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함 김명식 선생님을 만났다. 개동 발행인님이 스승으로 생각하고 계신 분이라는 말씀을 종종 들어왔는데 선생님을 처음 뵌 건 문학의봄 한마당을 통해서였다. 2015년 12월 문학의봄 한마당에 오셔서 강연을 하셨는데,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한글에 담긴 얼과 뜻을 생각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뒤풀이 자리에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짧게 들었다. 제주도 출신이시고 화천에서 자연의 삶과 한글 연구의 사명으로 살아가고 계신다고 하셨는데 왠지 그분 앞에 마음이 다가갔다. 나 역시 제주 출신이고, 군인이신 아버지를 따라 화천에서 유년의 시절을 보낸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로 다시 뵐 기회는 없었고, 언제 한번 찾아뵙고 싶다는 생각은 늘 마음에 있었다. 다사함 문학상이 제정된다는 개동님의 말씀과 지난 여름호부터 싣게 된 '다사함의 연작시'를 편집하면서 선생님을 뵈러 갈 날짜를 잡았다.
김명식 선생님의 호는 '다사함', '다 사랑합니다'라는 뜻이다. 선생님의 사랑은 무조건 열린 사랑이다.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평화를 사랑하고, 한글을 사랑하는 하늘처럼 땅처럼 바다처럼 모든 것을 품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가만히 있지 않고 밖으로 흘러나와 온누리를 사랑과 평화로 적신다. 그래서인지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선생님의 얼굴을 마주하고 앉은 시간이 평화였다.
군포에서 개동 발행인님을 모시고 화천으로 향했다. 요즘 선생님은 선이골에서 내려와 화천시의 아파트에서 아들과 함께 지내고 계신다고 했다. 전기도 전화도 우체부도 오지 않는 선이골 생활이 고령의 선생님에게는 어려움이 있을 거라 여겨진다. 선생님은 아파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모시적삼을 입고 길고 하얀 수염에 환한 웃음이 9년 전 모습 그대로셨다.
아파트 현관에 예쁜 화분이 놓여있었는데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미리 준비하셨다고 하신다. 마침 지나가는 이웃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드리고 아파트 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나의 스승이신 개동님과 개동님의 스승님, 스승님 두 분을 옆에 모시고 있으니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는 행복이 찾아온다.
선생님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과 방 가득 책만 있다.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가전제품이 있었지만 크게 쓰임이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선생님은 우리를 침실 겸 서재인 선생님의 방으로 안내한 후 물 두 잔을 우리 앞에 내밀었다. 선생님은 자리에 앉자마자 12권으로 편집된 한 질의 <한울산 사람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셨다. 그리고 개동님과 나에게 문학창작활동을 넓힌 공을 인정하여 공로상을 시상하신다고 하셨다. 12권의 책은 부상이라고 하셨다.
한 장의 종이 맨 위에 '다사함 울림글 문학상(일꾼상 공동수상)'이라 적혀 있고, 맨 밑에는 '다사함 울림글 창작기금재단 길잡이 다사함' 이라 적혀있었다. 살아오면서 수십 장의 상장을 받아왔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문학계에서 크진 않지만 상을 받을 때마다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그 상들이 나를 조금씩 나아가게 했을 것이다. 다음엔 조금 더 나은 상을 받기 위해 욕심을 갖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의 공로상에는 명령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공로를 인정함과 아울러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사명으로 주셨다.
다사함 울림글 문학상 길잡이가 주시는 상장을 받으며 기쁨 보다 무거운 책임을 느꼈다. 나에게 사명을 주신 가볍지 않은 상이다. 상의 제정을 계기로 사라져 가는 우리 글의 우수성과 우리말의 얼과 뜻을 알릴 수 있도록 나아가자는 생각이 가슴에 새겨졌다. 선생님이 걸어오신 길을 세상이 알아주지 않았어도 문학의 봄을 통해서 세상에 알리는데 작은 출발의 시간이었다.
선생님을 모시고 인근 식당에서 술을 마시면서 선생님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의 고달픈 자취를 따라 마시는 술은 달았다. 선생님의 고달픔은 세월에 녹아 숙성되고 발효되어 어느 술자리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진한 맛이 있었다. 스스로 쌓아올린 배움의 공적을 내려놓고, 젊은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선이골 외딴 산골짜기로 들어오신 30여 년 전의 그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마음을 지금까지 지켜내셨기에 선생님 앞에 개동님이 있고, 개동님 뒤에 내가 앉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댁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아침, 우리는 예정에 없었던 선이골로 향했다. 어떻게 온 걸음인가. 화천까지 와서 선생님과 술만 마시고 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개동님은 9년 전 선이골을 다녀왔지만, 나는 이대로 돌아가기엔 아쉬움이 있었다. 장마철이라 산길을 오르는 일이 어려울 것을 걱정해서 방문을 보류했었지만, 하룻밤새 마음이 바뀐 것이다.
선생님의 집을 나와 차로 20분, 선이골 입구에서 잠깐 하차를 했다. 입구에는 커다란 비석이 있었는데 '가림다 한글마을'이라고 새겨있었다. 한 사람의 생애가 하나의 마을을 이뤄냈다. 구불구불 차의 밑바닥을 긁는 소리를 들으며 십여 분을 더 가다가 차를 세웠다. 나의 운전 실력과 일반 승용차로는 더 올라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차에서 내려 걸음 반 쉼 반으로 한 시간여를 올라갔다. 돌도 많고 간밤에 내린 비로 젖은 풀잎에 샌들을 신은 발은 금방 젖었고, 날벌레들이 달려들어 눈앞이 어지러웠다.
힘겹게 오르다가 간혹 길 옆에 있는 돌탑을 보았다. 선생님이 길을 만들며 쌓은 돌들이다. 혼자서는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돌이 세워져 있거나 들을 모아서 작은 탑을 만들기도 하셨고, 돌 위에 우리 말을 새겨 넣기도 했다. 선생님은 앞서 걸으며 어떤 특정한 풀을 뽑으셨다. 그 풀은 외국 곡식과 함께 숨어든 일명 '돼지풀'인데 번식이 빠르고 생태계를 교란하는 나쁜 풀이라 보이는 족족 뽑아내야 한다고 하셨다. 그냥 오르기도 숨찬데 80의 고령으로 풀 한 포기에도 신경을 쓰고 계신 모습에 또 한 번 감동했다.
선생님이 살아오신 길을 걷는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간밤에 내린 비로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에 맞춰 뻐꾸기가 노래했다. 푸른 풀잎과 검은 돌들 사이로 보라색 꿀풀과 진주홍 산나리가 피어 있었다. 선생님은 가끔 나무와 풀의 이름을 말해주셨다. 수풀 사이로 붉은 보리수 열매를 가리키며 부처의 깨달음의 과정을 말씀하시기도 했다.
개동님의 기억에 의하면 9년 전에는 20 분 만에 오르셨다는 길을 한 시간이 걸려서 선이골에 도착했다. 20년 전에 심은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고, 통나무와 검은 기왓장으로 지어진 작은 집이 나타났다. 아이들이 뛰어놀았을 마당에는 잡풀이 우거지고 망초 꽃이 하얗게 피어있었다. 간밤에 멧돼지가 다녀갔는지 흙들이 파헤쳐져 있었다.
툇마루 위에 앉은 선생님 뒤로 '가림다 한글 배움터'라는 문패가 보였다. 선생님이 우리 말과 글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스스로 거신 삶의 지향점을 나타내는 작은 문패는 세월의 흔적으로 퇴색이 되었지만 선생님의 등 뒤를 조용히 지키고 있었다. 나무 쟁기와 여러 가지 농기구들도 녹이 슬며 선생님을 맞이했다.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니 선생님의 30년 세월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가림다 한글 38자를 새긴 벽과 상량판에 새긴 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벽에는 선생님이 공부한 책들과 세상에 내놓으신 저서가 빼곡하게 꽂혀있고, 출판기념회 현수막과 언론 기사와 사진과 시화가 걸려있었다. 먼지에 쌓여가는 선생님의 삶을 바라보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울컥해졌다.
서늘한 공기를 마시며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ㄱ(기역)에는 뜻이 있고, 얼이 있는데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ㅏ(아)에도 얼이 있고 뜻이 있는데 아무도 묻지 않는다. 선생님은 어머니(모음) 글자와 아버지(자음) 글자로 이루어진 우리 글을 평생 연구하셨다. 한 글자 속에 갇힌 얼과 뜻을 살리려고 노력하고 우리가 잃어버린 글자를 찾으려 애쓰셨다.
'가림다'는 고조선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문자라고 역사학계와 언어학계에서는 이단이라고 배척하는 상황에서 선생님의 연구는 어령울 수밖에 없었다. '환단고기'를 위서라 하고 다른 어떤 문헌엥서도 찾을 수 없는 글이라고 내버려 두고 있다니, 그 뿌리는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러면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 28 자 중 우리가 잃어버린 네 글자(아래아, 옛 이응, 여린히읗, 반치음)는 왜 되찾으려 하지 않는가.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동안 한 번도 갖지 않았던 한글을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한글날을 기념한다. 일 년에 한 번, 10월 9일 한글날, 기념식에 참석한 사람들, 그것도 단 한 시간 뿐이다. 우리는 한글을 사용하지만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시험을 보고, 성적을 높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한글에는 하늘과 땅과 사람이 담겨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간다. 그 어느 누구도 선생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ㄱ을 쓰지만 ㄱ을 모른다. 그냥 그대로 그처럼 그토록 그답게 그되게 그렇게 그저... ㄱ이 하늘처럼 살라는 뜻과 얼이 담긴 글자라는 걸 아는 시인이 되자. ㅏ를 쓰지만 ㅏ를 모른다. 싹트고 움트고 열리는 비롯음이고 지으심이고 사랑의 씨앗이라는 걸 아는 작가가 되자. 글월 문, 배울 학인 문학은 글을 배우는 학문이 아니다. 글을 통해서 세상을 울리는 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울림글'이다.
울림글상이다. 단순히 글을 잘 쓰는 기술을 뽑는 문학상이 아닌 누군가의 가슴을 덥히고 누군가의 마음을 울리는 글을 뽑는 상이다. 그런 상이어야 한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서 개동님은 다리가 풀려 자리에 잠깐 앉으셨고, 나의 손을 잡고 일어나셨다. 비탈길을 내려오면서 개동님을 부축했다. 선생님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짧게나마 인생과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면서 마음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어려움 앞에서는 스승에게 길을 묻고, 지칠 때는 제자에게 손을 내밀고 함께 걸어가는 길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첫댓글 거의 한 편의 소설을 쓰셨군요.
다녀오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다사함 선생님은 곧 도인입니다.
뜻 깊은 다사함문학상으로 인해 문봄이 더욱 보석처럼 빛날 것입니다.
강 시인님도 누군가의 스승이 되어 갑니다!
참스승을 만난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스승이 되었으면 합니다.
수고 많았어요.
우리 집까지 1시간, 화천읍까지 3시간, 어제는 화천 아들집에서 선생님의 터전인 선이골까지.
특히 사륜구동이 아니면 가기 어려운 선이골 오지마을을 승용차 밑창까지 긁어가며... 대단했어요.
오가고 머무는 동안 모든 비용도 다 부담하고 고맙고 미안했어요. 나도 휴게소에서 커피 한잔 살 돈은 있었는데...언제 다시 갈 일이 있더라도 선이골은 포기할 거에요. ^^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 세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개동님이 계셨기에 다사함을 배울 수 있으니
개동님께 감사합니다.
아름다워요ㆍ모두
돌아오니 많이 아쉽네요.
짧은 시간과 부족한 자신을 탓합니다.
글을 읽는 내내 감동이 함께했습니다.
수고하신 두 분 덕분에 우리 문봄이 더욱 빛나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문봄을 통해서 다사함이 널리 퍼져가기를 바랍니다.
두 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천천히 따라가면서 숙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