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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二 章 미래의 약속 부드러운 음성이 두 사람의 후면에서 들렸다. 달빛이 요요하게 내려앉은 거대한 나무 그늘 아래 검은머리를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여인이 조용히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해월, 그녀였다. 그녀를 대하자 위지강은 다시금 가슴이 두근거렸다. 연해월 역시 그를 다시 만난 것이 반가웠는지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소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연해월을 본 소녀의 안색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맹세코 이 세상에서 자신보다 아름다운 여인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이 작은 촌락 미림현에서 경국지색의 미녀를 보게 된 것이다. '칫, 이게 뭐야? 어떻게 이런 작은 고을에 저와 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살 수 있지?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거야?' 소녀는 연해월이 빤히 바라보자 그 시선을 마주 받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연해월의 눈빛이 그녀의 내심을 샅샅이 읽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인의 직감은 무서운 법, 연해월은 한눈에 그녀가 위지강에게 호감을 지녔음을 파악했다. '고지식한 사람. 어린 소녀에게는 자존심이 생명임을 모르다니.' 연해월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세상의 어떤 남자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 그들은 여인의 마음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지. 일명 벽창호라 부르는 사람인데 어린 동생이 마주하고 선 사람이 바로 벽창호야!" "당신은 누구죠? 누군데 내 일에 간섭을 하는 거죠?" 연해월은 방그레 웃었다. "나는 이 미림현에 사는 연해월이라고 해. 저 사람과는 나도 좀 알지. 벽창호이긴 해도 착한 사람이라 내가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는 거야." 좋은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소녀의 반응은 의외였다. "흥! 참견 말아요!" 연해월은 멍한 얼굴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왜 내가 싫어?" 연해월은 소녀보다 나이가 많고 아울러 세상의 경험도 풍부하지만 이성에는 그녀 역시 숙맥이다. 어린 소녀의 내심을 어루만져 사태를 무마할 생각이었으나, 이 소녀의 자존심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다. "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고 했어요?" "그래." 소녀의 안색이 핼쑥하게 변했다. 그녀는 위지강을 쳐다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도 저 사람을 아나요? 두 사람은 친한 친구인가요?" 위지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의 내심에 파문이 일었다. 우연한 만남이었고 말을 몇 마디 주고받은 것에 불과했지만 소녀는 이미 위지강에게 마음을 빼앗긴 상태였다. 그런 그녀에게 경국지색의 미녀인 연해월의 등장도 충격이었는데 이미 그녀와 그가 무관한 사이가 아니라니. 울컥 질투와 설움이 동시에 솟구쳤다. "호호호! 그래? 그럼 너도 반반한 얼굴로 사내를 꼬셔서 천하를 도탄에 빠뜨리는 마녀가 분명하겠구나. 나 매방군(買 君)이 오늘 색마와 마녀를 제거해 무림의 후환을 없애겠다." 매방군이라 이름을 밝힌 소녀가 지면을 박찼다. 미끄러지듯 공간을 이동하는 그녀의 신법은 이미 초절정에 달한 고수의 그것이었다. '좋지 않다.' 놀란 연해월이 급히 옆으로 몸을 날리려는 찰나이다. "어딜!" 매방군이 앙칼진 교성을 토하며 일검을 날렸다. 츠츠츠츠! 무서운 검이었다. 검극에서 홍색(紅色)의 검기(劍氣)가 쭉 뻗쳐 뇌전(雷電)처럼 곁가지를 치더니 삽시간에 십팔 방위를 완전히 차단했다. 위지강이 놀라 외쳤다. "신수궁(神水宮)의 홍예검강(虹刈劍 )이오. 연낭자, 정면으로 부딪쳐서는 안되오." 위지강이 급히 만류했으나 연해월은 어느새 기다란 몽둥이를 들고 매방군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치고 있었다. 그녀 또한 절정의 공력을 몽둥이에 주입했기에 몽둥이의 끝에서는 뿌연 기류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군!' 그랬다. 매방군의 공력은 이해할 만했으나 설마하니 연해월의 공력이 이 정도일 줄이야. 콰콰콰쾅! 굉렬한 파공음이 울렸다. 두 고수의 공격이 정면충돌하자 강기가 사방으로 날면서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초목이 잘려 날고 지면은 벼락을 맞은 듯 움푹움푹 패였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초목의 절단면에 베어 피가 흐르건만 위지강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장내를 주시했다. 연해월의 교구가 연신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반면에 매방군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치렁한 머리칼의 일부가 강기에 잘려 나풀거리며 허공으로 번지고 있었다. 누구도 우위를 점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매방군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 나왔다. "낙뢰무극검(落雷無極劍)! 이제 보니 넌 북파무림맹(北派武林盟)의 맹주인 사마덕조(司馬德操)와 관계가 있었구나." ― 북파무림맹! 천하를 사분(四分)해 지배하는 거대세력이자 북방 십만 리에 산재한 이천 개의 문파를 장악한 문파. 사람들이 중원무림 사상 최강의 문파로 꼽는 단체가 아니던가! 위지강의 눈빛이 깊숙이 가라앉았다. 북파무림맹의 맹주인 사마덕조의 성명절기인 낙뢰무극검을 펼치는 연해월! 그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일순간 감이 잡히지 않은 것이다.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이군!' 그때 매방군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신중해졌다. 연해월을 중심으로 살며시 내딛는 걸음걸이는 호랑이를 닮고, 검을 쥔 손은 가는 파장을 보이고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의 검극에서는 홍색의 검기가 무섭게 폭사되었다. "각오해라." 매방군의 신형이 분열하듯 점차 늘어났다. 둘에서 넷으로, 종내는 열여덟 개로 변해 연해월을 완전히 포위한 것이다. 그것은 눈의 착시가 아닌 너무도 빠른 신법으로 인해 드러난 현상이었다. "홍예십팔사검벽(虹刈十八死劍壁)!" 십팔방을 점한 매방군이 앙칼진 고함을 지르며 신형을 폭사시켰다. 허공은 일순간 포악한 검기에 난자되는 소리에 뒤덮였다. 연해월은 죽음을 보았다. 꾹 다문 입술에서 피가 비쳤다. 신수궁의 무공이 대단하다고 할지라도 이대로 피할 수는 없었다. "낙뢰풍운(落雷風雲)!" 일검이 만변을 일으키고 만변의 정화는 종내 일검으로 화하니 이것이 낙뢰무극의 심오한 경지였다. 콰우우―! 묵빛 기류가 나뭇가지 끝에서 맹렬히 뻗어 나왔다. 삽시간에 사방 팔방으로 비산한 묵빛 기류는 허공 한 지점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쏘아갔다. 그곳에 매방군이 있었다. 아울러 그녀가 펼친 홍예십팔사검벽이 있었다. 꽈가가강―! 굉음이 터지는 가운데 미약한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으음!" 연해월의 수수하던 의복이 갈가리 찢어져 나풀거렸다. 입가에서는 피가 줄줄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연해월이 매방군보다 나이는 두어 살 가량 위였지만 내공은 그녀에게 뒤진 것이다. 매방군은 검을 거뒀다. 처음에는 불같이 일어나는 질투심으로 인해서 연해월이 밉긴 했지만 그녀를 죽일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흥, 북파무림맹의 사마덕조와 어떤 관계인지 모르나 팔성의 낙뢰무극검으로는 어림도 없다.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어라!" 연해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패배의 치욕? 그런 것은 마음에 담지 않았다. 어차피 무공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무인이 아니라 그녀는 한 사내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낙의 삶을 택했으니까. 다만, 심혈을 다하지 않은 자신의 나태함이 아쉬울 뿐! 연해월은 나뭇가지를 고쳐 잡았다. "최선을 다하면 그뿐, 실력이 뒤진다고 무릎 꿇을 생각은 없다." "흥! 관을 보아야 눈물을 흘릴 모양이군!" 앙칼진 교갈을 터트리며 매방군의 교구가 허공으로 도약했다. 이동하는 속도는 섬전, 검을 날리는 속도는 쾌속하기 이를 데 없어 찰나간에 천지간이 검에 양단되는 듯이 보였다. 연해월도 몸을 날리며 전력을 다해 낙뢰무극검을 펼치려 했다. '아뿔싸!' 연해월은 다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낙뢰십팔검은 내력의 뒷받침 없이는 펼칠 수 없는 초절정 검법이다. 또한 내력이 높을수록 그 위력은 배가되는 것이다. 대신에 일초를 펼칠 때마다 막대한 진력이 소모되어 자칫하다가는 내력의 고갈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이 그런 경우였다. '이렇게 허무한 죽음이라니!' 연해월은 질끈 눈을 감았다. 매방군의 검이 연해월의 전신을 난자질하려는 그때, 위지강의 낭랑한 음성이 고막을 때렸다. "멈추시오." 바람처럼 몸을 날린 위지강이 두 사람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저 사람……!' 매방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 그녀는 검에 전력을 실었기에 회수가 불가능했다. 또한 이 검초는 강호의 유명한 고수들조차 막을 수 없는 신수궁의 절기 중의 절기였다. "바보같이. 어서 비켜욧!" 매방군은 당황해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기어코 그녀의 검은 위지강을 내리치고 말았다. "아아!" 매방군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기어이 자신의 검에 위지강이 당하고 만 것이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매방군은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떴다. 그런데 무엇을 보았는지 매방군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무사했군요!" "그렇소!" 무슨 방법이었는지는 모르나 위지강이 그녀의 공격을 피한 것이다. "이 나쁜 사람! 엄청난 무공을 숨기고 있는 고수였으면서도 나를 놀리다니!" 투정을 부리듯 하는 매방군을 보며 위지강은 빙그레 웃었다. "두 사람의 대결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시오. 불구대천의 원수도 아닌데 굳이 목숨을 걸 필요는 없지 않소?" '다 당신 때문이에요. 내가 어떤 여인인데 감히 나를 무시해요?'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매방군은 차마 말로는 못했다. 지긋이 자신을 바라보는 위지강의 눈빛에 절로 위압감을 느끼고 만 것이다. "당신의 말이라면 따르겠어요. 그리고 조금 전 내가 한 말은 진심이었어요." 새삼스럽게 얼굴이 달아오른다. 이런 게 첫사랑의 고백일까? 가슴이 울렁거리며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심장이 무섭게 뛴다. 위지강은 웃음을 머금고 매방군을 바라보았다. 당돌함에도 그녀가 밉지 않음은 어둠에 서 있는 사람이 밝음을 동경하는 심정일까? 연해월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쓸쓸하게 웃고 말았다. '어렵겠구나!' 돌아선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귓가로 위지강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정히 원한다면 훗날을 기약합시다. 조부님의 의견도 들어보아야 하니까!" 매방군의 얼굴이 일순 환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흥, 그 말을 어떻게 믿죠?" "난 사내대장부요. 남아일언은 중천금이라 했소." 그제야 매방군은 얼굴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좋아요. 당신의 이름이 위지강이라고 했죠? 위지공자의 말을 믿고 돌아가겠어요. 만일 약속을 어기면 강호를 뒤집어서라도 위지공자를 수배, 죄를 묻겠어요." "후후! 좋소이다." 대답을 하며 위지강은 빙그레 웃었다. '아! 저 미소… 무슨 사내의 미소가 저리도 황홀하단 말인가!' 매방군은 황홀한 가운데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수궁(神水宮)을 들어보았죠? 여섯 달 뒤 신수궁으로 오세요." "뭣이? 신수궁? 그럼 낭자는?" "신수궁의 궁주가 제 어머니예요!" 위지강은 물론 연해월도 일순간 말을 잊었다. 그녀가 신수궁과 관련이 있을 줄은 알았지만 설마하니 신수궁의 금지옥엽일 줄이야. "공주마마……!" "공주님!" 매방군을 찾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호호! 이제 가야 할 시간인 것 같군요. 저……!" 매방군은 연해월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미안했어요. 철없는 동생의 짓이라 여기고 이해해 주세요." 연해월이 뭐라 답하려 했지만 매방군은 틈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위지강의 얼굴을 그윽한 눈빛으로 주시한 후 몸을 날려 바람처럼 사라졌다. * * * 인생에 있어서 우연(偶然)이란 절대로 없다. 남녀의 만남 역시 그러하다. 윤회(輪廻)의 이치에 의한 재회를 어찌 우연이라 할 것인가? 매방군과 위지강의 만남은 겉으로 보기에는 우연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천하를 사분한 거대세력과 그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치열한 경쟁 하에 문파의 세를 확장하는 신수궁의 궁주(宮主)의 안배였음이니 어찌 이 일을 우연이라 할 것인가? 폭풍은 그렇게 서서히 태동하고 있었다. 북파무림맹 사마덕조의 무공인 낙뢰무극검을 펼치는 미지의 여인 연해월과, 천하사패에 비견되는 막강한 실력을 지닌 신수궁의 금지옥엽 매방군.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의 추적을 피해 천하를 떠도는 일세의 기남아 위지강! 그들의 만남은 바로 폭풍의 서곡이었다. * * * "으윽!" 매방군이 떠나자마자 연해월은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신수궁의 무공은 낙뢰무극검을 수련한 연해월도 감당할 수 없는 위력을 지녀서 오장육부가 제 위치를 벗어나는 중상을 입은 것이다. "연소저!" 위지강은 급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연해월은 낮은 신음만 흘릴 뿐 전혀 대답이 없었다. 위지강은 급히 연해월의 완맥을 짚었다. 그녀의 맥은 불규칙하고 미약하게 뛰고 있었다. 외상보다 내상이 엄중했던 것이다. '이대로 둔다면 생명이 위험하다.' 혈맥이 모두 뒤엉켜 있고 기혈은 곧 폭발할 듯 내부에서 용솟음치고 있었다. 위지강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의학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때문에 지금 당장 추궁과혈(推宮過穴)의 수법을 펼쳐야 그녀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추궁과혈은 전신혈맥을 두드리고 주물러서 타통시키는 수법이 아니던가. 위지강이 망설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어찌 아녀자의 몸을 함부로 떡 주무르듯 할 수 있단 말인가? 위지강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일단 목숨부터 살리고 보자. 무엇보다 사람의 생명이 우선이다." 위지강은 마음을 모질게 먹고 연해월의 전신혈맥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몰랑몰랑하며 고무공처럼 탄력적인 육질의 감촉이 그의 손바닥 가득 전해졌다. 기분이 삼삼하다. 애초에 그녀를 사모하고 있었으니 지금 이 순간 위지강의 기분이 어떠할 것인가? 처음으로 접하는 이성으로 인해 몸에서는 열기가 피어오르고 몸의 일부분이 갑자기 팽창하고 있었다. '미친놈, 껄떡거리기는!' 스스로를 질책한 위지강은 진력을 끌어올리며 운기행공(運氣行功)으로 심마(心魔)를 몰아냈다. 잠시 후 그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때로는 강하고 약하게, 송곳처럼 찌르다가도 손을 넓게 펴 애무하듯이. 위지강의 치료는 일각 가량 지속되었다. 손을 바삐 놀리며 연해월의 전신혈맥을 타통시키는 위지강의 눈은 입정한 고승의 성안(聖眼)처럼 고요하고 맑았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마침내 연해월의 옥용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위지강은 연해월을 일으켜 앉힌 뒤 자신도 그녀 뒤에 결가부좌를 틀었다. 그의 오른손이 연해월의 명문혈에 바짝 밀착되었다. 위지강의 전신에서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고 안색이 창백해지는 반면 연해월의 얼굴은 점점 화색을 되찾았다. 팡! 어느 한순간, 위지강은 왼손으로 연해월의 등짝을 가격했다. 연해월의 입에서 울컥 검붉은 핏덩이가 한 움큼 토해져 나왔다. 기혈을 막고 있던 응혈(凝血)이 빠져 나온 것이다. 위지강은 계속해서 진기를 불어넣었다. 연해월은 자신의 명문혈을 통해 뜨거운 기운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위지강이 자신의 진기를 주입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 그녀는 내심 가슴 떨리는 감격을 맛보며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고 있는 진기를 자신의 경락으로 유도했다. 서서히 온몸이 편안해지며 그녀는 점차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 * * 카우우우! 만월 아래 배고픈 늑대의 울부짖음은 처량하다. "저 새끼는 왜 저리 울어?" 산신묘, 낡은 그 안에서 투덜거리는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거미줄이 축축 늘어진 곳, 그 안에 네 사내가 모닥불 주변에 누워 전신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온몸이 뻐근하게 결리는 걸 보니 최소한 며칠 동안은 고생을 해야 할 것 같다. "개 같은 년, 얼굴은 천하제일미녀인데 손속은 사갈보다 더 지독하군!" 막충이다. "아고, 그런 말 마십시오. 난 아무래도 허리뼈가 아작 난 것 같습니다. 이제는 기둥서방도 못해 먹게 되었다 이겁니다." "씨팔. 난 코가 완전히 박살났어. 도무지 냄새를 맡을 수 없어!" 호북사웅이다.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어. 년이 사대문파의 하나인 북파무림맹의 무공을 수련한 고수로 알려진 이상 우리도 그에 필적하는 무공을 수련해야만 한다." 삼웅이 물었다. "근데 형님, 사대문파가 뭐요?" 막충이 삼웅을 째려보며 인상을 긁었다. "이런 멍청한 놈, 현 무림천하를 사등분해서 지배하고 있는 천하사세(天下四勢)가 북파무림맹(北派武林盟), 무적검맹(無敵劍盟), 남극벌(南克筏), 환희천(歡喜天)이라고 몇 번이나 말해주었는데 아직도 기억을 못해?" 막충이 답답한 듯 외치자 삼웅은 더욱 답답하다는 표정이다. "제기랄, 천하사세의 무공을 배운다면 연해월, 그년을 때려잡을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런 곳에서 우릴 받아주기나 하겠수?" 맞는 말이다. 막충은 가슴이 콱 막혔지만 그래도 명색이 대형이다.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약속은 약속이야. 되든 말든 일단 가 보자고!" "좋소. 사내대장부가 칼을 뽑았으면 무 쪽이라도 잘라야 할 터, 제가 앞장서겠소이다." 이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휘이잉! 그때 음산하기 그지없는 한풍이 몰아쳤다. 산신묘를 휘감아 도는 그 바람에서는 살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갑자기 어디서 이런 괴이한 바람이……!" 이웅은 말을 맺지 못했다. 산신묘의 출입문, 달빛을 받은 채 서 있는 한 사내를 본 것이다. '유령!' 패악이란 패악은 모조리 저지른 그이건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그 사내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음산했다. 안면을 가린 흑의죽립인 사이로 뿜어지는 눈빛은 냉광, 그것이었다. 고개를 돌린 나머지 사내들도 놀라고 말았다. "뭐야?" "갑자기 어디서 저런 친구가 나타난 거지?" 막충 등이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해할 때 흑의죽립인은 소맷자락 속에서 둘둘 말린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들었다. 쫙 펼쳐진 두루마리에는 위지강과 그의 조부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 두 사람을 본 사람만 대답하도록!" 안광보다도 더 차가운 목소리다. 막충은 어이가 없어 어깨를 으쓱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이게 곤두선 밥알만 처먹었나? 어디다 대뜸 반말……!" 번쩍! 흑의죽립인의 손이 허리를 스친다 싶은 순간 번뜩인 섬광, 막충은 정수리가 화끈한 충격을 느끼고는 부르르 온몸을 떨었다. "고수. 그대 같은 사람이 왜 이 미림현엘……!" 막충은 말을 맺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정수리에서 피가 콸콸 쏟아진 것은 잠시 후였다. 그 모습을 본 나머지 세 사람은 공포로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튀자!' 세 사람의 뇌리에 동시에 떠오른 생각이다. 생각은 이내 행동으로 나타났다. 세 방향으로 동시에 몸을 날리는 세 사람을 본 흑의죽립인의 차가운 눈빛에 조소가 흘렀다. "감히 내 앞에서 도주하겠다?" 번갯불보다 빠른 검광이 다시 한차례 작렬했다. 삼웅과 사웅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눈을 부릅뜬 채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의 동공은 크게 열린 채 풀어져 있어 이미 산 자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홀로 남은 이웅은 사색이 된 채 온몸을 달달 떨었다. * * * "본 적이 있나? 없나?" 흑의죽립인의 물음에 이웅은 발작하듯 외쳤다. "있습니다!" "위치는?" "마을의 뒤쪽 오래된 폐가입니다." 살 줄 알았다. 그러나 그에게 찾아온 것도 죽음이었다. 슈칵!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검광, 이웅의 미간이 절반으로 쪼개졌다. 찰칵! 흑의죽립인은 검을 검집에 꽂은 뒤 두루마리를 말아서 소맷자락에 갈무리했다. "드디어 이십 년 동안의 추적을 마무리 할 때가 되었군." 그의 입가에 차디찬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 한순간 그의 냉막한 눈빛이 찰나간 흔들렸다. 미세한 파공음을 포착한 것이다. '살기!' 그의 감지력은 매우 빨랐으나 상대방은 빨라도 너무 빨랐다. 감지하는 순간 기습은 벌써 면전에 도달하고 있었다. 세 가닥의 비단 천이 빳빳이 펼쳐져 거대한 면도처럼 흑의죽립인의 목을 쳐 오고 있었다. "난채대(蘭彩帶)! 난화보(蘭花堡)의 계집들도 그를 노리고 있단 말인가?" 흑의죽립인이 풍차처럼 휘돌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비단 천은 간발의 차이로 그의 발 밑을 스치고 지났다. 콰쾅, 쾅! 목표물을 잃은 비단 천은 그대로 산신묘의 벽을 강타했다. 허름한 산신묘는 단 일격에 폭발하듯 부서져 버렸다. 그 순간에 흑의죽립인은 휘날리는 낙진을 뚫고 허공으로 솟구쳐 있었다. 수많은 실전 경험을 통해서만 발휘될 수 있는 임기응변의 극치였다. 하지만 적은 더 빨랐다. 숲에서 다시 몇 가닥의 비단 천이 폭사되었다. 이번에는 흑의죽립인도 당황치 않았다. "크크크! 기습으로도 어쩌지 못한 이상 승부는 끝났다고 봐야지." 번쩍! 절정에 달한 쾌검이 월광을 갈랐다. 흑의죽립인을 노렸던 비단 천이 잘려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그만 모습을 나타내시지!" 흑의죽립인이 폭갈을 내질렀으나 이번에도 대답은 기습 공격이었다. 사방에서 쏘아오는 수많은 비단 천들. 기습자들의 수법은 더욱 고명해지고 살기는 가일층 짙어졌다. 흑의죽립인은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재차 신형을 퉁겨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콰가강! 굉음과 함께 비단 천에 맞은 거목들이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갔다. "좌측!" 흑의죽립인은 비단 천이 날아온 숲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는 숲에 뛰어들기 무섭게 쾌검을 사방으로 날렸다. 숲은 일시지간 죽음의 지옥으로 화했다. 서걱거리며 아름드리 고목이 베어지고, 그 고목에 은신하고 있던 적들이 난자되었다. 숨을 몇 번 내쉬는 그 짧은 시간에 광대한 숲의 절반 이상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잘린 가지보다도 절단된 인간의 사지가 많았으며 그로 인해 흐른 피가 내를 이루고 있었다. 흑의죽립인은 신형을 멈추고 반대편을 노려보았다. "천한 계집들, 그만 모습을 나타내시지?" "호호호! 역시 북파무림맹에서 파견한 인물이라 실력이 대단하군요. 허나, 나 역시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죠!" 요염한 웃음이 전방 숲에서 흐르는 가운데 갑자기 숲의 사방에서 괴이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괴상하기 그지없었다. 거대한 거미가 빛살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듯 숲은 삽시간에 스스슥, 하는 음향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이건……?' 흑의죽립인은 놀라 급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죽립에 가려진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고 말았다. 숲의 모든 길목을 차단하는 은색의 물체! 어른의 엄지손가락 만한 두께의 끈적끈적한 밧줄이 사방에 펼쳐져 그를 향해 좁혀오고 있는 것이다. "헉……!" 염병할, 이런 경우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난화보의 졸개들이 온 줄 알았는데 설마하니 난화보의 보주가 직접 왔을 줄이야.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이 무공은 수백 년 전에 실전 된 인면지주(人面蜘蛛) 막사굉(莫思宏)의 저주의 사술이 아니던가! 어찌할 틈도 없었다. 검을 쥔 손은 밧줄처럼 굵고 끈끈한 거미줄에 달라붙었고, 경악성을 내뱉기도 전에 다른 한 손마저 척 달라붙고 말았다. "깔깔깔깔!" 허공에서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요사스러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흑의죽립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 요사한 거미줄과 요사스런 웃음은 한 여인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지옥의 염라대왕을 만날지언정 절대 말라지 말라는 죽음의 사신을! "지주미인(蜘蛛美人) 소소염(蘇小艶)." 그 말에 화답하듯 교소가 흑의죽립인의 맞은편에서 울렸다. 높다란 나무 위, 두 다리를 벌려 마치 거미처럼 나뭇가지를 타고 있는 이십대 후반의 여인이 있었다. 몸에 꽉 끼는 옷을 입어 풍만한 몸매가 한껏 드러났으며 터질 듯 부푼 가슴에는 흰색의 거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역시 똑같은 복장과 자세로 매달려 있는 여인들이 숲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북제일의 쾌도인 무풍쾌도(無風快刀) 섭소풍(燮小風)이 고작 이 정도에 불과하다니 실망인데?" 그녀의 빈정거림에 섭소풍은 분갈을 터트렸다. "소소염, 네가 북파무림맹을 적으로 삼고 무사할 것 같은가?" 지주미인 소소염의 얼굴에 요염한 미소가 번졌다. "호호호! 북파무림맹이라고? 일년 전에 그 말을 들었다면 겁을 먹었겠지만 이제는 아냐." 지주미인 소소염은 촉촉한 아랫입술을 핥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이 몸도 환희천에서 꽤 대접받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귀하신 몸이니 말이지." 섭소풍이 놀라 물었다. "난화보가 환희천에 가담했단 말이냐?" 난화보는 여인들로 구성된 문파로 그녀들의 수법은 괴이하고 악랄했다. 강호의 정사지간의 수많은 고수들이 그녀들의 치맛자락에 휘말려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난화보가 정작 두려운 건 여인들의 입을 통해 알게 되는 중원무림의 정보와 기밀이다. 난화루를 얻으면 최강의 정보조직을 얻는 것이다,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환희천! 천하사세의 하나로 북파무림맹에 버금가는 세력을 지닌 서역의 패자였다. 그렇지 않아도 최강을 다투던 환희천이 난화보를 접수한 것은 정보망의 완성을 뜻했다. 지주미인 소소염의 얼굴에서 요염한 미소가 싹 거두어졌다. 대신 빙굴에서나 나옴직한 으스스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네가 분수를 모르고 함부로 보물에 눈독을 들인 데다 쓸데없는 것까지 알았으니 그것으로 죽을 이유는 충분하다! 죽여랏!" 명령을 받은 지주미인 소소염의 수하 여인들이 일제히 섭소풍을 향해 비단 천을 폭사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여인들의 몸이 맹렬한 속도로 휘돌았다. 그 결과 비단 천들은 예리한 송곳의 형태로 변해 섭소풍을 향해 밀려들었다. "헉! 난화보의 비천사(飛韆死), 그건 오래 전에 실전된 무공으로 알려졌는데……!" 더 이상 중얼거릴 틈이 없다. 비단 천들은 벌써 그의 몸을 꿰뚫을 듯이 접근한 것이다. "파(破)! 흑의죽립인 섭소풍의 입에서 일갈이 터졌다. 그의 몸에서 수십 가닥의 무형의 강기들이 뿜어져 난화보의 여인들을 향해 쏘아갔다. 콰앙! 천지가 울리는 굉음이 울렸다. 방원 십 장이 온통 먼지로 뒤덮인 가운데 고통에 찌든 비명이 낮게 울렸다. 섭소풍, 그의 몰골은 참으로 비참했다. 비단 천이 마치 화살처럼 그의 몸을 꿰뚫은 것이다. 반면에 그를 공격했던 여인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열 명에 달하는 여인들의 가슴에 사발 만한 구멍이 뻥 뚫린 채 시뻘건 선혈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동귀어진한 것이다. "호호홋!" 지주미인 소소염은 허공을 바라보며 요사한 웃음을 흘렸다. "꿈에 그리던 무림제일의 보물이 이제 바로 눈앞에 있다. 허나, 내가 취할 수 없는 물건, 누구도 그를 취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내 임무다." 그녀의 풍만한 몸매가 허공을 향해 날렵하게 도약했다. 수하들도 그녀의 뒤를 따라 일제히 날아올랐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