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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 구로다 세츠코 원전 필요없는 후쿠시마 여성들 활동가
인터뷰어: 이정윤 원자력안전과미래 대표
https://www.youtube.com/watch?v=QFOOuKbdSdo
Q. 구로다 세츠코 선생님은 평생 후쿠시마현에서만 거주하셨습니까?
-지금까지 도쿄에서 2년, 교토에서 10년, 가고시마현 아마미오시마라는 곳에서 5년 정도 거주한 적이 있습니다.
Q. 시민사회 활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며, 주로 어떤 활동을 하셨습니까?
-동기를 말씀드리자면, 제가 고등학교 때 베트남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학교 선생님이나 선배들로부터 베트남전쟁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고, 저도 전쟁을 강하게 반대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일본에서는 젊은 세대의 반대 의견이 점점 더 활발해졌는데, 그때부터 저는 활동을 본격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Q. 베트남 반전운동이 학생을 중심으로 어떻게 활동이 전개되었는지 그 내용과 경험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계기로는 베트남전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저는 대학 입시에 실패해서 소위 말하는 ‘헬멧 학생운동’은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대학생 친구들을 통해 정보를 공유받는 방식을 통해 사회운동을 시작했고,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Q. 주로 피켓팅 활동이었습니까?
-(피켓팅 활동은) 원전 사고 발생 이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Q. 1980년대 아마미오시마에서 농어업 공동생활을 하면서 재처리공장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반대운동을 하셨습니까?
-가고시마현 남쪽에 아마미오시마라는 섬이 있습니다. 일본의 학생운동을 경험한 사람들이 문화적 측면에서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히피 운동에 속한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저는 굉장한 흥미를 느꼈습니다. 재처리공장 청사진이 먼저 나왔고, 그것에 반대하기 위해 히피들이 그곳에 모여 공동체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당시에는 학생운동이 끝난 시점이었습니다. 그때 각지에서 공동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마미오시마 사람들은 “자연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싸운다”는 자세로 그곳에서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미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일본의 히피들은 알렌즈파크로 갔습니다. 다만 일본 본토에서 옮겨간 젊은이들이 독자적으로 한 것이 아닌 아마미오시마 주민들과 함께 반대운동을 한 것입니다.
Q. 한국은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화 요구가 급선무였는데 일본은 좀 특이한 것 같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차이를 좀 알겠네요. 반전 운동이 환경보호 운동으로 전환이 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맞습니까?
-일부 학생들은 베트남 반전운동을 통해 사회적 변화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아마미오시마에서 발생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Q. 그래서 결국 제처리공장이 아오모리현으로 옮겨간 것이군요?
-반대운동이 성과를 거둔 것도 있지만, 세계적인 에너지 정책 측면에서 상황이 변하여 아마미오시마에는 재처리시설이 들어서지 못했습니다.
Q.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발생했을 때 학생운동이 상당히 중요한 이슈가 됐을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저는 아마미오시마에서 5년을 살았습니다. 이곳에서 결혼도 하고 첫 아이를 낳았습니다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고향인 후쿠시마 오크아이즈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1986년 3월이었는데 이후 4월 체르노빌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Q. 환경보호 운동은 잠시 쉬셨습니까?
-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생활을 했으니까 그 활동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Q.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났는데, 그 사이에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셨습니까?
-귀농 이후 아이들을 키우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후에 현재 거주 중인 고리야마시로 이사를 했습니다.
Q.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반원전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그때까지 나름대로 원전 반대 네트워크와 공유하면서 미국 스리마일아일랜드(TMI) 사고, 체르노빌 사고가 발생하는 것을 바라봤습니다. 하지만 제가 살고 있는 현에서 그렇게 큰 사고가 발생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귀향 후 후쿠시마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면서 아이와 함께 원전 반대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그때도 설마 폭발할 것이라고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Q.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 필요없는 후쿠시마의 여성들’을 설립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정말 엄청난 재앙이었습니다. 쓰나미로 인한 피해도 상당히 컸고,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는데 원전 사고까지 겹치면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1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피해가 지속되고 있고, 복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재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저는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채 군마현에 있는 여동생 집으로 대피했는데, 10일 정도 이후에 후쿠시마에서 하던 일도 있고 해서 다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후에는 다른 곳으로 이사하지 않고 계속해서 살고 있습니다.
Q. 사고 당시 주민 피난을 위한 일본정부의 안내가 있었습니까?
-지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각자 알아서 해야 했습니다. 처음부터 어느 정도 정보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 중 일부는 피난을 갔지만, 결국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다시 돌아온 사람들도 많이 있었어요. 저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강제로 피난을 해야 했던 지역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리야마시는 예외였습니다. 지시 자체가 없었습니다. 후쿠시마현에서 직선거리로 60km 정도 떨어진 가장 큰 도시가 고리야마시입니다. 그곳에 대피령을 내리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정치적인 판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 알고 있는 것은 후쿠시마시, 고리야마시, 이와키시 등 큰 도시의 상공을 측정하지 않았거나, 측정하더라도 발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Q. 식수는 어떻게 해결합니까?
-일단 방사능 때문에 물을 마시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사고로 인해 단수가 된 것입니다. 방사능도 무서웠지만, 직접적인 피난의 이유는 식수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이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점을 몰랐습니다.
Q. 상공에서 방사능 측정을 하지 않은 것은 장비가 없어서인지 안 한 것인지? 최근 알게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장비가 없어서 못했다는 게 아니라 후쿠시마현 전체 상공에서는 계측을 했지만 큰 도시들은 그 데이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내 공개한 시민활동가가 있습니다. 주변 지역은 계측해서 나온 숫자가 있는데 큰 도시 세 군데만 데이터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을 발견한 활동가는 여러 모임에서 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발표하면 매우 위험할 수 있으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Q. 최근 IAEA나 유럽의 기관에서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방사능이 날라가는 것을 날짜별로 분석한 자료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다만 이는 시뮬레이션 자료일뿐 측정된 자료는 아니라고 봐야 하겠군요. 군마현으로 가셨다가 언제쯤 돌아오셨습니까?
-10일만에 돌아왔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독립했기 때문에. 아이가 있었다면 방사능 수치가 높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Q. 귀향 후 농업에 계속 종사하시는지요? 방사능 측정은 어떻게 하십니까?
-고리야마시로 이사한 후 농사는 더 이상 짓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부부 모두 오랫동안 설사를 했습니다. 그때 코피를 흘렸다는 사람이 있어서 화제가 되었는데 설사를 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금방 낫긴 했지만요.
Q. 당시 식수는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그때부터 하루가 지날 때마다 다양한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사는 지역에서는 단수 여부 관련 정보가 계속 바뀌곤 했습니다. 친구로부터 물을 받기도 하고 가게에서 생수를 구매하기도 했습니다. 고리야마시에서 급수차가 물을 공급해줬는데 이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줄을 서는 과정에서 피폭되기도 했습니다.
Q. 급수차가 식수를 공급한 기간은?
-10일인가 20일 정도로 기억합니다. 공원마다 급수차가 와서 물을 공급했습니다. 그나마 저는 줄을 설 수 있는 체력이 있었지만, 노인이나 아기가 있는 부모들은 줄을 설 수가 없어 이들에게 물을 나눠주기도 하고 힘들게 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Q. 지금은 식수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기준치가 있는데요. 기준치가 100베크렐(Bq)로 너무 높습니다. 실제는 그 기준치보다 낮은 숫자입니다. 저는 그대로 마시지 않고 약국에서 이중으로 걸러주는 필터를 사용해 불순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Q. 그 지역의 방사선에 의해서 피해를 본 주민들이나 조기 사망자가 있습니까?
-피난을 갔다가 10일이 지난 후에 저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때 어린이집에서 일했는데, 지진으로 인해 많은 아이들이 공포 속에서 소변을 그냥 보는 상황을 목격했습니다. 이런 일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아이들이 아주 무서워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갔습니다. 다행히도 어린이집 건물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고리야마시에서는 몇 군데 건물이 무너졌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집단주택 1층으로 많은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남편과 집은 무사했습니다. 지진 이후 여진이 지속되어 결국 어린이집은 쉬게 되었습니다.
식수가 떨어져 군마현으로 대피했는데 그때 피난도 힘들었습니다. 도로가 여기저기 함몰되어 직진할 수 없었고, 휘발유가 다 떨어져서 중간에 두 번이나 줄을 서서 10L씩 두 번 주유한 기억이 납니다. 일본에서 원전을 재가동시키기 위해서는 피난계획이 필요합니다. 지자체가 이것을 만들어야 하는데 일단 서류상으로 만들고 있긴 합니다. 실제 큰 지진이 발생하면 도로 단절 등으로 인해 도망가려고 해도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이건 이미 경험한 일입니다.
여동생도 군마현에서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여동생 부부도 오랫동안 고생을 하면서 유기농 농사를 해왔는데 사고 직후 땅이 오염되어 농사를 모두 망쳐버렸습니다. 크게 오래 쉬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다시 하고 있습니다. 한때 출하를 했습니다. 사고 이후 정부가 기준치는 100베크렐(Bq) 로 기준치를 크게 올리기도 했고, 어쨌든 몇 달 동안만 쉬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Q. 출하된 상품은 정부가 수매한 것인지 아니면 시장에서 팔았습니까?
-정부 차원의 보상은 없었습니다. 소비자들도 공부를 하게 되니까 지금 후쿠시마산 농작물은 그렇게 잘 팔리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이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정치권은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면 도쿄의 소비자들은 후쿠시마산을 구매해 후쿠시마를 응원하자는 운동이 있습니다. 제가 농사를 짓지 않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분명히 좋지 않은 것은 틀림없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후쿠시마의 농업은 매우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보상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국가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정부는 책임을 인정하지도 않고, 100베크렐(Bq)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를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Q. 원전 사고 발생 전후 갑상선암 발병률 차이는?
-많은 후쿠시마의 아이들이 갑상선암을 앓고 있습니다.** 사고 전 소아 갑상선암은 굉장히 희귀해서 100만명당 1~2명 발생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비정상적인 것은 국가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식으로 일관하거나 장비 성능이 좋아져서 발견할 필요가 없는 암까지 측정 해버린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일본 후쿠시마지역 어린이·청소년, 39명 갑상선암 확진 또는 의심 - 경향신문 (khan.co.kr)
Q. 갑상선암 검진 및 치료 목적인 경우 정부가 의료서비스를 지원해주고 있습니까?
-조사는 국가 및 현 차원에서 정기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2000년부터는 학교를 통해 모든 사람을 조사했습니다. 사고 발생 이후에는 18세 미만은 측정했는데 3년 전부터는 이것도 중단했습니다. 서류를 작성하거나 미리 신청한 사람만 측정할 수 있게 됐습니다. 어쨌든 발표할 때마다 갑상선암 환자는 늘어나고 있습니다.
Q. 정부가 체내에 남아있는 방사능 잔류량 체크는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있습니까?
-예전부터 갑상선뿐만 아니라 혈액검사 등 여러 가지를 시민단체에서 요구하고 있지만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사고 당시 18세 미만만 측정했고 19세 이상은 측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후쿠시마현 주민을 대상으로만 하고 있습니다. 바로 옆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은 제외했습니다. 그리고 성인들을 대상으로는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13년 동안 심장병 혹은 혈액 관련 질병이 후쿠시마현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Q. 후쿠시마 사고 이후 발병된 질환에 대한 정부 지원은 없습니까?
-방사능 때문이라는 것을 정부는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보상도 없습니다. 지금 여러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재판은 아이들이 10년이 지난 뒤 제기한 소송입니다.** 사고 이후 자신의 병이 방사능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하라는 취지의 소를 제기했는데, 당시 18세 이하의 아이들이 지금은 20대입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때문에 갑상선암” 20대 6명, 64억 손배 소송 (hani.co.kr)
Q. ‘체르노빌법 일본판’을 추진하고 있는 고리야마 모임은 어떤 것입니까?
-체르노빌법이란 사고 발생 후 5년 뒤 시민들이 정부에 건의하여 만든 법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법은 원전사고로 인해 피폭을 당한 시민에게 국가가 책임을 지는 점을 기본으로 합니다. 매우 높은 수준의 방사능 수치가 측정된 경우에는 국가가 새로운 지역으로의 이주를 지원하고 일거리와 주거를 제공하는 책임을 부담하게 합니다. 또 조금 낮은 수준의 방사능에 의한 대피 권리도 보장됩니다. 다만 이동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동하지 않아도 되며, 그 지역에 따라 3단계 정도의 구역을 설정하여 상황에 따라 대응할 수 있습니다. 해당 지역의 상황을 고려하여 보상을 추가하는 것입니다.
Q. 보상은 어떻게 진행됩니까?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이미 37~38년이 지났습니다. 지금도 오염된 지역에서는 아이들을 정기적으로 오염이 없는 곳으로 휴양을 보내고, 지역별로 일정기간 동안 휴양을 하게 되면 체질이 좋아진다고 합니다. 국가 예산으로 잘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국가 책임으로 인정하는 점에서 일본과는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시민 단체가 주도하여 이러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자본 부족으로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많은 지역이 돈이 부족해서 중단된 상태입니다.
체르노빌은 3단계로 나눠져 있습니다. 제가 사는 고리야마시는 2단계에 해당합니다. 법에는 '이주할 권리가 있고, 이주하고 싶으면 할 수 있고 비용은 국가가 보장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일본에는 이런 법이 없으므로 이주를 하고 싶어도 경제적인 이유로 이주를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국가의 정치체제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회주의 국가도 국민들을 지켜야 하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사고 직후 수백 대의 버스로 시민들을 대피시킨 점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런 조치가 없었고, 오히려 '지금 당장은 영향이 없으니 가만히 있으라'는 식으로만 일관했습니다. 일부 학자는 ”웃고 있으면 방사능 피해는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Q. '원전 필요없는 후쿠시마 여성들'은 지금도 경제산업성 앞에서 천막농성 중입니까?
-원전 사고 발생 이후 가을쯤 만들어졌고, 200명 정도가 천막농성을 했습니다. 여러 가지를 했습니다만, 2년 전쯤 안타깝게도 해체했습니다. 활동을 중단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10년이 지나 원전 관련 문제들이 많이 터져 나와서 지금은 해산 후 각자 대응하고 있습니다. 후쿠시마의 여성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지만 다른 지역으로 피난 이후 정착한 사람도 있고 돌아가신 분도 계십니다.
Q. 정부의 친원전 정책에 대해 시민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오염수 문제와도 관련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생각이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일단 사고가 발생하면 수습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늘어났지만 일본사회를 규정할 만큼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선거에서는 매년 자민당이 승리하고 있습니다.
친언니가 후쿠시마현 아이즈 지역에 살고 있는데 이 곳은 원전에서 조금 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언니와의 대화가 생각나는데 보수적인 사람인 그는 원전은 문제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항상 언니는 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사고 이후에는 원전에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선거 때는 자민당을 선택합니다. 일본인 대다수가 이런 상황입니다.
오염수 문제에 관해서는 바다로 방출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점은 여러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쿠시마현 지사 선거 때에도 오염수 반대를 외치는 시민파와 현직 보수파가 경쟁했으나 보수파가 크게 이겼습니다. 이와 같은 정치적인 풍토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는 아예 선거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Q. 무모한 원전 개발을 반대할 수 있는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한국 시민단체와 어떤 협조를 했으면 좋겠습니까?
-저는 옛날부터 한국의 시민운동이나 노동운동, 여성운동에 대해서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 운동의 부족함이라고 한다면 눈에 보이는 그런 운동은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공부는 많이 합니다. 강연회에도 많은 사람이 참석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운동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뭔가 각오를 다지는 운동 같은 걸 해야겠다. 이 같은 부분이 일본에서는 부족하다고 봅니다. 지금의 일본 시민운동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만 그걸 뚫고 나갈 수 있는 운동도 조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언론을 통해 내보내는 정보는 매우 강력하며, 정보량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후쿠시마 안심 캠페인은 사고 발생 직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후쿠시마 안심 캠페인을 홍보하며, 후쿠시마 현은 앞으로 더 나은 곳이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현재 새로운 공장들과 다양한 연구 기관들이 설립되고 있어 후쿠시마를 젊은 세대들이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겠다는 계획입니다. 이를 위해 후쿠시마 현으로 이사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400만엔 정도의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현재 원전 주변 지역의 절반 정도가 새로운 젊은 세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방송에서는 이러한 변화는 매우 감동적이라며,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하지만 실제 그 지역의 방사선 수치에 대해서는 발표하지 않고 있습니다.
Q. 사고 이후 귀환 가능한 원전 주변 지역 주민들은 몇 % 정도 돌아왔습니까?
-마을마다 상황이 다르지만 귀환 주민이 많은 곳은 절반 정도입니다. 돌아온 주민은 적지만, 새로 이주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원래 있던 주민들은 고령자입니다. 젊은 부부나 어린 자녀를 둔 가족들은 여전히 방사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원전 작업자들도 귀환한 인구에 포함됩니다.
Q.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은 어떻게 소비합니까?
-그곳에서 나온 음식을 먹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 ’이노베이션 코스트‘이라는 계획이 제안되었는데, 해안가를 멋진 혁신도시로 만들겠다는 내용이 핵심입니다.** 젊은 세대를 유인하려고 하는 것이죠. 그들에게 보조금과 일자리등 다양한 지원을 제공하는 내용이 핵심입니다.
**日 정부 "후쿠시마 인근 이주하면 2000만원 지원" | 한국일보 (hankookilbo.com)
Q. 마지막으로 일본 정부에 3가지를 요구한다면?
-첫 번째는 원전사고의 책임을 제대로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오염수 문제가 일본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인식하고, 이러한 혼란스러운 문제를 해결하고 제대로 보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3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피난을 간 사람들과 아이들의 질병이 여전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원전을 폐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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