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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선생집 제33권 / 칠언 절구(七言絶句) 2백 91수(首)
차운하여 영 상인의 시권에 제하다[次韻題英上人卷]
고승께서 응진 따라 공중을 날지 않으시고 / 高僧不逐應眞飛
석장(錫杖) 짚고 일자사를 부러 찾아오셨는가 / 杖錫來尋一字師
영철이 받은 조롱을 어떻게 해소하시려오 / 靈徹有嘲那解得
그쪽에선 시 받는 게 몹시 부끄러울 텐데 / 爲渠題卷媿多時
[주-D001] 응진(應眞) : 범어(梵語)인 나한(羅漢)을 의역(意譯)한 말로, 진도(眞道)를 터득한 사람을 뜻하는데, 손작(孫綽)의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에 “응진이 석장(錫杖)을 날려 허공을 밟고 다닌다.[應眞飛錫以躡虛]”는 표현이 있다.[주-D002] 일자사(一字師) : 시문(詩文) 가운데 한두 글자 정도를 고쳐 주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前村深雪裏 昨夜數枝開”라는 조매(早梅) 시 가운데 ‘數’를 ‘一’로 고쳐 정곡(鄭谷)이 일자사의 칭호를 얻은 고사가 있다. 《詩人玉屑 一字師》[주-D003] 영철이 …… 조롱 : 불가(佛家) 내부의 비난을 말한다. 영철(靈徹)은 당 나라 때의 시승(詩僧)으로, 늘 교연(皎然)과 교유하면서 포길(包佶), 이서(李紓)의 지우를 얻어 장안에 이름을 떨쳤는데, 승도(僧徒)가 질시하여 참소한 나머지 정주(汀州)로 귀양간 적이 있다. 《宋高僧傳 卷15》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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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관전서 제19권 / 아정유고 11(雅亭遺稿十一) - 서 5
김직재(金直齋) 종후(鍾厚) 에게
전번에 두 통의 편지를 연달아 받아 읽었습니다. 지금도 그 감회를 억누르지 못하겠습니다.
물으신 바의 3대(代)를 추증(追贈)하는 사실은, 다시 《당문수(唐文粹)》 요현(姚絃)이 편찬했다. 의 목록을 상고하니, 3대를 추증하는 제도가 없고, 구양공(歐陽公 구양수(歐陽修))의 문집에도 역시 없으며, 왕임천(王臨川 왕안석(王安石))과 증남풍(曾南豊 증공(曾鞏))의 문집에 비로소 있으니, 생각건대, 3대를 추증하는 제도는 송(宋) 나라 때에 시작된 듯합니다.
다만 구양공은 농강천표(隴岡阡表)의 끝에서 3대를 추봉(追封)하는 일을 매우 자세하게 기록했을 뿐이고, 자신이 지은 내외(內外)의 제도가 매우 많으나 3대를 추증하는 일에 대해서는 끝내 한 편도 없으니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소자첨(蘇子瞻)이 찬(撰)한 것은 본집(本集)에 실려 있고, 원명선(元明善)이 찬한 것은 원(元)의 《문류(文類)》 소천작(蘇天爵)이 편찬했다. 에 실려 있습니다. 뒤에 《문류》를 상고하였더니, 또한 요 수(姚燧)가 찬한 고려국왕 충선왕 봉증조부모 조모 조부는 참여치 않았다. 부모제(高麗國王封曾祖父母祖母父母制)가 있습니다. 2대를 추증하는 제도는 매우 많습니다. 《구당서(舊唐書)》ㆍ《신당서(新唐書)》 《구당서》는 유후(劉昫)가 찬하고 《신당서》는 송기(宋祁)가 찬했다. 와 《송사(宋史)》 아로도(阿魯圖) 등이 찬했다. 를 자세히 상고한 뒤에야 알 수 있습니다.
연기(緣起)라는 두 글자는 남조(南朝)의 양임방(梁任昉)이 지은 《문장연기(文章緣起)》인데, 대개 기(記)ㆍ시(詩)ㆍ부(賦)ㆍ표(表)ㆍ전(牋)과 온갖 글의 시초를 기록한 것입니다. 연기는 원시(原始)의 뜻과 같으니 그 연유한 바를 자세히 기록한 것입니다.
전번에 저에게 보내 주신 편지를 받아 물으신 말씀을 우러러 답하고, 거룩한 글을 망령되이 고쳤건만 인정해 주심을 받기까지 하였으므로 송구스럽고 감명하기 그지없는데 뜻밖에 이제 또 옛사람의
일자사(一字師)를 끌어 비유하심을 입으니, 놀라고 외축되어 몸둘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기년아람(紀年兒覽)》두 책은 어떤 사람이 등사하려고 가져갔었는데, 이제 찾아왔으므로 삼가 싸서 올립니다.
물으신바 기년의 체제는, 한(漢) 나라는 동한(東漢)과 촉한(蜀漢)으로 나누고, 진(晉) 나라 또한 동진(東晉)으로 나누어 기록하였으며, 그 중흥지(中興地)로서 각각 명호(名號)를 세웠으니, 정통(正統)에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육조(六朝)ㆍ오대(五代) 와 같은 것은 정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북조(北朝)에 비교하면 본래 이적(夷狄)입니다. 남당(南唐) 등 여러 나라는 각기 명호를 도둑질한 자들입니다. 오히려 이가 저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한 글자 내려서 쓰지 않고 마치 정통인 것처럼 하였으나, 그 조(殂)라고 쓰고 붕(崩)이라고 쓰지 않은 것에서 그 필법을 볼 수 있습니다.
서문(序文) 가운데의 애체(靉靆) 두 글자는 자서(字書)를 상고하였더니, ‘구름이 성한 모양이다.’ 하고, 또 ‘애희(靉霼)는 곧 애히(僾俙)다.’ 이등(李登)의 《성류(聲類)》에 애(僾)는 음이 의(倚)이니, 애히는 방불(彷彿)이라고 하였다. 하였으며, 또 《동천청록(洞天淸錄)》 송(宋)의 조희곡(趙希鵠)이 지었다. 에는 ‘애달(靉
) 장자열(張自烈)은 ‘체(靆)가 그릇 달(
)로 되었다.’ 하였다 은 노인이 잔 글자를 분변하지 못할 때 이것을 눈에 걸면 밝게 보인다.’ 하였고, 또 원(元) 나라 사람의 소설(小說)에는 ‘애체는 서역(西域)에서 나왔다.’ 《방여승략(方與勝畧)》에 ‘만랄가국(滿剌加國)에서 애체가 나온다.’ 하였다. 하였고, 또 《방주잡지(方洲雜志)》 명(明) 나라 장영(張寧)이 지었는데, 장영은 일찍이 조사(詔使)로 우리나라에 왔었다. 에는 ‘일찍이 지휘(指揮) 호농(胡豅)이 우거한 처소에서 선묘(宣廟)가 하사한 물건을 보았더니, 크기가 돈짝만한 것 두 개가 있었는데, 흡사 운모(雲母)와 같고 금으로 테를 둘렀으며 자루가 달렸다. 오므리면 하나가 되고 펴면 둘이 되었는데, 노인이 두 눈에 걸면 글자가 배나 크게 보인다. 또 손경장(孫景章)의 처소에서 두 번 보았는데, 손경장이 이르기를 「좋은 말[馬]로써 서역(西域)의 장사치 만랄(滿剌)에게서 무역해 얻었는데 그 이름이 애체(僾逮) 상고하건대 이것은 애체(靉靆)의 잘못이다. 라고 들은 것 같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이상 여러 설들을 상고하면, 구름[雲]의 애히(僾俙)한 것을 빌어서 안경(眼鏡)의 이름을 삼은 것인데, 송(宋)ㆍ원(元) 때부터 이미 있었으며 다만 성행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명 선종(明宣宗) 때에는 좋은 말로써 무역하게 되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사용합니다.
물으신바 《오잡조(五雜俎)》에 ‘소하(蕭何)가 전자(篆字)를 잘 썼다.’ 한 것은, 상고하건대 한(漢) 나라 허신(許愼)의 《설문(說文)》서문에 ‘《진서(秦書)》에 8체(體)가 있는데, 여섯 번째가 서서(署書)다.’ 했고, 그 주(註)에 ‘소자량(蕭子良)이 말하기를, 서서는 한 고조(漢高祖) 6년에 소하가 정한 것인데, 그것으로 창룡궐(蒼龍闕)ㆍ백호궐(白虎闕)에 썼다고 했다.’ 하였고, 또 진(晉) 나라 양흔(羊欣)의 《필진도(筆陳圖)》에 ‘소하는 글씨를 매우 좋아하였다. 일찍이 장자방(張子房)ㆍ진은(陳隱) 등과 함께 붓을 사용하는 방법을 논하였다. 소하가 창룡궐과 백호궐에 글씨를 쓰기 위하여 석 달 동안 깊이 생각한 끝에 그 편액(扁額)을 쓰니, 구경군들이 흐르는 물처럼 모여들었다. 소하는 몽당붓을 사용하였다.’ 《금호기(金壺記)》에 이르기를 ‘소하가 전주(篆籒)를 전공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소주(蕭籒)’라고 칭했다.’ 하였다. 하였고, 또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 ‘소하가 율법(律法)을 창작하며 말하기를 ‘태사(太史)가 학동(學童)을 시험하여 능히 9천 자 이상을 외어 쓰면 곧 사(史)로 삼고, 또 육체(六體)로 시험하여 성적이 우수한 자를 상서어사사서영사(尙書御史史書令史)로 삼으며, 이민(吏民)이 상서(上書)할 때에 글자가 혹 바르지 못하면 탄핵하라 했다.’ 하였습니다.
여러 설들을 살피건대, 소하는 한(漢) 나라 초기 서가(書家)의 영수가 되었던 것이고, 또 법을 세워서 사람을 시험하여 서학(書學)으로 초사(初仕)의 길을 삼았으니, 참으로 경세유자(經世儒者)가 됨에 해롭지 않으며 일을 만든 것이 구차스럽지 않으니, 도필리(刀筆吏)라는 이유로 그 장점을 덮어버릴 수 없는데, 다만 수적(手蹟)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후세에서 알지 못할 뿐입니다.
제갈 무후(諸葛武侯 이름은 양(亮))의 부자와 사안(謝安)ㆍ사마온공(司馬溫公 이름은 광(光))ㆍ왕개보(王介甫 이름은 안석(安石))ㆍ주 문공(朱文公 이름은 희(熹)) 같은 분들도 모두 서화를 잘하였으나 공업(工業)과 문학(文學)에 가리워져서 사람들이 그것을 자연 알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대저 세간에 이 일과 같은 것이 그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물으심을 외람되이 받고 이처럼 듣고 본 바를 다 말씀드리매 스스로 그 말이 많은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었고, 또한 옛사람의 ‘완물상지(玩物喪志) 라는 경계를 범하였으니, 더욱 두렵고 죄송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난 달에 처음 창설된 벼슬을 얻어서 숙수(菽水)의 공급을 돕게 되었으니, 매우 영광스럽고 기쁩니다.
근일에 규장각 팔경시(奎章閣八景詩)를 어명으로 짓게 되어 악전(幄殿)에 입시하여 장원을 차지하자 《명의록(明義錄)》을 하사하시고, 또 등영주 이십운배율(登瀛洲二十韻排律)을 짓게 하시므로 또한 장원을 차지하였더니, 백면지(白綿紙) 5권(卷)을 하사하셨습니다. 누의(螻螘)처럼 천한 신하가 분에 넘친 은총을 받았음을 돌아보매 매우 황감(惶感)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다른 생각 않고 오직 조심하고 공경하고 소심해야 할 처지인데, 문하(門下)께서는 어떠한 훈계를 해 주실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기다릴 뿐입니다.
근일의 업무는 《어정규장운서(御定奎章韻瑞)》를 편집 교정하는 것으로 점차 정리는 되어가나 자못 심력(心力)만 허비할 뿐입니다.
물으신바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나의 어리석은 소견에는 기자가 중국 땅을 피해 와서 그대로 봉(封)해지게 되었다는 것은 불역지론(不易之論)으로 여기나, 정전(井田)의 구적(舊蹟)이 끝내 의안(疑案)으로 남습니다. 그것은 정전에 대한 기록이 중국 서적에 조금도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무(李茂)와 이맹지(李孟智)의 일은 연동(蓮衕)의 이자(李子)에게 물었더니, 아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었습니다. 이상 모든 일은 별지에 적어서 올리겠습니다.
중국 서적 중에 약간 희귀한 것은 문사(文士)가 연경에 들어가서 친히 구입하지 않고서는 원래 구득할 방법이 없습니다. 《통아(通雅)》가 오지 못한 것은 사세가 원래 그렇습니다. 심계(心溪) 종인(宗人)은 근자에 만났는데, 몸에 별탈이 없다고 합디다.
생각건대, 서쪽 못에 있는 연꽃이 한창 만발할 터인데, 형을 따라서 꽃 그림자와 향기 사이에서 노닐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주-D001]
일자사(一字師) : 한 글자를 바로잡아 준 스승. 《만성통보(萬姓統譜)》에 “양만리(楊萬里)가 ‘진우보(晉于寶)’라고 말하매 한 이서(吏胥)가 ‘간보(干寶)이지, 우보가 아니다.’ 하니 양만리는 그 이서를 일자사라 했다.” 하는 것과, 《오대사보(五代史補)》에 “제기(齊己)의 조매시(早梅詩)에 ‘앞마을 쌓인 눈 속에[前村深雪裏] 어젯밤에 두어 가지가 피었다.[昨夜數枝開]’ 하는 수(數)자를 정곡(鄭谷)이 일(一)자로 고쳐주니, 제기는 정곡을 일자사라 했다.” 하는 등이 보인다.
[주-D002] 육조(六朝)ㆍ오대(五代) : 육조는 오(吳)ㆍ동진(東晉)ㆍ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 오대는 후량(後梁)ㆍ후당(後唐)ㆍ후진(後晉)ㆍ후한(後漢)ㆍ후주(後周)이다.[주-D003] 남당(南唐) 등 여러 나라 : 오대(五代) 때의 전촉(前蜀)ㆍ후촉(後蜀)ㆍ오(吳)ㆍ초(楚)ㆍ민(閩)ㆍ오월(吳越)ㆍ남한(南漢)ㆍ북한(北漢)ㆍ형남(荊南)과 남당(南唐) 등 10국을 말한다.[주-D004] 서문(序文) : 여기서는 《기년아람(紀年兒覽)》의 서문을 가리킨다.[주-D005] 도필리(刀筆吏) : 문서를 맡는 하급 관리. 소하는 진(秦)의 도필리에서 발탁된 인물이다.[주-D006] 완물상지(玩物喪志) : 무익한 기물(器物)을 완롱(玩弄)하면 뜻을 상한다는 말이다. 《서경(書經)》 여오(旅獒), 《근사록(近思錄)》 위학(爲學)에 “명도선생(明道先生)은 기송박식(記誦博識)을 완물상지로 여겼다.” 하였다.[주-D007] 처음 창설된 벼슬 : 여기서는 정조(正祖)가 처음 세운 규장각(奎章閣)의 검서관(檢書官)을 가리킨다.[주-D008] 《통아(通雅)》 : 명 나라 방이지(方以智)가 지은 책. 《이아(爾雅)》의 체재를 본떠 44문(門)으로 나누고 명물(名物)ㆍ상수(象數)ㆍ훈고(訓詁)ㆍ음운(音韻) 등을 고증한 것인데, 총 52권으로 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동주 (역) |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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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집 제2권 / 기(記)
유천귀래재기(柳泉歸來齋記) 주인은 한공 익지(韓公益之)이다.
교목(喬木)을 통해서 우리는 그 집안이 얼마나 오래된 세신(世臣)의 가문인지를 알 수 있고, 감당(甘棠)을 통해서 우리는 종묘(宗廟)가 얼마나 경건한 곳인지를 알 수가 있다. 지금 공이 자신의 거처를 이름지으면서 반드시 유(柳)라고 하는 글자를 집어넣으려고 하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공의 선조인 문경공(文敬公 한수(韓脩)의 시호(諡號)임)은 고려조(高麗朝)의 서울에서 도덕과 문장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며 유항(柳巷)이라는 호(號)로 널리 알려졌는데, 그야말로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임) 등 제공(諸公)과 한 동네에서 교유하며 서로들 왕래하곤 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경모(敬慕)하고 있는 바이다. 그리고 그 뒤로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자손들이 계속 배출되면서 역시 아조(我朝) 국도(國都)의 이른바 유씨(柳氏)네 촌에 대대로 거처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까닭에 공의 선대부(先大夫)도 유음(柳陰)이라고 자호(自號)하였는가 하면 그 자손과 형제들 또한 모두가 유(柳)라고 하는 하나의 글자를 몸에서 떼지 않게 되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공이 선영(先塋)이 있는 원주(原州)의 시골 마을에다 조그마한 집을 짓고서 ‘귀래재(歸來齋)’라 명명(命名)하고는 다시 그 위에 ‘유천(柳泉)’이라는 두 글자를 덧붙인 것도, 대개는 그곳에 천(泉)이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그 집안에서 숭상하는 유(柳)라는 글자를 빼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버드나무 다섯 그루[五柳]를 문간에 드리웠다는 그 유풍(遺風)이 지금도 고사(故事)로 전해지고 있다마는 이제는 그 사람이 먼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라고 그 누가 말할 것이며, 느티나무 세 그루[三槐]가 뜨락에 그늘을 드리우며 아름다움을 계속 잇게 했다는 일화(逸話)가 전해 온다마는 어찌 꼭 그 나무가 느티나무여야만 된다는 법이 있기라도 하겠는가.
그런데 내가 유독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귀래(歸來)’라고 하는 두 글자의 뜻이다. 대저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은 뒤에야 귀(歸)라고 하는 글자를 쓸 수 있는 것이요, 어디를 간 적이 있은 뒤에야 래(來)라고 하는 글자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으로 말하면, 청소년기에 이미 황금이 가득한 상자[金籯]보다도 학문의 경지가 넉넉하기만 하였고, 청장년기엔 기북(冀北)의 무리 중에서도 필적할 만한 상대를 찾을 수가 없을 정도였는데, 그러면서도 유사(有司)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가슴속의 뜻을 굽혀 본 적이 한 번도 있지 않았다. 그리고 화려한 현직(顯職)을 두루 거쳤지만 이것도 모두 활시위를 끝까지 당기는 것이 확인된 뒤에 재결(裁決)을 받게 된 것이요[決於持滿之末], 안위(安危)의 사이를 출입한 것 역시 공에게 거는 기대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는데, 그동안 자신의 절조(節操)를 바꿔 가며 임금이나 정승의 인정을 받아 보려고 시도한 것이 털끝만큼도 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공이야말로 애당초 길을 잃고서 헤맨 적이 있지를 않으니, 어떻게 바른길로 돌아온다[歸]는 글자를 쓸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주역(周易)》 건괘(蹇卦)의 여러 효사(爻辭)들을 보면, 모두가 왕래(往來)하는 뜻을 그 속에 구비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초육(初六)의 경우는 나아가는 것을 왕(往)이라 하고 나아가지 않는 것을 내(來)라고 하고 있는데, 왕래의 뜻이 이렇듯 독특하게 풀이되고 있는 것은 그 효(爻)가 가장 하위(下位)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또 육이(六二)의 경우는 아예 왕래(往來)라는 말을 거론하지 않고는 ‘발을 절뚝거려도 끝내 허물이 없다.[蹇蹇終无尤]’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육이(六二)가 왕신(王臣)의 지위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리고 구삼(九三)의 내(來)가 기쁜 이유는 바로 육이(六二) 때문이다. 다만 육사(六四)의 경우는 내(來)가 구삼(九三)과 연결되고 있으나, 구오(九五)에서 ‘크게 험난하지만 벗이 온다.[大蹇朋來]’고 한 것과, 지위가 없는 상육(上六)에서 ‘대인을 만나 보는 것이 이롭다.[利見大人]’고 한 것은 모두 육이(六二)와 관련해서 말해진 것들이다.
그런데 지금 제왕의 지위인 구오(九五)가 위에서 아직도 험난한 상황[蹇]을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공은 바로 충군애국(忠君愛國)해야 할 육이(六二)의 왕신(王臣)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왕래(往來) 같은 것은 말할 계제도 못 된다고 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초육(初六)의 ‘나아가지 않는다’는 내(來)의 뜻을 거꾸로 취하려고 하였겠는가.
또 곤괘(困卦)의 이효(二爻)와 오효(五爻)에도 왕래(往來)와 지대(遲待)의 뜻이 서로 구비되어 있는데, 구이(九二)의 효사(爻辭)를 보면 “술과 밥을 먹기에 곤란하나 주홍빛 인끈을 찬 임금이 바야흐로 오려 한다.[困于酒食 朱紱方來]” 하였고, 구오(九五)의 효사를 보면 “붉은 인끈을 찬 신하에게 곤란한 일을 당하지만 바로 천천히 기쁜 일이 있게 될 것이다.[困于赤紱 乃徐有說]”라고 하였다.
지금 공은 신하의 지위인 구이(九二)에서 제왕의 지위인 구오(九五)를 만나고 있는 입장이다. 그런데 아직 자신의 도를 행하지 못한 채 국록(國祿)만 축내며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것이 ‘곤우주사(困于酒食)’의 뜻이요, 의리상 구차하게 영합하고 싶지 않아 기필코 빨리 성취시키려고 안달하지 않는 것이 바로 ‘내서유열(乃徐有說)’의 뜻이다. 이 효사(爻辭)를 보면 임금도 바야흐로 신하에게 오려 하고 신하도 바야흐로 임금에게 다가가려 하고 있는데, 이러한 때에 수초부(遂初賦)를 읊을 겨를이 어디에 있기에, 그만 스스로 떠나오려 한다[來]는 글자를 쓸 수가 있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마음이 육신의 부림을 받다 보면 조용히 요양(療養)을 하기 위해 돌아올[歸來] 수도 있는 일이요, 공업(功業)과 명성을 이룬 뒤에는 물러나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돌아올[歸來] 수도 있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가령 하늘을 섬기며[事天] 날마다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는 갓난아이 때의 마음으로 돌아와 이를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요, 임금을 섬기며 날마다 태평 시대를 유지하게 하기 위해서는 거(莒) 땅에 있었을 때로 돌아와 그 시절을 잊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그뿐인가. 선조를 받들어 제향(祭享)을 올리는 날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갱장(羹墻)에 보이는 듯한 마음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요, 늙은 어버이를 모시는 날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새 새끼를 데리고 노는 그 처음의 마음으로 되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 교유하는 관계가 차츰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옛날 어려운 시절로 되돌아가 그때의 벗을 생각하며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요, 자제(子弟)가 오만하고 경솔할 경우에는 공적(公的)인 마음으로 되돌아가서 그가 고기를 먹는 자리에 있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상 거론한 것들 모두가 귀래(歸來)의 도(道)라 할 것인데,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고 하더라도 공에게만은 이를 적용할 수 있으리라고 여겨진다.
또 ‘유(柳)’라는 글자 속에서도 어찌 그 의미를 추출해 낼 수가 없다고 하겠는가. 버들[柳]이 매화와 봄을 다툰다고 하면 과장된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하나의 기운(氣運) 가운데 계속 돌고 돌아 제자리로 되돌아오면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보면, 과연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나중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가을을 맞기도 전에 먼저 조락(凋落)의 현상을 보이는 것이 싫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계절이 변화하는 가운데 종언(終焉)을 고했다가 다시 시작을 보이곤 하니 이것이야말로 항구적(恒久的)으로 귀래의 현상을 보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만물의 시초를 고찰하여 삶의 원리를 알고, 만물의 마지막을 궁구하여 죽음의 원리를 안다.[原始反終 故知死生之說]”고 하였다. 이렇게 하면 사생(死生)의 설(說)에 대해서도 알 수가 있는 법인데, 하물며 귀래(歸來)의 설 같은 것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공은 이러한 이치에 대해서 이미 스스로 터득하고 있었음이 분명한데, 나처럼 형편없는 사람만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과분하게도 공이 나를
한 글자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일자사,一字師]이라고 여기고는 재(齋)의 기문(記文)을 부탁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덕분에 나 역시 공의 ‘귀래(歸來)’에 대해서 이제는 천박하게 뇌까리지만은 않게 되었다고 하겠다.
아, 나는 이미 몸이 늙어서 수레를 걸어 놓아야 할[懸車] 나이에 박두하고 있는데도, 처지가 막바지에 몰린 나머지 멍에를 벗고 빠져나갈 길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니 공도 이제는 당연히 사양하지 말고서 지기(知己)를 위해 힘을 좀 써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귀래(歸來)’를 이룰 수 있게만 된다면 또 그만한 다행이 어디에 있겠는가.
[주-D001] 한공 익지(韓公益之) : 익지는 한준겸(韓浚謙)의 자(字)이다.[주-D002] 교목(喬木)을 …… 있고 : 하늘 높이 솟은 교목(喬木)이나 대대로 국가에 몸 바친 세신(世臣)은 모두 고국(故國)에 있게 마련이나, 우리가 고국이라고 하는 것은 교목이 있기 때문이 아니요 세신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온다.[주-D003] 감당(甘棠)을 …… 있다 : 《시경(詩經)》 소남(召南)의 편명(篇名)이다. 주 무왕(周武王) 때 소공(召公)이 서백(西伯)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추모한 나머지 그가 잠시 그늘 아래 쉬었던 감당나무를 기념하여 잘 가꾸며 보존하는 한편, 이를 노래로 지어 불렀다는 고사가 있다.[주-D004] 버드나무 …… 유풍(遺風) :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에 “집 옆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기에 이를 나 자신의 호로 삼았다.[宅邊有五柳樹 因以爲號焉]”는 말이 나오는데, 그 뒤로 지취(志趣)가 고상한 은사(隱士)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 되었다.[주-D005] 느티나무 …… 일화(逸話) : 주(周)나라 때 삼공(三公)이 궁정(宮庭)의 느티나무 세 그루를 정면으로 향한 위치에서 조회(朝會)를 하곤 하였으므로 삼괴(三槐)가 삼공(三公)의 대명사로 쓰이게 되었는데, 송(宋)나라 때 정승 왕단(王旦)의 부친인 왕우(王祐)가 병부 시랑(兵部侍郞)으로 있을 적에 자기 집 뜨락에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어 놓고는 자신의 후손 중에서 분명히 삼공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宋史 卷282 王旦傳》[주-D006] 청소년기에 …… 하였고 : 전통을 자랑하는 명가(名家)에서 학업을 닦아 일취월장(日就月將)하였다는 말이다. 한(漢)나라 때 추로(鄒魯)의 대유(大儒)라고 일컬어졌던 위현(韋賢)이 네 아들을 잘 가르쳐 모두 현달하게 하였으므로, 당시에 “황금이 가득한 상자를 자식에게 물려주기보다는 경서 한 권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훨씬 낫다.[遺子黃金滿籯 不如一經]”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漢書 卷73 韋賢傳》[주-D007] 청장년기엔 …… 정도였는데 : 기라성 같은 인재들 중에서도 출중한 면모를 보였다는 말이다. 기북(冀北)은 준마(駿馬)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인데, 한유(韓愈)의 〈송온처사부하양군서(送溫處士赴河陽軍序)〉에 “백락이 기북의 들판을 한 번 지나가자 말들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伯樂一過冀北之野 而馬群遂空]”는 유명한 표현이 있다.[주-D008] 화려한 …… 것이요 :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한 것도 모두 자신의 축적된 실력을 발휘하여 인정받은 결과일 뿐이라는 말이다. 소동파(蘇東坡)의 〈가설송동년장호(稼說送同年張琥)〉에 “옛사람은 오래도록 굽혔다가 비로소 펴고, 충분해진 이후에야 쓰임에 나아가며, 넘치고도 남게 된 뒤에야 흐르고, 활시위를 끝까지 당긴 뒤에야 쏘는 듯이 하였으니,[發於持滿之末] 이것이 바로 옛날의 군자가 남보다 훨씬 뛰어나고 지금의 군자들이 미치지 못하는 까닭이라고 하겠다.”라는 말이 나온다.[주-D009] 수초부(遂初賦) :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에 돌아와 숨어 살겠다는 뜻의 노래를 말한다. 진(晉)나라 손작(孫綽)이 십여 년 동안 산수(山水)를 유람한 뒤에, 산림(山林)에 은거하려고 마음먹은 처음의 뜻을 마침내 이루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수초부(遂初賦)〉를 지은 고사가 있다. 《晉書 卷56 孫綽傳》[주-D010] 하늘을 섬기며 :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애공문(哀公問)에 “이 때문에 어진 이는 어버이 섬기기를 마치 하늘을 섬기듯 하는 것이다.[是故仁人之事親也如事天]”라는 말이 나온다.[주-D011] 거(莒) 땅에 있을 때 : 과거 험난한 곤경에 처했을 때를 말한다. 제 환공(齊桓公)이 공자(公子) 시절에 거(莒) 땅으로 망명하여 온갖 어려움을 겪었는데, 귀국하여 즉위한 뒤 축하연(祝賀宴)이 벌어졌을 때 포숙아(鮑叔牙)가 술잔을 올리면서 “우리 임금께서 조국을 떠나 거 땅으로 망명했던 때를 잊지 않으시기를 축원한다.[祝吾君无忘其出而在莒也]”고 말했던 고사가 있다. 《新序 雜事》[주-D012] 갱장(羹墻)에 …… 마음 : 죽은 사람에 대한 간절한 추모의 정을 말한다. 요(堯)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이 3년 동안 사모하는 정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밥을 먹을 때에는 요 임금의 얼굴이 국그릇 속[羹中]에 비치는 듯하고, 앉아 있을 때에는 담장[墻]에 요 임금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했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63 李杜列傳》[주-D013] 새 새끼를 …… 마음 : 연로한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마치 어린아이처럼 재롱을 떠는 자식의 지극한 효심(孝心)을 말한다.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에도 색동옷을 입고 부모의 곁에서 새 새끼를 가지고 놀며 즐겁게 해 드린 고사가 있다. 《初學記 卷17 引 孝子傳》[주-D014] 고기를 먹는 자리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장공(莊公) 10년 조에 나오는 말로, 국가의 후한 녹봉(祿俸)을 받는 고위 관직을 말한다.[주-D015] 만물의 …… 안다 :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나오는 말이다.[주-D016] 수레를 …… 나이 : 수레를 타고 다닐 필요가 없어서 집안에 걸어 놓아야 할 나이, 즉 치사(致仕)의 나이인 70세를 가리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