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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 [초기불교 특강] 2500년 만에 밝혀지는 열반과 무아의 실체 2강(49:13)
<연기의 상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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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의 상속성, 개체적인 동일성이죠 이런 동일성은.
이런 거예요. 전찰나 후찰나 계속 한 찰나 한 찰나, 하나하나는 다 달라요 지금. 그렇죠. 그런데 여기도 또 붙여서 그릴 필요는 없죠. 여기도 또 전찰나 후찰나의 흐름이 있어요. 그렇죠. 또 있어요. 전찰나 후찰나. 그럼 우리가 이걸 ABC로 구분할 수밖에 없죠. 이게 개체성입니다. 연기의 개체성. 전 생각이 사라지면서 일어나는 후 생각으로 과거의 업보가 영향이 옵니다. 이게 또 영향이 오고. 또 이게 사실은 근거가 돼서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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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심지어 부파불교에서는요 보세요. 이 6근이라는 걸 생각해 보시면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그러죠. 그럼 안근에서 안식이 작용하죠. 안근으로. 안근에 의지해서 눈이거든요. 눈이라는 감각기관에 의지해서 안식이 작용합니다. 그럼 다 귀 다 맞아요. 이 물질로 있거든요. 의근(意根)은 뭘까요? 마음이라는 인식기관에 근거해서 의식이 일어나요. 의근을 대승에서는 7식으로, 유식학파에서 7식으로 보는 게 되게 이제 많이 유용하게 쓰이고 있고요. 7식에서 6식이 나온다. 그런데 실제 부파불교에서는 7식이 없죠. 부파불교는 6식까지 가지고 검토합니다. 6식에서 볼 때는요 이 전찰나 생각이 의근이에요. 전찰나 생각에 의지해서 후찰나 생각이 일어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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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또 의근이 돼서 새로운 생각.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의 이 ‘지금·여기·나너·이렇게’ 마음이 나온 바로 전찰나 생각이 있죠. 그게 의근이 돼서 나오는 겁니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이렇게 봐요. 찰나찰나가 그게 새로운 생각으로 창조적으로 계속 전진해 나가는 거예요. 이걸 이제 화이트헤드는요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이 ‘현실적 계기’라고 그래요. 현실적이어 연속해서 일어남. 그리고 전찰나의 그 마음에 그 영향 속에서 후찰나가 일어나는데 이거를 ‘창조적 전진’이라고 합니다. 이게 부파불교식 관점과 거의 유사해요. 그리고 부파불교도 연기법,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화이트헤드도 고정된 실체 없이 심지어 어떤 동일성도 없이 이렇게 흐르고 있다고 봐요. 그런데 제가 말한 동일성은 이거예요. 이 흐름의 차이들. 그럼 B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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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이런 동일성은 유지되고 있다. 이 정도를 말하는 겁니다. 계속해서 이게 겹치지 않는다는 거예요. 혼돈이 오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이 정도의 동일성. 왜냐하면 따져보면 한 찰나 한 찰나도 서로 다르거든요. 여러분도 그러잖아요. 지금·여기·나너·이렇게 마음과 바로 그 뒤에 일어나는 마음과 또 달라요. 벌써 여기서부터 동일성이 깨져버리죠. 그래서 동일한 자아는 없다. 단, 연기의 흐름 속에서 어떤 개체성을 갖고 있고 거기서 다른 연기와 구별되는 어떤 개체들의 일종의 동일성은 있다. 계속 그 업을 내가 책임진다. 그리고 이 업들은 다 어디를 향해서 가야 돼요? 소멸로. 부처님 발상은 소멸로 가야 돼요. 소멸로 못가면 계속 윤회하는 겁니다. 탈출해야 되는 거예요, 저거를 멈춰야 되는 거예요. 근데 만약에 고정된 자아가 있다고 그러면 탈출할 수 있겠어요? 탈출 못하죠. 그러니까 고정된 자아라는 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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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려버리는 걸 되게 중시합니다. 연기의 세계에는 애초에 고정된 자아는 없으니까. 애초에 영원히 동일한 자아는 없으니까. 연기만 있고 연기 속에서의 어떤 개체성이 생겨나는 거고 그런 객체적 동일성은 ‘자아’라고 불러주자. 그럼 방편으로 자아라고 부르되 그건 임시적인 자아죠. ‘연기의 자아’입니다. 그러면 지금 부처님 머릿속이 이해된다면 외도들이 와서 아트만 질문할 때 여러분 머릿속이 어떻겠어요? ‘아트만’ 개념을 들고 와요. ‘자아’라는 개념을 들고 와서 “아트만은 있나요? 이런 윤회를 통해서도 절대 변치 않는다는 그런 내가 있나요?” 그럼 이게 사실은 부처님 머릿속에서 진실로 그런 자리는 열반의식 밖에 없죠. 그럼 열반의식이 사실은 아트만이죠. 열반의식 얻으라고 해줘야 되죠. 근데 방편이 아트만 있다 없다를 말씀 안 하시기도 하고
5:02 < 부처님의 연기법>
모순점을 비판하기도 하고 하면서 아트만 사상에. “아니 연기하는데 어떻게 고정된 내가 있어?” 이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지금 머릿속에 있는 ‘아트만’이라는 생각을 내려놓게 만드는 거예요 부처님은. 고정된 내가 있다는 생각은 연기법에 안 맞아요. 그래서 연기법으로 사상 교정을 해야 돼요. 인지 교정을 해주면 스스로 알아요. “고정된 나는 없고 연기만 있고, 상호연기만 있구나! 그리고 이 모든 거를 다 내려놓을 때 순수하게 알아차리고 있는 이 자리가 사실은 원래 아트만이구나!” 이렇게 끝나게 돼야 됩니다. 그러니까 일단 아트만을 내려놓게 만들고 아트만이라는 고정관념을 박살내는 거죠. 아니면 침묵을 지키시는 거죠, 거기에 대해서 상황에 따라서.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진도 나가볼게요. 께왓다경 아까 질문까지만 했는데 지금 미리 한번 답을 해본 거예요. 이 질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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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았을 때 부처님 머릿속에서 이런 식 사유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아채시라고 제가 도와드린 겁니다. 다시 읽어볼게요. 이 질문 받을 때부터, 여러분 부처님이 어떻게 대답할지도 한번 생각해 보면서 들어보세요. 머릿속을 이해하면 어떻게 대답할지도 보입니다.
[* 께왓다경, 디가 니까야
“[질문] 어디서 ‘지수화풍’은 견고하게 서지 못하며, 어디서 길고 짧은 것, 미세하고 거친 ,것 청정하고 더러운 것과, 어디서 ‘정신과 물질’은 남김없이 소멸합니까?
[대답] ‘의식’(열반의식ㆍ무분별지)은 볼 수 없고 무한하고, 모든 곳에서 ‘빛’이 난다(명색을 초월한 열반의식에 안주). 여기서 ‘지수화풍’(4대)은 견고하게 설 수 없으며(색色의 소멸). 길고 짧은 것, 미세하고 거친 것, 청정하고 더러운 것(명名의 소멸, 이원성의 소멸) 여기서 ‘정신과 물질’(명색名色, 5온 혹은 식온을 제외한 4온)은 남김없이 소멸한다. ‘의식’(5온의 식온, 명색을 발생시키고 대상화하여 집착하는 의식)의 소멸로 인해서, 여기서 이것(명색) 이 소멸한다(열반의식 안에서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名色은 다시 발생할 수 없으니 윤회의 흐름이 끊김).”]
어디서 지수화풍은 견고하게 서지 못하나요? 어디에서? 길고 짧은 것, 반대되는 것들이에요. 이게 개념들입니다. 미세하고 거친 것, 청정한 것과 더러운 것, 이런 것들이 어디서 다 사라지나요? 어디서 정신과 물질이 남김없이 소멸하나요? 뭐가 떠오르세요? 그 모든 것들은 연기하는 것들이고 일체의 연기가 소멸된다는 것은 우리가 열반에 도달했을 때, ‘그 순수 1인칭 관점’에 도달했을 때만 모든 2인칭들이 놔지거든요. 이걸 떠올리셔야 돼요. 그때 부처님이 대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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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에서. 의식인데 어떤 의식이냐? 볼 수 없고, 대상화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무한하고, 생멸이 없다는 거예요. 연기 밖에 있으면서, 볼 수 없고 연기 밖에 있어야 돼요. 생멸이 없는 연기 밖에 있으면서 모든 곳에서 빛이 난다. 모든 것을 알아차린다. 이게 의식이다. 의식은 이렇다. 명색을 초월하여 있는 열반의식에 안주한 모습입니다. 여기에서 지수화풍이 견고하게 설 수 없다. 색(色)의 소멸. 여기에서 길고 짧은 것, 미세하고 거친 것, 청정하고 더러운 것, 즉 일체의 개념의 놀음이 사라진다. 명(名)이 사라진다. 여기에서 정신과 물질이라는 명색(名色), 5온이거나 혹은 식온을 제외한 4온을 말합니다. 5온이 사라진다. 남김없이 사라진다. 자, 그럼 여기까지 왔는데, 의식을 왜 한 번 또 얘기하죠? 의식의 소멸로 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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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이, 이것이 소멸된다가 명색이 소멸된다 그랬죠. 5온은 확실히 열반의 의식에서 사라진다. 그런데 마지막 한 번 더 쳐줘요. 의식은 의식에서 의식이 소멸됨으로써 명색이 소멸된다. 지금 여기 쭉 다 이해되시죠. 마지막 의식이 한 번 더 나온 거 빼고는. 그렇죠. 뭐 더 나올 수도 있죠. 이렇게 하고 넘어가면 되죠. 어때요. 이제는 뭐가 등장할 차례냐면 12연기요.
[* 12연기
①무명無明(무지) ②행行 ③식識 ④명색名色 ⑤육입六入(육입처六入處ㆍ육내처六內處ㆍ육근六根) ⑥촉觸 ⑦수受 ⑧애愛 ⑨취取 ⑩유有 ⑪생生 ⑫노사老死(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 1~2 전생/ 3~10 현생/ 11~12 내생, 1~2ㆍ8~10 인因/ 3~7ㆍ11~12과果)]
12연기를 아셔야 돼요. 여기까지가 지금 뭐 5온의 세계로 연기의 세계를 설명해 봤다면, 제대로 된 연기법의 설명은 12연기죠.
12연기를 한번 여기 써볼까요? 12연기 그 기억 못 하셔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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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처음에 뭐죠? 무명, 무명(無明)이라는 거는 무지라고 보시면 됩니다, 무지. 무지가 행(行), 마음의 작용이에요, 행은. 무지가 행, 업을 짓는 겁니다. 마음의 작용으로 업을 짓는 행업을 낳고 그 행이요 식(識)을 낳고 식 나왔죠. 아까 우리가 강조했던 식입니다, 의식을 낳고 의식이요 명색을 낳고. 그럼 명색이 뭐겠어요? 보통 5온이죠. 근데 여기서 4온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문맥 따라 4온으로 읽어야 될 수도 있습니다. 왜 식(識)이 지금 따로 빠져 있잖아요. 이걸 주목하셔야 돼요. 식이 지금 따로 빠져 있어요. 식은 이미 있었으니까 4온이라고만 볼 수 있겠죠. 근데 다 통합해서 왜 명색이 작용하면 또 식도 여기서 작용하니까 5온을 얘기해 줄 수도 있고 그러니까 다 가능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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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 따라서 보셔야 돼요. 그다음에 육입(六入), 육입은요 6근입니다, 6근. 6근에서 6경과 6근이 서로를 거두어들인다고 해서 육입 그러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 눈이 색깔을, 귀가 소리를, 서로가 서로를 거두어들인다고 해서 육입입니다. 6근을 말해요. 그다음에 6근(六根) 그다음에요. 6근이 생기면요 촉(觸) 접촉이 일어나고 수(受) 좋다 싫다가 일어나고 갈애(渴愛) 여기서 애정이 생겨요, 갈망이 생기고. 취(取) 집착이 일어나서 그다음에 유(有) 업을 짓게 됩니다. 그다음 여기서 구분해 가지고 여기서 생(生) 다시 태어나고 또 노사(老死) 늙어 죽게 됩니다. 여기 보시면 12연기 거기에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는 말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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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세에 걸쳐 있다는 거예요 12연기가. 이중의 인과, 양중은 이중이에요. 이중인과가 있다. 보세요. 무명(無明)과 행(行)이요 전생(前生) 얘기입니다. 생(生)과 노사(老死)가 내생(來生) 얘기예요. 그럼 현생(現生)은요 이겁니다(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 의식이 들어와서, 식(識)은요 엄마 뱃속에 들어오기 전입니다. 식이 엄마 뱃속에 들어오면 명색(名色)이 자라요. 정신과 물질작용이 시작돼서 6근(六根)이 온전히 갖춰집니다. 그래서 태어나면 접촉이 일어납니다. 색깔 소리 냄새 맛과 접촉이 일어납니다. 접촉이 일어나면 ‘좋다 싫다’ 거기에 ‘갈애’가 생기고 집착이 생겨서 업을 짓게 되는 거죠. 실제 취(取)해버리는 거예요. 집착해가지고 업을 지으면 유(有)가 업이 형성된 겁니다. 유는요 유가 존재죠. 그러니까 존재의 업을 지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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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날 업을 지어버린 거예요 유(有)는. 업을 지었으면 이제 빼박이죠. 다음생 이어집니다. 삼세에 걸쳐 있고 인과로는 이중인과(二重因果)라는 게요, 무명의 행(行)이 인(因)이 돼 가지고 과보가 여기까지(③식識~⑦수受)입니다. 여기까지가 과보(果報)예요. 여러분이 지금 기분이 ‘좋고 싫고’까지가 다 과보예요. 전생에 해놓은 짓 때문에 지금 좋은 일 싫은 일을 겪으시는 거예요. 현생의 인(因)은 이겁니다(⑧애愛~⑩유有). 여러분이 지금 잘해야 될 거는요 현생에 또 그거를 내가 또 갈망에 빠져서 집착해서 업을 지으면 점점 커지는 겁니다. 애愛·취取·유有는요 라지(L) 엑스 라지(XL) 투엑스 라지(2XL). 점점 커지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 이게(⑧애愛~⑩유有) 인(因)이 돼서 이게(⑪생生~⑫노사老死) 또 과(果)가 있어요.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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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①무명~②행/③식~⑦수), 인·과(⑧애~⑩유)/(⑪생~⑫노사). 12연기가 오묘하고 재미있는 거예요. 5온하고 12연기 다 알면 연기는요 다 알고요. 이게 막 전생 내생에 걸쳐져 있다고 이걸 뭐 숙명통을 얻어서 아는 건가? 하시면 안 돼요. 부처님은 철저히 뭐예요? ‘지금’ 알아차림이에요, 지금. ‘지금 이 순간’ 알아차리는 걸 바탕으로 설명이 안 되면 이게 엉터리인 거예요. 그럼 또 다른 형이상학이죠. 그럼 또 다른 교리 체계가 나오는 거죠. 믿어야 되면요 안 되겠죠. 석가모니는요 믿어야 되는 거면 지금 얘기를 웬만하면 안 하시겠죠. 부득이하게 께왓다경에서 ‘영원히 빛나는 의식’이라는 우파니샤드에서 강조하는 참나랑 똑같은 설명입니다. 이걸 부득이하게 얘기하신 거예요 께왓다경에. 그래서 심지어 이걸 지금 못 받아들이시는 분들은 전혀 다르게 번역해 버립니다. 원어가 버젓이 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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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꿔버려요. 왜? 못 받아들여서요. 빛나는 의식이 있으면 힌두교거든요. 몇 페이지를 보시냐면요 24페이지 한 번만 보고 갈게요.
[2.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의 순수한 의식의 빛을 보는 사람, 자기 내면에 머물고 있는 그 유일한 참자아를 보는 사람은 영원한 평화를 누린다. (정창영, “우파니샤드”, 무지개다리너머)]
24페이지 우파니샤드 보이시죠. 우파니샤드 2번 볼게요. 정창영님이 번역하신 겁니다. 우파니샤드.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의 순수한 의식의 빛을 보는 사람, 자기 내면에 머물고 있는 그 유일한 참자아를 보는 사람은 영원한 평화를 누린다.” 열반에 들어갔다. 끝. 이거 이대로 불경에 넣어놓으면 몰라요. 그렇겠죠. “형상 없고 무한한 그 빛에 안주하면 지수화풍이 모두 소멸되어 영원한 평화에 들어간다.” 지금 뭐가 달라요? 넣어 놓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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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니까요. 그러면서 이렇게 싸우는 거예요. 어이없죠. “영원히” 이게 “무한하다” 입니다. “변하지 않는다”도 “무한하다”죠. “하나의 순수한 의식의 빛” 그렇죠. 그럼 “모든 곳에서 빛나는 의식”이라는 거죠.
15:20 <영원히 빛나는 의식>
이 의식은 절대로 알아차리는 자이지 알아차려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참자아라고 하는 겁니다. 나다. 자 다시 돌아올게요. 이러니까 부처님도 부득이하게 쓸 때가 있었던 거예요. 보통 열반이라고 얘기하시는데 탐진치가 사라진 자리, 이렇게만 얘기하시는데 부득이 세게 얘기하신 거예요. 소극적으로만 얘기하시는데 부득이 적극적으로 얘기하신 게 지금 이 구절이고요. 또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이 우다나(Udana)에서 열반을 적극적으로 “불생불멸의 세계가 있다”라고 얘기하시는 거예요. 보통은 “탐진치가 소멸된다”라고만 얘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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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치가 끝나서, 이 갈애가 끝나서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를 열반이라고 얘기하지 적극적으로 묘사를 안 하는데. 왜? 적극적으로 설명해버리면 또 형이상학이 되거든요. 힌두교처럼 될까 봐. 브라만교처럼 될까 봐. 그런데 이게 막 숙명통해서 얻어야 될 거겠어요? 대신에 이 개념 하나를 정확히 알아야 됩니다. 이 개념은요 여기 이 식(識)은 뭘까요? 전생에서 지금 엄마 뱃속에 들어오기 전에 이 식, 이게 우리가 말하는 중음신(中陰身)이라고 하는 겁니다. 엄마 뱃속에 들어오기 전에 그 영혼의 상태. 중음신이라고도 보고요, 불교에서 보는 거예요 이렇게. 일반적으로 부파불교에서는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이라고 합니다. 다음생으로 연결시켜주는 식이에요. 재생연결식. 일반식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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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흔히 설명되는 식의 모습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거는요 사실은 이 재생연결식은 8식에 가깝습니다, 대승으로 치면. 근데 이제 초기불교 때는 8식 개념이 없잖아요. 그래도 재생연결식이라고 해서 일반 5온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식하고는 확실히 구분해서 얘기해 줍니다, 모든 불교학자들이. 각주에 다 들어있어요. 달라이라마 존자도 이 식을 이런 재생연결식으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엄마 뱃속에 수태될 때의 의식. 그럼 수태되고 나면 명색이 부풀어 자라거든요. 그럼 이 명은 뭐겠어요? 명은 3온이고 색이 색온이 하나가 있는 거죠. 합쳐서 4온, 색 몸뚱이, 수상행 마음 작용, 이게 부풀어 오릅니다. 그래서 식이 명색을 낳죠. 그 명색이 6근으로 온전해지면서 접촉이 시작되고 ‘좋다 싫다’를 느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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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를 이렇게 설명 드려볼게요.
이 가운데가 열반이 아니고 이걸 지금 8식이라고 해볼게요. 8식에 상응하는 재생연결식. 이쪽이 명(名) 이쪽이 색(色). 그려볼게요. 그러면 벌써 이제 식이 있고, 식이 엄마 뱃속에 들어와서 명으로 작용하고 마음작용 일으키고 몸뚱이를 지금 알아차리고 있겠죠. 그럼 이게 지금 우리 한 생이에요. 찰나찰나는 아니고 한 생으로 구분해 볼게요. 그럼 1생 2생 3생 있으면 왜 삼세냐? 3생이 이제 여기서 12연기에 나오니까요. 그런데 이 식이 명색으로 작용을 하면 5온이 되겠죠. 이게 5온이 됩니다. 5온이 여러분 전부예요, 5온이 사실은. 그렇죠. 지금 12연기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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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5온하고 충돌 나시면 안 돼요. 5온이에요. 여러분이 지금 갖고 계신 거 몸과 마음. 나머지 다 몸과 마음의 작용이에요. 12연기로 서로서로 인연이 돼서 이것이 있어서 이것이 있는 관계를 묘사하다 보니까 12개가 나온 거지 실제로는 그냥 5온이에요. 5온 작용이에요. 이걸 아셔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은 지금 의식을 가지고 마음작용, 심왕을 가지고 심소, 심행을 일으키고 몸뚱이 작용을 갖고 있고, 이게 다예요, 여러분이. 그래서 식이 명색으로 작용하는데, 이 색이 6근이 더 온전히 갖춰진 걸 육입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이 육입이 생기면 어떻게 돼요? 이 정신작용에서 촉, 접촉을 하겠죠. 아까 이게 아주 보편적인 마음작용이잖아요. 촉, 그다음에 수, ‘좋다 싫다’ 느끼고 그다음 좋은 거에 대해서는 사랑하겠죠. 또 먹고 싶고 또 맛보고 싶겠죠. 그다음에 취, 누워도 자꾸 생각나고 눈 감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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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겠죠. 먹겠죠. 그래서 업을 짓습니다. 치킨 먹은 겁니다, 유에서. 그렇죠. TV에서 먹방을 봤어요. 좋아 보였어요. 갈망이 생겨요. 먹고 싶다. 쉽게 포기가 안 돼요. 이제 자꾸 생각나요. 이제 먹었어요. 그럼 어때요? 이 과보가 유, 업을 지었으니까 다음으로 이어지겠죠. 이게 지금 생·노사예요. 또 태어나는 거예요. 다음생이에요, 이게. 그럼 전생에요 전생에도 이렇게 했겠죠. 똑같이 지금 최소한 애·취·유 했겠죠. 그게 무명으로 행한 거예요, 무지로. 고집멸도 4성제·12연기를 모르고 행을 했겠죠, 진리를 모르고. 그게 어떻게 됐어요? 그 행한 게 지금 이 식으로 이어진 거예요. 무명으로 행하니까요, 집착이 생겨서 의식이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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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을 또 5온에 또 집착이 생겨서 온 거예요. 그래서 5온에 대한 강한 업보를 갖고 있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8식 같다는 거예요 이거는. 업보를 갖고 있어요. 업보를 관리하는 의식이에요. 다음생으로 업보를 가지고 가는 의식이라니까요. 그래서 업보를 가지고 여기서 온 거예요, 이 식이. 무명·행. 그럼 이 무명·행이 별게 아니라 촉수애취유 한 거예요 전생에. 전생에 한 거를 지금 간단하게 무명·행 이런 거예요. “무명으로 네가 업 지었잖아. 치킨 먹었잖아” 이거예요. 치킨 먹었잖아. 그래서 너가 다음에는 이제 후라이드를 먹겠다고, 여기서는 오븐에 구운 걸 먹고, “여기서는 이제 후라이드를 먹겠다고 또 태어난 거 아니야. 다음에 찜닭을 먹겠다고 또 네가 태어나고.” 계속 이어지는 거예요 업이. 그 집착. 닭에 대한 집착이겠죠. 그럼 이게 5온에 대한 집착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전생에 무명·행을 했기 때문에 이 무명·행이 다른 게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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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수·애·취·유’죠. 이 ‘애·취·유’가 ‘무명·행’이죠. 무지로 사랑하고 집착하고 업을 저질렀죠. 그 무명으로 한 행위 때문에 그게 업이 돼서 태어났어요. 식이 명색, 5온을 갖추고 몸과 마음을 갖추고 여기에 또 태어났어요. 그래서 또 업을 지었어요. 그래서 다음생이 또 예약된 겁니다. 다음생으로 또 이어지는 거예요. 다음 식으로 또 이어진 거죠, 이 짓들이 사실은. 이 식으로 또 태어나서 또 생이라는 게 또 5온을 갖춘 걸 생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5온을 갖춰야 태어난 겁니다. 식만으로 말하는 게 아니고 5온이 갖춰지면 또 태어난 거예요. 또 엄마 뱃속에서 또 부풀어지고 있겠죠. 자라고 있겠죠. 예전에 유명한 시 있었지 않나요? 칼릴 지브란인가? ‘또 다른 여인이 날 낳으리라’ 시집 제목 기억하세요? 또 누군가 날 낳겠죠, 여인이 낳겠죠, 아무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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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연기 쉽죠. 이게 다예요. 그래서 이게 삼세에 걸쳐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무명·행’이니 ‘생·노사’니 이거는 생략된 말들입니다. 이 과정을 생략해서 이렇게 쳐버린 거예요. “다음생에 또 일어나서 괴로울 거야. 전생에 네가 무지로 인한 업을 지어서 이렇게 태어난 거야.” 이 소리밖에 없어요. 여기서 중요한 거는 모든 거를 이 인과 속에서 보고 있다는 거예요, 연기 속에서. 뭐 하나 고정된 게 없어요. 심지어 지금 여기서 말하는 이 식마저도 고정된 게 아닙니다. 고정된 식이 있는 게 아니고요. 이 식이 지금 8식과 나름 통하는 식이지만 8식마저도 우리 유식학에서 배웠죠. 폭포수처럼 흐르고 있는 의식이라고 그랬죠. 달라이 라마식 표현으로 하면 연기적인 의식연속체입니다. 이것도 사실은 지금도 매순간 계속 변하고 있는 거예요. 자꾸 달라이 라마께서는 열반의식을 자꾸 이렇게 설명하려고 해서 제가 반대한 거죠. 열반의식은 여래인데, 열반의식을 아뢰야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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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급하려고 그러시니까. 아뢰야식은요 생멸의 세계에서 계속 함께 무상하게 계속 생멸하면서 변하면서 지금 업을 관리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업 지을 때마다 계속 관리하는 업이 바뀌잖아요. 계속 들고 나고 하는 거예요 지금 이 8식 작용은. 그런데 꼭 8식도 아니고요, 식인데 8식의 유사한 식, 재생연결식이라는 게 붙어서 그 식이, 보세요. 여기서 이제 중요한 점이 나오는데 부처님이 이 12연기를 이렇게 쉽게 설명 잘해놓으시고 꼬이게 하나 해놓으신 게 있어요. 꼬이게 설명해 놓으신 게 있어요. 보세요. 간단하게 식이 명색을 낳았죠.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때 식은 8식에 해당되는 재생연결식이었어요. 재생연결식이 우리 명과 색을 낳았습니다. 5온을 낳았어요.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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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명색의 이 몸뚱이와 이 정신작용을 또 식별하는 게 식이죠. 그때는 우리가 유식학적으로 얘기하더라도 7식·6식에 해당되는 식이이겠죠, 이제 5식까지 포함해서. 이거 이해되세요? 식이 명색을 낳았다가 12연기인데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은 색이 식별되잖아요. 색과 명이 식별돼요. 명색이 다시 식을 낳아요. 이게 꼬이게 돼 있다고요, 갔다 또 왔다 하는 것같이. 12연기가 쫙 가는데 식과 명색 관계에 있어서는 재생연결식, 그래서 제가 구분하게 하려고 지금 8식·7식·6식·5식이라는 대승 이론을 써봤는데 원래 이제 초기불교에서는 다 6식이죠, 부파불교는. 6식 하나로 설명하니까 6식에서 명색이 나왔는데 명색이 다시 6식을 낳아요. 이해되시죠? 12연기 한 군데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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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하나만 유념하시면 됩니다. 식이 그래서 구분해야 된다는 거예요. 8식이 명색을 낳고 명색을 알아차리면서 7식·6식이 가동한다, 기능을 한다. ‘이거 내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기능한다 이렇게만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26:21 <명과 색의 상호 연기>
그래서 이거를 이 부분 하나만 지금 나중에 등장할 건데 그래서 이거 식이 명을 알아차리고 식이 색을 알아차리는데 또 명과 색도 서로 상호연기하고요. 그런데 또 명이 식별이 되고 색이 또 식한테 영향을 주니까 셋이 지금 서로 상호연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 구조를 아셔야 돼요. 이게 그림으로 지금 들어있는 게 찾아보세요. 이렇게 장수가 많아져가지고 제가 이거 다 그려놓은 게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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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어떠세요? 13페이지 보세요.
이 모든 거를 괄호 쳐서 알아차리고 있는 식이 또 있다. 됐죠. 이게 열반의식, 재생연결식, 6식·7식·8식 안 쓰고 해볼게요.
초기불교식대로 열반의식, 이쪽에 재생연결식도 벌써 부파불교 거지 부처님 말씀은 아니에요. 다만 중음신 같은 거, 일단 중음신 같은 존재로서의 식, 명색을 또 알아차리는. 그래서 우리가 흔히 아는 6식으로서의 식. 어때요. 대충 이런 구조가 나오죠. 그런데 아까 생각해 보시면 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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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온이죠. 여기 결국은 5온이니까 이게(식) 견분, 색이 상분을 대표하고, 명은 이 상분을 향한 심행 심소 마음작용을 대표한다. 이 셋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이렇게도 볼 수 있죠. 이곳 이 일체, 이 주객이 주·객이 찢어져서 주객 그리고 주관의 반응, 이 모든 것들을 통으로 2인칭으로 알아차리고 1인칭으로 안주할 수 있게 된다면 열반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서도 1인칭이 가능합니다. 이게 참나면 이거 에고잖아요. 여기는 순수자아, 예전에 후설식으로 말하면 순수자아, 여기는 경험자아거든요. 경험자아는요 1인칭이지만 2인칭이 될 수 있는 1인칭입니다. 왜? 순수자아한테는 파악되거든요, 대상화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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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자체로는 얘가 또 1인칭이에요. 견분이니까. 상분이니까 얘도 2인칭이고, 이렇게 1인칭 2인칭으로 따지면 마음작용이라는 것도 사실 다 2인칭이죠. 생각·감정도 다 내가 알아차리니까. 그렇죠. 이렇게 1인칭 2인칭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 식을 우리가 보통 이 견분을 나라고 집착하는 거거든요, 아니 식을. 식이라는 견분을 나라고 집착하는 겁니다. 그리고 상분이라는 대상을 남이라고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여기서 이 나라는 경험자아, 에고가 생기고요. 이것들 전체가 타자, 대상이 되고 타자가 되고 이 열반의 자아가 또 생기는 거죠. 열반의 자아, 이게 참나죠. 참나가, 순수자아가, 열반의 자아가 경험의 자아, 에고의 자아를 알아차리고 이 에고는 또 대상들을 알아차리고 있는 구조. 그런데 이 1인칭, 2인칭 관계 자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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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 안에 넣어서 “몰라” 해버리면 순수 열반만 남게 되는 거. 그게 지금 께왓다경의 상황이죠. 그러니까 이제 께왓다경에서 부처님이 왜 마지막에 한 번 의식을 한 번 더 때렸는지를 아시려면 이 의식은요 재생연결식에 해당되는 겁니다. 다시 읽어볼게요. 여기까지 보고 다시 보시면 어떻게 보이나 보세요?
30:22 <의식의 특징>
[대답] ‘의식’(열반의식ㆍ무분별지)은 볼 수 없고 무한하고, 모든 곳에서 ‘빛’이 난다(명색을 초월한 열반의식에 안주). 여기서 ‘지수화풍’(4대)은 견고하게 설 수 없으며(색色의 소멸). 길고 짧은 것, 미세하고 거친 것, 청정하고 더러운 것(명名의 소멸, 이원성의 소멸) 여기서 ‘정신과 물질’(명색名色, 5온 혹은 식온을 제외한 4온)은 남김없이 소멸한다. ‘의식’(5온의 식온, 명색을 발생시키고 대상화하여 집착하는 의식)의 소멸로 인해서, 여기서 이것(명색) 이 소멸한다(열반의식 안에서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名色은 다시 발생할 수 없으니 윤회의 흐름이 끊김).”]
의식은 볼 수 없고 대상화 안 되고 무한하고 모든 곳에서 빛난다. 모든 곳을 알아차리는 자리지 알아차려지는 게 아니다. 순수 1인칭 의식 자리이다. 여기서 지수화풍, 대상이 되는 지수화풍이라는 색도 소멸하고 모든 이원성이라는 개념도 소멸하고 정신과 물질작용도 남김없이 소멸한다. 여기서 한 번 더 쳐주는 게 지금 여기서는 5온의 소멸만 얘기했어요. 지금의 5온의 소멸만 얘기했어요. 지금 여기까지 스토리는 여러분이 지금 여러분 의식에서 일어나는 이 5온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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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수상행식의 현상을 통으로 깨어서 알아차리신 거예요. 지금 이 순간에 5온을 알아차리시고 지수화풍도, 길고 짧음이라는 개념도, 일체 개념도 거기에 대해서 일어나는 좋고 싫음이라는 모든 정신작용도 소멸됐다. “몰라”가 됐다는 걸 확인했죠. 열반에 도달했죠. 그런데 여기서 하나 부처님이 더 때리는 거예요. 12연기에서 확실히 벗어났다는 얘기를 하려니까 뭘 얘기를 해줘야 돼요? 지금 명색이 사라졌지만 다시 명색을 일으키는 게 식이죠. 이 식이 사라져야 다음생이 없다는 게 확보가 돼요. 그래서 지금 ‘의식이 소멸되면’이라고 한 번 더 때린 겁니다. 12연기 중에 이 식이 소멸돼야 이 이후가 없어지는 거예요. 지금 내가 열반의식에 안주했는데 이게 일시적인 안주가 아니라는 걸 말하려면, 일시적으로 안주는요 열반에 안주했다가 다시 튕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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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수다원과예요. 오래 머물러요 좀 더. 사다함과예요. 이제 더 훨씬 안주해 있어요. 아나함과예요. 완전히 들어앉으면 이제 아라한이 돼요. 아라한이 돼도 아직 색수상행식이 작동해요. 유여열반(有餘涅槃)이거든요. 지금 유여열반에서 무여열반(無餘涅槃) 넘어가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완전히 안주했을 때, 마지막 딱 죽을 때 어떻게 해야 돼요? 마지막 의식이 소멸하면서 재생연결식이 사라져야 돼요. 소멸돼야 돼요. 그러니까 무명·행에 의해서 업보를 가지고 다음 명색을 꿈꾸는 의식, 즉 우리 아뢰야식의 업보가 지워져야 된다고요. 그래야 다음생이 끊어지죠 확실히. 그러니까 ‘의식이 소멸하면’이라는 걸 강조한 거예요. 그러면 그 뒤에 명색이 완전히 끊어집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된다. 왜 이 구절이 있는지 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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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5온만 얘기한 게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연기의 확실한 종결을 얘기한 겁니다. 그러면 확실하게 끊어진다. 여기에서 “마지막 의식을 무여열반에 들 때” 각묵 스님 번역에 이렇게 된 것 같은데요, 해설에는. “마지막 아라한 될 때 이제 소멸되는 의식”이라든가 이런 식으로. 지금 그게 이제 그 말이 틀린 건 아닌데 정확하게 이 식은요 12연기에서의 식이에요. 왜냐하면 12연기에서 5온이 사라지려면 식이 사라져야 돼요. 12연기식 연기론은요 이것이 있으면 이것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명색이 우리 태어나는 거라고 그랬죠. 새로 태어나는 거. 5온이 태어나는 건데 명색을 안 태어나게 하려면 식이 소멸돼야 됩니다. 그래서 식이 강조된 겁니다. 식이 소멸되면 명색이 사라진다, 완벽하게. 그런데 “무한하게 빛나는 의식”을 앞에 설정했잖아요. 여기는 여래인 거죠. 무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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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곳에서 빛나는 의식은 소멸될 수가 없잖아요. 그렇죠. 5온의 식만 사라지는 거죠. 즉 5온에서의 이 식과 명색은 서로 이렇게 연기 속에 있는 거잖아요 이미. 왜 여러분이 소멸될 거랑 소멸되지 않을 걸 아시냐면요 여기(절대계)는 상호관계가 아닙니다. 여기(현상계)는 다 상호관계입니다. 부처님은 “상호연기 하는 것들은 이 모든 것들은 소멸돼야 된다”고 봐요. “그래야 열반에 도달한다.” 이제 부처님 머릿속 확실히 보이죠. 눈빛들이 힘을 얻으신 눈빛들이세요. 지금 이 강의 안 듣고요 불교 평생 해보세요. 그러니까 “난 초기불교에 관심 없어”는 괜찮아요. “부처님이 왜 그러셨을까?”를 알고 싶다면요 “그럼 니까야를 보면 되지. 아함경을 보면 되지.” 분량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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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초월입니다. 한 니까야만 이만큼이에요, 책이. 그래서 상윳따 니까야인가 제가 한번 사봤어요. 이렇게 책 하나에 2십 몇 만 원입니다. 왜? 이게 한 7권 분량을 압축해 놓은 거예요. 그럼 이게 4부가 있어요. 거기에 또 별개로 법구경, 우다나 이런 또 작은 소품들 많아요. 이 수많은 경전 속에서 답을 찾으려면 머리 아픕니다. 그러니까 스승이 필요한 거죠. 길 안내가 필요한 거죠. 이렇게 이렇게 해서 부처님 어떤 분이다를 제일 빨리 아시면 돼요. 왜 이게 이 방식이 옳으냐?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이 1주일 만에 아라한이 됐어요. 복잡했겠어요? 전혀 안 복잡했다는 거예요. 딱 오자마자 “야, 앉아.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무상해 안 무상해?” “무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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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거야 내 거야? 괴로워 안 괴로워?” “무상·고·무아입니다.” 무상·고·무아. 왜 무상·고·무아냐? 서로 연기하니까. 이거 멈춰야지, 연기. 이게 윤회예요. 지금 윤회가 생사의 윤회도 윤회입니다만 한 찰나 한 찰나가 서로 지금 윤회하고 있는 거예요. 연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전(前)찰나에서 딱 끊어버리면 후(後)찰나 안 일어나게 하면 끝나는 거예요. 식이 딱 끊어지면, 다음 찰나 생각이 안 일어나면 여러분 열반에 드신 거예요. 그리고 그게 쭉 이어지면 끝난 거예요. 그게 일정 시간 있다가 다시 업보가 올라오면 아직 덜 열반에 완벽히 못 든 거니까 수다원 사다함 이렇게 레벨을 부여받는 거고 완전히 들어앉아서 다시 이 5온의 세계에 접속이 안 되면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었다고 하는 거예요. 남은 게 하나도 없는 열반, 즉 5온과 12연기 밖으로 완전히 사라진 열반이 무여열반입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돌아가실 때 무여열반에 드셨다고 해서 열반에 드셨다고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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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5온을 불태워버렸다. 화장하면서 5온을 이제 다 소멸시켰으니까 이제 다시 오지 마시라고 열반에 드셨다고 하는 거예요, 초기불교는. 근데 대승은 안 그러죠. 빨리 오라고 그러죠, 화장하면서. 왜냐하면 보살사상과 이게 섞인 거죠. “열반에 드셨다”고 하면서 “빨리 오시라”고 하는 거예요. 초기불교는 진심으로 열반에 드신 분들을 화장하면서 시작된 예법이겠죠, 아라한들이 많았으니까 초기에는. 1250 아라한까지 나오니까. 그렇게 아라한이 많았어요. 근데 보통 아라한들이 1주일, 보름에 된 아라한들이 많아요 경전에는. 어려우면 그렇게 못합니다. 정확히 딱 1인칭 관점에서 자기 몸과 마음을 일체를 2인칭으로 바라보다가, 이 모든 2인칭의 세계가 무상·고·무아의 연기세계라는 걸 알고 불변의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고 내려놓음으로써 영원불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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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들어가는 거예요. 다만 영원불변의 세계라고 그렇게 강조를 안 한 것뿐이에요 부처님은. 그걸 또 하나의 상이 생겨서 형이상학 체계가 될까 봐. 이런 저의 께왓다경에 대한 이런 해석이 가장 지당한데도, 우리 산스크리트어 전문가가 검증했잖아요. 근데 지금 전문가라는 분들이요 자꾸 왜곡되게 번역을 해요, 이 구절을. 그런데 우리 해석이 맞다는 걸 제가 보여드리려고 ‘보행왕정론’을 가져온 겁니다. ‘보만론’이라고 불리는데요. 연기론 하시는 분들이 가장 중시하는 용수보살, 용수보살이 당시 께왓다경을 번역해서 자기 경전에 넣은 거예요. 그럼 이분 해석하고 우리 해석이 다른가 같은가 보시면 알겠죠. 그러면 우리 해석이 타당하다는 게 입증되잖아요. 보세요. 용수보살은요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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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볼 때 고정·불변의 실체를 반대하고 부처님을 닮으려고 했던 분이에요. 그래서 부처님처럼 모든 형이상학 체계를 다 공격하셨어요 용수보살은. 다 박살내버립니다. 다만 그 방식이 언어를 해체하는 방식이라 너무 무리했어요. 부처님은 적당히 하셨잖아요. 딱 자명한 선에서만 공격하셨는데, 연기의 세계를 강조하시고 고정·불변의 실체에 대해서 적당한 수준에서 비판만 하시고 대부분 침묵을 지키시고 하셨는데 용수보살은요 아예 고정·불변한 이 언어가 가져오는 이 고정·불변성 있죠. 이름 붙이면 이름은 다 고정돼 있잖아요. 이 친구는 연기하고 있어요. 근데 연기하다가 이 친구는 원래 컵이 아니었습니다. 연기하다가 컵 모양을 갖게 됐어요. 그때부터 우리가 뭐라고 불러요? 컵이라고 불러요. 그럼 컵 그러면요 컵은 고정·불변의 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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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은 컵 아닌 게 될 수가 없어요. 그렇죠. 컵이라는 이름은요 컵 아닌 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컵은 고정·불변인 거예요, 이름은. 이름만 그래요. 이 친구는 안 그래요. 계속 변해가요. 이게 이제 깨지면 아무도 컵이라고 안 불러요. 쓰레기라고 하죠. 그때부터 이름을 쓰레기라는 이름을 갖게 돼요. 저 그럴 때 많아요. 이렇게 딱 김밥 같은 걸 먹다가요 버려요, 쓰레기통에. 딱 버릴 때 느껴요. ‘내가 쓰레기를 먹었나?’ 왜냐하면 방금 여기까지는 음식이었거든요 맛있는. 그런데 쓰레기통에 먹다가 탁 버리는 순간 얘는 쓰레기가 돼요. 여기서 논리에 빠진 분들은요, 논리의 세계에 빠진 분들은 이 추상적인 개념에 빠져버리면 실상이 안 보입니다. 실상은 변하고 있어요. 이름만 그렇게 붙인 거예요 부득이하게. 어쩔 수 없이. 이름 없이는 구별이 안 되니까. 이 연기적 개체성도 구별이 안 되니까 붙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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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방편으로 알고 쓰시면 돼요. 그래서 나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고정·불변의 나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이름만 그래요. 근데 이름 없이는 부처님이 한 말씀도 못하죠. 아니 부처님이요 “호흡에 들숨 날숨에 집중해라.” 그러면 “들숨이요?” 이러시면 어떻게 해요. 여러분이 “들숨이요? 들숨이라고 하면 고정·불변의 들숨은 날숨이 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이게 ‘제논의 역설’이에요 예전의. “거북이가 나보다 빨리 출발했을 때 나는 거북이를 이길 수 없다.” 실제로는 이겨요. 근데 논리의 세계에서는 내가 한 걸음 나갈 때 거북이도 조금 나갈 것이다. 나도 나가고 거북이도 나가고 하면 논리적으로는 못 따라잡는 거예요. 또 이 뭐죠 “화살은 날아갈 수 없다.” 유한한 거리인데 날아가는 이 거리를요 논리의 세계에서는 무한하게 쪼갤 수 있습니다. 무한하게 쪼개버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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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이 못 날아가요 저기까지. 그렇죠. 논리는 쪼갤 수 있어요. 그러면 이게 뭔 차이냐면 개념의 세계와 실상의 세계를 혼동한 겁니다. 그러면 논리가 그렇게 역설이 나와요. 어떤 사람이 막 논리적으로 절대 화살은 나를 맞출 수 없다. 화살이 여기서부터 나까지 날아오려면 쪼개고 또 쪼개고 그 구간을요 쪼갠 구간을 아이패드 같은 걸로 또 쪼개고 또 벌리고 또 벌리고 하면 이 모든 무한한 거리를 화살이 날아와서 날 맞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거기 서 봐” 이러면 되죠. 그럼 “서 봐” 할 때 설 수 있을까요? 논리랑 실상은 다르다. 비슷해요. 논리와 실상은 달라요. 다른데 알고 쓰는 거지.
42:49 <용수보살의 방편>
근데 용수보살이 한 일은 논리를 공격해서 논리를 통해서 공(空)을 보여주고 싶고 이렇게 연기(緣起)를 보여주고 싶고 무자성(無自性)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예요. 그럼 다 해체해버리면요 그러고 나면 열반에 들어가겠죠. 용수식 전법인데 석가모니식 방편을 쓰셨지만 너무 과하게 썼다. 너무 여기저기 다 불을 질러서 말도 못하게 만들어 놨어요. 그건 아니죠. 석가모니는 보시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너 다음에 어디로 태어난다.” 이런 말까지 해요. 그럼 너를 전제해요. 보세요. 심지어 “나는 해탈을 이루었다. 나는 이제 육신을 벗는다.” 나라는 말을 계속 쓰세요. 이해되시죠. 그럼 그건 방편이에요. 쓰시면 돼요. 알고 쓰시면 돼요. “연기 속에 있다. 고정된 건 하나도 없다”라는 걸 알고 쓰시면 방편이 되고, 모르고 쓰면 무지가 되는 거죠. 그 차이입니다. 한번 보시죠. 다만 용수보살이 그렇게 고정불변의 실체를 부정한 분인데도 이 께왓다경을 어떻게 번역해서 넣었는지 한번 보자고요. 그러면 우리 번역이 맞는지 틀린지 더 인정받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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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보만론寶鬘論”)
93. “흙과 물과 불과 바람
길고 짧은 것, 미세하고 거친 것과
선善 그 자체 등(을) ‘의식’(識) 속에서
남김없이 한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94. ‘의식’(識)은 의지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無轉)
일체의 주인 된 자이니 바로 그것에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은 (그) 머물 곳을 얻을 수 없습니다.
95. 바로 이것에서길고 짧음과
미세하고 거친 것, 선(善)과 불선(이 사라지게 됩니다.)
바로 이것에서 이름(名)과 형색(色)들이 역시
남김없이(無餘) 사라지게 됩니다.
(용수 저, 신상환 역, “보행왕정론”, 도서출판b)]
흙과 물과 불과 바람, 께왓다경이라는 거 정확히 아시겠죠. 다음까지 보면 더 정확합니다. 길고 짧은 것, 미세하고 거친 것, 선(善) 그 자체 등. 보통은 이제 선한 것과 더러운 것 이런 거였겠죠. 불선한 것. 이걸 좀 생략한 거죠. 이런 등을 의식 속에서 남김없이 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의식 속에서 이것들이 남김없이 소멸된다는 거죠. 의식은 의지하지 않고.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연기 밖이죠. 용수보살이 이 정도 말했으면 연기 밖이죠. 의지하지 않고 존재하는 게 있으면 안 되잖아요 원래. 의지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변화도 없어요. 일체의 주인 된 자다. 일체를 알아차리는 자다 이거죠. 자이니 바로 그것에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은 머물 곳을 얻을 수 없다. 거기서 일체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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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것에서 이 의식에서 길고 짧은 것 미세하고 거친 것, 선과 불선이 사라지게 됩니다. 바로 이것에서 이름과 형색들, 명색 역시 남김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저기 중관학당 운영하시는 신상환 박사님이 번역하셨죠. 어때요? 께왓다경 우리가 정확히 본 거 맞죠. 이건 확인 차 넣어놓은 겁니다. 께왓다경을 정확히 푼 거 맞다. 심지어 용수보살마저도요 언어를 다 해체할 때 목적이 뭐였냐면요 언어를 해체하고 이 열반의식에 들어가게 하려고 한 거예요. 용수보살의 제일 주장이 이겁니다. “언어의 희론, 언어유희에서 떠나서 반야지·무분별지에 들어가라.” 거기 가야만, “언어의 세계에서는 공성을 개념적 분석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희론을 떠나서 반야지·무분별지에 들어가야 공성을 직관할 수 있다.” 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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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분별지·반야지라는 게 뭐겠어요? 이 의식이에요. 열반의식. 지금 이 보행왕정론에서 이 의식은 뭐라고 풀면 되냐면요 반야지(般若智)라고 풀면 됩니다. 그럼 용수보살의 평소 주장이에요. 언어를 떠나서 반야지에 들어가라. 이거 달라이라마 존자도 강조하는 겁니다. 다만 달라이라마 존자는 거기서도 반야지를 또 “무상한 연기적 의식연속체”라고 얘기하려고 그래요. 미치겠어요. 그러니까 잘못된 거예요. 이건 용수보살을 잘못 배운 거예요. 석가모니를 잘못 배운 거예요. 그러니까 연기를 쓸 때 써야지 열반에다가 연기를 들이대는 분들이 있어요, 지금 여기다가. 연기법을 여기다 써야 되는데 열반에다 들이대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 그러니까 열반도 법 아닌가? 이렇게 해서. 그러니까 일체개고(一切皆苦) 보세요. 일체가 고통이다. 일체가 고통이다. 제법이 만법이 무아(諸法無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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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행이 무상하다(諸行無常) 할 때 이 3개가 가리키는 바가 다르면 되겠습니까? 근데 왜 제법(諸法)이라고 했겠냐는 거예요. 법에는 무위법인 열반도 들어가지 않겠냐는 거예요. 이게 지금 불교의 논리예요, 학자들의. 미치겠어요. 그러니까 이게 사람 말 뜻 못 알아들으면요 미칩니다. 지금 부처님 표현을 계속 바꾸고 있잖아요. “일체(一切)는 고통이다. 제행(諸行)은 무상하다. 제법(諸法)은 무아다.” 그런데 부처님이 통틀어서 “무상·고·무아를 떠나라”고 그랬어요. 그럼 열반도 떠나야겠네요, 거기다 무상 하나에다 열반 끼워 넣으면. 말이 안 되는 소리죠. 이번 기회에 아무튼. 원체 많아가지고 이상한 얘기들이. ‘범천의 초대 경’ 여기까지 한번 볼까요. 여기까지 보고 쉴게요.
[* 범천의 초대 경, 맛지마 니까야
특징도 한계도 없이 모든 곳에서 ‘빛나는 의식’(열반의식)이 있다.
* 빛나는 마음의 경, 앙굿따라 니까야(전재성 역)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그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로 오염된다.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그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에서 벗어난다.]
맛지마 니까야에 한 번 더 나옵니다. 여기서는 좀 달라요. “특징도 한계도 없이 모든 곳에서 빛나는 의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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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특징도 한계도 없이 모든 곳에서 빛나는 의식이 있다.” 비슷하죠. 아까 용수보살도 “의지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일체의 주인 된 자.” 그리고 ‘빛나는 마음의 경’에는요 앙굿따라 니까야에 전재성님이 번역하신 건데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알아차리는 거라는 거예요. 그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로 오염된다.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그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에서 벗어난다. 즉 번뇌는 오고 가는 거예요. 이걸 한문으로 ‘객진번뇌(客塵煩惱)’라고 합니다. ‘객’ 손님이라는 거예요. 손님처럼 오고 갑니다. 빛나는 마음은요 오고 가지 않아요. 그렇죠. 이 논리에서 빛나는 마음은 항상 빛날 뿐이에요. 번뇌가 객으로서 왔다 갈 뿐이에요. 그렇죠. 왔다 가는 건 연기의 세계입니다. 오고 감이 없는 거는 열반의 세계고요. 이렇게만 구분하시면 좋겠습니다. 10분 쉬고 다시 하겠습니다. 지금부터는요 글 하나하나 읽으면서 지금 5온·12연기만 적용하면 돼요. 5온과 12연기면 다 풀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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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취) [초기불교 특강] 2500년 만에 밝혀지는 열반과 무아의 실체 2강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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