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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시기 순교자 시신의 유기 및 매장과 광희문 밖
[서종태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 연구소 연구교수]
1. 머리말
2. 순교자 시신의 유기와 광희문 밖
3. 순교자 시신의 매장과 광희문 밖
4. 광희문 밖에 유기되고 매장된 순교자들
5. 맺음말
1. 머리말
수구문 또는 시구문으로도 불린 광희문은 서소문과 함께 시신을 도성 밖으로 내갔던문이다. 흉년의 굶주림이나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가 도성 안팎에 나뒹굴 때마다 조정에서 그 시신들을 거두어 광희문 밖에 내다 버리고 또 그 근처에 묻어 주게 하였다 아울러 박해시기에 좌,우포도청, 형조의 전옥, 의금부 등에서 처형된 죄인들의 시신도 광희문 밖에 유기되고 또 그 근처에 묻혔다.
이 때문에 1909년 베네딕도수도회에서 촬영한 사진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광희문 밖은 온통 무덤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 무덤 들 중에는 박해시기에 순교한 천주교도들의 무덤도 분명 다수 포함 되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 자리에 주택과 빌딩이 빼곡하게 들어섰지만, 그 밑에는 진토로 변한 순교자들의 유해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광희문 밖은 가장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이 버려지고 묻힌 성지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는 무덤을 중심으로 순교자에 대한 공경이 이루어지고 성지가 조성되었다.1 이러한 교회 전통으로 볼 때, 광희문 밖은 교회와 학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광희문 밖은 오랫동안 교회와 학계의 관심 밖에 놓여 있었다. 그러다가 2013년 9월 2일 서울대교구가 성지 순례길을 선포하면서 광희문을 순례길 1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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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석우,「순교영성과 성지개발의 의미」,「만 번을 죽어도 하느님을 믿겠습니다j,도 서출판 아름다운세상,2006, 19〜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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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말씀의 길)에 포함시키고,2 이어 2014년 8월 한정관(바오로)신부가 광희문성지 담당 신부로 임명되어 광희문 앞에 순교자현양관 을 마련해 사목을 시작하고, 2015년『서울 한양도성 광희문과 천주교박해』3를 펴냄에 따라, 광희문 밖은 비로소 교회와 학계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기왕의 연구는 몇 가지 사례를 가지고 광희문 밖과 순 교자들의 관계를 밝힌 초보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이에 본 연구 에서는 교회 측 사료와 관변 측 사료를 두루 활용하여 박해시기 광희문 밖과 순교자들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밝혀 보고자 한다 우선 광희문 밖이 박해시기 내내 좌, 우포도청, 형조의 전옥 의금부 등에서 처형된 천주교도의 시신이 관례적으로 버려지고 묻힌 장소라는 사실을 차례로 규명하고, 이어 광희문 밖에 유기되고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의 전체 숫자 시기별 분포, 지역별 분포,성인. 복자. 하느님의 종 분포 등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2. 순교자 시신의 유기와 광희문 밖
박해시기에 많은 천주교도들이 형조의 전옥과 좌, 우포도청과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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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평화신문,「순교 성인과 함께 걷는 말씀, 생명. 일치의 길,2013년 9월 7일자.
3 이 책은 비매품으로,펴낸이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이고,펴낸 곳은 ‘재단법인 한국교회사연구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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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청 등에서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매를 맞아 순 교하기도 하고,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교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이렇게 순교한 천주교도들의 시신은 그 뒤에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그 순교자 시신들 중 일부는 좌, 우포도청의 옥이나 전옥 등에서 그 가족이나 교우 등에 의해 수습되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사료들이 참고된다.
① 남경문 베드로가 병오년 7월 그믐께 포청에서 교수형으로 치명하 신 줄을 아오나 다른 사정은 모르고, 죄인 삼촌이 가끔 포청에 다니며 옥졸 유직에에게 돈도 주며 술도 먹인 까닭에 남경문 베드로가 죽은 사정과 때를 알고 시신을 찾아 장사 지낸 일을 삼촌에게 친히 들었습니다 … 죄인의 삼촌이 남경문 베드로가 치명한 줄을 알고 포 청에 가매,옥졸들이 그 시신을 섬에 담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찾아 다가 보니,모가지에 올가미 자국이 완연히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교 수형으로 죽은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그 칠규(七襄)를 불로 지진 것은 교수형을 집행한 뒤라도 혹 숨기가 있는지 시험하여 본 것 같습니다. 시신을 찾은 뒤 남경문 베드로의 외교인 동생들이 장사 지내되, 선산[舊山]에 묻지 않고 따로 애오개 쌍룡정이(현 마포구 염리동 일 대)에 장사 지냈다는 말을 삼촌에게 친히 들었습니다. 그 후에 죄인이 두어 번이나 무덤에 다녔으나 지금 무덤 자리를 잊고 모릅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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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수원교회사연구소 편,이해,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2,「1884년 3월 10일 시복재 판 남 테레사 증언」,천주교 수원교구 2012, 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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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a 신축년(1841)윤3월 초6일에 김성우 안토니오가 종내 굴하지 않았기 때문에 포청에서 교수형에 처하여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과연 시신을 찾은 뒤에 친히 보니,모가지에 매인 자리가 완연히 있었습니다. … 김성우 안토니오가 치명한 후에 시신을 포청에서 어떻게 내왔는지 모르나, 즉시 일가 사람들이 찾아 구산(鍾山,현 하남시 망 월동)으로 내려가 염습(強襲)하여 선산 근처에 장사 지냈습니다. 그래서 죄인이 그 산소에 여러 번 다녔습니다.5
②-b 김성우 안토니오의 치명한 사정을 잘 모릅니다 매를 맞다가 죽 었는지 교수형에 처하여 죽었는지 지금 알지 못하고,신죽년 윤3월 초8일에 치명한 줄만 압니다 … 김성우 안토니오가 죽은 후 기별이 있으매,죄인의 집에서 사람을 보내 찾아 구산으로 내려와 집안 일가 중에서 장사 지냈습니다. 그 무덤은 죄인 집 산소 근처인데, 이때까지 이장을 못하고 그저 있습니다.6
③-a 이호영 베드로가 재옥 4년 만에 병들어 무술년(1838)에 옥중치 명한 줄만 아옴고 자세한 사정은 모르오나 이호영 베드로의 아내가 시체 찾으러 갈 적에 옥졸이 말하되 “서러워 마오. 영감이 필경 하늘로 갔겠으니 다른 것은 모르나 죽을 때 눈에 붉고 이상한 빛이 보이더라.”라고 하였습니다 … 이호영 베드로가 죽은 후에 그 아내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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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수원교회사연구소 편,이해,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j 1,「1883년 6월 12일 시복재 판 김 막달레나(김성우 조카) 증언_1,천주교 수원교구 2011, 3기쪽
6 앞의 책,「1883년 6월 20일 시복재판 엄 체칠리아(김성우의 제수) 중언j,4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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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를 찾으러 형조로 가니, 옥졸들이 돈을 먹을 욕심으로 시신을 안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형조판서에게 말하니, 형조판서가 시신을 주라고 분부하여 찾아다 노고산[노구산현 마포구 노고산동)에 장사 지냈다는 말을 들었으나 산소는 자세히 모릅니다.7
③-b 이호영 베드로는 서강(西江) 토정(土事)에서 기해년 전에 잡혀 전옥(典獄)에서 수년이나 고생하다가 옥중에서 죽음에 이르렀다는 말을 들었고, 그 시신은 전 첨지가 전옥의 하졸에게 돈을 주고 찾아 다가 장사 지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8
④ 황석지 베드로는 양반집 후손으로 수원 고을 샘골이라고 하는 고향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 그는 얼마 전부터 서울에 와서 조카 황 안드레아 집에 얹혀살다가 거기서 갑자기 붙잡혔다. … 포도청에서 여러 차례 문초를 당한 후,황석지 베드로는 뜻을 굽히지 않은 채 형조로 이송되었다. … 영광스러운 신앙고백을 하고나서 황석지 베드로는 사형선고를 듣는 행복을 누렸다. 그는 기꺼이 자기의 결안에 수 결했다. 그런 다음 목에 칼을 쓰고 따로 떨어진 옥에 갇혔다 … 이렇 게 8개월을 지내는 동안 황석지 베드로는 천주께서 자기의 희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항상 불안스러워 끊임없이 동정 성모께 의탁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병이 들어 며칠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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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수원교회사연구소 편,이해,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j 1,「1883년 6월 26일 시복재 판 변 아나스타시아 증언」, 461쪽
8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기해,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j 2,「1884년 4월 28일 시복재판 김성서 요아킴 증언」,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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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하게 세상을 떠나니,때는 계사년(1833) 5월(6월)초였다. 그의 나이는 70이 가까웠었는데, 다른 고문은 말고라도 중죄인같이 문초를 당한 것이 다섯 번이나 되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일가들이 듣고 시체를 찾으러 가니, 김이라는 외교인 선비가 이렇게 말하였다. “황석지 베드로가 세상을 떠날 때에 이옥 전체에 환한 빛이 비치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러 나갔습니다. 그분의 감방에 불이 비치고 있기에 들어가 보니 비둘기 한 마리가 그분 위에서 빙빙 돌고 있겠 지요. 그 후 몇분 안있어 그분은 숨이 넘어갔습니다.’9
위의 사료 ①은 1884년 3월 10일 시복 재판당시 남테레사가 1846년 병오 박해때 순교한 백부 남경문에 대해 증언한 내용 이다, 이에 의하면 1846년 남경문이 포도청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 했을 때 옥졸이 그사실을 알려 주었는데, 남경문이 옥에 갇힌뒤 그동생이 가끔 포도청 에다니 며 옥졸에게 돈도 주고 술도 사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외교인 동생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러 포도청에 가자 옥졸이 그의 시신을 담아 주었다.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의 경우를 통해서도 포도청옥에서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사료 ②_a는 1884년 4월 28일 시복재판 때 김성서(요아킴)가,②b는 1883년 6월 12일 시복재판 때 김 막달레나(김성우의 조카)가 각각 1841년 순교한 김성우(안토니오)에 대해 증언한 내용이다. 이에 의하면 김성우가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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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샤를르 달레 저,안응렬,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j 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196〜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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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교수형으로 순교한 뒤, 기별을 받고 일가 사람들이 가서 포도청에서 그 시신을 찾아 구산으로 옮겨 왔다 여기서 그의 시신을 일가 사람들이 수습할 수 있도록 기별한 사람은 그의 집안이 부유했던 점이나 남경문의 경우로 미루어 보아 돈을 받아먹은 옥졸이었을것으로 판단된다.
그뿐만 아니라 전옥에서도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사료 ⑤-a는 1883년 6월 26일 시복재판 때 변 아나스타시아가,⑤나는 1884년 4월 28일 시복재판 때 김성서(요아킴)가 각각 1838년 순교 한 이호영(베드로)에 대해 증언한 내용이다. 변 아나스타시아의 증언(⑤-a)에 의하면, 이호영이 붙잡혀 형조의 전옥에서 여러 해 옥살 이하다가 1838년 전옥에서 순교한 뒤, 그의 아내가 그 시신을 찾으러 전옥에 갔는데, 옥졸들이 돈을 먹을 욕심으로 그 시신을 내주지 않아 형조판서 에게 말하니, 형조판서가 그 시신을 주라고 분부하여 시신을 찾았다. 그러나 김성서의 증언(③-b)에 의하면,그 시신은 전 첨지가 전옥의 하졸,즉 옥졸에게 돈을 주고 찾았다. 이러한 김성서의 증언으로 볼 때, 형조판서의 분부에도 불구하고 전옥의 옥졸이 그 시신을 내주지 않고 버텨, 결국 전첨지가 옥졸에게 돈을 주고서 그 시신을 찾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1833년 전옥에서 순교한 황석지(베드로)를 통해서도 형조의 전옥에서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④에 의하면, 황석지는 서울에 사는 조카 황 안드레아 집에 얹혀살다가 그곳에서 붙잡혀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은 다음 형조로 이송되어 굳게 신앙 을 고백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뒤 전옥에서 8개월 동안 옥살이하다가 그곳에서 순교했는데,그의 순교 소식을 듣고 일가들이 전옥에 가서 그 시신을 수습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박해시기에 좌,우포도청이나 형조의 전옥 등에서 순교한 천주교도들의 시신은 바로 그곳에서 그 가족이나 교우 등에 의해 1차로 수습되었다. 그러나 남경문과 이호영의 경 우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포도청의 옥이나 형조의 전옥 등에서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하려면 옥졸에게 돈을 주어야 했는데, 박해시기 천주교도들의 경우 경제적으로 부유한 자들은 극 소수이고, 대 부분은 매우 가난하여 옥졸에게 돈을 주고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 할 형편이 못 되었다. 또한 신자인 가족이나 교우로서는 포도청의 옥이나 형조의 전옥 등에서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체포 될 위험을 무릅써야 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은 현전하는 기록에서 포도청의 옥이나 형조의 전옥 등에서 그 시신을 수습한 순교자가 단지 위의 4명만이 확인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좌, 우포도청의 옥이나 형조의 전옥 등에서 순교 한 뒤 그곳에서 1차로 시신이 수습된 순교자는 극소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러면 천주교도들이 좌, 우포도청의 옥이나 형조의 전옥 등에서 순교한 뒤 그곳에서 시신이 수습된 극소수의 순교자를 제의한 나머지 수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궁금하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사료가 참고된다.
⑤-a 허임 바오로가 좌포청에서 혹형을 당한 후에 기운이 모두 없어져 죽은 사람모양으로 옥에 끌려 들어 오는것을 친히 보았습니다 … 그날 허임 바오로를 팔간으로 들여가매 분명히 죽였을 줄 알지만, 올가미를 씌워 죽였는지는 모릅니다. 허임 바오로가 그날 밤에 목숨을 다했으나 날짜는 모르고,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한날 죽은 줄만 압 니다. … 허임 바오로가 죽은 후에 중부(中部)서원(書員)이 와서 그 시신을 들것에 담아 내어가는 것을 보았으나 나중에 시신이 어찌되 었는지는 모릅니다.10
⑤-b 형벌을 받은 후로부터 김 루치아(곱장 할멈)가 옥중에 누워 3, 4일 만에 목숨을 다하였습니다. 밤에 임종할 때 죄인은 보지 못하였으나, 임종을 본 교우의 말을 들으니, 김 루치아가 예수 마리아 성명을 부르고 편안히 선종 하였다고 했습니다 … 김 루치아의 시신은 중부 서원이 내어가는 것을 보았으나 다른 사정은 모릅니다.11
위의 사료⑤-a와 ⑤-b는 1883년 7월 10일 시복재판때 유바르바라가 1839년 포도청 옥에서 순교한 허임(바오로)과 김 루치아에 대해 각각 증언한 내용이다. ⑤_a에 의하면,1839년 허임이 교수형이 집행 되던 좌 포도청 옥의 시체실인 팔간으로 밤에끌려가 순교 한뒤, 중부(中部) 서원(書員)이 가서 그 시신을 들것에 담아 내갔다. 또한 ⑤-b에 의하면, 1839년 곱사등이 할멈 김 루치아가 포도청 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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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기해,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j 1,「1883년 7월 10일 시복재
[판 유 바르바라(목격자) 증언」,545쪽 11 앞의 책,5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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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순교한 뒤 중부 서원이 가서 그 시신을 내갔다. 이러한 허임과 김 루치아의 사례로 보아,포도청 옥에서 순교한 뒤 그곳에서 가족이나 교우가 수습하지 못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중부의 서원이 가서 들것에 담아 내갔음을 알 수 있다.
중부 서원이 포도청 옥에서 들것에 담아 내간 순교자들의 시신 은 어디로 갔을까에 대해서는 다음의 사료가 참고된다.
⑥-a(좌포청)한번은 한 신자가 고열에 시달리다가 물을 좀 달라고 청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그래,우리가 물을 주지!”라고 하며 쇠침을 박은 몽둥이로 그의 가슴을 죽도록 팼다. 그 로인해 결국 이불쌍한 신자는 두시간 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포졸은 그가 병사하였다고 보고하였고,시체는 실려 나가 성곽 밖에 버려졌을 뿐, 그 누구도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확인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12
⑥-b 가끔씩 우리는 굶주림과 비참함과 혹은 병으로 죽은 도둑 죄수들의 시체가 우리 앞으로 실려 나가는 것을 보았다. 도둑 죄수는 앓고 있을 때도 약을 주거나 어떤 진정제 같은 것을 주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병을 앓는다고 해서 어떤 혜택을 받거나 매질에서 면제받지는 못하였다. 심지어 차꼬도 벗지 못한 채 그저 심지가 꺼지듯 생명이 꺼지도록 놔두었다가, 죄수가 마지막 숨을 거두어서야 차꼬를 벗겨낸다 그러고는 옥졸이 입회하여 도둑 죄수 네 명이 죽은 죄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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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펠릭스 클레르 리델 지음 유소연 옮김, 나의 서울 감옥생활 1878 –프랑스 선교사 리델의 19세기 조선 체험기-j,살림출판사, 2008,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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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로 보아 중부 서원을 가리킴에 틀림이 없다. 아울러 ⑥-C에 의하면,리델 주교와 함께 좌포
도청에서 옥살이 하던 신자들 중 생존자 10명을 모두 교수형으로 처형 한뒤 그들의 시신을 관례 대로 성문 밖에 내다 버렸다.
⑥-a와 ⑥-b의 사례로 볼 때, 포도청 옥에서 순교한 천주교도의 시신들 중 그가족이나 교우 등 이 수습 하지 못한 시신들은 밤에 중부의 서원들이 가서 짚으로 만든 거적 때기에 싸서 성곽 밖 에다 내다 버렸 다는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⑥-c의 사례로 볼 때, 그러한 일은 일시적 이아 니라 관례대로 박해 시기내내 계속 이루어 졌다는 것을 살필 수 있다.
그러면 포도청 옥에서 순교한 천주교도들 중 그가족이나 교우등에 의해 수습 되지 못한 시신 들 을 일시적이 아니라 관례 대로 박해 시기 내내 계속 밤에 중부의 서원들이 짚으로 만든 거적 때 기에 싸서 내다 버린 성곽 밖은 어디 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병오 박해 때 순교한 김임이(데레사). 이간난(아가타). 우술임(수산나). 정철염(가타리나)등의 사례가 참고가 된다. 관련 자료를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⑦-a 김임이 테레사와 이간난 아가타와 우술임 수산나와 정철염 가타 리나 덕이가 우포도청에 치명할 때까지 갇힌 줄은 아나 다른 사정은 모릅니다. … 치명한 후에 이간난 아가타의 부친이 자기 딸의 시체를 찾아 장사 따로 지내고 김임이 데레사,우술임 수산나,정철염 덕이 시체는 광희문[수구문] 밖에 버린 것을 교우들이 밤에 찾아 그 근처에 다시 장사할 때 죄인도 같이 참예하였으나 오랜 일이기 때문에 산소 자리도 모르고 다른 사정도 잊었습니다.15
⑦-b 이간난 아가타와 우술임 수산나가 한가지로 갇힌 교우와 한날 교수형에 처해져 치명하였다는 말을 들었으나 사정은 자세히 모를니다 … 죽은 시신을 광희문[시구문]밖에 내어 버린 후에 이간난 아가 타의 시신은 그 부친이 찾아 장사 지내고, 외교인이기 때문에 교우와 상종함이 없으니, 그 분묘가 어디에 있는 줄을 모릅니다.16
사료 ⑦_a는 1884년 5월 24일 시복재판 때 김 프란치스코가, ©-b는 1883년 4월 10일 시복재판 때 김 가타리나(김임이의 이복동 생)가 각각 1846년 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해 증언한 내용인데, 김 프란치스코는 김임이. 우술임. 정철염의 시신 수습과 안장에 참여했던 인물이고,김 가타리나는 김임이의 이복 동생이다. 김 프란치스코와 김 가타리나의 증언에 의하면, 1846년에 김임이. 우술임. 정철염. 이간난 4명은 포도청에서 순교한 뒤 그 시신을 시구문 또는 수구문이라고도 하는 광희문 밖에 내다 버려졌다. 위4명의 사례로 볼 때, 포도청 옥에서 순교한 천주교도들 중 그 가족이나 교우 등에 의해 수습되지 못한 시신들을 관례대로 박해 시기 내내 중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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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j 2,「1884년 5월 24일 시복재판 김 프란치스코(목격자) 증언」,507쪽.
16 수원교회사연구소 편,어해,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j 1,「1883년 4월 11일 시복재 판 김 가타리나(김임이 이복동생) 증언j,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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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들이 밤에 짚으로 만든 거적때기에 싸서 내다 버린 성곽 밖은 바로 광희문 밖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관례는『승정원일기』의 다음 기사를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⑧ 이덕성(李德成)이 한성부의 말로 아뢰기를,“본부의 참군(參軍) 유 도중(兪道重)이 오부의 관원과 이달 2월 초3일부터 초5일까지 도성 안팎의 시체를 함께 조사해 보니, 동부 관내의 금중계(金衆契)에 시체 1구 창선방계(昌善技契)에 시체 1구가 있고, 서부 관내의 아현 근 처에 시체 2구 문지올(文智70 근처에 시체 2구가 있으며, 남부 관내의 청녕위계(靑事射契)에 시체 3구 와유두리계(瓦有頭里契)에 시체 1구 죽전동계(竹前洞契)에 시체 1구, 보십외계(甫十外契)에 시체 1구 구리개계(坑里介契)에 시체 1구 회현동계(會賢洞契)에 시체 1구가 있고, 북부 관내의 안국방계(安國功契)에 시체 1구가 있으며, 중부 관내의 고병조계(古兵普契)에 시체 1구 종루서변계(鍾樓西邊契)에 시체 1구 수표동변계(水標東邊契)에 시체 1구 하순원계(河順元契)에 시체 1 구가 있습니다. 동부, 남부, 중부 관내의 시체는 광희문[수구문]밖 송장현(送葬視) 근처에 묻어 주고, 서부 북부 관내의 시체는 서소문 밖 대현(大規)근처에 묻어 주겠다는 뜻으로 감히 아됨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알았다.”라고 하였다.17
사료 ⑧은 1698년(숙종24) 2월 6일에 한성부 참군 유도중이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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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숭정원일기j 숙종 24년(1698) 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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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관원과 이달 2월 3일부터 5일까지 도성 안팎의 시체를 함께 적발하여 보고한 내용을 이덕성이 임금에게 아뢴 것이다 이에 의 하면 시체가 동부 관내의 금중계와 창선방계에 각각 1구씩 있고, 서부 관내의 아현 근처와 문지올 근처에 각각 2구씩 있으며,남부 관내의 청녕위계에 3구, 와유두리계, 죽전동계, 보십외계, 구리개계, 회현동계에 각각 1구씩 있고,북부 관내의 안국방계에 1구가 있으며,중부 관내의 고병조계, 종루서변계, 수표동변계, 하순원계에 1구씩 있는데, 동부, 남부, 중부 관내에서 적발한 시체는 광희문[수구문]밖 송장현 근처에 묻어 주고,서부 . 북부 관내에서 적발한 시체는 서소문 밖 대현(북아현동에서 신촌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근처에 묻어 주겠다고 아뢰자 임금이 윤허하였다 여기서 주목되 는 내용은 동부, 남부, 중부 관내에서 적발한 시체를 임금의 윤허를 받아 수습하여 광희문[수구문]밖 송장현 근처에 묻어 준 대목 이다.
이와 같이 동부, 남부. 중부 관내에서 적발한 시체를 임금의 윤허를 받아 수습하여 광희문 밖 송장현 근처에 묻어 준 일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같은 해 3월 11일, 5월 21일, 6월 21일, 7월 7-16-21 일, 8월 11일, 9월 2.21.26일, 10월 6.16.21 일 등 3월부터 10월까지 총 13번이나 반복되었다.18 이러한 사실은 동부, 남부, 중부 관내에서 적발한 시체를 수습하여 광희문 밖 송장현 근처에 묻어 주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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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승정원일기』숙종 24년(1968) 3월 11일,5월 21일,6월 21일,7월 7.16.21 일,8월 11일,9월 2.21.26일,10월 6.16.21 일 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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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례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증명하여 주는 것이다.
그러면 광희문 밖 송장현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한국 지명 총람』1(서울편)‘아리랑고개’ 항목에 “광희문 앞에 있는 고개이다. 시내 어려운 사람들이 죽으면, 흔히 수구문을 지나 이 고개를 넘어서 신당동 화장터나 금호동 공동묘지로 가게 되므로, 수구문을 시구문, 이 고개를 아리랑고개라 한다.”라고 밝혀져 있다19 이로써 보아 송장현은 광희문에서 광희문성지 오른편을 따라 죽 나 있는 고개인 아리랑고개를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포도청이 자리했던 정선방, 우포도청과 전옥이 자리했던 서린방 의금부가 자리했던 견평방 등은 모두 중부에 속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로 볼 때, 좌, 우포도청, 형조의 전옥 의금부 등에서 순교한 천주교도들 중 그 가족이나 교우 등에 의해 수습되지 못한 수많은 시신들은 박해시기 내내 관례대로 중부의 서원들이 밤에 짚으로 만든 거적때기에 싸서 광희문 밖 송장현(아리랑고 개)근처에 내다 버리고 묻어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광희문 밖 송장현(아리랑고개)근처는 순교한 천주교도들 중 그 가족이나 교우 등에 의해 수습되지 못한 수많은 시신들이 관례대로 버려지고 매장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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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한글학회 편,『한국 지명 총람1(서울편),1966, 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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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순교자 시신의 매장과 광희문 밖
박해시기에 좌, 우포도청,형조의 전옥 의금부 등에서 순교한 천주교도들 중 그 시신이 가족이나 교우 등에 의해 수습되어 안장된 순 교자들을 모두 조사하여 정리하면〈표 3〉과 같다.〈표 3〉에서 알수 있듯이, 가족이나 교우 등에 의해 그 시신이 수습, 안장된 순교자는 총37명인데, 권철신(암브로시오), 손경서(안드레아)등 7명은 살던 고향에 옮겨져 안장되었고, 이호영, 이간난 등 20명은 도성 밖 가까운 곳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김임이, 우술임 등 6명은 광희문 밖에 안장 되었고,나머지 황석지, 장성집(요셉)등 7명은 안장된 장소가 미상이다.
시신이 고향에 옮겨져 안장된 7명에 가운데,1801년 신유박해 때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다 장살된 권철신의 시신은 의금부 옥 또는 광희문 밖에서 수습되어 고향인 양근 남시면 효자산 선산에,20 기해박해 때인 1839년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손경서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옥 또는 광희문 밖에서 수습되어 고향인 홍주 신리 선산에,21 1841년 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김성우의 시신은 일가 사람들에 의해 포도청 옥에서 수습되어 고향인 광주 구산의 선영 근처에 각각 안장되었다.22 또한 병인박해 시기인 1867년 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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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여유당전서 시문집 제15권,「녹암권철신묘지명」
21 서종태,「신리,거더리 교우촌 순교자 연구」, 교회사학』7, 2010, 73~74쪽
22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j 1,「1883년 6월 12일 시복재판 김 막달레나(김성우 조카) 증언」,3기쪽: 같은 책,「1883년 6월 20일 시복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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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옥에서 순교한 박공첨과 박성첩 형제의 시신은 여러 친족에 의해 우포도청 뒤에서 수습되어 고향인 광주 실촌 건업이에,23 1868년 우포도청 옥에서 순교한 박순집의 장모인 홍 유스띠나의 시신은 그 아들에 의해 광희문 밖에서 수습되어 고향인 시흥 방아곳지에,24 1868년 포도청 옥에서 순교한 민효원의 시신은 포도청 옥 또 는 광희문 밖에서 수습되어 고향인 지평 마내에 각각 안장 되었다.25
시신이 도성 밖 가까운 곳에 안장된 20명 가운데,1838년 전옥에서 순교한 뒤 그 아내와 전첨지에 의해 전옥에서 수습된 이호영의 시신26과 1846년 병오박해 때 포도청 옥에서 순교한 뒤 외교인 부친에 의해 광희문 밖에서 수습된 이간난의 시신은 모두 노고산에 안장되었다.27
1839년 옥에서 순교한 최경환의 시신은 옥졸의 연락을 받은 그 형제와 수리산 교우들에 의해 광희문 밖에서 수습되어 애오개에 안장되었다가 뒤에 수리산 뒤뜸이로 이장되었고,28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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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엄 체칠리아(김성우 제수) 증언j, 419쪽.
23 한국교회사연구소 편,『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정리 번호76,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1M〜135쪽
24 박순집 증언,김영수 역, 박순집증언록,성황석두루가서원,2001,69〜기쪽
25 병인치명사적(절두산순교성지 소장 필사본) 23권,104쪽.
26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기해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j 1,「1883년 6월 26일 시복재판 변 아나스타시아 증언j,461쪽; 기해,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j 2,「1884년 4월 28일 시복재판 김성서 요아킴 증언j, 炎2쪽.
27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기해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j 1,「1883년 4월 11일 시복재판 김 가타리나(김임이 이복동생) 증언j, 133-135쪽: 같은 책,「1883년 5월 14일 시복재판 이 이사벨라(이간난 동생) 증언」,171쪽
28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j 2,「1886년 11월 4일 시복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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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환과 함께 수리산에서 살다가 붙잡혀 옥에서 순교한 이 에메렌시아의 시신도 그 가족과 수리산 교우들에의해 수습되어 애오개에 안장되었다가 뒤에 수리산 뒤뜸이로 이장된 것으로 여겨지며,29 1846년 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남경문의 시신도 옥졸의 연락을 받은 그 외교인 동생들에 의해 수습되어 선산이 아닌 애오개 상룡정에 따로 안장되었다.30
1846년 포도청에서 장살된 임치백의 시신은 배교하고 석방된 아들 임성룡과 교우에 의해 광희문 밖에서 수습되어 둔지미에 안장 되고,31 1867년 좌포도청에서 순교한 뒤 그와 친한 몇 사람에 의해 포도청 옥 또는 광희문 밖에서 수습된 김홍범의 시신32과 18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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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최 베드로(최경환 아들) 증언」,811쪽: 같은 책,「1887년 4월 2일 시복재판 이 마리아 증언,827쪽 이와 달리 최양업 신부의 조카인 최상종은 1939년에 작성 한「최 바시리오 이력서j에서 최경환이 옥에서 순교한 뒤 옥졸들이 그 시신을 섬 에 넣어 노고산 밑에 갖다 버렸기에 수일 후에 최경환의 중씨 부자가 가서 시신을 찾아 노고산에 가매장했다고 밝혔다(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순교자와 증거자들j,
「최 바시리오 이력서」,한국교회사연구소,1982, 219쪽 그러나 포도청에서 순교 한 시신은 중부의 서원이 광희문 밖에 내다 버렸으므로 옥졸이 최경환의 시신을 섬에 넣어 노고산 밑에 갖다 버렸다는 기록은 오기로 판단된다 그리고 최경환의 시신을 가매장한 곳도 1939년에 ‘노고산으로 밝힌 최상종의 기록보다 1886년에 ‘애오개’로 밝힌 최 베드로의 중언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최 베드로의 증 언을 따랐다
29 김정숙,「수리산 순교자 이성례와 이 에메렌시아의 생애와 신앙생활」,『교회사학j 6, 2009, 127-131 쪽
30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기해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j 2,「1884년 3월 10일 시복재판 남 테레사 중언, 157쪽.
31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기해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j 1,「1883년 4월 17일 시복재판 임 안나 증언,285쪽: 같은 책,「1884년 4월 29일 시복재판 김성서 요아킴 증언 ,365쪽.
32 박순집 증언,김영수 역,앞의 책, 79~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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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포도청 옥에서 순교한뒤 그사촌에 의해 포도청 옥 또는 광희문 밖에서 수습된 김입들의 시신 은 모두 소경재에 안장 되었다.33 아울러 1868년 우 포도청에서 순교한 김성연과 그 모친의 시신은 그친구들과 외교인 일가에 의해 포도청 옥 또한 광희문 밖에서 수습되어 홍제원 근처에 안장 되었고, 1879년 좌 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10명의 시신은 서울 교우들에 의해 광희문 밖에서 수습되어 베르뇌 주교와 1866년 순교한 여러 다른 교우들이 안식 하고 있는 왜고개에 안장되었다.
반면에 1846년 병오박해 때 포도청 옥에서 순교한 김임이, 우술임. 정철염 등의 시신은 수습되어 광희문 밖에 안장되었다. 관련 자료를 모아 보면 아래와 같다.
⑨-a 죽은 시신을 광희문[시구문] 밖에 내어 버린 후에 … 우술임 수산나 시신을 교우들이 가서 근처에 장사 지내되, 정철염 가타리나 덕이와 한 광중에 묻었단 말을 그 사람에게 친히 들었습니다. 죄인도 언니의 산소에 다닐 때 그 분묘를 친히 보았으니, 언니의 분묘에서 열 보밖에 안 됩니다.34
⑨-b 김임이 테레사를 죽인 후에 포청에서 시체를 내어 시구문 밖에 버렸거늘, 오라비와 형부와 다른 교우가 같이 가서 시신을 찾아 그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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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박순집 증언,김영수 역,앞의 책,75~76쪽
34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기해,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ji 1,「1883년 4월 11일 시복재판 김 가타리나(김임이 이복동생) 증언, 133-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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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 에 장사 지낸 말은 그 사람에게 친히 들었습니다 죄인도 3년이나 그 산소에 다니다가 이장 할 마음이 있었으나 형세가 부족 하였기에 못 하였을뿐더러 그 분묘까지 잃었습니다.35
⑨-c 정철염 가타리나의 시신을 시구문[광희문] 밖에 내어 버리매, 교우들이 찾아 그곳에 장사 지내고, 우술임 수산나의 사찰에서 대답한 말대로 우술임 수산나와 합장하여 묻었습니다.36
⑨-d 치명한 후에 이간난 아가타의 부친이 자기 딸의 시체를 찾아 장사 따로 지내고, 김임이 데레사, 우술임 수산나, 정철염 덕이 시체는 수구문 밖에 버린것을 교우들이 밤에 찾아 그 근 처에 다시 장사 할 때 죄인도 같이 참예 하였으나 오랜 일이기 때문에 산소 자리도 모르고 다른 사정도 잊었습니다.37
®-e 김임이 테레사는 태중 교우로 어려서부터 수계하더니,궁녀로 들 어갔다가 나온 후 시집가지 않고 혼자 살았습니다. 병오년 군난에 잡혀 굴하지 않고 옥중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치명하매, 포청 하인이 시체를 시구문 밖에 내다 버린 것을 죄인과 김경보와 김원보와 강 교우 두 어 사람과 같이 찾아가 보았습니다. 여 교우 세 사람뿐인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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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수원교회사연구소 편,이해,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j 1,「1883년 4월 W일 시복 재판 김 가타리나(김임이 이복동생》증언」, 125쪽
36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기해,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j 1,「1883년 4월 11일 시복재판 김 가타리나(김임이 이복동생) 증언」,137〜139쪽
37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기해,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2,「1884년 5월 24일 시복재판 김 프란치스코(목격자) 증언」,5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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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이 넷이나 있으매, 하나는 사나이 도적놈이라 내어놓고, 여교우 시신만 1마장을 옮겨 한 광중에 세 신체를 분간하여 장사 하였습니다.38
사료 ⑨-a.b.c는 김임이의 이복동생 김 가타리나의 증언이고, ⑨-d와 ⑨-e는 김임이, 우술임, 정철염의 시신 수습과 안장에 참여했던 김프란치스코와 서 야고보의 증언이다 세 증언자들 중 김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포함한 교우들이 밤에 광희문 밖에서 김임이, 우술임, 정철염의 시신을 찾아 그 근처에 장사 지냈다고 증언하였고, 김 가타리나는 자신의 오빠와 형부 및 다른 교우가 광희문 밖에서 김임이, 우술임, 정철염의 시신을 찾아 그 근처에, 우술임과 정철염은 한 광중에 묻고 김임이는 두 사람의 무덤에서 10보 떨어진 곳에 따로 묻었는데, 그 뒤 3년이나 그 산소에 다녔다고 증언하였다. 그리고 김 야고보는 자신과 김경보, 김원보 및 강 교우 두어 사람과 같이 광희문 밖에서 김임이 등 세 순교자의 시신을 찾아 1 마장 떨어진 곳에 옮겨 한 광중에 세 시신을 분간하여 장사 지냈다고 증언하였다.
이 세 사람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광희문 밖에서 김임이, 우술 임, 정철염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한 사람들은 김 프란치스코, 서 야고보, 김경보, 김원보, 강 교우 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한 시각은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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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수원교회사연구소 편,이해생오 순교자 시복재판록j 2,「1885년 10월 7일 시복재 판 서 야고보 증언(목격자), 7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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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 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어두운 밤에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한 것은 관례적으로 남부의 서원이 밤에 순교자의 시신을 광희문 밖에 내다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하다 체포될 수 있는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세 순교자의 시신을 안장한 곳은 광희문 밖 근처,즉 시신이 유기된 곳에서 1마장 떨어진 곳이었다.
아울러 세 순교자의 매장 방식에 대해서 야고보는 세 사람의 시신을 한 광중에 분간하여 묻었다고 밝히고, 김 가타리나는 우술임과 정철염은 한 광중에 묻고 김임이는 두 사람의 무덤에서 10보 떨어진 곳에 따로 묻었다고 밝혀, 다소 차이가 난다. 그러나 세 순 교자를 장사 지낸 뒤 3년이나 언니 김임이 산소에 다녔다고 밝힌 김 가타리나의 증언이 더욱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김 가타리나의 증언에 따라 우술임과 정철염은 한 광중에 묻고, 김임이는 두 사람의 무덤에서 10보 떨어진 곳에 따로 묻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또한 병인박해 때 포도청 옥에서 순교한 천주교도들 중에도 그 시신이 수습되어 광희문 밖에 안장된 순교자들이 여러 명 더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1867년 2월 19일 우포도청에서 45세의 나이로 옥사한 송백돌(宋百2, 베드로)이 우선 주목된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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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아래에 인용한 사료에서 보듯이,송백돌이 1868년 1월에 체포되어 우포도청에 서 42세의 나이로 순교한 것으로 박순집은 증언했으나,1우포도청등록에는 그가 1867년 2월 19일 우포도청에서 45세의 나이로 물고(物故)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이이화 편, 포도청등록j 하(우포록),「정묘(1867》2월 19일 죄인 송백돌(宋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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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베드로의 속명은 백돌이요,자는 치명이니,죄인과 동서요,남묘 앞 태생이니, 부친은 비신자이다. 모친의 교훈을 들어 예비를 하였으나, 부친이 이미 민며느리를 정하였으매, 조당이 됨으로 내여 보내고, 죄인의 동서 되매, 아내는 시흥 방아곳 태생인 임씨 여자와 혼배하여 내외 열심 수계하며, 갖바치 물주로 생애 하더니, 무진(1868) 정월 초파일에 교우 체포령이 나매, 포교들이 연이틀와 얼굴을 익히고 가더니, 삼일만에 다시와서 잡아내어 수갑을 질러, 우포도청으로 가 문초하는 말이, “네가 봉교한지 몇 해냐?” 대답하되,“첫해부터 성사(聖事)를 받은지 이미 이십 년입니다.” 하니, 포청으로 내렸다. 사기전 하던 김경장이 가보고 하는 말이,“내가 형벌을 견디지 못하여 자네를 대었으니, 이런 참혹한 일이 어디 있으리오. 용서하기를 바라노라.” 하 니, 베드로가 좋은 말로 대답하되, “당신이 그리하였으나, 내가 여기오기는 천주의 부르심이니 염려 말라.” 하더란 말은 경장에게 들은바요. 문초 사연은 모르오나 삼일 만에 여러 옥졸[獄守]이 곤하여 다졸거늘, 새벽에 베드로가 일어나 앉으며 하는 말이,“내 문답을 외울 것이니,여러분이 다 들으시오.” 하며, 문답 일편을 풀림까지 다 외우며, 칼머리를 장단쳐 가로되,“우리들이 이런 때를 당하여 천당길이 가까웠으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소.” 하니, 졸던 교우가 다 정신을 차리며,유직이도 듣다가 칭찬하는 말이, “여러 천주학군 중에 송백돌이가 제일이다.” 하더니,제오 일 만에 옥중 치명했습니다. 그 시체는 동사하던 갖바치 오륙 인이 시신을 거두어 수구문 밖 성 밑에 장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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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경문화사,1985, 672쪽). 그러므로 그가 순교한 때는 1867년 2월 1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로 보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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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나이 사십이세요. 자녀 사 남매는 다 교우와 혼배하였습니다.40
위의 자료는 박순집이 자신의 동서인 송백돌에 대해 증언한 내용이다. 이에 의하면 서울 남묘 태생으로 모친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송백돌은 외교인 부친이 민며느리로 정한 여인을 조당 때문에 내보내고 교우인 시흥 방아곳 태생인 임씨와 혼배하여 열심히 계명을 지키며 신앙 생활을 하였다. 갖바치 물주로 생계를 꾸리던 그는 사기그릇 장사를 하던 김경장의 진술로 교우임이 드러나 1867년 2월 포교에게 체포되어 우 포도청으로 끌려 갔다. 이때 그는 신앙을 굳게 증거 하고 2월 19일 옥중에서 45세의 나이로 순교 하였는데, 가죽 신을 만드는 일을 같이 하던 갖바 치5, 6명이 그 시신을 수습하여 광희문[수구문]밖 성 밑에 장사 지냈다.
이와같이 병인박해 때 순교한 뒤 광희문 밖에 안장된 천주교도로는 1870년 포도청에서 순교한 박 바오로를 들 수 있다.
박 바오로는 죄인의 팔촌이고 안토니오의 아들이며 전생서 태생입니 다 태중 교우로 나이 이십이 세에 애오개 김 아가타와 혼배하여,내 외가 열심히 계명을 지켰습니다. 그러더니 병인년(1866) 시월에 포교 에게 잡혀 집에서 배교하고 있다고 하기에,죄인이 곧 찾아가 깨우쳐 권면하며 “본동을 떠나 교회로 돌아와 다시 죄를 짓지 않기로 결심하라.”고 하니, 그가 “낸들 어찌 몹시 원통한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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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박순집 증언,김영수 번역,앞의 책, 68~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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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인의 지방에 가면 계명을 지키기가 더욱 어려우니, 차라리 이곳 에 있다가 다시 잡히면 그때 이전에 잘못한 일을 고치겠습니다.”라고 하더니, 그 후 경오년(187 0) 이월 초팔일에 과연 다시 잡혔습니다. 본 동 사람들이 포졸을 달래며, “그를 놓아 주라”고 하니, 그는 “내가 이전의 일도 원통하거늘,이제 무슨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나는 죽으러 갈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 “가족과 동네 사람에게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라고 하고는 바로 딴꾼 집으로 갔습니다. 그때 딴꾼 이 “교우를 대라”고 하니, 그가 “병인년 후로 교우들이 나를 포교보다 더 피하였으니 누구를 보았겠으며, 죽을 사람이 누구를 대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포청으로 들어간지 삼일 만에 옥졸[유직]이 그 시체를 찾아가라고 하여, 그 처남이 그 시신을 거두어 왕십리 끝에 묻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그 아내와 외교인에게 들었습니다. 치명할 때 나이는 오십 세입니다.41
위의 자료는 박순집이 자신의 팔촌인 박 바오로에 대해 증언한 내용이다. 이에 의하면 박안토니오의 아들인 박 바오로는 전생서 태생으로 태중 교우였다. 그는 22세에 애오개 김아가타와 혼배하여 내외가 열심히 계명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1866년 10월에 포교에게 잡혔으나 배교 하였다, 이때 박순집이 그를 찾아가 “ 본동을 떠나 교회로 돌아와 다시 죄를 짓지 않기로 결심 하라. ” 고 권면하자, 그는 외교인이 사는 지방에 가면 계명을 지키기가 더욱 어려 우므로 살던 곳에서 그대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잡히면 순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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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박순집 증언,김영수 번역,앞의 책,58〜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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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말하더니,1870년 2월 8일에 다시 잡혔다. 이때 그는 교우를 대라는 포교의 요구를 단호히 물리치고 포도청으로 끌려가 3일만에 50세의 나이로 순교 했는데,옥졸이 그의 시체를 찾아가 라고 연락하여 그 처남이 포도청 옥 또는 광희문 밖에서 그 시신을 수습해 광희문 밖 왕십리 끝에 묻었다.
또한 광희문 밖에 안장된 천주교도로 1866년에 순교한 이용우(이이학 베드로)도 주목된다. 그에 관한 자료를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⑩-a 이(李)베드로는 본디 단양읍 하방 사람이고, 이름은 용우(容雨)이며, 자는 이학(而學)인데, 병인년(1866) 10월에 피신하여 풍기로 갔다가 경포에게 잡혀 서울로 갔습니다 좌포도청과 의금부를 오가면서 혹형을 받았으나 아무 말도않고 예수 마리아 성명(聖名)만 입에
외우다가 그해 11월 초 8일에 서소문 밖에서 교수형을 받아 치명하였 습니다. 이튿날 시체를 찾아 그곳에 흙으로 덮어 두었다가 10여 일 후에 염습하였는데, 시체가 곧 방금 운명한 것 같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42
⑩七 충청북도 단양군 읍면 하방리 이용우(李容魂,베드로)는 전에 치명한 이 가를로의 당질인데, 병인년(1866)9월 28일 우리 주 예수의 본을 받기 위하여 풍기군 노잔이로 피하였다가 서울 포교가 본집에 왔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풍기 지경터에서 출동한 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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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병인치명사적J 18권,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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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졸과 서울 포교를 찾아가는 길에 잡혀가서 본군 옥에 갇혔습니다. 그 다음날 서울로 갔는 데 중죄인 모양으로 짚둥우리를 타고 서울 좌포도청으로 들어가 형벌과 심문 2차례, 주뢰 2차례를 받았습니다 이때 “천주를 배반하라.”고 하매,“내가 세상에 나서 천주를 배반하고는 다시 갈 데가 없으니 국법대로 죽기를 원하노라.”고 하니, 우 포도청으로 옮겨 가두고 주뢰 2차례,형벌과 심문 3차례를 가했으나, 앞서와 같이 대답 하였습니다. 그러자 10일 후에 의금부로 옮겨 가두매,의금부 관장이 “네가 배반하면 살려 줄 터이니, 부디 고집하지 말고 배교 한다는 한마 디 말만 하여라 그러면 가산과 토지를 도로 줄 것이다. 부디 배교 한다는 한마디 말만 하여라 그 러면 좋은 양반의 집안을 망하지 않게 이어갈 것이다. 부디 즉시 배반 하여라 그러면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니,“내가 죽기를 어려워하지 않으니,국법대로 죽기를 원하노라.”고 대답하였다 또 “교우를 대라.”고 하고 혹형을 무수히 더하였으나,“우리 천주성교의 엄한 법인 10계 제5계에 ‘살인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말로 대기만 하여도 살인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대지 못하겠습니다. 오로지 죽을 따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좌 포도청으로 옮겨가두어 엄한 형벌을 2 차례 가했습니다 그리고 동짓달 초 8일 좌포도청에서 교수형을 받아 치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체를 그아들 이 요한이 찾아서 서소문 밖 성곽 아래에 빈 섬[空石]으로 싸서 두고 단양 본집에 가서 염습할 것을 가지고 8일 만에 가서 염습하려 하니, 그 추운 겨울에도 시체가 부드럽기가 곧바로 운명한 시체와 같았 습니다. 염하여 장사 지내려 할 때, 포도부장 장 가가 와서 “웬 사람이냐?”라고 묻기에,“나는 성교로 치명한 단양의 이 아무개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하니,포도부장이 “이 추운 겨울에 저 허약한 군졸 혼자서 운구하여 장사 지낼 수 없으니, 보기 답답하다”라고 하고는 “모군 3명과 가래와 괭이를 얻어 주고 묘지까지 정하여 줄 것이니,
이곳에 장사 지내고 내려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과연 거기에 장사 지내고 품삯을 물으니, “모군 품삯은 논하지 말고 빨리 시골로 내려가라.”고 하였습니다.43
⑩-c 이이학(李而學,53세)의 경우,본래 단양 태생으로 유업(儒業)에 종사하였으며,5년 전에 서 삼촌 이병기(李秉基)에게 배웠습니다. 강습한 지 다년간에 이르렀지만,이른바 영세하고 견진하고 세례명을 짓는 등의 일은 애당초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증거가 드러났으니,어찌 감히 변명하겠습니까. 자백한다고 진술을 바칩니 다.44
사료중 ⑩_ a 와 ⑩-b는 이용우의 순교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증언한 기록으로,⑩-a는 단양음에 사는 이요경이 증언한 것이고, ⑩-b는 증언한 사람이 누구 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⑩ - c 는 이용우[이이학(李而學)]가 1866년 11월 7일 풍기 태생 진치영(秦致永,안드 레아),영천 태생 김낙선(金樂善,토마스),풍기 태생 김종한(金鍾漢,요한)등과 함께 좌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을 때 진술한 내용이다.
위의 자료들에 의하면, 이용우는 단양읍 하방 사람으로, 자는 이학이다. 본래 유업에 종사하다가 1866년 당시로부터 5년 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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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병인치명사적j 18권,35~39쪽
44 이이화 편, 포도청등록j 하(좌포록),「병인(1866) 12월 8일 죄인 이이학(李而學)j,
보경문화사,1985, 4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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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에 서(庶) 삼촌 이병기(李棄K)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 했으며, 세례명은 베드로이고45 전에 치명한 이 가롤로의 당질이었다. 그는 1866년 박해가 일어나자 9월 28일(또는 10월)풍기군 노잔이로 피신하였다가 경포에게 붙잡혀 서울로 끌려와 좌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았으며, 이때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하였다.
그런데 이용우가 치명한 장소에 대한 증언이 서로 엇갈린다. 즉 ⑩_a에는 11월 8일 서소문 밖에서 교수형을 받아 치명하였다고 되어 있으나,⑩-b에는 11월 8일 좌포도청에서 교수형을 받아 치명 하였다고 되어있다. 이러한 모순은 병인박해 때 교수형이 집행된 사례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데,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교수형 이 집행된 사례는 관변 기록이나 교회 기록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에 교수형이 옥에서 집행된 사례는 교회 기록에서 많이 확인되고 있는데, 특히 1878년 체포되어 좌포도청에서 옥살이했던 리델 주교는 박해시기 때 좌포도청 옥의 시체실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 음을 확인하였다.46 이러한 근거로 볼 때 이용우가 교수형을 받아 순교한 곳은 ⑩_a에 따라 좌포도청의 옥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또한 위의 자료들에 의하면 이용우가 좌포도청에서 순교한 뒤 그 아들 이 요한이 그 시신을 일단 수습해 놓고 단양 집에 가서 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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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그는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을 때 세례명을 짓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두 증언 기록에 그의 세례명이 '베드로’로 밝혀져 있고,그가 “강습한 지 다년간에 이르렸다.”라고 진술했으므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같다.
46 펠릭스 클레르 리델 지음 유소연 옮김,앞의 책,23’142〜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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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할 용품을 챙겨 8일(또는 10일)만에 다시 와서 염습하여 장사 지냈다. 그런데 ⑩七에 보면,그 아들 이 요한이 그 시신을 수습하여 서소문 성곽 아래에 가마니로 싸서 두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서소문 성곽 아래는 이미 민가가 발달하여 시신을 거두어 둘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 증언은 착오가 있는 듯하다. 그런데 ⑩-a에 보면, 이용우가 순교한 뒤 그 이튿날 그 시체를 찾아 그곳에 흙으로 덮어 두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바로 그 시 신을 수습한 곳에 흙으로 덮어 두었다는 점인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좌포도청에서 순교한 천주교도의 시신은 좌포도청 옥이나 광희문 밖에서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좌포도청 옥이나 그 주변은 흙으로 덮어 두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 시신을 수습하여 흙으로 덮어 둔 곳은 광희문 밖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러면 그 아들 이 요한이 단양 집에서 챙겨 온 용품으로 그 시 신을 염습하여 안장한 곳은 어디였을까 ⑩-b에 보면,이 요한이 그 시신을 염하여 장사하려 할 때, 포도부장 장가가 와서 추운 겨울에 그 혼자서 애쓰는 딱한 처지를 보고 안타깝게 여겨 모꾼 3명과 가래, 곡괭이 등의 연장을 얻어 주고 묘지까지 정해 주어 그대로 그곳에 장사 지내고 내려갔다고 했다. 포도부장 장가가 이용우의 장지 로 정해 준 곳은 이 요한의 딱한 처지로 보아 그 시신을 수습한 곳 에서 멀지 않은 광희문 밖 공동묘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견해는 그 시체를 그곳에 흙으로 묻어 두었다가 10여 일 후에 염습 했다는 ⑩-a의 내용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매장된 곳이 미상인 7명의 순교자들 중 1833년 전옥에서 순교한 뒤 일가들에 의해 전옥에서 시신이 수습되어 안장된 황석지,1839년 포도청 옥에서 순교한 뒤 그 외교인 매제에 의해 시 신이 수습되어 안장된 장성집,1869년 우포도청 옥에서 순교한 뒤 그 동네 외교인 친구들에 의해 시신이 수습되어 안장된 김희지 등 3명의 경우는 매장된 곳을 알 길이없다. 그러나 나머지 박 막달레나, 박 바오로, 손 바르바라 등 5명의 순교자는 광희문 밖에 매장된것으로 여겨진다.
박순집의 증언에 의하면, 1868년 3월 23일 전생서 태생인 박 바 오로(박순집 부친)박 바오로(박순집 삼촌)박 요한 사도(박순집 형)와 왕십리 태생인 손 바르바라(박순집 형수)가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뒤, 박 요한 사도의 시신은 수습하지 못하였지만, 박 바오로(박순집 부친)박 바오로(박순집 삼촌) 손 바르바라의 시신은 치명한지 6일(또는7일)만에 본동 외교인 일가 몇 사람이 수습하여 어떤 곳에 장사 지냈다가 1885년에 둔지미 주 산으로 이장하였다.47 포도청 옥에서 치명한 지6일(또는7일)만에 박 바오로(박순집 부친) 손 바르바라. 박 바오로(박순집 삼촌)의 시신을 수습했던 것으로 보아 이들 세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한 곳은 광희문 밖의 시신 유기처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1885년에 박 바오로(박순집 부친)손 바르바라 박 바오로(박순집 삼촌)의 시신을 이장한 둔지미 주산은 둔지산을 가리킨다고 생각되는데, 이 둔지산은 현 용산구 이태원동 일대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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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박순집 증언,김영수 번역,앞의 책,6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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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산48으로 그들의 시신을 수습한 광희문 밖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곳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습할 당시에 그들의 시신을 둔지미 주산으로 옮겨 매장하지 못하고 1885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곳으로 이장한 것은 치명한 지6일(또는7일)만에 그들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상황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그들 의 시신을 수습하여 처음 안장한 곳은 광희문 밖 시신 유기처근처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49
또한 1866년에 순교한 박아기 막달레나(박순집 고모)의 시신도 광희문 밖에 안장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866년 10월 11일에 남편 안명순 베드로가 포졸에게 잡혀가자, 아내 박아기 막달레나가 자진하여 좌포도청으로 잡혀가 신앙을 증거하고 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5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 뒤 서부 하인이 그 시체를 찾아가라고 기별하여, 그 시숙 안만홍과 외교인 정군첨 두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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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편,『서울지 명사전 j,「둔지 산」,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0.
49 김 가타리나가 이복언니 김임이에 대해 증언한 내용인 ⑨七와 서 야고보가 김임 이에 대해 증언한 내용인 ®_e에 의하면,김임이가 순교한 뒤,그녀의 오라비와 형부와 다른 교우들은 시구문 밖에서 그녀의 시신과 우술임. 정철염의 시신을 찾아 1마장 떨어진 곳에 함께 매장했다 그 뒤 김 가타리나는 3년이나 그 산소에 다니 다가 언니의 시신을 이장할 마음이 있었으나,형세가 부족하여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분묘까지 잃었다 이와 같이 광희문 밖에 버려진 시신을 수습하여 우선 광희문 밖 근처에 안장했다가 나중에 다른 곳으로 이장하려 했던 사례로 미루어 볼 때,박 바오로(박순집 부친). 손 바르바라. 박 바로오(박순집 삼촌)의 시신들을 우 선 수습하여 안장한 곳은 광희문 밖 시신 유기처 근처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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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 했으나 뒤에 그무덤을 잃었다 〜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좌 포도청 옥에서 순교한 천주교도의 시신을 광희문 밖에 내다 버리는 일은 중부의 서원이 담당하였으므로,박 아기 막달레나의 시신을 찾아가라고 기별한 서부 하인은 중부서원을 착각한 것으로 이해되고, 그 시신을 수습한곳은 광희문 밖 시신유기처로 판단 된다. 그러나 곧이어 55세의 나이로 순교한 남 편 안명순의 시신은 수습하지 못 하였는데51 당시 상황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박아기 막달레나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한 곳은 광희 문 밖 시신 유기처 근처로 생각된다.
그밖에 가족이나 교우가 수습하지 못하여 광희문 밖에 그냥 버려진 수많은 천주교도들의 시신 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와 관련해서는 조선 후기에 조정에서 광희문 밖에 버려진 시신들에 대해 취한 일련의 조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계사년(1593) 갑오년(1594) 무렵에는 무명 한 필 값이 쌀 두 되였고, 말 한 마리의 값은 서너 말에 불과하였다. 굶주린 백성이 대낮에 사람을 죽여 서로 먹는 지경이었는데, 병까지 겹쳐서 길가에 죽은 자가 서로 베다시피 즐비하였으며, 수구문 밖에 쌓인 송장이 산더미 같았는데, 성보다도 두어 길이나 더 높았다 이에 중들을 모집해서 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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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박순집 증언,김영수 번역,앞의 책, 59〜61쪽
51 박순집 증언,김영수 번역,앞의 책,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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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하였는데, 을미년(1595)에 와서야 그쳤다.52
위의 내용은 임진왜란 직후인 1593년(선조26)부터 1595년 까지의 상황을 언급한 것이다. 이에 의하면 1593-4594년 무렵에 대낮에 사람을 죽여 서로 먹을정도로 백성이 굶주린데다 염병 까지 겹쳐, 길가에 죽은 시체가 서로 베다시피 즐비 하였고,광희문 밖에 내다버린 송장이 산 더미 같이 쌓여 성보다도 두어길이나 더 높았는데,조정에서 승려들을 모집하여 묻어 주도록 하여,그 일이 1595년에 이르러서야 마무리 되었다. 이로 보아 임진 왜란직후에 광희문 밖에 버려 진 시신들 중에 연고자가 거두어 장사 지내지 못한 시신들을 조정에서 승려 들을 모집하여 묻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조처는 그 이후에도 계속 이루어졌다.
우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왕세자에게 “금년에 전염병이 옛날에도 드물 정도로 창궐하여 죽은 시체가 들판에 내버려져 있어 그 광경이 처참했는데,조정에서 특명으로 매장하도록 하셨으니, 이는 실로 해골과 시체를 거두어 묻어 주는 은덕을 베푸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수구문 밖에는 유골과 썩은 뼈가 수레바퀴와 말발굽 사이에 아직도 내 버려져 있는 것이 많습니다 청컨대 한성부로 하여금 거듭 오부에 명령하여 이를 빨리 거두어다 묻게 하소서.”라고 아뢰니, 왕세자가 따랐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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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국역 연려실기술』제17권,「선조조(宣祖朝) 고사본말(故事本未)」,‘난중(亂中)의 시 사(時事) 총록(梅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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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은 1718년(숙종44)11월 12일 우의정 이건명이 당시 대리청정하던 왕세자에게 아뢰 어 조처한 내용이다. 이에 의하면 1718년 당시 전염병이 옛날에도 드물 정도로 창궐하여 죽은 시체가 들판에 내버려져 있자, 조정에서『예기』월령(처令)에 “들판에 드러난 해골과 시체를 거두어 묻어 준다.”라고 한 가르침에 따라 조정에서 특명으로 매장하도록 은덕을 베풀었지만, 광희문 밖에는 수레바퀴와 말발굽 사이에 아직도 버려져 있는 유골과 썩은 뼈가 많아 한 성부로 하여금 거듭 오부에 명령하여 빨리 거두어 묻어 주도록 조 처하였다. 이로써 보아 “들판에 드러난 해골과 시체를 거두어 묻어 준다.”라고 한『예기』월령의 가르침에 따라 조정에서 광희문 밖에 버려져 있는 유골과 썩은 뼈를 거두어 묻어 주도록 조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광희문 밖에 버려진 시신들 중에 연고자가 거두어 장사 지내지 못한 시신들을 조정에서 묻어 줄 뿐만 아니라 제사를 지내 그 시신들의 넋을 위로해 주도록 하였다.
채제공(蔡濟燕)이 한성부의 말로 아뢰기를,“어제 대조(大朝)전교(傳敎)중에 동, 서 교외의 시체를 한성부에 분부하여 즉시 흙으로 덮어 주고 이어 푯말을 세워 땅을 파서 상하게 하는 것을 금하도록 하고, 동부와 서부의 관원으로 하여금 즉시 제사를 지내 술을 뿌려 넋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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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국역 숙종실록j 44년(1711)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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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게 하여 나의 뜻을 보여라’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근래에 날 씨가 몹시 추워 유리걸식하는 무리의 죽은 시체가 도성 안팎에 연이 어 있었기 때문에,신의 부에서 각 해당 부에 통지하여 날마다 적발 하여 낱낱이 묻어 주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땅이 얼어 파기가 어렵기 때문에 방민(技民)들이 깊이 파서 후하게 묻어 줄 수 없고,흥년인 한 겨울이라 또한 민력을 많이 쓰기가 어렵습니다. 어제 삯꾼이 묻어 준 시체는 모두 100구였습니다. 그중 74구는 광희문 밖에 있었고, 3구는 전생서(典姓暑)가에 있었으니, 이는 남부에 관계되고, 23구는 당고개에 있었으니, 이는 서부에 관계됩니다. 이후로 죽은 시체가 또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각 해당 부에 단단히 타일러 이번 사례에 따라 낱낱이 깊이 파서 후하게 묻어 주고,광희문 밖과 당고개에 전교대로 오부의 관원으로 하여금 나뉘어 가서 제사를 지내고, 제사 지낼 때 올릴 제물과 차릴 여러 기구는 여저K屬祭)에 따라 하도록하고, 각 해당 아문®門)으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세자가 따랐다.54
위의 사료는 1755년(영조31) 12월 29일 채제공이 한성부의 말로 당시 대리청정하던 왕세자에게 아뢰어 조처한 내용이다. 이에 의하면 당시 날씨가 몹시 추워 유리걸식하는 무리의 죽은 시체 가 도성 안팎에 연이어 있었기 때문에, 한성부에서 각 해당 부에 통지하여 날마다 적발하여 낱 낱이 묻어주게 하였다. 그런데 12월 28일 숙종이 한성부에 분부하여, 동, 서 교외의 시체를 즉시 흙으로 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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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승정원일기』영조 31년(1755)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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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주고 이어 푯말을 세워 땅을파서 상하게 하는 것을 금하도록 하고, 동부와 서부의 관원으 로 하여금 즉시 제사를 지내 술을 뿌려 넋을 위로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한성부에서 삯꾼을 구해 총100구의 시체를 거두어 묻어 주었는데,그 중 77구는 남부의 관내인 광희문 밖(74구)과 전생서 가(3구)에서 거둔 것이었고, 23구는 서부의 관내인 당고개에서 거둔 것이었다. 이러 한 사례에 따라 이후에 죽은 시체도 낱낱이 거두어 깊이 파서 후하게 묻어주고, 오부의 관원 으로 하여금 그 시신들을 매장한 광희문과 당고개에 가서 여제(屬 祭)에 따라 제사를 지내 그들의 넋을 위로하도록 조처하였다.
이와같이 조정에서 도성 안팎에 나 뒹구는 시신을 거두어 광희문 밖이나 당고개에 매장 해주 도 록 조처 한것은 『예기』 월령의 가르침을 따를 뿐만 아니라 재이(災異)의 단서를 없애기 위한 방편 이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자료가 참고된다.
지평 이상윤(李尙光)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동성(東城)을 고쳐 쌓을 때 동문個門)에서 수구문까지의 거리가 1리입니다. 근래 여역(屬疫)과 두진(室參)으로 죽은 남녀가 몇천 명인지 모를 정도인데 이들을 모두 그 사이에다 묻었습니다. 이제 감독하는 사람이 잘 살피 지 못한 탓으로 성을 개축 할즈음 수천개의 남녀 무덤에서 발굴된 뼈를 수십 개의 구덩이를 파고서 묻었는데, 해골과 몸 뼈가 부러지거나 부서지고 머리와 발의 위치가 바뀌어, 그 낭자하게 전도된 꼴을 차마 볼 수가 없는 정도였다고 하니, 이것이 재이를 부르는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듣고 나니 매우 놀랍고 참혹하다 무덤을 감독하는 관리를 의금부로 하여금 잡아들여 조처하게 하라.”라고 비답을내렸다.55
위의 사료는 1753년(영조 29) 6웧 3일 지평 이상윤이 상서하여 수구문 밖에 흩어져 있는 해골 에 관해 아뢴 내용이다. 이에 의하면 근래에 전염병으로 죽은 남녀 몇 천명의 시신을 거두어 수구문과 동문 사이에 묻었는데,그 무덤들을 감독하는 관리가 잘 살피지 못하여 동성을 고쳐 쌓을때 그 수천 개의 남녀 무덤을 파헤쳐 발굴된 뼈를 수십 개의 구덩이를 파고서 묻었으나, 해골과 몸 뼈가 부러지거나 부서지고 머리와 발의 위치가 바뀌어 차마 볼 수 없는 정도였다고 아뢴 뒤, 이것이 재이를 부르는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자 임금이 매우 놀랍고 참혹 하 다고 하면서 의금부로 하여금 무덤을 감독하는 관리를 잡아들여 조처하라고 비답을 내렸다. 이 와같이 지평 이상윤이 아뢴 내용과 임금의 비답으로 미루어 볼 때,도성 안팎에 나뒹구는 시신 을 거두 어광희 문밖에 매장 해주도록 한 조정의 조처는 재이의 단서를 없애기위한 방편 이기 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 살펴보았듯이, 조선 후기에 흉년의 굶주림이나 전염병으로 죽 은 시체가 도성 안팎에 나 뒹굴 때 마다 조정에서는“ 들판에 드러난 해골과 시체를 거두어 묻어 준다.”라고 한『예기』월령의 가르 침을 따르고,재이의 단서를 없애기 위해 그 시신들을 거두어 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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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국역 영조실록j 29년(1753) 6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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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밖에 매장하고,여제에 따라 제사를 지내 그들의 넋을 위로하도 록 조처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일련의 조처로 미루어 볼 때,박해시 기에 순교한 뒤,가족이나 교우가 수습하지 못하여 광희문 밖에 그 냥 버려진 수많은 천주교도들의 시신도 정부의 조처로 수습되어 그 근처에 매장되었다고 판단된다.
광희문 밖에 안장된 순교자와 관련하여 현석문(가롤로)도 주목 된다. 1846년 7월 29일 새남터 군문에서 현석문이 효수형으로 순교 한 뒤, 신자들은 그의 시신과 7월 16일 새남터 군문에서 효수형으 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수습하여 문배부리에 두 시신을 한 구덩이에 함께 임시로 장사 지냈다.56 이와 같이 김대건 신부와 현석문을 매장한 문배부리는 오늘날 용산구 문배동,신계동 일대로 당고개인데, 문배산은 옛날 공동묘지였다. 이렇게 문배부리에 함께 매장된 김대건 신부와 현석문의 시신은 뒤에 교우들이 각기 다른 곳으로 이장했는데,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양성 미리내로 이장 하였고, 현석문의 시신은 광희문 밖 왕십리 끝에 이장하였다.57 이렇 게 현석문의 시신을 이장한 왕십리 끝은, 박순집의 팔촌인 박 바오로가 포도청에서 순교한 뒤,박 바오로의 처남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광희문 밖 왕십리 끝에 묻었던 사례로 보아 알 수 있듯이,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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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수원교회사연구소 편,기해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j 2,「1885년 10월 7일 시복 재판 서 야고보 증언j,697쪽: 같은 책,「1886년 11월 3일 시복재판 최 베드로(최 경환 아들) 증언j,795쪽
57 수원교회사연구소 편,이해,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j 2,「1884년 5월 24일 81회 차 시복재판 김 프란치스코(목격자) 중언」,5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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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문 밖에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했던 곳이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새남터에서 가까운 왜고개나 노고산 등에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하던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왜 굳이 새남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광희문 밖 왕십리 끝에다 이 장하였느냐는 것이다. 당시 가족들의 무덤을 한자리에 아울러 쓰던 풍습을 고려할 때, 현석문의 시신을 왕십리 끝으로 이장한 것은 앞서 순교한 가족들이 그곳에 묻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아버지 현계흠(플로로)이 순교할 당시 가족들은 무사하였으므로 그의 시신을 거두어 매장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기해 박해 때 순교한 그의 누이 현경련(베네딕타)이나 아내 김 테레사와 아들 현은석의 경우도 당시 교회의 일을 주관하고 있었던 현석문 의 위치를 고려할 때, 신자들이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해 주 었을 것이다. 게다가 박 바오로의 사례로 보아 알 수 있듯이, 왕십리 끝은 광희문 밖에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했던 곳이다 따라서 현석문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도 광희문 밖 왕 십리 끝에 함께 매장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4. 광희문 밖에 유기되고 매장된 순교자들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79년 기묘박해까지 좌, 우포도청, 형조의 전옥 의금부 등에서 처형된 뒤 그 시신이 광희문 밖에 버려지거나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천주교도들을 모두 조사하여 정리하면〈표5 〉와 같다. 이〈표 5〉에서 알 수 있듯이 박해시기에 처형된 뒤 그 시신이 광희문 밖에 버려 지거나 묻힌 것으로 추정 되는 천주교도의 숫자는 총 794명에 달한다.
순교한 794명을 시기별로 살펴보면,〈표1〉에서 알 수 있듯이,1846년 병오박해 이전에는 모두 54명의 천주교도 시신이 버려지거나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에, 1866년 병인박해 이후에는 모두 740명으로 추정된다. 병오박해 이전에 비해 병인박해 이후에 버려지거나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천주교도의 시신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병오박해 이전에 순교한 천주교도 54명을 시기 별로 세분하여 살펴보면, 신유박해(1801) 때 4 명, 신유박해와 기해박해 사이(1833-1836)에 2명, 기해박해(1838〜1841) 때 41명, 병오박해(1846) 때는 7명으로, 기해 박해때에 이르러 그수가 대폭 증가 하였음을 알 수있다. 여기서 신 유박해 때 그 수가 4명에 불과한것은 신유박해 때는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천주교도들을 좌, 우 포도청의 옥이나 형조의 전옥에서 교수형으로 처형하지 않고 31명을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로 처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해박해 때 그 수가 41명으로 대폭 증가한 것은 천주교도들을 서소문 밖, 당고개,새남터 등의 형장에서 참수로 처형할 뿐만 아니라, 『기해일기』의「총론」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듯이, 1839년 가을에 조인영(趙貪永)이 정승이 된 뒤로 천주교를 더욱 혹 독 하게 박해 하면서 그해 안에 천주교도를 죄다 처형 하고자 형조의 전옥과 좌, 우 포도청의 옥에 갇혀 있던 교우들을 모두 교수형 으 로 처형했기 때문이다.58
병인박해 이후에 순교한 천주교도 740명을 시기별로 세분하여 살펴보면, 1866년 111명,1867년 73명, 1868년 307명,1869년 49명, 1870년 51명, 18기년 52명, 1872년 24명,1874년 4명,1877년 9명, 1878년 16명, 1879년 15명,연도 불명 29명으로,1866년과 1868년에 그 수가 111명과 307명으로 특별히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1866년 프랑스의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가 프랑스 선교사 9명이 살해된 데 대한 보복과 통상을 목적으로 군함을 거느리고 와서 리델 신부의 통역과 천주교도 최선일, 최인서, 심순여의 안내를 받아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까지 올라와 정찰하고 돌아갔다가 강화도를 점령하고 약탈한 병인 양요와,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페롱 신부와 최선일 등 천주교도들의 안내를 받아 덕산에 있는 훙선대원 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사건으로 박해가 격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교한 뒤 광희문 밖에 버려지거나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천주교도의 숫자가 740명에 달할 정도로 병인박해 이후에 특별히 많았던 것은 병인양요, 남연군묘 도굴사건 등으로 박해가 격화 되면서 붙잡혀 들어온 천주교도들이 포도청의 옥에 가득 차자, 빈 자리를 만들기 위해 그들을 교수형으로 처형하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리델 신부가 붙잡혀 좌포도청에서 옥살이하던 중에 옥졸 두목과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리 델 신부가 하루는 옥졸 두목에게 예전에도 신자들을 본 적이 있는지 물었더니, 그는 “본 적이 있느냐고요? 수백 명을 봤소!”라고 대답 했다. 이에 리델 신부가 “이곳에서 신자들을 많이 죽였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그 당시엔 옥이 신자들로 가득 차 있어서 빈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매일 우리가 상당수를 교살했지요. 기껏해야 2-3일 정도밖에 가두어 두지 못하였지요.”라고 대답했다.59
또한 리델 신부는 옥졸들이 시체실에서 죄수를 교수형에 처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 과정을 자세히 서술한 뒤 “내가 이 교수형 집행 과정을 길게 묘사한 이유는 바로 1866년과 1868년 박해 때에 수천 명은 아니더라도 수백명의 신자들이 이렇게 죽어 갔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60
요컨대 병인박해 당시에는 옥이 신자들로 가득 차, 빈자리를 만들기 위해 옥에 갇힌 지 2〜3일 만에 신자들을 처형했다. 그리하여 매일 밤 옥에서 상당수의 신자들이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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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펠릭스 클레르 리 엘 지음 유소연 옮김,앞의 책,123쪽
60 펠릭스 클레르 리델 지음 유소연 옮김,앞의 책,142—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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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순교한 천주교도 794명의 지역별 분포를 정리한〈표2〉에서 알 수 있듯이, 서울과 경기 , 충청, 강원, 황해, 경상, 평안, 함경, 전라도 등 8도에 거주하는 신자들이 두루 포함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서울 거주자가 309명으로 가장 많고, 충청도가 212명으로 그 다음으로 많으며, 경기도가 158명으로 세 번째로 많다.
그다음은 강원도가 39명, 황해도가 13명, 경상도가 12명, 평안도가 3명, 함경도가 2명, 전라도가 2명,시골, 산곡, 타지, 처가 등의 거주자가 9명,거주지가 미상인 자가 35명이다.
여기서 서울 거주자가 309명으로 가장 많은 것은 좌, 우포도청이 한성부, 즉 서울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고,61 19세기 중반에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천주교도가(19.68%)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데다62 1866년 병인양요의 진원지가 서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충청도 거주자가 212명으로 두 번째로 많은 것은 19세기 중반에 전국에서 가장 많은 천주교도가(50.51%) 충청도에 거주하고 있는데다63 1868년 남연군묘 도굴사건이 충청도 덕산에서 발생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경기도 거주자가 158명으로 세 번째로 많은 것은 19세기 중반에 전국에서 세 번째로 많은 천주교도가(13.22%) 경기도에 거주하고 있는데다64 1866년 병인양요가 경기도에서 벌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총 794명 중 거주지가 미상인 35명을 제외한 759명을 서울 거주자와 지방 거주자로 구분해 보면, 지방 거주자가 452명 (59.55%)으로,서울 거주자 309명(40.71%)보다 143명(18.84%) 더 많다. 이와 같이 59.55%에 달하는 지방 거주자 452명은 시신을 수 습하다가 체포될 위험도 있고,포도청이나 전옥에서 치명할 날짜를 알기가 어려운 데다가 시신을 거두어 고향에 안장하는 데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에, 대부분 광희문 밖에 버려지고 매장되었다고 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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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조선 초 설립 당시 포도청은 서울과 경기 일원을 관할 범위로 하였으나,임진왜란 과 병자호란 이후 서울이 도성 밖 성저십리까지 확대되면서 경기 지역은 포도청의 업무 지역에서 제외되었다 그리하여 좌, 우포도청은 서울을 각기 8패(牌),곧 8개 지역으로 나누어 순찰하면서 치안을 유지하였다(조윤선,「포도청」,『한국가톨릭 대사전j 11권,한국교회사연구소,2005, 8969쪽k
62 방상근, 19세기 중반 한국 천주교사 연구,한국교회사연구소,2006, 60쪽
63 주 60참조.
64 주 6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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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옳을 듯하다 서울 거주자도 신분이 낮고 경제적으로 열악 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시신을 거두어 따로 안장하기 어렵 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여겨진다.65 이렇게 볼 때〈표 5〉에 수록 된 천주교도들은 대부분 순교한 뒤 광희문 밖에 버려지거나 묻혔다 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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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박해시기에 순교한 뒤 광희문 밖에 버려지거나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천주교도 들의 지역, 신분, 지위 등에 대해서는〈표 5〉에 미처 반영하지 못하였다 그러므 로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조사, 정리하여 보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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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순교한 뒤 광희문 밖에 버려지거나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천주교도 794명 중에 시복,시성되거나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된 인물들 총 53위가 포함되어 있다.
이들을 조사하여 정리 한〈표 4〉에서 알 수 있듯이, 순교한 794명 중에는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된 성인 103위 가운데 23위,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앞에서 시복된 복자 123위 가운데 6위, 그리고 현재 시복 절차를 진행하고 있는 하느님의 종 132위 가운데 24위가 각각 포함되어 있다.
우선 23위 성인들 가운데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이 아가타, 이 바르바라, 최경환(프란치스코), 유대철(베드로), 현경련 등 기해박해 순교자 16위와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한 이간난(아 가타), 현석문(가롤로)등 7위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6위 복자들 가운데에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심아기(바르바라) 김이우(바르바라) 현계흠 3위와 병인박해 때인 1876년 순교한 송 베네딕도, 송 베드로, 이 안나 가족 3위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24위 하느님의 종들 가운데에는 기해박해 때 순교한 이 에메렌시아, 최영수(필립보)등 7위,병인박해 때인 1866년 순교한 박아기(막달레나)1위, 1867년 순교한 김홍범(요한), 송백들(베드로) 2위, 1868년 순교 한 최사관(예레니모), 이유일(안토니오) 둥 8위,1801년 순교한 김성실(베드로)요한 2위, 1878년 순교한 피 가타리나와 최지혁(요한) 이아기(루치아) 부부 3위 ,1879년 순교한 이병교(레오)1위 등이 포함되어 있다.(〈표4 참조).
5. 맺음말
이상에서 교회측 사료와 관변측 사료를 두루 활용하여 박해시 기 내내 좌, 우포도청, 형조의 전옥 의금부 등에서 순교한 천주교도의 시신이 관례적으로 광희문 밖에 버려지고 묻혔음을 차례로
규명하고, 이어 박해시기 내내 광희문 밖에 유기되고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의 전체 숫자, 시기별 분포,지역별 분포, 성인, 복 자, 하느님의 종 분포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이글을 통하여 알아본 몇가지 사실들을 요약함으로써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박해시기에 좌, 우포도청이나 형조의 전옥 등에서 순교한 천주교도들의 시신은 바로 그곳에서 그 가족이나 교우 등에 의해 1차로 수습되었다. 그러나 체포의 위험과 가난한 형편 때문에 1차로 시신이 수습된 순교자는 극소수였다. 그 나머지 수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은 박해시기 내내 관례대로 중부의 서원들이 밤에 짚으로 만든 거적때기에 싸서 광희문 밖에 내다 버렸다.
박해시기에 좌, 우포도청이나 형조의 전옥 등에서 순교한 천주교도들 중 그 시신이 가족이나 교우 등에 의해 수습되어 안장된 순교자들은 37명만이 현전하는 기록에서 확인된다.
이중 7명은 고향에 옮겨져 안장되고, 20명은 도성 밖 가까운 곳에 안장되었다. 반면에 병오박해 때 순교한 김임이, 우술임 등 6명,병인박해 때인 1866년 포도청에서 순교한 이용우(베드로), 박아기(막달레나,박순집 고모)2명, 1868년 포도청에서 순교한 송백돌(베드로). 박 바오로(박순집 부친). 박 바오로(박순집 삼촌). 손 바르바라(박순집 형수)4명, 1870년 포도청에서 순교한 박 바오로(박순집 팔촌)1명 등 총 13명은 광희문 밖에 안장 되었다.
그리고 수습되지 못한 시신 들은 조정에서『예기』월령의 가르침을 따르고 재이의 단서를 없애기 위해 모두 광희문 밖에 묻어 주도록 조처하였다.
아울러 1846년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한 현석문(가롤로)의 시신은 김대건 신부의 시신과 함께 문배부리에 가매장되었다가 뒤에 광희문 밖 왕십리 끝으로 이장되었다. 이렇게 광희문 밖으로 이장한 것은 그의 가족들이 광희문 밖에 안장되어 있기 때문이므로, 신유박해 때 순교한 아버지 현계흠, 기해박해 때 순교한 누이 현경련과 아내 김 데레사 등도 광희문 밖에 안장되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79년 기묘박해까지 좌, 우포도청, 형조의 전옥 등에서 처형된 뒤 그 시신이 광희문 밖에 버려지거나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천주교도를 조사하여 정리하면 총 794명에 달한다.
이 794명의 시기별 분포를 살펴보면 1846년 병오박해 이전에는 모두 54명, 1866년 병인박해 이후에는 740명으로 추정된다.
794명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서울과 경기, 충청, 강원, 황해, 경상, 평안, 함경, 전라도 등 8도에 거주하는 신자들이 두루 포함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서울 거주자가 309명으로 가장 많고,충청도가 212명으로 그 다음으로 많으며, 경기도가 158명으로 세 번째로 많다.
아울러 순교한 794명 중에는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 된 성인 103위 가운데 23위,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앞에서 시복된 복자 123위 가운데 6위, 그리고 현재 시복 절차를 진행하고 있는 하느님의 종 132위 가운데 24위 등 총 53위가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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