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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이상한 사제관계(師弟關係) [1] 최근 들어 유청풍과 고혜원은 막연산에서 자주 만나게 되었다. 오늘도 그녀는 그가 멧돼지를 굽던 계곡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청풍이 앉기가 무섭게 그녀는 질문부터 던졌다. "안색이 왜 그러니?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거야?" 유청풍은 사곡 쪽을 가리키며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대략 말해 주었 다. "환자들을 돌봐주던 분이 돌아가셔서......." 물론 그는 단궐의 신상에 관한 사항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 은 단궐이 비밀로 하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고혜원은 사곡의 실정을 알고 난 이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런 상태로 가다가는 환자들이 다 죽을지도 몰라. 역질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다른 병을 치료해 주면 좋잖아." "뾰족한 방법이 없어. 의원은 아무도 오려고 하지 않으니......." "그럼 약을 사다주면 되지?" 유청풍은 심각한 안색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 많은 치료비를 무슨 수로 감당하겠어?" 일순 고혜원의 눈에서 묘한 빛이 흘러 나왔다.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 유청풍은 무슨 말인가 싶어 마주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미 심사숙 고를 마친 듯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네가 내 요리사부가 되는 거야. 만약 이 계획이 성공할 경우 사곡 의 치료비를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유청풍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집안 어른들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걸?" 고혜원은 상체를 기울이더니 그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들이댔다. "할머니가 어머니를 야단치시는 것을 차마 못 보겠어. 그래서 내가 만두를 주문할 테니… 너는 우리 할머니를 만난 다음… 그러면 내가 응해 줄게. 어때?" 마침내 유청풍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가사(家事)를 배우기 위한 것이라면 통할 듯도 싶은데?" 고혜원은 모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호호! 요리사부, 고마워!" 그녀는 고집깨나 있어 보임직한 유청풍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하지만 그는 시종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아직 좋아 하기는 일러. 결과를 장담할 수 없으니......." 고혜원은 그의 손목을 잡은 채 힘껏 흔들었다. "염려 마. 잘 될 테니까." 유청풍은 슬며시 손을 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짐짓 불만 스러운 듯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좋은 일을 한 것은 같은데 어쩐지 서운한데......?" "뭐가 말이야?" "좀... 불공평하지 않아? 명색이 무예의 고수인 내가 연하의 남자 를 사부로 모신다는 게 말이야." 유청풍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싫으면 취소해도 상관없어." 고혜원은 정색을 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으음, 그런 뜻이 아니라… 나도 네 사부가 되면 안 될까?" 이때 그녀는 내심 매우 놀라고 있었다. '사혈(死穴)이 이동하는구나! 과연... 단궐의 전인이 맞아.' 방금 그녀는 두 번의 신체 접촉을 통하여 그의 사혈을 짚어 보았다 . 물론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고통만 느낄 정도로 진기 를 흘려 보았다. 하지만 유청풍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 이는 그가 단궐의 뇌운진기를 보유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혈도 가 이동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유청풍은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한 채 의아스러워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무공을 가르쳐 주면 우리는 서로 사부도 되고, 제자도 되는 공평한 입장이 되잖아?" 유청풍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으음, 이번 기회에 조금 배워둘까? 무공만 익혔더라면 검혈 사부 도 목숨을 잃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목숨처럼 여기는 남의 절기를 수련한다니, 그건 말도 안돼." 그녀는 나름대로 견해를 피력했다. "이번 기회에 무림의 폐쇄적인 전통을 본보기로 고치는 거야. 무공 은 전수과정에서 발전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오늘날 소림사(少林寺)를 비롯한 소위 팔대 명문정파가 퇴보한 이 유는 그들의 독선적인 아집에 있었다. 그들은 원로들과 좋은 관계를 맺은 자에게만 절기를 전수함으로써 스스로 한계점을 그은 것이었다. 유청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문제가 없지." 고혜원은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성공이야. 환자들도 구하고 동시에 사부의 명도 이행할 수 있게 됐어. 이제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원인만 밝혀내면 될 거야.' 그때였다. "흐흐흐! 경치가 아주 좋은데?" "......!" 돌연 음침한 음성이 두 사람을 긴장시켰다. 십여 장쯤 떨어진 바위 위. 붉은 경장에 하얀 피풍(皮風)을 두른 사십대 중반 가량의 장한이 시뻘건 안광을 발하며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핏빛 도끼는 절로 전율을 느끼게 만들었다. 손잡이가 무려 석 자나 되는 그 도끼는 보통 것보다 열 배나 컸으 며 밑 부분이 앞뒤로 한 뼘 정도 위로 구부러져 섬뜩한 분위기를 자 아냈다. 더구나 그의 좌우에는 음험한 인상의 이십여 명이 반월형으로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피풍에는 단검을 입에 문 나녀(裸女)가 다리를 벌리고 앉은 채 빨간 장미꽃으로 치부만을 가린 야릇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고혜원은 그들의 피풍을 힐끗 바라보았다. '저것이 그 악랄한 탐화몽포(耽花夢抱)의 상징화구나! 그렇다면 저 들은......?' 그녀는 벌떡 일어나며 눈을 부릅떴다. "네가 바로 귀홍부(鬼紅斧) 엽기(葉騏)냐?" 사십대 중반의 장한, 즉 귀홍부 엽기는 비릿한 눈초리로 그녀를 쏘 아보며 반문했다. "그래도 안목은 있군. 그래, 날 아느냐?" 그의 음성에는 자만심이 가득 배어 있었다. 고혜원은 아미를 모았 다. "수많은 사람을 인간시장에 팔아 넘긴 네놈을 누가 모르겠느냐?" 옆에 있던 유청풍은 엽기가 출현한 까닭을 눈치채고 있었다. '원승안을 죽인 보복을 하기 위해 나타났구나.' 엽기도 유청풍을 힐끗 흘겨보았다. 그의 눈이 반짝 빛을 발하고 있 었다. '이제 보니 저 녀석이 아니라 바로 저 계집 때문이었군. 대통좌(大 統佐)가 날 이리로 보낸 이유는.......' 탐화몽포란 여인들을 납치하거나 매매하는 정해단의 전위행동조직 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황후(皇后)도 업어 갈 정도로 교묘한 솜씨를 지닌 것으로 유명했다. 인물만 반반하다면 상대가 어떤 신분의 여인이라 해도 어 김없이 납치해 버리는 무서운 조직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납치한 여인을 윤간(輪姦)하여 반항의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은 다음 인간시장으로 팔아 넘기는 흉악스런 자들이기 도 했다. 얼마 전 단궐에게 죽음을 당한 원승안 일당은 바로 이들의 바람잡 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평소 탐화몽포는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나 정보를 알 려 줄 하부조직이 몰살당하자 복수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었다. 더불 어 그들은 고혜원을 납치하기로 마음 먹고 있었다. 엽기는 자신의 수뇌인 대통좌의 얼굴조차 모른 채 명령을 이행하는 중이었다. 고혜원은 전신 진기를 잔뜩 끌어올렸다. "잘 걸렸다! 그렇지 않아도 악명 높은 정해단을 소탕할 작정이었는 데......." 엽기는 고혜원의 신경을 슬쩍 건드렸다. "본 개봉총령(開封總領)의 뜻에 잘 따르면 스무 명의 첩 가운데 으 뜸으로 삼으마. 하나 반항하면 데리고 놀다가 팔아치울 테다!" 그는 그녀의 미모에 혹했음인지, 아니면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생 각해서인지 자신의 직책을 스스럼없이 밝혔다. 휙! 고혜원은 벼락같이 신형을 솟구쳤다. "받아라. 정해단의 개야!" 순간 탐화몽포 다섯 명이 땅을 박차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 지만 고혜원은 이미 사문의 절기인 난향비천(蘭香飛天)을 시전한 상 태였다. 그녀가 손을 휘저을 때마다 쌍륜화극은 윙윙! 하는 파공성을 내며 허공 가득 눈부신 꽃송이를 그려냈다. 그것은 난향비천의 제 일초식인 화향만개(花香滿開)였다. 찬란한 꽃송이들은 거대한 회돌이를 형성하며 탐화몽포의 조직원들 이 발출한 검기를 뚫고 맹렬히 파고들었다. "케에에엑!" 순간 몇몇 장한들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썩은 나뭇가지마냥 날아가 떨어졌다. 고혜원은 허공에서 한번 구른 후 교구를 쭉 뻗으며 그대로 엽기를 향해 쏘아갔다. 엽기는 쌍륜화극이 막 가슴을 파고들 찰나 상체를 비틀며 귀홍부로 재빨리 열십자를 그었다. "흐흐! 함부로 날뛰지 마라, 계집애야!" 슈슈슈슈슉! 일순 수십 개로 변한 귀홍부는 쌍륜화극이 만든 꽃송이를 모조리 잘라버렸다. 두 개의 강기가 부딪치자마자 쨍강! 하는 소리와 동시에 파란 불똥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방금 엽기는 귀홍삼식(鬼紅三式) 가운데 제 일초식 귀홍단명(鬼紅 斷命)을 펼쳐낸 것이었다. 허공에 뜬 고혜원은 부강(斧 )에 막혀 공격이 좌절되자 다시 유청 풍의 옆으로 내려섰다. 이 일합의 결과 두 사람의 실력은 막상막하임 이 입증되었다. 엽기는 거만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서하경(徐霞瓊)을 믿고 건방떠는 모양이다만, 아마 무림오절(武林 五絶)이 몽땅 몰려와도 소용없을 거다!" 무림오절이란 무림의 하늘 아래 가장 강하다는 다섯 명의 고수를 말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았다. 도법(刀法)의 일인자 도절(刀絶) 위강(偉剛). 기관학(機關學)의 대가인 공절(空絶) 혁련달(赫連達). 의술(醫術)의 달인인 의절(醫絶) 홍오간(洪悟懇). 호색(好色)으로 유명한 색절(色絶) 모염정(毛艶湞). 고고한 미인(美人)으로 널리 알려진 화절(畵絶) 서하경. 그 중에서 화절 서하경은 바로 고혜원의 사부였다. 당금 무림은 바 로 이들 오 인의 절대고수, 즉 무림오절이 좌지우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혜원은 냉랭한 눈초리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네놈이 그런 말을 내뱉고도 살줄 알았느냐?" 하지만 정작 말을 그렇게 해놓고도 그녀는 쉽사리 달려들지 못했다 . 그것은 무림오절을 우습게 여기는 엽기의 실력이 만만치 않을 뿐더 러, 그녀가 공격하는 사이에 다른 자들이 유청풍을 해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한편 엽기는 그녀의 심중을 꿰뚫어 본 듯 수하들에게 눈짓을 보냈 다. "저 놈부터 죽이자!" 이십여 명의 탐화몽포가 유청풍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 순 간 엽기도 신형을 날리며 고혜원에게 무지막지하게 도끼를 휘둘렀다. "예쁜 계집, 순순히 내 품에 안기거라." 위이잉! 시뻘건 도끼가 허공을 메우는 찰나 고혜원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 가더니 유청풍을 왼팔로 감아 안은 채 대각선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탐화몽포 십여 명이 장검을 번뜩이며 삽시간에 그녀를 에워 쌌다. 고혜원은 신형을 팽그르르 돌리더니 우수로 열십자를 그어댔다 . "차아앗!" 카라라락! 쌍륜화극의 톱니바퀴가 장검과 충돌하자마자 탐화몽포 단원들의 검 은 풍화된 돌마냥 우수수 부스러졌다. 놀랍게도 그 조각들은 곧장 반 대 방향으로 퉁겨나가 그들의 목과 흉부에 파편처럼 박혀 버렸다. "끄아악......!" 피보라를 일으킨 일곱 명이 나가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엽기가 날 린 장력이 그만 유청풍의 등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말았다. 펑! "크악!" 유청풍은 등이 갈라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그는 울컥 한 사발이나 되는 선혈을 주르륵 쏟아냈다. 만약 단궐이 전수한 일성의 뇌운진기를 보유하지 않았거나 고혜원이 조금만 느렸 다면 그는 즉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엽기는 멈추지 않고 재차 공격을 가했다. "귀홍탈망(鬼紅奪亡)!" 이번에는 시퍼런 도끼 날이 유청풍의 목을 쳐왔다. 고혜원은 다급 히 제 이초식 설화벽천(雪花壁天)을 펼쳤다. 그녀는 쌍륜화극으로 강기의 벽을 만들어 귀홍부를 막아내는 한편 발 밑으로 날아드는 탐화몽포 단원들의 검을 박차고 신형을 허공으로 솟구쳤다. "야앗! 번화행류!" 한 줄기 섬광과 함께 그녀는 유청풍을 안은 채 계곡 아래로 쏜살같 이 날아갔다. "절대 놓치지 마라!" 엽기가 고함쳤다. 그와 탐화몽포 단원들은 일제히 신형을 날려 추 격해갔다. 고요했던 막연산은 돌연 살벌한 추격전이 전개되었다. 고혜원은 비록 유청풍을 안고 있었으나 부근의 지리를 훤히 꿰고 있어 숲과 바위, 할 것 없이 협소한 지형을 택하여 추격을 교묘히 벗 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귓전을 울리는 파공성으로 보건대 적들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따라 오는 것 같았다. 한편 유청풍은 뇌운진기 덕분에 이미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달려왔을까? 두 갈래 길이 나타나자 고혜원은 그를 내려놓은 다급히 말했다. "여기서 헤어지자. 저들은 아마 날 노릴 거야." 유청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너도 조심해." 고혜원은 우측으로 난 산길을 택해 달려갔다. 유청풍은 그녀와 반 대 방향으로 달렸다. 그들이 헤어진 직후, 옷자락 날리는 소리와 함께 추격자들이 나타 났다. 엽기는 두 갈래 길을 살펴보더니 명을 내렸다. "몇 명은 산길로 가라. 나머지는 날 따라오고!" 그들은 절반으로 나누어 무섭게 달려갔다. 엽기를 포함한 몇몇 탐 화몽포의 단원들은 유청풍이 달아난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2] 유청풍은 마을을 오 리 정도 남겨 둔 지점까지 달려 왔다. 그의 숨 은 턱에 닿고 있었다. 그러나 채 숨도 돌리기 전 그는 눈을 크게 떠야 했다. "헉! 벌써 쫓아오다니......." 과연 삼십여 장 앞에 붉은 피풍 차림의 탐화몽포 단원들이 장검을 번뜩이며 달려오고 있었다. 엽기를 포함한 그들은 먼저 지름길로 달 려와 퇴로를 차단한 것이었다. 비록 이곳은 마을과 가깝기는 해도 평소 사람의 왕래가 드문 곳이 었다. 마침내 엽기와 여섯 명의 수하들은 유청풍을 빙 둘러쌌다. 엽기는 흉소를 흘리며 다가섰다. "흐흐! 잘 알 테지? 영원히 우리 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그는 여유만만한 모습이었다. 고혜원이 없는 이상 누가 손을 쓰건 유청풍을 죽이는 건 손바닥 뒤 집는 일보다 쉽다고 여긴 것이었다. 그는 귀홍부를 사용할 필요도 없 다는 듯 우수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자, 이제 방해자가 어떻게 되는지 네 시체로 본보기를 삼아주마!" 유청풍은 분노에 찬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내 죽는 것은 무섭지 않다만, 너희들의 악행을 저지하지 못하는 게 한스럽구나!" 일순 그의 머리 속에는 사곡 사람들의 영상이 스쳐지나갔다. 엽기는 얼굴 가득 비웃음을 띄웠다. "어린 놈이 주제를 모르고 함부로 날뛰니 제 명대로 못 사는 거다. " 그는 진기를 잔뜩 모은 우장을 쭉 뻗으려다 멈칫했다. '억! 저 자는......?' 이때 유청풍의 동공 속에 빠르게 움직이는 영상이 비치고 있었다. 코 밑에 팔자수염을 기른 오십대 중반 가량의 인물이 느릿하게 움 직이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이 장 옆에 와서 멈추고 있었다. 한데 놀 랍게도 탐화몽포의 단원들이 썩은 수숫대처럼 일제히 쓰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엽기는 경악하며 우장을 막 뻗는 순간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등인탁(鄧麟卓)이 왜 우리 일에......?' 그의 내심 속의 의문이었다. 하나 미처 그 까닭을 알기도 전에 그 는 사혈을 짚여 절명하고 말았다. 팔자수염의 인물, 즉 등인탁은 시신을 내려보며 그 해답을 내놓고 있었다. '네가 죽어야 내 계획이 달성된단 말이다.' 한편 유청풍은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비등원주(飛騰院主)가......? 대... 대단하구나. 아무리 방 심했다고 해도 엽기 일당을 한수에 죽이다니.......' 그는 엽기가 방심하다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누가 봐도 그렇게 느낄 정도로 등인탁의 손속은 신속했다. 비등원은 개봉부에 있는 장원으로 등인탁은 그 장원의 원주였다. 그는 독자(獨子)와 함께 살고 있었다. 세인들은 그가 아홉 자짜리 장창(長槍)을 귀신처럼 구사한다하여 섬안비창(閃眼飛槍)이란 별호를 붙여 주었다. 하나 지난 수십 년 이 래 그가 장창을 사용하는 광경을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등인탁 은 늘 비등원에서만 지낼 뿐 외출하는 일조차 극히 드물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유청풍은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저는 유청풍이라 합니다.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먼 발치에서 등인탁을 몇 번 본 것이 전부였다. 따라서 그는 등인탁이 자신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등인탁은 점잖게 수염을 쓰다듬었다. "조심하거라." 바로 그때 청아한 교음이 들려왔다. "다행이군요! 원주께서 구해 주셔서......." 반가운 여운을 동반하며 착지한 인영은 바로 고혜원이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쌍륜화극을 허리에 찼다. 등인탁은 태연히 손을 내저었다. "뭘, 별것도 아닌 것을......." 비등원은 고혜원의 집인 와호장과 도로 하나를 격하여 마주보고 있 었다. 고혜원은 자신이 무공을 배우고 귀가 한 이후 한 번도 그를 찾아가 지 않았었다. 그래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진작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항상 마음에 걸렸어요 ." 등인탁은 소탈하게 웃었다. "이렇게 만났으면 된 거지. 그새 어엿한 고수로 변했구먼?" "호호! 아직 멀었어요, 한데 산책 나오셨나 보죠?" "허허허! 오늘 따라 이상하게 좀이 쑤시지 뭐냐?" 고혜원은 그의 속셈을 모른 채 마냥 고마워했다. "역시, 고인은 다르셔요." 노련한 등인탁은 점잖게 손을 저었다. "어허, 고인은 무슨... 앞으로 만나면 부담없이 얘기를 나누겠군. 자, 젊은 사람들 시간을 뺏으면 안 되지." 유청풍과 고혜원은 나란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희들은 먼저 가겠어요." 그들이 멀리 사라지자 등인탁은 의구심에 찬 눈빛을 발했다. '성깔 센 저 계집아이가 어째서 하찮은 녀석과 어울릴까?' 그가 엽기를 죽인 이유는 고혜원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하기 위함이 었다. 기실 그는 명문 출신인 고혜원이 하찮은 만두집 소년과 어울리 는 이유가 궁금했기에 그 내막을 알아보려 했던 것이었다. 그는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다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부러뜨렸다. 이어 나뭇가지를 거꾸로 땅에 꽂아놓았다. 그는 힐끗 나뭇가지를 확인한 후 휘적휘적 걸어 산을 내려갔다. 쑥꾹! 쑥꾹! 막연산에는 산새들 울음소리만 이따금 들릴 뿐 다시 적막이 감돌았 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지게를 멘 사십대 가량의 장한이 나타났다. 그는 등인탁이 부 러뜨려 바닥에 꽂아놓은 나뭇가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 솟구쳤다. '실패라......? 으음, 예상 밖이군. 어쨌든 대통좌가 명을 내렸으 니 조직을 새로 구성해야겠구나.' 그는 낫으로 나무줄기를 두 번 긁고는 조용히 사라졌다. 그 흔적은 여간 눈여겨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표식이었다. 그것은 바로 명령을 접수했다는 표기였다. 이처럼 명령자의 얼굴을 모른 채 비대면(不對面) 상태로 상황을 주 고받는 장소를 강호에서는 무인연락소(無人連絡所)라 불렀다. [3] 개봉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들은 모두 고부택(高腐宅)에 몰려 있었 다. 하남성 사람들 말에 의하면 고부택은 고관부호댁(高官富豪宅)의 속 어라는 것이다. 개봉은 대도(大都)라 빈부(貧富)의 격차가 심했다. 화려한 부호들 이 있는가 하면 나날이 끼니걱정을 해야할 극빈층도 부지기수였다. 대부분의 빈민들은 한데 몰려 살았는데 그 거리는 늘 너저분했다. 반면 개울 하나 건너에 있는 곳은 고루거각(高樓巨閣)이 즐비했다. 그곳을 이름하여 고부택이라 불렀다. 빈민촌에서 맞은편에 있는 고부택을 바라보면 제일 먼저 눈에 뜨이 는 곳이 와호장과 비등원이었다. 와호장은 다섯 개의 가산(假山)과 세 개의 인공호수, 그리고 그 사 이로 하늘을 찌르는 전각들이 화려함을 자랑했다. 이런 와호장이 유명한 이유는 건물의 규모보다는 장대부인 때문이 었다. 사람들은 장대부인을 아느냐고 물으면 의례 아! 그 회초리 할 머니! 하며 엄지를 치켜세우곤 했다. 장대부인은 올해 세수 여든이 지났어도 막 시집갈 처녀인 양 깔끔 하여 대전 마루에 티끌 하나만 떨어져 있어도 하녀들을 매섭게 후려 쳐 대곤 했다. 장대부인의 장(張)은 성씨이며 대부인(大夫人)이란 칭호가 말해 주 듯 슬하에 아들을 두었다는 뜻이었다. 바로 무림의 호랑이로 불리는 와호장주 고헌부(高軒富)가 노부인의 아들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금년 오십 오 세인 그도 결혼하고 나서야 비로소 장 대부인의 회초리를 면했다고 했다. 물론 장주가 매맞았다는 것은 어 디까지나 풍문이며 목격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이토록 엄한 장대부인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을 모르는 손녀 고혜원이었다. "뭐라고? 또 사냥을 갔다고......? 어미는 대체 뭐 한 게야?" 카랑카랑한 장대부인의 고함소리가 별당(別堂)을 쩌렁 울렸다. 며느리이자 고혜원의 어머니인 기소연(奇素蓮)을 비롯한 와호장의 모든 하녀들은 지금 장대부인 앞에 집합해 있었다. 기소연은 한때 홍상여검(紅裳女劍)이라 불리던 아름다운 여걸이었 으나 이제는 세월과 가정이라는 족쇄에 물린 한낱 아낙에 불과했다. 그녀는 드센 딸 고혜원을 낳은 게 무슨 큰 죄라도 되는지 시어머니 장대부인에게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처녀시절 고운 티가 남아 있던 마흔 다섯 기소연 의 얼굴에는 어느새 잔주름이 가득 자리잡았다. 진노한 장대부인은 노여움을 며느리에게 몽땅 쏟아 부었다. "쯧쯧, 다 큰 계집아이가 눈만 뜨면 무공에 미쳐서 밤중에 들어오 고, 이젠 할미의 잔소리도 듣기 싫다 이거냐?" 겉으로야 고혜원을 야단치고 있지만 기소연을 겨냥한 것이 뻔했다. 기소연의 전신은 어느덧 식은땀으로 촉촉이 젖어 들었다. "어머니, 제 잘못입니다." "그 소리도 어디 한두 번이라야지. 대책을 강구하지 않고서....... " 그때였다. "실례합니다." 갑자기 들린 낯선 남자의 음성이 분위기를 깨트려 놓았다. 음성의 주인공은 어딘지 환한 느낌을 주는 훤칠한 체격의 마의 소 년이었다. 장대부인은 오만한 표정으로 소년을 노려보았다. "넌 누구냐?" 소년은 칼날처럼 예리한 음성을 듣고도 담담히 말했다. "소인은 유청풍이라고 합니다." 장대부인의 눈은 벌써 그가 들고 있는 만두상자를 휩쓸고 지나갔다 . 그녀의 쏘는 듯한 시선에는 황당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유청풍은 당당한 자세로 사유를 설명했다. "대부인 마님의 손녀께서 주문한 만두를 가져왔습니다." 고혜원의 거처인 원화각(圓花閣)은 하인(何人)을 막론하고 접근할 수 없는 통제구역이라 그는 하녀들을 통하여 배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에는 모든 하녀들이 장대부인의 별당에 모여 있 기 때문에 직접 찾아 온 것이었다. 장대부인은 의아해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아이가 만두를 시켰다니......?" 산해진미도 그냥 쏟아버리는 와호장에서 무슨 싸구려 만두를 주문 했단 말인가? 유청풍은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재빨리 받아 넘겼다. "손녀께서 아침 일찍 다녀갔습니다." 그때 어린 하녀 아이가 냉큼 나섰다. "아가씨는 지금 안 계셔요!" 어린 하녀는 유청풍을 잘 아는지 얼른 옆구리를 콕 찔러 주었다. 아마 빨리 자리를 피하는 편이 좋다는 신호였을 것이다. 유청풍은 전혀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장대부인은 다소 짜증 섞인 어투로 물었다. "얼마냐?" 재물이야 무한한 터라 자존심이 남 다른 노심(老心)은 적어도 보석 으로 체면을 유지하고 싶었다. 만두 파는 소년과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한데 유청풍은 노부인의 예상을 완전히 깨트려 놓았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맹랑한 행동에 장대부인은 미간을 잔뜩 모았다. "뭐라고......?" 유청풍은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또박또박 말했다. "대부인의 손녀께서는 누구나 아는 듯이 천방지축이 아닙니까? 이 번에도 다짜고짜로 소인의 만두가게에 와 만두를 사먹고는 맛있다며 돈도 내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게다가 배달까지 시키더군요." 장대부인의 입이 벌어졌다. 유청풍은 그녀가 말할 기회도 주지않고 내쳐 말했다. "이런 일이 재차 발생하면 고명하신 대부인께서 얼마나 난처하겠습 니까?" 장대부인은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드디어 언성을 높였다. "네 이 녀석!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입을 놀려!" 대전이 짜르르 울렸다. 그 바람에 하녀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헉! 청풍아, 넌 이제 죽었다만 우리도 큰일 났다.' 십여 명의 하녀들은 어깨를 움츠린 채 전전긍긍했다. 이때 유청풍 은 매우 신속히 그리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소인이 생각한 것입니다만, 대부인 마님의 고민도 풀 겸 비책을 하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만......." 어른 말을 함부로 가로 챈 것도 그렇거니와 주제를 벗어난 참견은 가뜩이나 엄한 장대부인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힌 일이었다. "아니, 이 녀석이 그래도......?" 그녀가 쥔 회초리가 막 돌풍을 일으킬 찰나 옆에서 기소연의 허락 이 떨어졌다. "어디 말해 보거라." 실상 그녀는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 역시 대부인이 될 처지라 하녀들이 보는 앞에서 더 이상 야단 만 맞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녀는 하녀들이 만두를 먹을 때마다 입에 올렸던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비록 천민이긴 하나 강단이 있는 아이구나.' 유청풍은 비록 허름한 행색이지만 어딘지 타인에게 신뢰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장대부인은 별안간 당돌해진 며느리를 힐끗 보며 노기를 억지로 참 고 있었다. 하나 일그러진 노안(老顔)을 볼 때 여차하면 한 바탕 소 리라도 지를 기세였다. 유청풍은 뒤를 돌아다 본 후 다시 두 부인의 표정을 살폈다. 그것은 주위를 물리쳐 달라는 요구가 분명했다. 기소연은 즉시 하 녀들에게 명을 내렸다. "너희들은 그만 가 보거라." 하녀들은 이때다 싶어 우르르 몰려 나갔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그는 두 부인에게로 다가가더니 나직한 음성으 로 말했다. "본래 말괄량이란 무조건 붙잡아 두면 반발심만 생기기 마련입니다 . 그래서......." 뭔가 그럴싸한 말이 나오는지라 장대부인도 떠름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별당에는 자신감에 넘친 유청풍의 음성이 간간이 흘러나오 고 있었다. "그런 다음... 스스로 흥미를 느끼도록 동기를 유발시키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유청풍의 말이 이어질수록 장대부인의 안 색이 차츰 환해지고 있었다. '어라? 이제 보니 요 녀석 보통내기가 아닐세!' 그녀의 매서운 노안은 설명하는 유청풍의 전신을 쉴새없이 흩어 내 렸다. 잠시 후 설명을 마친 유청풍은 장대부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 다. "어르신, 어떻습니까?" 장대부인은 무릎을 탁 쳤다. "맞아! 가사를 완벽히 배울 필요는 없어. 시집가면 아랫것들이 어 련히 안 할까? 그저 남들 입이 무서워서 붙잡아 두려는 게야." 한데 곧 수긍할 것 같던 장대부인은 웬일인지 다시 안색을 굳혔다. "안돼! 그 아이가 너무 억세. 너도 알 테지? 이 년 전 귀가 도중 강남칠흉(江南七兇)의 목을 댕겅 잘라 냉영괴화란 별칭이 붙은 사실 을......." 노부인은 손녀를 걱정하는 듯하면서도 실상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청풍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다. "흉악범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교육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요?" 이때 기소연은 어떤 감을 잡았다. 화가 났던 시어머니가 갑자기 말이 많아진 것은 인정한다는 뜻이었 다. 기소연은 시치미를 뚝 떼고 시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허락하시는 겁니까?" 순간 장대부인은 본연의 점잖은 음성을 되찾았다. "아, 반나절만 조용히 집에서 보내도 그게 어디냐? 재미를 붙이면 차츰 나아지겠지." 장대부인은 느닷없이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본가는 자격을 중시한다. 네가 누굴 가르칠 만한 솜씨를 지녔느냐 ?" 그새 노부인의 눈빛은 온통 후회로 꽉 차있었다. 내가 저 어린 귀신에게 단단히 홀렸지! 하는 표정이었다. 유청풍은 만두 운반상자에서 접시를 꺼내 두 사람 앞에 내밀었다. "이것을 드셔 보십시오." 일순 장대부인과 기소연의 눈에서 기광이 쏟아졌다. 깨끗한 나무껍질을 깔아 놓은 하얀 자기접시에 거북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물론 그 거북이는 면분(面粉:밀가루)으로 만든 것이었 다. 놀랍게도 장수(長壽)를 상징하는 거북의 등에 뜨거운 김이 무럭무 럭 나는 만두 다섯 개가 놓여 있지 않은가? 누구나 증교자(蒸餃子) 같은 찐만두나 전교자(前餃子) 또는 과염( 鍋貼)이라는 군만두 아니면 물만두인 수교자(水餃子)를 한 번쯤 먹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청풍이 가져 온 육포자(肉包子:고기만두)는 매우 특이했 다. 놀랍게도 만두피(饅頭皮)에는 먹음직스런 매실이 주렁주렁 열린 산수화가 찍혀 있었다. 장대부인은 운치 있는 그림과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에 이끌려 자신 도 모르게 만두를 조금 베어 물었다. 곧 노부인의 입에서 생전 안 하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오, 세상에... 희한한 만두다. 이게 네 솜씨냐? 쇠고기나 돼지고 기도 아닌데......?"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나 겸연쩍어 노부인은 며느리에게 눈짓을 보 냈다. "어미, 너도 하나 시식(試食) 하려므나." 아마 이러한 모습을 하녀들이 보았다면 기절초풍했을 것이다. 기소연도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 물더니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만 두피는 일정하게 얇고 쫄깃쫄깃하며 고소한 그 육염(肉 : 속) 맛은 정녕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특이한 솜씨였다. 기어코 기소연마저 부지불식간에 찬탄을 터트렸다. "어머니, 그림도 그렇고 정말 맛이 독특하네요." 만미당의 만두는 늘 고량진미(膏粱珍味)만 대하던 장대부인과 기소 연에게 희귀한 음식이었으나 잘못된 선입감을 일시에 뒤집어 놓았다. 유청풍은 최후의 못을 박았다. "그럼 오전에는 사냥을 하되, 오후에는 요리를 배우도록 조치하겠 습니다. 한 가지 고려할 점은 제가 스승이므로......." 그는 여기서 말을 중단하고 두 부인의 눈을 번갈아 주시했다. 스승이란 말에 장대부인의 말투가 금세 달라졌다. "뭔가?" "손녀 따님과 말을 놓고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자네, 올해 몇이지?" "열 여섯입니다." 장대부인은 잠시 어려운 난제에 부딪쳤다. '손아래 사내라... 남들이 비웃지나 않을까? 하지만 문제는 요렇게 영리한 인물이 또 있을지......?' 반질반질한 참나무 회초리가 주름진 손에서 속절없이 팽그르르 돌 았다. 사실 그 동안 여자 요리선생을 몇 명 초빙해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 하고 말았다. 요리선생들은 고혜원이 쌍륜화극을 휘두르는 순간 혼비 백산하여 도망간 것이었다. 그렇다고 고혜원보다 연상의 남자를 불러오자니 어쩐지 부담스러울 뿐더러 유청풍보다 낫다는 보장도 없을 것 같았다. 시어머니의 마음이 갈팡질팡하자 기소연은 간곡한 음성을 발했다. "어머니......." 장대부인이 며느리가 부른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하긴, 가르치는 데 연륜이 무슨 상관이며 더더욱 선생이 굽실대면 그 드센 아이가 말을 듣겠나?" 이내 노부인은 와호장의 가법(家法)을 강조하듯 검지를 쳐들었다. "강의할 때만은 본가에서 제공하는 비단옷으로 갈아입게." 유청풍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느 제자가 구차한 스승을 공경하겠습니까? 오래된 옷일망정 제 것을 깨끗이 차려 입겠습니다." 장대부인은 긴 침음성으로 놀란 마음을 대신 나타냈다. "으으음, 보수를 말해 보게. 원하는 대로 줄 테니......." 유청풍은 겸손한 태도로 말 끝을 흐렸다. "어떤 대가도 받고 싶지 않습니다만......." "어허, 괜찮아. 자식 교육에 누가 돈을 아낀단 말인가?" 기소연은 얼른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어머니." 그녀는 구원자 유청풍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싶었다. 드디어 유청풍 은 사곡에 관한 실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제가 환자들을 조금 도와주었던 바... 어르신께서 나서신다면 큰 보탬이 될 것 같습니다." 일순 장대부인의 눈에서 괴광이 번뜩였다. '알고 보니 보물일세. 재산의 출처를 의심 받을까봐 염려하던 참이 었는데... 이번 기회에 인심을 쓰면 모두 본장을 칭송할 테지.' 장대부인은 내심을 감춘 채 흐뭇한 안색을 지었다. "오호, 훌륭한 인재구나. 자네는 오로지 수업에만 신경을 쓰게. 내 가 후견인이 될 테니......." 이리하여 유청풍은 아무도 못 말리는 고혜원의 요리사부가 되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