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사 3 성명석각姓名石刻 https://blog.daum.net/sudoarm/4 /카페지기 정리
2017. 11. 7. 보장천추寶藏千秋 돌도사와 떠나는 석각石刻기행 - 청암사 ③ 성명석각姓名石刻 참조
虎溪 (호계)
■ 虎溪(호계) 각자 바깥쪽 바위
林秀養(임수양),
洪淳謨(홍순모),
閔東爀(민동혁,1839~ ) [진1839] 1899~1900 김산군수역임. 父 민백주(閔百胄)
閔百能(민백능), 1753~ 지례현감 역임
閔百易(민백역)
李裕寅(이유인),
崔公得(최공득),
李暎洙(이영수) 이항주
李恒柱(이항주)
金淵錫(김연석
子渭權(김위권),
徐兩恩(서양은)
柳大權(유대권)
柳漢起(유한기)
文性牧(문성목)
子炳璹(문병숙)
文鐘範(문종범)
洪淳謨(홍순모)
閔東爀(민동혁)
柳大權(류대권)
李裕寅(이유인, ( ~ 1907.6.21) ) 김해사람. 1901.2. 경상도 관찰사 시 방문한 것으로 추정되.
崔公得(최공득)
李裕寅( ~ 1907.6.21) 경남 김해 사람으로 중인이었으나 무속인 진령군(眞靈君)의 도움으로 고종과 명성황후(민비)의 측근이 되었고, 노년에는 명당으로 유명한 예천 금당실 마을에 큰 저택을 지었는데, 일각에서는 구전에 한말 끊임없는 외세의 위협으로부터 고종과 황후의 도피처로 삼기 위해서 저택을 지었다고 전해온다.
아흔 아홉 칸의 궁궐 같은 큰 저택을 지으면서 힘없는 지역 주민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시켰으며, 강제 노역에 시달린 주민들은 목재를 목도질 해오면서 목도소리 대신 상여 소리를 하였고, 집이 망하기를 기원하면서 집의 기둥을 세울 때 거꾸로 세울 정도로 원성의 목소리가 높았다고 전해 들려온다. 조선일보 기사 https://blog.naver.com/ds2hcg/222264183996
1900년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을 규탄하는 시무15조를 올렸으며, 같은 해 평리원재판장임시서리가 되어 을미사변과 연루된 안경수(安駉壽)·권형진(權瀅鎭)을 고종에게 아뢰지 않은 채 교형(絞刑)에 처한 죄로 철도(鐵島)에 유배당하였다.
1905년 공진회사건(共進會事件)으로 구속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었다.
대표관직으로 파주목사, 함경남도관찰사, 궁내부특진관, 한성부판윤, 1901년 2월 경상북도관찰사를 지냈다. 1902년 말 탁지부대신임시서리가 되었고, 한성부판윤 · 시종원경 · 경무사 등을 두루 역임한 뒤, 1904년 중추원부의장이 되었다. 같은 해 심상진沈相震 등과 함께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輔安會(보안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에 있으면서 排日과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섰다.
■ 洗塵巖(세진암) 계곡 중앙 암벽
최송설당(1855)
허석許襫(1838) 子허한許㸁(1860)부자
이종면李宗勉(1870),
이근영李根榮,
조병진趙炳鎭 子 조성진趙性眞,
이희재李熺宰,
장석윤張錫胤,
이용직李容直,
이인설李寅卨, 이인택李寅澤,
전병하全炳夏,
박해진朴海鎭, 박해명朴海明,
배석하裵錫河 子 한준漢準 한익漢益 한기漢基 한성漢成 한욱漢旭,
박기홍朴基洪,
도한진都漢鎭,
이종표李鐘杓 子 이장우李章雨 이길우李吉雨,
김성한金聖㸁,
이상필李相弼,
서택호(徐宅鎬,1809~1894) 子 응철應澈 孫 은교 曾孫 龍희, 정복鄭濮,
문지곤文志坤, 문선곤文善坤, 문백곤文伯坤
이규환李圭桓, 이병옥李炳鋈,
도제량都濟良 子 도동식都東植, 도영홍都瑩鴻 子도창식都昌植
이태림李泰林 子 이기봉李基奉 孫 이상우李祥雨,
박종하朴鐘夏, 박민하朴敏夏, 박응하朴應夏 ▶박민하 지례군수 역임(1913`)
妓 금홍錦紅이 새겨있다.
서택호徐宅鎬 子 서응철徐應澈등 4대가 함께 새겨있다.
*서택호徐宅鎬는 1809년 ∼ 1894년 조선 후기 유학자이다.
평소 경전經典)에 기록된 문자를 성현聖賢의 말이라고 여겨 독서를 중시하였다.
1839년(헌종 5)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었다.
저서로는《사일재일고四一齋逸稿》는 1923년 서상준徐相晙이 이강伊岡 서응순徐應淳의 《이강일고伊岡逸稿》와 합본하여 엮어 간행한 《달성세고達城世稿》에 실려 있다.
이인설李寅卨 조선후기(1869) 중앙관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낸 인물이다.
이길우李吉雨 189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에 올랐다. 형 이장우李章雨와 부 이종표李鍾杓가 함께 새겨있다.
전병하全炳夏
1880년 3월 7일∼1954년 4월 12일 일제 강점기 법조인으로 친일을 한 인물이며 창씨 개명한 이름은 전본길조(全本吉助)이다.
1934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권업채권사기 사건으로 체포된 후 일본 고베[神戶]로 호송되었다.
이종면李宗勉
오정梧庭 이종면李宗勉은 1870년 11월 20일(음) 대구에서 출생하여 1912년 7월 대구 상무소 발기인과 1913년 경상농공은행장을 지냈으며, 경북고등학교의 전신인 대구 협성학교 교장을 지낸 상공인인 동시에 교육자로 문학에도 많은 작품을 남겨 서원시선, 인산만록, 오정시선등의 시집을 남겼다. 1932년 5월16일(음) 세상을 떠난 이후 팔공산 자락 환성산(지금의 도림사)이곳을 영면지永眠地로 삼게 되었다.
도림사 토지를 시주한 안영주보살의 시조부가 되는 분이다. 이분이 청암사를 방문하여 새겼는지, 또한 이름이 같은 동일인인지 알 수 없으나 대구에 살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보아 가까웠던 청암사는 언제든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다. 안영주보살의 시조부 이름을 청암사에서 만나니 마치 나의 조상을 만난 것처럼 반갑기만 하다.
장석윤張錫胤은 1764년(영조 40)∼ 미상 조선 후기 문신으로 자는 백영伯永이다.
1786년(정조 10) 별시문과 을과로 급제하였다. 1798년(정조 22) 현풍현감 재직 시절 추곡하모秋穀夏牟를 절반은 원회곡元會穀으로 절반은 돈으로 바칠 것을 주장하였다. 성주星州의 노장곡면蘆長谷面 10리를 현훙으로 옮겨 그 소출을 사용하게 해줄 것과 조창과 왜관 두 곳에 하납(下納)하는 일을 시정해 줄 것 등을 주장하였다. 1802년(순조 2) 외직으로 전라좌도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지방을 감찰하고 불합리한 실정을 고쳐줄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거창 수승대에도 이름이 보이며 홍류동 계곡 석각에 최치원둔세시를 차운한 시와 오언절구 시 두편이 새겨져있다. 현풍현감 재직시 청암사를 들른 것으로 보인다.
장석윤張錫胤 이용직李容直
해인사에 있는 판서 이용직 시주편액
이상으로 김천 청암사에 새겨진 석각을 살펴보았다.
이곳저곳 자료들을 모아 편집하다보니 혹 잘못된 기록이 있을지 조심스럽기만 하다. 어쨌든 수도암에서 1994년부터 출가와 원주소임, 수도암 서전西殿에서의 생활, 선원 첫철안거등 5년여를 생활한 소납으로서는 출가생활이 시작된 사찰이란 점에서 청암사에 빚갑는 마음으로 자료를 정리해 보았다.
이제 합천 연호사로 달려가본다.
참고문헌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 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팔공산 도림사 월간 도리도리 2017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