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마가복음 12장 28절에서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프로테: 프로토스)가 무엇이니이까』
프로테(πρώτη)는 순서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중요성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12장 29-30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카르디아스 καρδίας)을 다하고 목숨(프쉬케 ψυχῆς)을 다하고 뜻(디아노이아스 διανοίας)을 다하고 힘(이스퀴오스 ἰσχύος)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여기서 네가지가 등장한다. 카르디아스는 마음으로 번역되었는데, 데살로니가전서 3장 13절에서 『너희 마음(카르디아스)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파루시아)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카르디아스는 영적 마음이다. 파루시아를 강림으로 번역했는데, 교회 사람들은 종말 때 예수님의 지상 재림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도의 심령 속으로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셔서(재림),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지는 성전에 임재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마음으로 번역된 것은 새사람의 몸을 입은 영적인 마음이다.
프쉬케는 혼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혼을 의미한다. 이 혼은 죽어야 할 혼이다. 옷을 갈아입듯이 이전의 혼(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목숨을 다한다는 말은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고 라는 의미다.
디아노이아스는 에베소서 2장 3절에서도 표현되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디아노이아스)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θελήματα τῆς σαρκὸς καὶ τῶν διανοιῶν)으로 번역되었는데, 헬라어로 보면, “육신과 그것의 마음이 원하는 것”이다. 그 마음이라는 것은 육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육적 마음인 것이다. 육적 자아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씨뿌리는 비유에서 농부가 굳었던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가꾸어서 열매를 얻을 수 있듯이 그 이치를 깨닫고 하나님나라 발견하라는 의미다.
이스퀴오스는 능력 권세 힘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부여받는다. 마태복음 11장 27절에서『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성도 역시 그리스도로부터 이와 같은 권세를 받는다. 권세를 받는 성도는 하나님으로 오는 것임을 기억하라는 말씀이다.
『둘째(데우테라:데우테로스)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데우테라(δευτέρα)는 그 다음이라는 말이다. 가장 중심은 하나님 사랑이지만, 그 다음은 이웃 사랑이라는 말이다. 사랑(아가파오)이라는 말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죽었던 영을 살리는 일이다.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합되어 죽었음을 믿고, 함께 부활되어, 새혼을 입고, 영이 살아나므로, 성도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씨뿌리는 비유처럼 굳어있는 육적 자아를 깨어(디아노이아스) 하나님을 발견하고, 옛혼이 죽고(프쉬케인 혼을 다하고), 새옷을 입은 영의 마음으로(카르디아스:영의 마음), 심령 속의 성전이 세워져 왕 같은 제사장의 권능(이스퀴오스)을 부여받고 죽었던 영이 살아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이웃(교회 신도)에게도 이와 같은 이치를 깨닫게 해주어서 죽었던 영을 살리는 것이 바로 아가파오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한 서기관의 질문에 대해서 답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하셨는데, 바로 앞에 부활이라는 주제로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육적 부활이 아니라, 영혼(영과 혼)의 부활임을 설명하신 것이다. 그래서 상당히 비유적으로 네가지의 단어를 이용하여 영혼의 부활과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 설명하셨다.
그런데, 서기관은『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라고 말을 한 것이다. 제사장, 서기관 등 유대 지도자들은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굳게 믿었는데, 예수님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이 분이 참 메시야 라는 것을 마음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표현을 다르게 했지만, 유대지도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라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분명 하나님은 한 분인데, 서로 다르게 믿는다는 말이다. 오늘날 모든 교회 신도들이 하나님을 한 분으로 믿는다. 그러나 자기들이 원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시내산에서 모세가 계명의 돌판을 받으러 간 사이에 금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제사를 한 그런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기복신앙을 바탕으로 한 인본주의, 율법주의, 다른 종교와 비슷한 영지주의적인 생각이 바로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또 마음(카르디아스)을 다하고 지혜(쉬네세오스)를 다하고 힘(이스퀴오스)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12:33)
카르디아스는 영적인 마음, 쉬네세오스는 영적인 지혜, 이스퀴오스는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권능을 의미한다. 이 서기관은 아마도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고 여러가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평상시에도 동물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여인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분이 여인의 후손인 약속의 씨 메시야이구나 라고 여겼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표현은 할 수 없었으나, 마치 니고데모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컸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막12:34) 예수님은 한 서기관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있지만 현재적으로 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들의 신앙을 버리고 예수께로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 당시 유대교의 출교는 죽음처럼 여겨지는 그런 시대였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다.
오늘날 교리에 젖어있는 신도들이 교리를 벗어나면 영적으로 죽는 것처럼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현재적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으면, 심령 속의 그리스도의 재림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모두가 율법 아래 있는 자가 된다. 율법 속에 있는 자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야 하며, 하나라도 어기면 심판을 받는다.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당시 한 서기관이 지혜롭게 대답하므로, 예수님이 그에게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다고 말을 했지만, 오늘날 교회의 대부분은 지혜롭게 답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14장 21절을 대하는 태도때문이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이 ( ) 부분을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ὁ ἔχων τὰς ἐντολάς μου καὶ τηρῶν αὐτὰς ἐκεῖνός ἐστιν ὁ ἀγαπῶν με· 이 부분을 다시 번역해 보면, 『나의 계명을 가지는(에콘 ἔχων) 자와 그것들을 지키는(테론 τηρῶν) 자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첫째되는 계명은『네 마음(카르디아스 καρδίας)을 다하고 목숨(프쉬케 ψυχῆς)을 다하고 뜻(디아노이아스 διανοίας)을 다하고 힘(이스퀴오스 ἰσχύος)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나의 계명을 가지는 자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자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키는 자』는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가 되는 것이다. “지키다” 라고 번역된 테론(τηρῶν)은 기본형은 “테레오”로서 방어선을 지키다, 보호하다, 상태를 유지하다 등의 의미다. 즉 성경의 규정을 행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마음에 새겨 잃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오늘날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계명을 지킨다』는 의미를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하여 적용시키는데 있다. 계명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말을 한다. 사랑하는 것을 규정과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교회 사람들이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규정을 지키듯이 완벽하게 지키는 자가 있는가?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규정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스스로 완벽하게 규정을 지켰다고 말을 한다면 무슨 근거로 스스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스스로 완벽하게 사랑했다고 누가 인정하는가? 그렇게 말하는 자는 정말 완벽하게 지키고 있는가? 여기에 답하려고 한다면 율법주의자들인 것이다.
요한계시록 14장 12절에서『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이 말을 확대 해석하여 장차 종말에는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도록 하는 환란이 올 것인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인내로서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므로 이를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지킬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 주셔서 이를 지켜 나갈 수 있다고 말을 한다. 그래서 계명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의 신부가 될 수 있으며, 새하늘과 새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말도 “계명을 지키는 것”을 율법주의적으로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항에 대해 행동하는 것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2장 7절에서『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테론)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여기도 마찬가지로 “지키다” 라는 헬라어는 테론이다. 즉 보존하다, 유지하다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간직하는 것이다. 이를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이단이 생기는 것이다.
이단들은 계명을 지키는 것을 십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적용한다. 말하자면 율법을 지켜 행하자는 말이다. 하나님이 십계명(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것을 지키려고 하다가 완벽하게 지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대하여 죄인임을 고백하고 장차 여인의 후손인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짐승을 죽이는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서 이 짐승을 대체하는 메시야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율법을 예수님 당시에 유대지도자들은 율법주의로 확대 해석하여,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한 것이다.
오늘날도 교리에서 예수님의 능동적, 수동적 순종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학적 개념에서 학자들은 능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가 영생을 얻게할 조건으로 죄인을 위하여 율법을 준수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수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가 죄의 형벌을 지불하여 그의 모든 백성의 부채를 갚음으로서 수난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스스로 고난과 죽음에 자신을 종속시킨 것은 그의 능동적 순종의 일부이고,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종속되어 살았으며 종의 형상으로 활동하셨다는 것은 수동적 순종의 일부라는 것이다. 기독교 내에서도 능동적, 수동적 순종을 지지하는 파가 있는가 하면, 반대하는 파가 있다.
율법을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국가적인 법 또는 도덕법 정도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 이전에도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명령하신 규례들이 있다. 율법은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진리를 말씀한 것으로 생명과 구원을 내포하고 있다. 생명과 구원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저 도덕법이라든가, 의무적으로 지켜야 하는 각 나라의 일반법과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법을 잘 지키는 것이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율법을 율법 속에 담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의 규정에 얽매인 율법주의로 바라본다면, 생명과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의 의미는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며, 이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이것을 율법주의적으로 지키느니 마느니 말하는 자들은 계명을 지킨다는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계명을 마음에 간직한다는 말이다. 오늘날 교회가 이단을 배척하면서도, 스스로 잘못된 교리를 말하거나 헬라어 성경과 다르게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자가 있다면 그게 이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