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의 나라 한강야경이야기
● 삼국시대의 한강
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한강유역의 득실이 나라의 흥망성쇠와 지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한강유역이 반도의 중앙부를 축으로 관류하는 큰 강인만큼 한반도의 중심무대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군사, 경제, 사회, 외교적 제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 지역이 삼국 쟁패의 주요 과녁이 되었고 한강유역을 점유한 국가는 영토적 확장과 더불어 국가발전의 강력한 터전을 마련한 결과가 되었다. 결국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유역을 번갈아 지배했던 사실을 전 역사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한강유역을 점유하면 나라가 번영하였고 상실하면 쇠퇴하였다.
● 고려시대의 한강
송악의 호족 출신인 왕건은 918년 왕이 되어 고려를 건국하고 935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문종 21년에 한강유역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당시 양주(현 서울)를 남경으로 승격시켜 개경 및 서경과 함께 3대요지가 되었다. 이후 고려말 1382년(우왕 8년) 9월에 한양천도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왜군의 창궐, 대명관계의 복잡성 등 정치,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고 풍수지리설이 성행하자 도읍이 불길하다 하여 이듬해 2월에 개성으로 돌아왔다.
고려왕조 마지막 왕인 공양왕 때(1390년 9월) 다시 한양천도를 단행하였으나 한양천도가 있은 후 큰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일어나고, 인축이 동사했으며 신도의 문화부에 큰 범이 뛰어들어 사람을 물어가는 등 불길한 일이 자주 발생하자 1391년 2월에 다시 개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고려로서의 한양천도 문제는 종말이 맺어지고 그 완전한 실현은 1394년(조선태조 3년) 이성계에 의해 이루어 졌다.
● 조선시대의 한강
태조 이성계는 즉위 후 불과 16일 만인 1392년 8월 3일에 도평의사사에게 한양천도를 명하여 태조3년(1394년) 10월 25일(음력) 천도를 실현하였다. 한양천도의 배경은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주지하는 바와 같이 풍수지리설에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는 점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개경의 지덕이 쇠패한 땅이라 망국의 수도를 하루라도 빨리 피하려는 미신적 사상인 음양지리(풍수)적 사상에 영향 받아 천도를 서둘렀다는 지적이다.
둘째, 태조 이성계 자신이 왕위 획득과 관련되는 행위에 대한 가책과 개성의 왕씨를 중심으로 한 구가세족의 반발에 대처할 필요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정황은 태조 이성계로 하여금 천도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게 하였다.
셋째, 한강을 끼고 한양의 인문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을 들 수 있다. 한 왕조가 도읍지를 선택할 때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선 지리적인 위치를 고려하고 있음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양은 지세가 훌륭하고 군사적인 방위에 있어서 천연의 요새지였다.
이러한 지세의 훌륭함은 일찍이 이중환도 그의 「택리지」에서 한양의 진산인 삼각산이 수려하고 맑기가 나라 안에서는 사산중의 하나라고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전근대사회에 있어서 국가재정의 운용을 위한 수입은 거의 농업생산물에 의지하고 있었다. 농업경제가 사회의 기반을 이루고 상태에서는 현물을 조세로 수취하였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세곡의 운송에 큰 관심을 가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도로망을 포함하여 육상교통 수단이 별로 발달하지 못했던 까닭에 조세는 주로 대량수송이 용이한 조운을 통해 운송되었다. 그러므로 도읍지로서의 위치는 수륙의 교통이 편리한 곳에 있어야 함은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지리적 위치 등을 고려하여 선택한 한강을 끼고 있는 한양은 천도 때부터 조운의 발전은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전국의 세곡이 조운을 통하여 한강에 모였고, 한양에 거주하는 지주층이 지방농장에서 거두어들인 소작도 대부분 선박으로 이곳에 운반되었다.
도성 내 일반 생활품도 그 양이 많은 것은 대부분은 선박으로 한강을 통하여 공급되었다. 그리고 조선후기에 이르러 세제개혁과 아울러 대동법이 실시됨에 따라 한강은 더욱 중요성을 더하게 되었으며, 호남을 비롯하여 충청도 등지에서 수납되는 대동미는 조운선을 통하여 한강으로 수송되었다.
따라서 한강은 백관의 녹봉과 국가재원을 충당시켜 보급로가 되었다.
● 근세의 한강
한강변에 입주했던 최초의 외국인은 프랑스인 신부들이었는데 1887년 현 원효로4가 1번지의 6,500평의 땅을 구입하여 신학교를 건축하고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한강에 증기선이 최초로 운항한 것은 1888년이었는데, 그 뒤 1890년 독일계와 미국계의 증기선이 취항하게 되었고, 이어 중국인 거상 동순태가 100톤짜리 증기선을 들여와 용산과 인천사이를 취항하기 이르렀다.
1899년 착공한 한강철교 공사는 다음해인 1900년에 완공,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철교가 놓여졌다. 그리고 길이 26마일의 서울역에서 인천을 잇는 경인철도가 1900년에 개통되었다.
한강대교는 1900년에 건설된 한강철교 이후 최초로 한강을 가로지르는 인도교로 건설된 것이다. 이 때문에 개통 초기에는 제1한강교라고 불리었다. 1912년에 교량가설계획을 수립한 후 1917년 10월에 준공되었다.
1925년 7월의 을축년 대홍수로 중지도에서 용산쪽으로 건설되었던 소교가 유실되었다. 1929년 9월에 소교를 재개통하였고 폭은 18m로 확장되었다. 너비 36.6m, 길이 841.5m이고 교량 중간에 중지도가 있는 한강상 최초의 도로교이다.
한강에 큰 홍수가 있었던 때는 1912년과 1920년, 1925년의 세 차례였다,. 그 가운데 가장 큰 피해를 낸 것은 1925년(을축)대홍수로 7월 15일에서 18일까지 4일간에 걸쳐 400에서 500밀리미터의 높은 강수량을 보였다.
노도와 같은 홍수물은 한강 제방을 무너뜨리고 순식간에 용산, 남대문 앞 까지 일대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현재 올림픽 주경기장이 위치한 잠실동과 신천동은 부리도(浮里島)라 불리는 하중도(河中島)였다. 이 섬은 오랜 세월 동안 흐름이 약간씩 북 서류하게 됨으로써 생겨난 섬이다.
1970년 4월, 북쪽 하도를 넓게 하고 남쪽의 하천을 폐쇄함으로서 하중도를 육지화 하는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대역사는 100만 평이 넘는 공유 수면 매립공사가 주축이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그 주변 340만평의 광역 구획정리사업이 동시에 실시되어 1975년에 마무리 되었다.
이개발로 인해 남류 하던 흐름이 폐쇄되면서 만들어진 호수가 하적호(河跡湖)인 석촌 호수이다.
● 한강과 임진왜란
선조 25년(1592년) 4월 14일 왜장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이 이끄는 20만의 대군이 정명가도를 이유로 조선침공을 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군은 한강을 쉽게 도강하여 북진하였으나, 그 뒤 원호, 변응성 등의 남한강 전투승리는 적의 보급로와 진출로를 차단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권율 장군의 행주산성에서의 승전을 계기로 왜적을 퇴각의 궁지로 몰아넣어 관, 의병으로 하여금 각지에서 반격 할 수 있는 실마리를 만들어 주었다. 결국 벽제관 싸움에서 패배하여 전의를 상실한 명과 행주산성에서 패배하여 식량부족과 전쟁에 지친 왜병은 한강상에서 강화회담 후 왜군은 철수하였다.
● 일제침략과 한강
일제항쟁기의 한강은 침략적 위치로서의 중요성이 높이 평가되었으므로 수로의 기능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한일수호조약에 의하여 원산이 개항되고, 인천항은 1880년 12월에 개항키로 결정한 후 1882년 4월에 개항이 되었다. 개항과 함께 근대적 교통로의 필요성으로 인하여 경인선 철도가설공사는 1990년 7월 5일에 완공되고, 경부선 복선화 계획과 관련하여 제2철교는 1911년 7월에 착수 1912년 9월에 준공되었다.
또한, 만주사변 이후 물자의 수송거리의 단축을 위해 인도교 근처에 한강철교가 1944년에 완공되었다. 한강인도교는 1916년 중앙차도 4.5m, 좌우보도 각 1.6m로 기공하였으나 처음 가설한 인도교는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어 1930년대를 전후해서 급증하는 교통량의 해소방법으로 광진교를 1934년 8월에 착공하여 1936년 10월에 완공함으로써 인도교와 함께 한강을 도보로 건널 수 있는 2번째 다리가 되었다.
● 한국전쟁과 한강
한강은 그 길이가 514㎞에 달하는 대하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사에서 한강선이라고 하는 지역에는 통상 양화교에서 광진교 사이의 24㎞에 이르는 한강변 일대가 포함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그 작전의 성패여부에 따라서 전세가 좌우되었던 까닭에 이 지역을 특히 한강선 이라고 일컫고 있는 것이다.
한강선은 대체로 하상폭 1~1.5㎞에 유수폭이 300~1,000m이며, 수심은 2~5m로 도하장비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강을 건널 수가 없다. 따라서 한강선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수도권 일원에서 가장 큰 천연장애물로서 중요시되고 있다. 한국전쟁당시 한강을 건너는 교통수단은 나루터에서 배를 이용하거나 한강위에 가설된 다리를 통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 나루터
나루터는 서강 - 율도의 가중리나루와 마포 - 여의도의 마포나루, 서빙고에서 잠원동으로 건너는 서빙고나루와 한남동으로부터 신사리로 가는 한강나루, 그리고 뚝섬에서 압구정동으로 통하는 뚝섬나루 및 광장동 - 천호리의 광나루등 6개소가 전술적인 이용도가 높은 여건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 나루터에는 각각 몇 척씩의 작은 부선과 목선이 있었지만, 한국전쟁 당시에는 대부분 국군과 서울 시민들이 철수 또는 피난할 때에 이용하여 남쪽 강변에 버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북쪽에서는 많은 병력이 동시에 강을 건너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한강나루에는 차량을 도하시키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대부대의 도하작전이 가능하였다.
한강선에 가설된 교량은 한강대교와 광진교의 두 개의 인도교와 경인선(상행 및 하행)의 단선철교, 그리고 경부선의 복선철교 등 모두 다섯 개의 교량이 있어서 강을 건너는 주된 교통수단이 되고 있었다.
이 교량들은 1950년 6월 28일 이른 새벽에 국군 공병부대가 폭파시켰다. 한강 9·28 수복이후 한강대교의 파괴된 경간에 한강가교 설치공사를 착수하여 같은 해 10월 19일에 개통식이 거행되어 시민교통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고 10월 한강가교의 확장과 보도 증설공사가 시공되어 1957년 3월 4일 한강대교 복구공사가 시작되었고 그해 12월 12일에 준공되었다. 결국 한강대교는 한국전쟁 당시 작전목적으로 국군에 의하여 폭파된 지 장장 7년 9개월 만에 한강을 드나드는 시민들의 교통수단으로 다시금 그 기능을 회복하게 되었다.
● 옛 이름
한사군과 삼국시대 초기의 한강은 한반도의 중간 허리부분을 띠처럼 둘렀다는 뜻에서 '대수' 라 불렀고, 고구려에서는 '아리수' 라 했으며, 백제는 '욱리하' 라고 했다. 또 신라는 상류를 '이하', 하류를 '왕봉하' 라고 불렀다. 한편 '삼국사기' '신라편' 지리지에는 한강을 '한산하' 또는 '북독' 이라고도 했다.
고려 때는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 내리는 긴 강이란 뜻으로 '열수' 라고 불렀으며, 모래가 많아 '사평도' 또는 '사리진' 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경강' 이라고도 불렀으며 그 이전에 백제가 동진과 교통하여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한강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쳐서 '한수'라 불렀고, 그 뒤부터 옛 이름은 차츰 사라지고 '한수' 또는 '한강' 이라고만 불리어졌다.
한편 한강은 본래 우리말 '한가람'에서 비롯된 말로 '한'은 '크다, 넓다, 길다'는 의미이며, '가람'은 강의 고어로 '크고 넓은 강' 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 한강의 발원지
● 남한강 유역
한강의 본류인 남한강은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검용소에서 발원한 하천으로서 삼척시 하장면 부근에서 골지천의 이름으로 북류하다가 광동댐을 지나 석병산(1,010m)에서 발원한 임계천과 합류해 서류, 정선군 북면 여량리에서 황병산(1,407m)을 발원지로 한 송천과 만나 조양강이 되어 흐르다가, 오대천과 합류한 후 남류하여 동강이 된다.
동강은 영월읍에서 평창강과 주천강이 합류해 만들어진 서강과 만난 후 흐르다가 충주시에서 달천, 강원도 원주시와 경기도 여주군 부근에서 섬강·청미천과 만난 후 양화천·복하천·흑천 등의 지류를 합친 후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만난다.
● 북한강 유역
총연장 317km, 유역면적 10,834㎢의 하천으로 금강산에서 발원한 금강천이 강원도 철원군 원동면에서 금성천을 합친 후 북한강이라는 이름으로 화천군을 거쳐 남류하다가 소양강과 춘천에서 만난다.
소양강은 인제군 서화면에서 발원한 인제천이 인북천이라는 이름으로 남류하다가 설악산에서 발원한 북천과 인제읍에서 합쳐진 후 홍천군 내면에서 발원한 내린천과 합류되어 춘천으로 흐르는 강을 말한다.
이후 북한강은 경기도 가평군에서 홍천군 서석면에서 발원한 홍천강과 합류한 뒤 서류하다가 외서면 청평리에서 조종천을 합친 후 양평군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합류해 한강을 이룬다.
북한강의 풍부한 유량은 댐 건설에 유리한 조건이 되어 소양강 다목적댐을 비롯해 화천·춘천·의암·청평댐이 건설되었다. 북한강 유역 내 가장 큰 거점도시인 춘천은 원래 북한강 가항종점에 있어서 조선초기에는 소양강창을 두고 북한강 유역의 세곡을 수집·운반하고 물자 집산지를 이루었으나 일제 말 청평댐 건설로 배의 운항은 막혔다.
● 팔당 아래 유역
팔당 하류유역이란 양수리에서 부터 한강이 임진강과 합류되는 지점까지의 구간을 말한다.
이 지역에는 위로부터 왕숙천, 성내천, 중랑천, 탄천, 홍제천, 안양천, 곡릉천 등 많은 하천이 한강으로 유입되고 있으며, 경기도 남양주시, 하남시, 구리시와 서울특별시, 경기도 고양시 등이 자리하고 있다.
과거 팔당 하류의 한강에는 한강 상류로부터 운반된 토사가 퇴적되어 형성된 양수리 하중도, 당정·미사 하중도, 토평·석도 하중도, 잠실 하중도, 뚝섬, 신사·반포 하중도, 여의도, 난지도, 능곡 하중도, 신평·노고 하중도 등의 많은 하중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하중도는 한강종합개발사업을 비롯한 개발사업으로 인해 유로가 변경되어 여의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육화(陸化)되거나 골재 채취로 인해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한강의 어제와 오늘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발간, 200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