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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의 희생 제사와 예배, 그리고 삶
1. 들어가는 말
인간은 지상에 존재한 이후로 계속하여 다양한 신들을 예배하여 왔다. 인류의 역사는 곧 예배의 역사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예배는 그만큼 인간의 종교 생활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예배야말로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가장 소중한 연결고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예배가 없이는 인간과 신 사이의 관계가 형성되지 못한다. 예배를 통하여 인간은 비로소 신을 만나고, 신은 인간의 예배행위를 매개로 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참으로 예배는 인간과 신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는 인류가 지상에 존재해 온 이후로 지금까지 변함없이 적용되는 진리이다. 어느 종교이건 예외가 없다. 예배 없는 종교란 존재하지 않는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세상에서 예배를 배제한 종교라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구약성서는 이 점을 가장 분명하게 확증하는 책이다. 구약성서를 읽어 보면, 이스라엘 주변 세계의 여러 민족들, 곧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이집트 및 시리아-팔레스타인 등지의 거주민들이 오랜 세월 동안 매우 다양한 신들을 섬기고 예배해 왔음을 알 수 있다(삿16:23; 삼상6:4; 왕하3:26~27; 5:17 등). 그들은 대체 어떠한 신들을 섬기고 예배했던 것일까? 이는 그들이 어떠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들의 종교는 자연계 안에 있는 각종 피조물들을 신적인 존재로 보거나 숭배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른바 ‘자연종교’(nature religion)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섬기고 예배하던 신들은 하늘과 땅과 물과 바다와 공기와 해와 달과 별들 및 각종 동식물 등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구약성서가 이러한 자연 숭배 행위를 야웨 유일신 신앙의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기는 하지만, 고대 근동 세계의 무수한 민족들이 그들 나름의 방식을 따라 여러 신들을 섬기고 예배해 왔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이스라엘 민족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구약성서는 민족사의 시작에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야웨 하나님만을 섬기고 예배해야만 했던(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사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공식적인 예배행위는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옮겨 간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가나안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자손의 약속과 땅의 약속을 확인받은 후에 그곳에 제단을 쌓고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창12:7~8).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이끌어내신 후에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각종 율법 규정들을 주셨는데(출 19장 이하), 그중에는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할 것인지를 상세하게 지시하는 제사 규정들(레위기, 특히 1~7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민족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서부터, 그 지역 사람들이 섬기고 예배하던 다른 신들을 마음대로 섬기기 시작했다. 이른바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행위는 사사시대를 거쳐(삿2:11~13, 19; 3:7; 6:25, 28, 30 등) 왕정 시대에까지 이어졌으며(왕상11:4~8; 16:32~33; 18:19; 왕하17:16~17; 21:3, 23:4 등), 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지속되었다(왕하17:24~34). 진실한 마음으로 야웨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이 훨씬 많았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고 마침내는 완전히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나님 아닌 다른 신들을 예배하고 섬긴 것이야말로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해야만 했던 것일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예배는 참으로 많은 구성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예배를 드리기 위한 공간인 성막 또는 성전, 그리고 진설병이나 그룹, 등대, 제단, 향단 등의 각종 예배용 물품들, 예배에 사용되는 노래(시편)와 음악 및 각종 악기들, 성서 본문 읽기와 기도 및 설교 등의 다양한 예배 순서들, 십일조를 포함한 각종 예물들, 예배를 위해 봉사하는 제사장과 레위인 및 성가대 등의 사람들, 예배에 참여하여 희생 제사를 드리는 자들, 안식일이나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등의 각종 절기와 축제 등이 그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여기서 다 다룰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그것들 중의 일부는 오늘날의 예배에서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그것들 모두를 상세하게 다룰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예배의 구성 요소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들의 마음가짐이나 삶의 자세에 있다. 구약성서는 시종일관 이 점을 강조한다. 물론 이러한 강조점은 구약 예배의 핵심을 이루는 동물 희생 제사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시간에는 동물을 제물로 잡아 드리는 희생 제사에 초점을 맞추되,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바람직한 예배의 원형에 해당하는 아벨의 제사를 살핀 후에, 레위기가 규정하는 이스라엘 5대 제사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이어서 이스라엘의 잘못된 예배행위를 우상숭배와 형식주의(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형식에만 치우친 제사 행위)의 측면에서 살피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바람직한 예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종합적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2. 바람직한 예배는 이러한 것이다: 아벨의 제사
구약성서는 어떠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바람직한 예배인지를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힐 필요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그 가장 두렷한 증거를 우리는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을 향한 이상적인 예배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소개된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사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친 인간의 첫 제사 행위라 할 수 있다. 그 중심 내용은 이렇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을 낳는다. 가인은 나중에 커서 땅을 경작하는 자(농업)가 되었고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자(목축업)가 되었다. 이 둘이 어느 날 똑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농사를 짓고 사는 가인은 그가 수확한 농산물, 곧 자신이 경작하던 땅의 열매를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드렸고, 양을 치는 아벨은 그가 가지고 있는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런데 묘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를 물리치시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던 것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히브리어 본문을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히브리어 본문은 흥미롭게도 가인과 아벨 두 사람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를 똑같이 히브리어 ‘ה’(민하)로 표현하고 있다. ‘민하’는 ‘선물’이라는 뜻과 ‘소제’(素祭; cereal offering), ‘봉헌물’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드린 제물이 무엇이었느냐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 항목에서 살필 이스라엘의 제사법에 의하면 곡물로 드리는 제사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위기 2장에 있는 소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스라엘에서는 양이나 염소가 아닌 송아지나 비둘기를 제물로 삼아 드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 레위기에 규정된 번제나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이 이를 잘 보여 준다.
따라서 두 사람의 제사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 곧 가인은 곡물을 드린 까닭에 그의 제사가 안 받아들여진 것이고 아벨은 피를 흘리는 양의 제사를 드린 까닭에 그의 제사가 받아들여진 것이라는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엄밀히 말해서 이러한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속죄 제물로 보는 신약성서의 관점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이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양자 사이에 있는 제물의 차이는 문화권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지 결코 제사의 정당성을 보증해 주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순전히 자신의 노동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예물로 드린 것이었다. 생각해 보라. 농사짓고 사는 가인에게서 어떻게 양의 제사를 바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어찌 땅을 갈고서 그 열매로 사는 가인에게서 무리하게 양이나 염소의 제사를 원하시겠는가? 하나님은 결코 사람의 직업이나 그 직업과 관련된 제물의 종류를 차별하는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짜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창세기 4:4~5절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 본문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으면 다음과 같다.
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면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가인과 그의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이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은 아벨이 바친 제물뿐만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제물보다 먼저 받으신 것은 아벨이라는 한 인격이었다. 그래서 본문은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아벨과 그의 제물)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해 설명하는 히브리서 11:4 본문에 의해서 뒷받침된다. 이 본문은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린 것은 순전히 그가 가진 믿음에 의해서였다고 말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아벨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과 그를 경외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 흠 없고 순전한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달리 말해서 아벨의 제사는 그의 정결한 생활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었다는 얘기다. 따라서 그가 하나님께 드린 제사는 사실 그의 삶 전체를 드리는 제사라고 할 수 있다. 즉 아벨은 생활 속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려고 애썼고, 그러한 삶의 연장선상에서 정성스러운 제사를 드린 것이다. 참으로 그의 제사는 기쁨과 감사가 있는 제사였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였다.
다소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시는 다음의 말씀이 이를 잘 보여 준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가인에게 주어진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역으로 아벨이 평소에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 제사도 바른 것이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은 제사가 공의롭고 바른 삶과 같은 차원에 속한 것임을 강조하는 예언자들의 메시지와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사1:10~17; 호6:6; 암5:21~24; 미6:6~8; 렘7:3~7 등). 제사는 곧 그것을 드리는 자의 삶이요 인격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삶과 인격 전체가 곧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요 예배인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그렇지 못했다. 그에게는 아벨만큼의 성숙한 믿음이 없었던 까닭에, 자연히 그의 제사는 흠 없고 순전한 것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아마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바친 아벨처럼 정성을 기울여 제물을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제사였던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경외하는 마음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자기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당장에 성을 내면서 얼굴색을 바꾼 것에서 그대로 드러난다(창4:5). 만일에 그에게 정말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나 경외심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무슨 이유로 자신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셨는지를 헤아리고서 자신의 잘못된 상황을 개선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러한 반성이 없었다. 도리어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크게 분노할 따름이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제물이 아벨의 경우처럼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제사가 아니라 의무감에서 비롯된 억지 제사였음을 드러낸 셈이 되었다.
또한 가인은 평소의 생활 속에서 올바른 행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는 죄의 유혹에 너무도 쉽게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람이었다. 죄의 지배를 받고 사는 불경건한 사람이었던 것이다(창4:7). 그의 이러한 성향은 마침내 동생 아벨을 시기한 나머지 그를 들에서 쳐서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창4:8). 그는 동생을 죽이고서도 뻔뻔스럽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숨기면서 하나님께 대드는 파렴치한 사람이었다(창4:9). 이러한 그가 하나님께 아무리 좋은 제사를 드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가인이라는 인격과 그의 삶을 받지 않으신 것이고, 당연히 그의 그릇된 인격과 삶으로부터 비롯된 그의 제물까지도 받지 않으신 것이다. 가인의 이러한 모습을 두고서 요한일서 3:12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참조, 유1:11)
3. 이스라엘의 다섯 가지 주요 제사
(1) 레위기 제사법의 배경
구약성서는 여러 군데에서 이스라엘의 제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지만(출20:24; 34:25; 민 15장; 신 12장 등), 그래도 가장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책은 레위기이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레위기는 출애굽 사건과 그 이후에 주어진 시내산 계약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출애굽 사건은 고통에 찬 이스라엘의 신음과 부르짖음에 대한 야웨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출애굽 사건을 묘사하는 출애굽기 2:23~24; 3:7~9; 6:5; 민수기 20:16; 신명기 26:6~8; 느헤미야 9:9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본문들은 한결같이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의 고역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들의 탄식과 신음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생각하시고서 그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고 보고한다.
이스라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결국 압제와 속박 속에서 신음하는 그들을 이집트로부터 ‘내보내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러한 출애굽의 은총은 그들로 하여금 구원과 해방의 하나님을 잘 ‘섬기게’ 하려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3:12, 18; 4:23; 5:1, 3; 7:16; 8:1, 20; 9:1, 13; 10:3 등). 이를 위해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비롯한 각종 율법 규정들을 주셨다. 이것을 우리는 시내산 계약(법)이라 칭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시내산 계약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은총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시내산 계약은 그러기에 의무이기 전에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 감격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할 자발적인 응답의 규정인 셈이다. 레위기도 그중의 하나에 속하는 것으로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예배할 것인지, 곧 하나님께 어떻게 제사를 드리고 또 생활 속에서 성결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책이다. 레위기의 이러한 가르침은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백성이 되며 이방 나라들을 위한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인가(출19:5~6)를 목표로 하고 있다.
(2) 번제(燔祭)
레위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1~10장)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과 관련되며, 둘째 부분(11~27장)은 일상생활 속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 둘은 다음과 같이 세분할 수 있다.
① 제사 제도: 1~7장
② 제사장 위임식: 8~10장
③ 부정함과 그 처리 방법: 11~16장
④ 실제적인 성결을 위한 규정들(성결 법전): 17~26장
⑤ 서원 예물에 관한 규정: 27장
여기서 우리가 취급하고자 하는 것은 이른바 이스라엘의 5대 제사라고 알려진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의 제사들이다(레 1~7장). 이 제사들은 여러 가지 의미들을 가지고 있지만,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하자면 희생 제물을 통해 개인과 백성의 잘못을 용서받고(속죄), 더 나아가서 향기로운 제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계약 관계)를 유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들 주요 제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번제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번제(燔祭)는 그 이름이 뜻하는 바와 같이 남김없이 다 태워서 드리는 제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번제는 전반적인 속죄를 위하는 제사요, 온전한 헌신을 다짐하는 제사라고 할 수 있다. 번제는 그 제물의 내용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뉜다. 소의 번제(1:3~9)와 양이나 염소의 번제(1:10~13) 그리고 비둘기의 번제(1:14~17) 등이 그러하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제물의 내용이 달라져야 한다는 평균의 원칙에 기인한다. 즉, 재산이 아주 많은 사람은 소를 제물로 드리고 중산층 정도에 속하는 사람은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드리며, 그럴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전혀 없는 사람은 비둘기를 제물로 드리도록 규정한 것이다. 세 가지의 번제가 그 절차에 있어서 대동소이하므로 여기서는 그 첫 번째인 소의 번제만을 정리해 보자.
예배자, 곧 헌제자(獻祭者)가 소를 가지고 번제를 드릴 경우에는 일정한 순서를 따르는데, 흥미로운 것은 헌제자와 제사장들이 하는 일이 명확하게 구별된다는 점이다. 먼저 헌제자는 제물의 머리에 안수함으로써(4절) 자신의 죄를 고백함과 동시에(참조, 16:21) 그 제물이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죽을 것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는 자신의 죄를 희생 제물에게 전가(轉嫁)하는 행위이다.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 그는 자신의 죄와 죽음을 대신할 그 제물을 죽이고, 죽은 제물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그릇에 담아 제사장들에게 전달한다(5절). 이어서 그는 희생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그다음에 죽은 제물의 몸을 불에 타기 쉽게 조각을 낸다(6절). 마지막으로 그는 오물이 많이 묻은 제물의 내장과 정강이를 깨끗하게 씻는다(9절). 그렇다면 제사장들은 어떠한 일을 하는가? 그들은 먼저 헌제자가 그릇에 담아 온 제물의 피를 회막 문 앞 사면에 뿌린다(5절). 이어서 그들은 단 위에 불과 나무를 준비하고(7절), 헌제자가 가져온 제물의 조각들과 머리와 기름을 단 위에 놓는다(8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 위에 올려진 모든 것들을 불살라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도록 한다(9절).
이러한 역할 분담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번제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사람은 제사장들이 아니라 헌제자라는 사실이다. 희생 제물을 죽이고 피를 받고 가죽을 벗기고 몸을 토막 내고 내장과 정강이를 씻는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은 헌제자의 몫으로 돌아가고, 제사장들은 그 헌제자가 가져다준 것을 제단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일을 맡는다. 이는 헌제자가 제사장의 제사(예배) 집전을 그냥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써 제사장 집전의 예배에 적극 참여하였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제사는 제사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다 도맡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헌제자의 적극적인 협조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스라엘의 제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헌제자가 주도하는 예배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이 점에서 오늘의 우리는 설교자 중심의 예배 구조를 개선하여 회중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예배 참여를 유도하는 예전 프로그램을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3) 소제와 화목제
번제에 바로 이어서 소개되고 있는 소제(素祭, Cereal/Grain Offering, 히브리어로 ‘민하’)는 다섯 가지 희생 제사들 가운데 유일하게 곡물을 불로 태워 드리는 제사로 야웨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충성을 표현하는 제사이다(2장). ‘민하’가 ‘선물 또는 공물’이라는 뜻을 아울러 가지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소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소제에 쓰이는 재료에는 고운 (밀)가루나 볶은 곡식과 기름, 유향 등이 있다. 소제물에 누룩이나 꿀을 넣는 대신에 소금을 넣는 것은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소제는 예물의 성격에 따라 요리하지 않고 드리는 예물(1~3절)과 요리하여 드리는 예물(4~10절)의 둘로 나누어진다. 요리하여 드리는 소제물은 화덕에 굽는 경우와 철판에 부치는 경우 및 솥에 삶는 경우 등이 세 가지 방식을 사용할 수 있다. 불로 태우고 남은 것은 제사장의 몫으로 돌리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소제의 이러한 특성은 오늘의 예배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본 정신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출애굽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이스라엘의 제사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예배도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구원 은총에 감사하는 태도를 수반해야 하는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는 자야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시50:8~15, 23). 또한 시편 기자가 노래하는 바와 같이, 찬양과 감사야말로 짐승을 잡아 죽이는 희생 제물보다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시69:30~31). 요컨대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일상생활 속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무수한 은총들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 없는 예배는 올바른 예배라고 할 수 없다.
세 번째 제사인 화목제(和睦祭, Peace/Fellowship Offering)는 유일하게 복수형으로 표현되는 제사이다. 히브리어로 ‘שְׁלָמִ֖ים’(슐라밈)인데, 이 말은 우리가 잘 아는 ‘샬롬’의 복수형이다. 따라서 ‘화목제’로 번역되는 ‘슐라밈’을 직역하면 ‘평화들의 제사’ 또는 ‘평화들을 목적으로 하는 제사’라는 뜻이 된다. 이 제사는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의 화해와 친교 및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서원을 위해서,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예배자와 가족을 포함하는 그의 이웃과의 화해와 친교를 위해서 드리는 제사이다(3장). 화목제는 제물의 종류에 따라 소(1~5절), 양(6~11절), 염소(12~17절) 등의 셋으로 나뉜다.
화목제의 제물은 소나 양이나 염소의 내장, 콩팥, 간 등에 있는 기름을 반드시 드리며, 양의 경우에는 기름기가 많은 꼬리 부분을 드린다. 제물의 가슴과 오른쪽 다리는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가며, 나머지는 제사드리는 자가 친지들을 비롯한 이웃들과 나누어 먹는다. 친교의 제사이기 때문에 다섯 제사 중에서 유일하게 공동 식사를 포함하고 있다. 오늘의 예배도 화목제의 이러한 요소를 잘 살려내어야 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화목제가 화해와 친교를 목적으로 하는 제사라는 점에 기초하여, 예배가 끝날 무렵이나 끝난 후에 성도들로 하여금 예배의 연장선상에서 화해와 친교의 순서를 갖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예배 후 친교의 식사를 나누는 것은 좋은 사례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화목제의 실현은 대규모 교회보다는 소규모 교회에서 보다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음이 분명해진다. 대형화를 추구하는 교회는 거기에 알맞은 친교의 프로그램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속죄제와 속건제
속죄제(贖罪祭, לְחַטָּאת-핫타아트)는 야웨의 계명을 위반했을 경우에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이다(4:1~5:13). 속죄제를 위한 제물에는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소나 염소 또는 비둘기나 곡식 가루 등이 있으며, 하나님께 드리고 남은 것을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야만 했다. 물론 제물의 종류는 죄를 지은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달라진다.
① 제사장(4:3~12)- 흠 없는 수송아지
② 이스라엘 온 회중(4:13~21)- 수송아지
③ 이스라엘 회중의 지도자인 족장(4:22~26)- 흠 없는 숫염소
④ 이스라엘 일반 백성(4:27~35)- 흠 없는 암염소
마지막으로 속건제(贖愆祭, לְאָשָׁם-아샴)는 하나님(5:15~19)과 사람(6:1~7)에게 잘못한 일이 있을 경우에 드리는 제사이다(5:14~6:7). 속건제는 범죄 행위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자에게 보상할 것을 요구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속죄제와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한 예로 레위기 5:6은 두 제사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보아 속죄제가 하나님께 대한 죄에 더 많이 치중하고 있다면, 속건제는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위반 행위를 더 많이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보상의 법칙이다. 레위기 6:1~7은 만일에 이웃에게 잘못하여 물질적인 손해를 입혔을 경우에는 반드시 피해액의 오분의 일을 더해 보상할 것을 명하고 있다.
오늘의 예배는 속죄제와 속건제의 이러한 예배 정신을 충실하게 반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잘못을 범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삶이 속죄제와 속건제의 요건에 해당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배자는 누구나 하나님과 사람에게 잘못한 모든 것들을 용서받으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이웃에게 잘못한 일로 인해서 어떤 형태로든 손해–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간에-를 입혔을 때에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것을 충분히 보상해 주어야 한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그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배를 드리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마5:23~24)도 같은 맥락에 속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