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차쿠 성당
한반도의 연장 해안선처럼 뻗어 나간 중국 요동 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차쿠 (岔溝 )는 현재 필자의 집이요 일터요 성전이다. 비록 중국의 정치 특수성 상 전례 공동체를 형성할 순 없었지만, 사제가 꼭 미사 집전을 통해서만 신자를 만나라는 법은 없다. 주례를 금하고 강론을 못하게 하면 ‘말씀 나누기’ 라는 방식도 있다. 또 명절날, 생일날, 손녀의 12살 기념식 날, 차쿠의 천주교인들은 지역의 유일한 사제인 한국 신부를 초대한다. 어떤 때는 나의 밭에서, 어떤 때는 그들의 도화 꽃 핀 밭에서 땅을 일구며 땀도 함께 흘린다. 지금 코로나 때문에 못 가고 못 만나서 많이 보고 싶지만, 그래도 중국 SNS로 매일 안부를 주고받는 차쿠의 사람들이다.
올 2021년 한 해를 최양업,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으로 뜻깊게 보내고 있다. 그런데 과연 국내에 두 분이 같이 살던 성지가 있었을까? 없는 것 같다. 김대건 신부님이 워낙 일찍 순교하셨기 때문이다. 중국 대륙에는 그래도 김, 최신부님이 같이 살던 공통성지가 서너 군데 있다. 그중 한 곳이 차쿠이다. 최양업 신부님의 첫 사목지 (1849년 5월∼12월 보좌 사목 )인 줄만 알았는데, 그 산기슭인 백가점이 김대건 신부님의 요동 편지의 발신처 (4, 5, 6, 7번째 서한)로서 동일지점이 되기 때문이다.
차쿠에는 조선으로 입국하려던 파리외방선교사들의 <선교사 대기소>가 있었다. 봄에 도착한 선교사라도 압록강이 결빙되는 겨울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냥 물 위를 도강하다가는 십중팔구 국경수비대에게 발각될 것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밤, 하얀 광목을 뒤집어쓰고 강 얼음 위를 기어가야 붙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1866년 병인박해 직후, 차쿠는 조선 천주교회의 보루가 된다. 가까스로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가 차쿠에서 조선의 제6대 주교가 되었고, 1868년 <조선교구 임시 청사>가 이사해온 것이다. 영토는 중국 땅이지만 교회로서는 조선 소속 본당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설왕설래했던 “무엇 때문에 학생들을 멀리 홍콩까지 걸어오게 하여 진을 빼는가? 가까운 국경에 민가 몇 채를 매입하여 신학교를 하면 되지 않는가 ?”하던 의견이 관철되어 <조선 신학교 >도 열게 된다.
이러한 차쿠의 역사에 필자의 개인사도 덧붙이고 싶다. 2006년 1월 1일 차쿠가 다름 아닌 백가점이었음을 확인한 후, 정확히 딱 10년 만인 2016년 1월 1일, 차쿠에 4층짜리 교육관을 지어 입주했다. 외국 종교가의 그 불가능한 거주를 가능하게 한 장본인야말로, 차쿠에서 요양을 한 故 전영부 신부라는 점을 꼭 말하고 싶은 거다. 일이 되려고 했는지 이 중국 신부님은 필자와 출생 연월일이 완전히 일치했다. 이런 천생연분을 중국인들은 아직도 ‘못내 ’ 믿고 있는 바다. 이 미신 같은 힘이 마침내 중국 공산당들에게도 샛길을 내어주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은 상주할 뿐만이 아니라, 한국인 순례객이 오면 성지 미사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오지에서 외국인 혼자 고생한다고 중국 수녀님들까지 파견해 주었다.
차쿠의 주변에 대련 여순 안중근 감옥이 있고, 변문(邊文) 옆 단동(丹東)에는 북한 철교와 세 신학생 도강지역이 있다. 또 민족의 성산이라는 백두산 천지도 그리 멀지 않다. 어서 코로나 19가 안개처럼 활짝 걷혀서 빨리 차쿠에 돌아가고 싶다. 지금 이렇게 지면으로만 성지를 안내할 게 아니라, 거기 직접 살면서 반가운 고향 분들처럼 독자들을 맞이하고 싶다.
@작성자 : 이태종 사도요한 신부 (청주교구 , 중국 차쿠 거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