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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몰락
팔레스타인의 심상치 않은 상황과 12군단의 패배를 보고받은 황제 네로는 서둘러서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 장군에게 6만 명의 병력을 배당했다. 다양한 전쟁에서 이미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입증한 베스파시아누스가 갈릴리와 유다 지역의 격렬한 반란을 진압해야 할 임무를 선두에서 떠맡게 된 것이다. 그가 이끄는 두 개의 군단이 갈릴리 지역을 향해서 출발했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당연히 격렬한 저항을 예상했지만, 유대 반란군들은 강력한 로마 군대를 만나자마자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도 못한 채 그저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로마군들은 신속하게 주요 도시들을 장악해나갔다. 갈릴리와 다볼산 지역, 그리고 훗날 요세푸스라는 이름의 역사가로 유명해진 요셉 벤 마티아스(Joseph Ben Matthias)가 제사장으로 있던 요타파타가 로마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여세를 몰아서 예루살렘을 공격할 채비를 하고 있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로마로부터 급한 전갈이 당도했다. 네로 황제가 정적들과의 싸움에서 밀리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희소식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의 자리를 꿈꾸면서 로마로 돌아갔다. 68년 6월의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이 바라던 대로 로마의 황제가 되었지만,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잊지 않았다. 그는 아들 티투스(Titus Flavius Vespasianus)로 하여금 자신의 임무를 대신하게 했다. 티투스 장군은 70년 봄에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같은 해 8월 5일, 예루살렘 성전이 불에 타서 무너져 내리고 오직 성전의 서쪽 벽만 남았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는 게 바로 그것이다.
4년 동안 반란군의 요새들이 차례차례 로마군에게 접수되었다. 유대 반란군은 계속해서 밀리다가 마침내 사해 부근에 우뚝 솟은 마사다(Masada)를 최후의 항전 터로 선택했다. 그곳은 과거 헤롯 대왕이 가족들과 함께 피신하려고 시설을 갖춰둔 천혜의 요새였다. 하지만 주변을 물 샐 틈 없이 포위한 채 차근차근 경사로를 건설해서 숨통을 조여오는 로마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일어났던 1차 유대 반란은 그렇게 진압되었다.
로마와 유대 전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사실, 피비린내 나는 유대 반란 전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가이사랴의 감독을 지낸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의 기록에 따르면, 초대 교회 지도자였던 야고보가 처형되자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66년 11월경에 요단강 건너편 펠라(Pella)로 미련 없이 이주했다. 당시 예루살렘은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일부가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전쟁을 모면하려고 동족을 버리고 안전한 도시로 옮겨갔다는 다분히 현실적 선택에 따른 도덕적 비난을 의식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유세비우스의 주장과 달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부가 펠라로 이주했고, 나머지가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유대 전쟁에 참여했다는 절충안을 제시하는 이들도 있다.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유대 전쟁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가 과거처럼 제대로 구심점 역할을 못했을 뿐 아니라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이 성장을 거듭한 것을 고려한다면 교회의 핵심 지도자들이 전쟁을 겪지 않은 게 분명하다.
전쟁 여파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근근이 연결해주던 실낱같은 관계마저 단절되었다. 양측의 관계를 먼저 서둘러서 정리한 쪽은 유대인들이었다. 반란이 진압되자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런 비극을 또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로마 당국의 의심을 살 수 있는 기독교를 비롯한 외곽 세력을 회당에서 몰아냈다.
기록에 따르면, 90년경 오늘날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남쪽에 있는 야브네(Yavene)에 해당하는 얌니아(Jamnia)에서 바리새인들이 주축이 되어서 의회를 구성했다. 1세기 말 의회는 유대 경전의 목록을 결정하면서 회당에서 암송되는 열여덟 개의 축복 기원문 가운데 열두 번째 기도에 배교자들, 즉 ‘나사렛 사람들’을 저주하는 문장을 추가했다. 물론 ‘나사렛 사람들’이란 나사렛 그리스도인들을 뜻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꾸로 유대인들을 ‘주님의 살육자’(닛사의 그레고리우스)나 ‘유다의 형상에다 기도가 당나귀 울음소리와 비슷한 뱀’(히에로니무스)이라고 조롱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와 유대인들의 회당은 공식적으로 결별하게 되었다. 이후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6년 4월 13일 로마의 유대교 회당을 공식적으로 방문해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특별한 형제들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형”이라고 부를 때까지 거의 2천 년 동안 양측은 서로 화해를 모른 채 살았다.
박해를 감내하는 그리스도인
69년부터 81년 사이에 로마 황제들은 언제나 기독교 교회를 무시하는 정책을 고수했다. 그런데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차남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81~91)만큼은 전임자들과 성향이 달랐다. 그는 형, 티투스 황제가 병을 얻어서 갑작스레 세상을 뜨는 바람에 생각지도 못한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역대 로마 황제 가운데 남다른 능력을 발휘한 티투스 황제는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에 따른 폼페이의 비극과 80년 로마에서 발생한 사흘간의 대화재라는 엄청난 재난을 무난히 극복했지만, 여행 중에 얻은 열병으로 재위 2년 만에 숨을 거두었다.
형의 뒤를 이어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도미티아누스는 살아 있는 신이 되고 싶었다. 그는 다른 황제들처럼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기다릴 만큼 인내심이 부족했다. 도미티아누스는 황제의 환심을 사려는 아첨꾼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사람들에게 재위 기간 동안 자신을 ‘주인이자 신’으로 부르도록 요구했다. 황제 중심의 국가 종교에 불참하고 국가의 지시를 거부하면 국가에 대한 범죄로 간주 되었다. 그런데 권력에 심취한 황제는 거기서 한술을 더 떠서 사람들에게 공개적인 선서를 요구하기까지 했다.
도미티아누스의 과도한 요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황제는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사라졌으니 로마 당국에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칙령을 발표했다.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가 황제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반발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집단행동을 로마 황제의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으로 간주한 도미티아누스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체의 유대 풍습을 금지한다는 법령을 제정하고 시행했다.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역사상 처음으로 이탈리아를 벗어난 지역에서까지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한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했지만, 249년까지 어떤 황제도 기독교를 로마 당국을 상대로 조직적인 반역 행위를 도모하는 위험한 집단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는 트라야누스(Trajanus, 98~117 재위)의 즉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현재 튀르키예에 속한 비티니아의 총독 플리니우스(Plinius)는 황제 트라야누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플리니우스는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을 처리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보고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 번의 기회를 허락했다.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누구든지 석방했다. 그리스도를 저주하지 않는 시민들은 로마로 압송해 재판을 받게 했다. 그 이외는 즉시 사형에 처했다. 트라야누스는 플리니우스의 깔끔한 일 처리 솜씨에 갈채를 보내면서 그리스도인을 사냥하듯 색출하지 말고 제보가 있는 경우에만 처벌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계속해서 플리니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믿는지 알아볼 셈으로 인근 교회에 출석하는 두 명의 여자 집사를 체포해서 심문했다. 하지만 소득은 없었다. 결국 그는 황제에게 자신은 ‘이상한 미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 기독교가 이해할 수 없는 미신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남녀가 소위 그 미신을 포기하는 대신에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유명한 서머나의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of Smyrna)였다. 유세비우스가 「교회사」에서 폴리카르푸스에 대해서 소개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서머나의 폴리카르푸스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진 뛰어난 목회자였다. 오늘날 튀르키예의 남서쪽에 위치한 이즈미르(Izmir)에 해당하는 서머나의 경기장에서 그리스도인 몇 명이 처형될 예정이었다. 그때 경기장에 모여 있던 군중들이 한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무신론자들을 쫓아내라! 폴리카르푸스를 찾아내라!” 앞에서 설명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여러 신들을 부정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여러 신들을 부정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무신론자로 분류하고 있었다.
당국은 폴리카르푸스의 시중을 들던 사람들을 잡아다가 그가 피신한 장소를 털어놓을 때까지 고문을 가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노년의 폴리카르푸스는 별다른 저항 없이 스스로 붙잡혔다.
폴리카르푸스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던 총독은 재판정에서 그를 어떻게든 회유해보려고 노력했다.
총독이 말했다. “나이를 생각하라. ‘무신론자들이여 물러가라!’고 말하라.”
총독의 회유는 무척이나 집요했다.
“맹세하기만 하면 그대를 풀어주겠다. 그리스도를 저주하라.”
군중들 역시 한 음성으로 외쳤다. “저주하라! 저주하라!”
폴리카르푸스는 주변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군중들을 향해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내가 86년 동안 그리스도를 섬겨왔지만, 그분은 내게 단 한 번도 섭섭하게 하신 적이 없었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분을 모욕할 수 있겠소?”
더 이상 타협은 불가능했다. 병사들이 화형대에 묶으려고 하자 그가 말했다.
“묶지 말아 주시오. 이 불로 나오게 하신 그리스도가 역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이오.”
결국 폴리카르푸스는 미동도 하지 않고 산 채로 화형을 당했다.
신앙의 옹호자들
2세기 중반에 들어서자 기독교 학자들은 비판자들이 자신들을 상대로 퍼붓는 비난과 오해, 그리고 근거 없는 공격을 상대로 일일이 응대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이방 종교들의 다신론이나 신들에 관한 추잡한 일화를 소개하는 신화, 그리고 피로 얼룩진 이방 제사나 동물숭배는 미신이며 실제로 악마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거론했다. 작가이며 학자인 그들을 사람들은 변증가(辨證家)라고 불렀다.
처음에 변증가들은 로마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의도가 없었다. 대부분이 자유롭게 그리스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그들은 일반인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이 범죄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스식 개념들을 빌어서 입증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교회를 변호하는 글을 직접 황제에게 보낼 때도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그리스 철학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는 기독교를 합리적으로 설명해주고,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도록 납득시키는 것이었다.
변증가들 가운데는 팔레스타인 출신 유스티누스(Justinus, 100~165)가 유명했다. 유스티누스는 주로 로마에서 활동하면서 그리스 철학을 적극 수용했다. 그리스도인들이 플라톤을 비롯한 스토아 철학이나 그리스 신화에 비판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유스티누스가 그리스 철학을 선호한 이유는 이랬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헤라클레토스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그리스의 이교 철학자들은 하나님의 우주적 말씀의 희미한 그림자를 발견했다. 이 우주 질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육신이 되었다.
따라서 그는 이교 철학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반드시 기독교 신앙과의 어떤 접촉점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이교 철학자들을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기독교를 진정한 철학으로 간주한 것이었다. 유스티누스는 그리스식 세계관을 기초로 성서의 개념들을 이해했다.
그렇다고 해서 유스티누스가 이교의 철학을 자신의 신앙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것은 그들의 출신이나 언어 또는 옷 입는 습관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의 법을 따르지만, 법보다 높은 삶의 방식을 따릅니다. 그들은 모두를 사랑하지만, 모두로부터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이름도 없으며 저주를 받습니다. 그들은 죽음으로 내몰리지만,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안에 있지만, 이 세상의 것은 아닙니다.”
누구보다 고집이 세기로 유명했던 이 변증가는 그리스도와 로마의 여러 신들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도록 요구받자 지체 없이 그리스도를 선택했다. 결국 그는 스토아 철학을 신봉하던 아우렐리우스 마르쿠스(Aurelius Marcus) 황제의 지시로 참수당했다. 165년의 일이었다. 얼마 뒤에 사람들은 그를 순교자 유스티누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유스티누스가 발전시킨 기독교 철학은 3세기 초반에 교부들 가운데 진정한 천재로 인정받는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Origenes)가 계승했다. 오리게네스는 기독교와 그리스 문명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즉 기독교 안에서 그리스 문화를 수용하는 것은 물론 더 나가서 그것을 초월하고 지양하기 위해서 자신의 열정을 불태웠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64년부터 4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기독교의 신앙을 가지려면 그에 앞서 목숨을 잃어도 좋다는 각오를 해야 했다. 250년 이전까지의 박해는 제한적이고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유대교’라는 용어에 맞서 ‘기독교’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던 안티오크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나 서머나의 폴리카르푸스 감독, 그리고 블란디나(Blandina), 페르페투아(Perpetua), 펠리키타스(Felicitas)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들이 박해를 받고 순교했다. 순교를 겨우 모면한 젊은 여성들은 사창가로 팔려 가야 했다.
하지만 이런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예상하지 못한 속도로 늘어갔다. 그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교회와 함께하기 때문이라는 게 그리스도인들의 해석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지중해 일대 사람들에게 기존의 전통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영적 관심과 삶의 지침을 제시함으로써 높은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 역시 또 다른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제국의 시민들에게 제시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종교적 교훈을 빼놓는다면 급속한 성장의 배경을 제대로 설명할 방법이 없다.
기독교는 로마제국에 일종의 도덕적 지침을 제시했다. 2세기 중반이 되자 로마 당국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배격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도덕법을 접한 적이 없는 시민들도 그랬다. 시민 가운데 유대교가 주장하는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추종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들은 할례의 끔찍한 고통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정식으로 유대인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회당에 재정적 도움을 베푸는 선에서 만족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기독교는 그 틈새를 적극적으로 파고들었다. 이방인들이 보기에 기독교는 유대교와 달리 고통스러운 할례의식을 거치지 않고서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게 커다란 매력이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들의 우월한 도덕적인 행동은 법이나 관습, 혹은 계급에 근거한 윤리보다는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일반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태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기존의 종교는 상류층 사람들에게 도시와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려면 빵과 서커스에 돈을 써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교회는 여유 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게 마땅하다고 가르쳤고 그대로 실천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들은 평등을 실천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던 여성에 대한 견해는 로마인들의 그것과 분명히 달랐다. 로마인 가장들은 가족 모두에게 체벌을 가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을 갖는 것은 물론, 장애아처럼 원하지 않는 아이가 태어나면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은 채 내다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달랐다. 기독교 교회를 이끌어가는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호의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자기 집을 예배 장소로 제공할 정도로 부유한 여인들이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었다. 기독교 공동체가 여성을 존중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성을 존종하던 예수님의 교훈과 삶을 그대로 실천했다.
실제로 예수님은 여성을 열등하게 간주하는 유대인 남성들의 편견에 적극적으로 도전했다. 이것은 당시 유대교 랍비들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랍비들은 여성을 인격체로 대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들과 직접 대화하고 가르쳤다. 여성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자리를 뜨지 않았고, 그리고 부활의 소식을 접했을 때도 역시 누구보다 먼저 믿고 사람들에게 전했다. 세월이 흐르고 교회의 직제가 강화되면서 서서히 변질되기는 했지만,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처럼 여성을 존중했을 뿐 아니라 동역을 허락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인격적인 신을 제시했다. 로마의 신들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비인격적 존재였다. 반면에 기독교는 신적 존재와의 직접적 교제는 물론이고 그 이상의 무엇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을 이해하고 고통에 동참하는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간주했다. 이것은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의미가 있었다.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골의 리옹에서는 블란디나라는 장애인 여성 노예가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고문을 당했다. 그녀는 황제에게 분향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병사들은 블란디나를 경기장으로 끌고 가서 벌거벗긴 채 십자가에 매달고 굶주린 맹수를 풀었다. 그런데 맹수는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병사들은 그녀의 피부를 모두 벗겨내고 채찍질하고 나서 불에 달군 석쇠에 올려놓았다. 만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상처 입은 몸을 황소 우리에 내동댕이치자 성난 황소들이 들이받았고, 결국 그녀는 순교했다. 숨죽이고 지켜보던 그리스도인들은 블란디나의 죽음에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예수를 목격했다. 자신들처럼 야유를 당하고, 고통을 겪고, 슬퍼하던 예수님이 그곳에 있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진 신체의 고통은 오히려 용기로 바뀌었다.
아프리카 카르타고에도 3세기 초반에 박해가 몰아닥쳤다.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45~211 재위)의 칙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페르페투아를 비롯해 다섯 명의 그리스도인이 투옥되었다. 로마 당국은 연로한 아버지를 내세워 신앙을 포기하도록 종용했다.
페르페투아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이 그릇을 보세요. 이것이 물그릇이거나 다른 무엇이거나 상관이 없을까요? 이것이 본래의 그것과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나서 말했다.
“그렇다면 저도 저의 있는 그대로의 이름인 그리스도인 말고 다른 어떤 이름으로 제 자신을 부를 수는 없어요.”
페르페투아는 자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버지를 위로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는 죽음이 기다리는 원형경기장으로 걸어 나가서 서툰 검투사의 검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댔다.
박해가 가해지면 가해질수록, 그래서 고통의 강도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그리스도인들은 그만큼 더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한 예수님과 하나 됨을 극적으로 경험했다. 극심한 신체적 고통은 그들과 예수님을 잇는 매개와 교회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이렇게 말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