표 중에 16명이 기독교인이다. 그리고 9명이 목사이다. 태극기를 만들어서 여 성도들의 치마 밑에 감추어 날랐다. 일본인들도 깜박 속았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것이 교인들이었다. '이 준' 열사는 상동교회 집사였다. '유 관순'열사도 이화여고 다니며 정동 교회를 다니던 학생이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독교인들이 막강한 역할을 한 것이다.
❹ 세상에서 맛을 내는 사람 / 소금은 맛을 조절한다. 맛을 표현하는 형용사가 있다. '달다, 쓰다, 짜다, 맵다, 싱겁다, 시다, 상큼하다, 시큼하다, 덤덤하다.' 수도 셀 수 없는 맛의 형용사가 있다.
'오미자차'라는 것이 있다. 5가지 맛을 낸다고 해서 오미자이다. '단 맛, 쓴 맛, 신 맛, 떨떨한 맛, 새큼한 맛' 등 5가지 맛이 있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러나 단 맛은 없어도 살 수 있다. 쓴맛이 없어도 된다. 매운 맛이 없어도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짠맛이 없으면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소금은 맛의 가장 기분적인 것을 조절하는 기본 조미료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도의 맛을 확실하게 내야 한다. 소금이 짠맛을 확실하게 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울지 않는 새는 새가 아니다. 맛을 내지 않는 소금은 소금이 아니다. 녹지 않는 소금은 소금이 아니다. 소금은 녹아야 한다. 그래야 맛을 내게 된다. 그곳에서 녹아지는 사람이 소금이다. 희생하는 사람이 소금이다. 소금은 녹아야 소금이다. 소금의 핵심은 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이 말씀은 ‘너희는 세상의 필수품’이라는 말이요 ‘너희는 세상의 맛’이라는 말씀이다.
우리 인간의 삶 속에 맛을 잃을 때 큰일이 난다. 맛이란 딴말로 바꾸면 의미이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면 보람도 가치도 상실하고 만다. 덴마크나 스웨덴 같은 나라는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는 나라이기에 경제적으로 아무 염려 없이 인생을 안심하고 살 수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나라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왜 자살을 할까? 삶의 맛과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오, 주님! 내 마음은 내 마음을 지으신 당신을 모시기까지는 참 평안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 품에 인길 때 비로소 안정이 있고, 평안이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생활은 겉으로는 호화롭고 윤택한 것 같다. 그러나 그 내면은 삶의 의미를 상실해 버린 사람이다.
‘인생이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고, 어디로 가는가?’를 바로 아는 사람만이 인생의 참 맛과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 많이 사명감으로 살고 맛을 내며 보람 속에 살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크리스천인 우리는 삶의 의미를 부여잡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갑니다.’라는 삶의 의미를 세상 사람에게도 심어주어야 한다.
히 11:8-10 /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향을 떠나 약속해 준 먼 땅으로 가라고 지시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고향을 떠났습니다. 9)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 훗날 하나님께 같은 약속을 받은 이삭과 야곱처럼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10)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진 하늘의 도성으로 그를 데려다 주시리라는 확신 속에서 기다리고 산 것입니다. 그 하늘의 도성은 바로 하나님께서 설계하고 건설하신 곳입니다.
2.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빛에 대하여 알아보자!
빛의 속성 가운데 으뜸 되는 것은 물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어두움은 모든 것을 감추고 숨기지만, 빛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환하게 드러낸다.
예수님은 하나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셨다. 성지 이스라엘에는 산들이 많다. 옛날 유대인들은 산꼭대기에 집을 짓고 동네를 만들었다. 그러니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주야로 사람들의 눈에 환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낮에는 햇빛에 반사되어 환하게 뵐 테고, 밤에는 집집마다 켜놓은 등불로 인해서 환하게 보일 것이다.
이처럼 빛은 자신도 드러내고, 자기 주변에 물체들도 환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15절에서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라고 했다. 집안에 있는 어둠을 물리치고, 집안을 환하게 비추려면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어야 한다. 그런데 등불을 켜서 말로 덮어버리면 주변을 비출 수가 없다.
❶ 빛은 생명이다. 빛의 반대는 어둠이다. 그러므로 어둠은 죽음이다. 때문에 빛이 있는 곳에는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다. 그러나 어둠 가운데서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다. 빛은 사랑이고 기쁨이다. 그래서 빛이 있는 곳에는 사랑의 꽃이 피어나고 그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나 어둠은 미움이고 슬픔이다. 빛은 소망과 성결이다. 그러나 어둠은 절망과 더러움이다. 빛은 믿음과 진실이다. 그러나 어둠은 불신과 거짓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사랑과 기쁨을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빛을 비추어 주시는 분이시다.
❷ 빛의 사명은 '비추는 것'이다. 철학자 디오니게스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어느 소경이 등을 들고 다녔다.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다. ‘앞도 보지 못 하면서 왜 등불을 들고 다니시오?’ 소경이 대답했다. ‘내가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보고 부딪치지 말라고 그러는 것이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 빛이 되라고 하셨다. 항상 이 세상이 밝도록 빛을 비추며 살라고 하셨다. 옛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이방인들의 빛’이라고 했고, 유명한 랍비들을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인류에 크게 공헌한 사람들을 가리켜 ‘인류의 등불’이라고 하고, 민족에게 공헌한 사람들을 ‘빛을 남긴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성도를 향해 ‘너희는 빛이다’고 하셨다. 얼마나 영광된 말씀일까?
❸ 빛에는 몇 가지의 종류가 있다.
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적인 빛이 있다. 창조 장인 창1장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또한 해와 달과 뭇 별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적인 빛이다.
➁ 하나님께서 비추는 특수한 빛이 있다. 사도행전 12:7에 옥중에 잇던 베드로에게 나타난 광채, 사도행전 9:3의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 나타난 빛들은 특수한 빛이다.
➂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빛이 있다. 촛불, 전등불이 그것이다.
➃ 상징적인 빛이 있다. 하나님을 빛으로 비유했다. 시편 27:1에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라고 했고, 요한일서 1:5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니라'고 하셨다. 요한계시록 22:5에서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고 하셨다. 또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요한복음 8:12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성도들을 빛이라고 했다. 본문에서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도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하셨다.
❹ 어두움에도 몇 가지의 종류가 있다.
➀ 자연적인 어두움이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따라 해가 지면 어두움이 온다.
➁ 영적인 흑암이 있다. 우리가 물리쳐야 할 어두움은 바로 영적인 어두움이다.
마태복음 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❷ 빛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➀ 어두움을 밝혀 준다.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의 세력은 물러간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빛을 받은 우리가 이 어두움을 물리쳐야 한다. 태양빛을 듬뿍 받은 달이 밤하늘을 환하게 비춘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듬뿍 받은 자들이다. 이제는 부패한 이 세상에 은혜의 빛을, 진리의 빛을, 사랑의 빛을 환하게 비추는 우리들이 되어야 한다. 아프리카 밀림지대에 식인종이 사는 나라에도 리빙스턴, 슈바이처 같은 사람들이 선교사로 들어가서 이 빛을 던져 주었다.
단 12:3 / 그러나 하나님의 슬기를 간직한 이들과 많은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이끈 자들은 하늘의 별들처럼 언제까지나 빛나리라.
➁ 빛은 사물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일을 한다. 어두운 곳에서는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빛이 오면 추한 것, 모난 것, 둥근 것 다 판별이 된다. 또한 빛은 그 진상을 폭로하는 일을 한다. 악한 것, 선한 것, 그대로 판별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기에 진실을 바로 나타내는 판별력을 가져야 한다.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그른가를 정확히 가릴 줄 알아야 한다. 구약에 이사야 선지자나 아모스 같은 선지자는 그 빛의 사명을 다 한 사람들이요, 신약에 세례 요한도 그 빛에 사명을 감당하다가 헤롯에게 목 배임을 당했다. 우리가 빛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고난도 핍박도 감수해야 한다.
➂ 빛은 방향을 제시해 준다. 옛날 이스라엘은 애급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에 광야를 거치게 되었는데 사막의 길은 방향을 잡기가 어려운 곳이다. 그때 40년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불기둥으로,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했다. 만약 방향을 잡지 못하면 길을 헤맬 수밖에 없다. 가로등이나 등대는 방향을 제시해 주는 일을 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빛이라고 한 말은 ‘세상에 죄 속에 빠진 사람들에게, 실패와 좌절과 낙심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어 바른 삶의 목적을 가르쳐 주어야 할 사명’이다.
➃ 빛은 열을 발사해서 태우는 일을 한다. 성령을 불로 표현한다. 우리가 이 불을 받아야 한다. 이 불이 죄악을 태우고 못된 모습을 바꿔 놓는다.
➄ 빛은 열이 있다. 예수님이 빛이 되라고 하시는 말씀은 ‘뜨거운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성령을 받으면 뜨거운 사람이 된다. 죽은 사람의 특징은 몸이 차다. 섬뜩하다. 살아 있는 사람은 36.5도 적당한 체온을 유지한다. 빛은 뜨거움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실망한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지만 실망과 좌절뿐이었다. 이 때 빛 되신 예수님이 그들과 동행하였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지 못했다. 죽은 예수가 감히 여기 나타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 본 순간 예수님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빛 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뜨거움만 남기고 떠나 가셨다. 두 제자는 뜨거운 가슴을 안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예수님은 뜨거움을 주시는 빛이시다. 이 빛을 받아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한다.
➅ 빛은 열매를 맺게 한다. 그렇다. 수많은 사람이 어둠 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우왕좌왕할 때, 예수 믿는 사람은 빛의 진리를 전파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자신도 철저히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해야 한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감동을 받고 감화되어 복음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롬 13:12 / 밤은 깊었고 주께서 오실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에 속하는 악한 행실을 벗어버리고 낮에 사는 사람처럼 바른 생활로 무장을 하십시오. 여러분의 행위가 모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도록 범사에 단정하고 진실하게 행동하십시오.
엡 5:8-9 / 과거에는 여러분의 마음이 어둠에 싸여 있었으나 지금은 주께서 주시는 빛으로 가득 차 있으니 생활로 그것을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9) 이 빛을 간직한 여러분은 선한 일과 옳은 일과 진실한 일만을 하십시오.
3. 소금으로 살고 빛으로 살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 ‘착한 행실’은 영어 성경에서 ‘굿 웍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좋은 일’을 뜻한다. 또한 헬라어로는 ‘칼로스’라고 해서 ‘아름다운 행동, 고상한 행동, 칭찬 받을 만한 행동’을 뜻한다. 16절에 쓰여진 말은 칼로스이다. 예수 믿는 사람의 착한 행실은 단지 선할 뿐 아니라 아름답고 매력적이어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의 착한 행실은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을 정도로 아름답고 매력적이어야 한다.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다.
기독교인은 어디 가서나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름다운 일, 칭찬 받을 일을 많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모세는 신명기 12:28에서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는 듣고 지키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선과 의를 행하면 너와 네 후손에게 영영히 복이 있으리라’라고 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빛을 비추는 것은 우리가 영광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라고 했다. 세상 사람들의 선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행하는 것이다. 어느 면으로는 교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성도들의 선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 어느 교회에 장로님 한 분이 있는데, 그 장로님은 특이하게도 ‘예수님 동생’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 장로님은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하나님은 나에게 축복을 주셨다. 나는 건강하다. 자식들도 모두 잘되었다. 어떻게 하나님께 받은 축복과 은혜를 보답하면 될까?’하는 것이었다. 장로님은 교회에서도 헌금을 가장 많이 할 뿐만 아니라, 나가서 구제도 하고, 장학금도 주고, 착한 일을 많이 했다. 이렇게 착한 일을 많이 하니까 주변 사람들이 이 장로님을 보고 감동하였다. 그래서 붙여 준 별명이 ‘예수님 동생’이라는 별명이었다.
■ 빙점이라는 소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본의 여류 기독교 소설가인 ‘미우라 아야코’ 여사의 이야기이다. 그는 한때 척추에 이상이 생겨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만 지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는 병상에 누워서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척추를 다쳐서 꼼짝도 못 하고 가만히 누워만 있어야 하는데, 이 기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에게 멋진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밝은 웃음을 선사하기로 하자.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늘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 그리고는 그때부터 자신의 표정을 밝게 하면서, 보는 사람마다 웃어주기로 했다. 그래서 의사를 보아도 환하게 웃고, 간호사를 보아도 환하게 웃고, 옆에 있는 환자를 보아도 밝게 웃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허리를 다쳐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 계시는 분이 뭐가 그렇게 기쁘고 즐겁습니까?’ 그때마다 ‘미우라 아야꼬’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 저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만 생각하면 너무도 행복하답니다.’ 그녀는 후일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동안에 내가 건강할 때보다도 더 많은 사람에게 전도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낼 수 있었다.’
우리가 형통할 때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얼마든지 더 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때로는 고난이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형통할 때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축복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산 위에 동네처럼 해야 한다. 산 위에 동네란 빛이란 말씀과 비슷한 뜻이지만 약간 다른 의미가 있다. 가령 산 위에 어떤 동네 속에 어떤 집 한 채가 있다고 하자.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불을 피우면 연기가 오르는 것이 보이고, 등불을 켜면 그 등불의 빛이 환하게 드러난다. 마치 등대와 같다. 교회가 주목을 받고 비판을 받는 것도 바로 산 위에 동네이기 때문이다. 빛을 비추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착한 행실은 자기 자신에게 주의와 시선을 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타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4. 곳곳에서 빛과 소금이 되었던 사람들
기독교가 비난받고, 교회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예수 믿는 사람이 핍박의 대상이 되는 것은 기독교 역사에 계속되어 온 일이다. 기독교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위협을 느껴 그런 경우도 있는 반면 기독교, 교회, 믿는 사람에게 거는 기대가 큰데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실망해서 손가락질하는 경우도 있다.
성경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은 예수님을 본받아 살려는 사람도 많이 있었고, 기독교 역사를 볼 때 그러한 사람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인 반면 현실을 사는 것은 오늘 여기 있는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이 빛과 소금이 되려면 위대했던 분들의 면면을 읽는 자체도 은혜롭지만 그러한 분들을 본받는 것은 매우 귀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내 주변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 성자 프랜시스를 처음에는 앗시시 사람들이 미친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프랜시스의 착한 행실이 알려지자 차차 프랜시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프랜시스처럼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부유한 상인으로 그 지역에서 유력한 사람 버나드가 프랜시스의 헌신과 착한 행실에 감화를 받고 따르기로 했다. 프랜시스를 찾아와 ‘저는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리고 앞으로 선생님이 명하는 대로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얼마 후에 신부 한 사람이 따르게 되었고, 계속 자원해서 프랜시스를 따르는 사람이 13년 동안에 3천여 명이나 되었다. 프랜시스의 착한 행실이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었기 때문이다. 착한 행실은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 남강 이승훈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오산학교에 동상을 세웠다. 그 동상 제막식 전날에 이승훈 선생이 오산학교 학생들에게 말하기를 내 동상이 세워지게 된 것은 내 생각에 내가 똥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승훈 선생은 오산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화장실 청소를 했다. 그런데 겨울에는 대변이 얼어서 위로 올라온다. 아무도 치우지 않았다. 그것을 교장이 도끼로 깎아냈다. 얼었던 대변이 튀어 입으로 들어온다. 교장이 이렇게 착한 일을 함으로 감화를 끼쳤다. 이승훈 선생은 동상 제막식이 끝나고 5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하기를 ‘자기 시체를 땅에 묻지 말고 뼈를 생리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이 보도록 하라’라고 했다. 그러나 일제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참으로 감동적인 일이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느냐 못 받으시느냐는 예수 믿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착한 일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착한 일을 안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지 못한다. 칼 빨트는 말하기를 기독교의 신앙은 그 행위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고,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다.
■ 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 최고의 대통령으로 칭송을 받는다. 그는 크리스천으로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만 자기 길을 버리고 하나님 길을 따라가는 사람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대통령으로 입후보하였을 때 그의 정적 중에 스텐턴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선거기간 내내 링컨을 중상모략하고 없는 말을 만들어 비방했다. 그런데 링컨이 대통령이 된 후 그를 국방부장관에 임명을 했다. 수많은 사람이 왜 그를 장관으로 임명했냐고 물었지만, 링컨은 ‘비록 그가 내게는 원수일지라도 미국 국민에게는 원수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남북전쟁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필요한 사람은 스텐턴같은 유능한 능력이 필요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개인적인 원수된 감정은 극복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국방부장관이 된 스텐턴은 링컨 대통령에게 없어서는 안 될 충실한 장관으로 미국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서양 속담에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의 일이요,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사람의 일이요,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행동이다’라고 했다.
■ 중국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허드슨 테일러의 부모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들은 약국을 경영하였는데 언제나 정당한 값 이상은 받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고 약을 지어주었다. 공짜로 약을 받아들고 미안해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계산서는 천국으로 보내겠습니다. 거기에서 갚아주십니다. 그리고 약이 떨어지면 언제든지 오십시오.’ 그는 사람들에게 살맛이 나게 했다.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살았다. 가난하고 어렵던 사람들이 얼마나 살맛이 났겠는가!
■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어느 날 한가롭게 길을 가고 있는데 남루한 차림의 나병환자 같은 사람이 손을 내밀면서 적선을 구했다. 톨스토이는 얼른 호주머니를 뒤져보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그는 진정으로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큰 죄라도 지은 듯한 표정으로 걸인을 향하여 말했다. ‘참으로 미안합니다. 형제여! 지금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거든요.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순간 걸인은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아닙니다.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저에게 돈은 주지 않았지만, 당신은 지금 더 크고 소중한 것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당신은 지금 나보고 ‘형제여!’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저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저는 오늘 당신에게서 더 큰 것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돌아서서 갔다. 이 순간 톨스토이는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람은 물질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구나! 물질을 베푸는 것도 선행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을 마음을 베푸는 일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 중국의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던 워치만 니가 젊은 시절 농사를 지으면서 살 때였다. 어느 해 날이 몹시도 가물었다. 그래서 그는 양수기로 물을 퍼서 자기 논에 어느 정도 물을 채워 놓았다. 그런데 그다음 날 그가 아침 일찍 자기 논에 가보니까 물이 많이 줄어 있었다. 알고 보니 이웃 논 임자가 논둑을 터놓아서 말도 없이 그쪽 논으로 물을 빼내 가버린 까닭이었다. 그는 몹시도 화가 났지만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모른 척하고 참았다. 그는 또 다시금 양수기를 동원해서 자기 논에 물을 채워 놓았다. 그런데 그다음 날 아침 논에 나가보았더니, 또 물이 많이 빠져 있었다. 그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생각에 이웃 논 임자를 찾아가서 정중하게 항의를 했다. 물론 이웃 논 임자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웃 논 임자로부터 사과를 받았다. 다음부터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워치만 니의 마음속에 기쁨이 없었다. 자기가 분명히 틀린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또 이웃 사람이 잘못했다고 사과도 하고, 앞으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들기에 앞서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 제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어찌 저의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없습니까?’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떻게 일의 옳고 그름만을 따져서 꼭 정당한 일만 해야겠다고 생각하느냐? 그것보다도 더 위대한 일을 할 수는 없다는 말이냐?’ 그러한 음성을 듣고서 그는 깊이 생각했다. 그다음 날 아침 일찍이 양수기를 준비해서 먼저 이웃 논으로 갔다. 그리고 여러 시간 동안 물을 퍼 올려서 이웃 논에 충분하게 채워 주었다. 그 뒤에 그는 양수기를 자기 논으로 옮겨서 자기 논에도 물을 채웠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웃 논 임자는 마음에 큰 감동을 하였다. 그때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이웃 논 임자와 그의 온 가족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 미국 철강왕으로 불리었던 카네기의 회사에 늘 웃고 다니며 입에 감사가 붙어 다니는 찰스 슈와브라는 젊은 노무자가 있었다. 회사에 가장 먼저 출근하고 카네기보다 늘 먼저 와서 있었다. 늦게까지 일하는 사람 중에는 언제나 찰스 슈와브가 있었다. 어느 날 카네기는 그에게 1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10억이 넘는 돈을 보너스를 주었다. 그러면서 ‘이것은 감사를 아는 사람들에게 주는 보너스요. 이것은 십리 인생길을 아는 사람에게 주는 나의 작은 배려입니다.’라고 했다. 훗날 이 노무자가 미국 최고의 철강회사 유나이트 스틸사의 사장이 되었다. 그의 사장 취임식에서 카네기가 축사를 했다. ‘일개 노무자가 어떻게 이 스틸사의 사장으로 앉을 수 있는가? 많은 사람이 의아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곁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떻게 일하는지를 꾸준히 지켜본 사람이라면 지금 오늘 이 사장의 자리는 당연히 슈와브의 자리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 2007년 크리스마스 때 미국 뉴욕에서는 두 가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하나는 ‘스타벅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커피를 사려고 줄을 서 있던 어느 여자가 자기 커피를 산 후 ‘이분 커피값도 제가 내겠습니다’하고 뒷사람의 커피를 사주었다. 뜻밖에 깜짝 놀란 뒷사람은 ‘제가 살 수 있는데요.’ 했지만 그 여자분은 ‘걱정 마세요. 제가 당신에게 드리는 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라고 했다. 이 이야기가 ‘Economic Herald’라는 신문에 자그맣게 실렸는데, 그 기사를 읽은 많은 사람이 그 여자분처럼 스타벅스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커피를 사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려 1만 5천 명이 커피를 거저먹었다는 훈훈한 이야기이다. 작은 선행이 빛을 발하고, 그 빛이 퍼져 크리스마스에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선사했다.
또 하나는 크리스마스 때만 뉴욕에 나타나는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는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돈뭉치를 들고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10불씩 나누어 주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무려 3천 불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전에도 자기가 사는 도시에서 그렇게 했었다. 이것이 화젯거리가 되자 기자들이 그를 찾아와 그가 누구인지, 왜 그런 일을 하는지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하다가, 끈질기게 묻자 이야기해주었다.
사연인즉 그가 20대 초반에 직장, 먹을 것, 돈도 몇 푼 없었다고 했다. 어느 날 마지막 남은 돈을 들고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으면서 ‘오늘 저녁부터는 어디서 먹고 잘까?’ 고민하고 있는데, 웬 할아버지 한 분이 지나가면서 허리를 굽혀 바닥에서 뭔가 줍더니 ‘젊은이! 자네가 여기 돈을 떨어뜨렸네.’ 하면서 10불을 주고 나갔다. 사실 그는 돈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젊은이가 혼자 점심을 먹는 모습을 식당 저편에서 지켜보던 그는 수심 가득한 이 젊은이에게 큰 문제가 있는 걸 알아채고 일부러 그 옆에 와서 10불을 떨어뜨리고는 주워주는 척하면서 돈을 주고 간 것이다. 선(善)은 감동을 일으킨다. 선한 말 한마디, 선한 행동 하나가 빛이 된다. 어둠 속의 이 젊은이는 빛을 보았다. 그 후 이 젊은이는 사업에 성공했다. 20대 초에 그 할아버지를 통해 느꼈던 빛이 그의 마음속에 살아 있어서, 크리스마스 때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10불씩 나눠주며 빛을 비춰 삶의 기쁨을 사람들에게 안겨주게 된 것이다.
■ 어느 종합병원에서 외래환자를 안내하는 안내원의 아내가 남편의 수입으로 근근이 살았는데 30년 동안 근무하고 은퇴한 후에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 퇴직금이나 연금도 없었지만 조금씩 절약한 보람으로 혼자서 평생을 굶지 않고 살만큼 준비가 되었다 그때 그 아내는 55세였다. 그 아내는 어떻게 하면 뜻있고 보람된 생활을 할까를 늘 생각했다. 병원에서 안내 일을 하던 남편의 일을 나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병원에는 오랫동안 입원해 있는 환자가 있는데 간호사도 잘 돌보아 주지 않고 가족도 늘 와서 위로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날마다 병원에 나와 오랫동안 입원해 있는 환자에게 가서 말벗도 되어주고, 아픈 데를 주물러 주기도 하고 발도 씻겨주고 열심히 봉사했다. 그러면서 외래환자들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를 살폈다. 그러다가 조그마한 주머니를 만들어 가위와 종이와 노끈과 연필과 면도기 등을 준비해서 다니다가 필요한 환자들에게 빌려주는 일을 20년 동안 한결같이 했다. 이분이 하는 일은 보람을 크게 느끼는 일도 아니었고, 남이 알아주는 일도 아니었고, 보수가 있는 일도 아니었고, 신문에 나는 일도 아니다. 그런 일을 20년 동안을 계속한 것은 굉장한 믿음의 역사였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것을 생각하면서 세상에 소금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병원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기쁨이라도 주기 위해서였다. 이런 사람이 세상의 소금이다.
■ 서울 신월동 시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시장 코너에 정차된 아우디 차량을 7살 정도로 보이는 손자가 할머니 대신 손수레를 밀고 올라가다 긁는 사고가 있었다. 할머니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손주는 할머니만 바라보고 울먹이고, 주변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이 손수레엔 콩나물 한 봉지와 바나나 몇 송이가 실려 있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외제 차량과 접촉 사고를 내게 되면 수리비가 엄청나게 나온다. 약 10분 후에 차량의 주인이 나타났다. 그런데 아우디 차량 소유주는 긁힌 차를 보면서 화를 낸 것이 아니었다. 아우디 차량 소유자는 오자마자 대뜸 할머니에게 ‘할머니, 제가 차를 도로변에 주차해 통행에 방해가 됐고, 그 때문에 손주가 부딪혀서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함께 달려온 아우디 차주의 아내는 외제 차를 긁은 일로 인해 울먹이고 있는 할머니의 손자를 달래주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처음 목격하고 SNS에 글을 올린 사람은 ‘저분들이 외제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저분들 인성이 부러웠다. 집에 오는 내내 정말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공부보다 저런 인성을 더욱 많이 가르쳤으면 좋겠다.’라는 글을 썼다. 사람들은 언제 감동하는지 아시는지? 자기가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내려놓고 상대방을 배려해 줄 때 감동한다. 이기심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상대방을 섬길 때 사람들은 감동한다.
결론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마태복음 5:38-48을 마음에 담고 기도하자.
세상 사람들은 악한 자를 대적하려고 한다. 그러나 결코 악으로는 악을 이길 수가 없다. 함께 점점 더 악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더 복잡해진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된 사람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다.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악을 행하는 사람까지라도 선대해야 한다.
사실 나에게 피해를 주고 고통을 주는 사람에게 항거하지 않고 묵묵히 참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다른 사람이 주먹으로 한 대 때리면 나도 당장이라도 때려주고 싶고, 한 대만 때리는 것으로는 속이 풀리지 않아서 두 대, 세 대 더 때려줘야 마음이 풀리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 속에는 단순히 한 번 참아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그런 마음을 털어 버리고 사랑을 베푸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였다. 한순간을 참을 수는 있다. 그러나 마음에 있는 보복의 감정이나 나쁜 감정을 해결하지 않으면 마귀는 자꾸 나를 꼬드겨서 보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마음의 문제, 감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온전히 보복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사실 나에게 피해를 주고 고통을 주는 사람에게 항거하지 않고 묵묵히 참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다른 사람이 주먹으로 한 대 때리면 나도 당장이라도 때려주고 싶고, 한 대만 때리는 것으로는 속이 풀리지 않아서 두 대, 세 대 더 때려줘야 마음이 풀리는 것이 인간성이다.
우리가 한순간을 참을 수는 있다. 그러나 마음에 있는 보복의 감정이나 나쁜 감정을 해결하지 않으면 언젠가 그게 자꾸만 나를 꼬드겨서 보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마음의 문제, 감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온전히 보복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할 수가 없다.
마 5:38-48 / 또 모세의 율법에 ‘만일 어떤 사람이 남의 눈을 상하게 하였거든 자기 눈도 상하게 하라. 만일 남의 이를 부러뜨렸거든 자기 이도 부러뜨리라’라고 하였다. 39)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 네 한쪽 뺨을 때리는 사람이 있거든 다른 쪽 뺨도 돌려대라. 40)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거든 겉옷까지 벗어주라. 41) 비록 가고 싶지 않더라도 누가 너더러 오리를 같이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 주어라. 42)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어 달라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 43) 또 모세의 율법에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이 있다. 44)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답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분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않은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46) 만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무슨 미덕이 되겠느냐?(헬라어 원문은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 정도는 하지 않느냐? 47) 만일 너희가 너희 이웃들과만 가까이 지낸다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느냐? 이방인들도 그렇게는 하고 있다. 48) 그러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
눅 11:9-13 / 기도도 이와 같다. 구하라, 주실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어주실 것이다. 10)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아버지된 사람으로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겠느냐? 12) 아들이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비록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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