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의소(大乘起信論義疏)』의 저자
혜원慧遠( 523 ~ 592)
돈황(敦煌) 출신. 13세에 출가하여 20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음. 담은(曇隱)에게 5년 동안 사분율(四分律)을 배우고, 7년 동안 법상(法上, 495-580)의 가르침을 받음. 북주(北周)의 법난(法難) 때, 무제(武帝)에게 직간(直諫)하고 은둔함. 580년에 불교가 부흥되기 시작하자 소림사(少林寺)에서 강의하고, 581년에 수(隋)의 문제(文帝)가 그를 낙주(洛州) 사문도(沙門都)에 임명함. 문제(文帝)가 혜원을 위해 장안(長安)에 정영사(淨影寺)를 창건하니, 그는 그곳에서 강의와 저술에만 몰두함. 저서 : 유마의기(維摩義記)·대반열반경의기(大般涅槃經義記)·관무량수경의소(觀無量壽經義疏)·무량수경의소(無量壽經義疏)·대승의장(大乘義章).등이 있다.(시공 불교사전, 2003. 7. 30.)
중국 수나라 불승으로 ‘석의(釋義)의 조(祖)’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당시 석의학의 제1인자였다. 《대승의장(大乘義章)》등의 저술을 남겼다.
출생-사망
속성 이(李). 간쑤성[甘肅省] 둔황[敦煌] 출생. 만년에는 장안(長安:현재의 시안[西安])의 정영사(淨影寺)에 살았으므로 ‘정영혜원’이라 불렸다. 그의 학계(學系)는 지론 남도파(地論南道派)에 속하며, ‘석의(釋義)의 조(祖)’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당시 석의학의 제1인자였으며, 기골호법(氣骨護法)의 스승이었다.
578년 북주(北周)의 무제(武帝)가 북제(北齊)를 멸망시키고 북제에서 폐불(廢佛)을 단행하려 하자, 아무도 말을 못하고 있을 때 유독 그만이 무제를 격렬하게 논힐(論詰)하여 마침내 불법을 지켰다. 저술은 50여 권이 넘지만 《대승의장(大乘義章)》(28권)이 특히 유명하다.(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수나라 때의 승려. 속성(俗姓)은 이(李)씨고, 감숙(甘肅) 돈황(敦煌) 사람이다. 배우기를 좋아했고, 3살 때 출가할 마음을 굳혔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13살 때 체도(剃度)하여 스님이 되었다. 많은 경론(經論)을 섭렵했다. 선정(宣政) 원년(578) 북주(北周)가 제(齊)나라를 멸망시키자 무제(武帝)가 고승들을 궁전에 모아 불교를 폐하겠다고 선포했지만 승려 가운데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는데, 스님만 강력하게 항의하니 무제도 어쩌지 못했다.
얼마 뒤 급군(汲郡) 서산(西山)에 잠입하여 수행을 열심히 닦았다. 수나라가 들어서자 불려 장안(長安)에 가서 정영사(淨影寺)에 머물렀다. 이 때문에 정영혜원(淨影慧遠)으로 불렸다. 이곳에서 항상 강설하니 사방에서 7백여 명의 학자들이 몰려들었다. 문제(文帝) 개황(開皇) 12년(592) 황명을 받들어 번역을 맡았는데, 얼마 뒤 입적했다. 학계(學系)는 지론남도파(地論南道派)에 속하며, 석의(釋義)의 조(祖)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당시 석의학의 제1인자였으며, 기골호법(氣骨護法)의 스승이었다. 저서는 50여 권이 넘는데, 『대승의장(大乘義章)』 28권이 특히 유명하다. 그 밖의 저서에 『지지소(地持疏)』와 『십지소(十地疏)』, 『화엄소(華嚴疏)』, 『열반소(涅槃疏)』 등이 있다.(중국역대불교인명사전, 2011. 10. 25.)
출생 - 사망출생지유파직업저서
523년 ~ 592년 |
중국 돈황 |
지론종(地論宗), 남도파(南道派) |
승려 |
대승의장, 십지경론, 열반경, 무량수경 |
중국, 수대의 승려. 돈황 사람. 속성은 이씨. 지론종(地論宗), 남도파(南道派)의 법상의 문하의 제1인자로, 북주의 무제가 행한 폐불(廢佛)에 대해서, 혼자서 항변한 것으로 유명. 수의 문제에 의한 불교부흥책에 의해서 육대덕(六大德)의 한 명으로서 초대되어서 장안에 들어갔다. 정영사에 거주하면서 강독하였으므로 여산의 혜원과 구별해서 <정영사(淨影寺)의 혜원>이라고 한다. 주저서에 『대승의장(大乘義章)』 14권을 비롯해 『십지경론(十地經論)』, 『열반경』, 『무량수경』의 주석을 썻다. (종교학대사전, 1998. 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