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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조 강의②]
<2> 단시조 창작 교실
1) 시조(時調)는 천년을 넘어 맥이 빛나는 우리 시형
우리 시조는 신라의 향가에서 발원하여 고려 말에 뿌리를 치고 발아(發芽)하여 조선조를 빛낸 우리 고유의 시형이다.
마음이 어린 후니 하난 일이 다 어리다.
萬重 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난
지난 닙 부난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화담 서경덕 -막연한 기다림과 그리움
서화담이 사제지간인 황진이를 기다리며 쓴 시조이다. 초장에선 스스로 어리석다 할 만큼 강렬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중장에선 만중운산이란 둘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공간적으로 걸쳐놓고 현실적으로 불가(不可)한 일임을 상정한 다음 종장에서 그래도 황진이가 오지 않을까 일말의 그리운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紅顔은 어듸 두고 백골만 누웠나니
잔 잡아 勸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백호 임제 -인생무상감
앞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황진이와 관련된 작품이다. 당대의 문장가 임제가 술을 매개로 황진이 무덤에 들려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시각적 이미지를 통한 대조적 표현 기법(청초⇔홍안, 홍안⇔백골)으로 표현을 하고 있다. 초, 중장은 설의적 의문문으로 하여 인생의 무상감을 표출해 보이고 있다. 평안도 관찰사로 가는 도중에 송도에 들려 황진이 무덤에 가 슬퍼한 것으로 이로 인해 파직(罷職)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2) 시는 크게 정형시와 자유시로 구분한다.
시조는 정형시이다. 이 정형시에는 중국의 한시, 일본의 하이쿠, 유럽의 소네트가 있다. 이 정형시는 세계에 아주 소수로 문화 민족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민족만이 가지고 있다. 반면 자유시는 서구가 터전으로 지구촌에 산재(散在)하여 있고, 우리나라에는 100여 년 전에 들어와 이 땅에 싹이 난 외래시형(詩形)이다. 서구 문명의 유입과 더불어 세력을 얻어 들어온 이 자유시가 너무 세차게 소용돌이치다 보니 우리 민족 혼(魂)이요, 우리의 전통 문화 유산인 시조가 곁방으로 밀려나고 자유시가 무슨 전통문학의 조강지처인 양 안방을 차지하는 기형상이 나타났다. 이는 안타까움을 넘어 눈물 나는 일이다. 우리는 혼을 빼앗긴 셈이다. 혼을 잃었으니 나라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 민족 스스로 전통을 외면한 데서 나온 참사이다. 이웃 일본은 하이쿠를 세계 속의 시로 발돋움 시켰고, 중국은 지도자마다 외국 정상을 맞을 때 꼭 한시 한 편을 올려놓고 대화하는데 우리는 어떤가. 대통령이고 국무총리고, 우리 시조를 입에 올린 적이 있었던가. 우리 민족은 일천 년 전에 앞에 보이 바 같은 빛나는 시형을 만들어 정착시켰는데 이를 외면하는 현실이 되었다. 이런데 이 어찌 민족의 자존심을 말할 수 있겠는가.
3) 단시조가 원형으로 이 땅에 자리 잡았다.
이 한수의 시조는 우리가 아는 대로 3장 6구 12소절(소리마디) 45자 내외로 이루어진다. 3(4), 4, 3(4) 4, (3(4), 4, 3(4) 4, 3, 5∼7 4. 3의 자수율(字數律)과 소절율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자수율보다는 소절율로 시조를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자연스런 시조의 형태는 기본율격은 지키되 이를 불변의 법인 양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한 자의 빈틈도 없이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웃 일본이나 중국의 하이쿠, 한시를 의식하고 뱉는 말인데 우리 선조들은 이런 경직된 사상을 가지고 이 시형을 향유(享有)한 것이 아니다. 우리말은 뜻글자가 아니고 소리글자로 고립어와 굴절어의 중간적 성격을 띠는 교착어로 어근과 접사에 의해 단어의 기능이 결정되는 언어의 형태이다. 그러나 지나친 이탈은 경계해야 한다. 함부로 과음절(5자 이상)가 남발되어서는 시조를 망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시조는 19세기 초까지는 문학으로서의 시(詩)와 음악으로서의 창(唱)이 한 몸이었으나 20세기 와서는 이것이 분리되어 문학으로서의 시조로 자유시와 겨루는 현대시가 되었다. 시조에서 1소절이라고 하는 것은 1모라(mora)로 한 소리마디 호흡이요, 의미상 독립체이다. 우리가 흔히 혼동하는 종장 둘째 구를 구성할 때 이 소리마디는 지켜져야 한다. 이것이 두 개의 소리마디가 되면 안 된다. 예로 황진이의 시조 ‘동짓달 기나긴 밤을∼’과 같은 경우처럼 두 단어가 주술관계나 수식관계로 자연스럽게 결합되어야 한다. 단시조의 시적배열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이를 확인해 보기로 한다.
3)-1 장별배행시조
民話 그리고 民畵/ 이상범
문갑에 쌓인 고요 닦으면 날이 서고
청 댓잎 어른대다 달의 몸을 찌를 때면
병풍 속 잠자던 수탉 홰 울음을 울었다.
-민화에 서린 역동적인 서기
이 작품은 전통적 한국인의 정서가 밴 작품으로 제목이 보여주듯이 민간에 돌아다니는 민속적인 그림과 거기 얽혀 있을 법한 이야기들을 엮어 만든 작품이다. 양반네의 사랑방에서 느끼는 선비의 도를 보고 있는 듯하다. 밤의 고요가 먼지처럼 쌓인 문갑을 손으로 닦아내면 그 문갑은 깨어나 날이 서고, 밖에는 푸른 댓잎이 그 예리한 잎의 끝으로 달빛을 찌른다고 역동성과 생동감을 살려 표현하고 있다. 고요 속에 댓잎 서걱 이는 밤에 두르고 앉은 병풍에선 닭이 홰를 치며 울고 있다고 하였다.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회화적이다. 김홍도의 토속적인 풍속화를 언어 그림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별/ 필자
밤하늘 앙가슴에 깨져 박힌 유리조각들
예리하게 반짝이며 어둠살을 저며 낸다.
하얗게 날 세운 날로 우리 죄도 도려냈으면….
-별빛의 예리함과 인간의 죄의식
이 작품에 대하여 박영교(한국시조시인협회 수석부회장)는“현대시조는 상식을 초월하고, 의식의 혁명, 패러다임의 변화, 은유법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미지로서 시를 담아내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여 <별>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하며 우리 인간사 속에는 많은 일들이 잘못된 것으로 나타나는 점이 많다는 것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시인은 밤하늘의 별빛을 햇빛 받은 유리조각에 은유하여 표현하면서 그 예리한 빛들은 어둠살을 저며낸다고 했다. 종장에 가서 시인은 그 어둠살을 저며내는 그 예리한 빛으로(칼날로 은유) 우리들의 죄(罪)를 도려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피력(披瀝)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밤하늘은 인정이 메말라 가고 거짓이 판치는 어두운 현실(現實) 세계를 은유(隱喩)한 시어이며, 앙가슴은 그런 음침하고 부조리한 세계에 가슴 조이며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유리조각은 별들을 은유한 말로 그런 어둠과 부조리를 도려낼 밝고 환한 세력을 이미지화한 것이다. 밤하늘의 어둠을 뚫고 반짝이는 별이 깨져 흩어진 유리 조각 같다는 발상에서 나와 그 별들이 예리한 판단력으로 어둠(부조리)을 도려내고 있는 듯한 한 폭의 영상 그림이다.
3)-2. 구별배행시조
종달새와 할미꽃/ 정완영
어제 밤 실실 단비 산과 들을 다 적시고
새 아침 하늘 문 열고 종달새 비비비 읊은
그 언덕 할미꽃 하나 고개 들라 함이라.
-비온 뒤에 약동하는 자연과 새와 꽃의 모습
정완영 시인은 시작 노트에서 “일우보윤(一雨普潤), 지난밤 실실 단비 한 주름이 소리 없이 내려주어 오늘 아침 해토삼천리(解土三千里), 이 강산 삼천리가 흠씬 젖어 내렸구나. 하늘 문 활짝 열어 놓고 종달새 한 마리가 어디선가 솟아올라 지지배배 지지배배 몸살 나게 우는구나. 듣는가? 사람들아! 종달새 한 마리가 씨 뿌리며 우는 뜻을, 저 언덕 할미꽃 하나 고개 들라 우는 뜻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은 시조의 기본을 다 잘 갖추고 있다. 서벌 시인은 이 작품을 초, 중, 종장이 과거, 현재, 미래의 의미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다. 과연 이 작품은 초장은 어젯밤 일이고, 중장은 현재의 일로 하늘 문을 여는데 종달새의 비비비가 이중적 이미지로 역할하고 있다. 그리고 종장은 미래에 벌어지는 일이다.
꽃의 반란/ 이도현
4월엔 차라리
외출하지 않는다.
저렇듯 입술이 타듯
반란하는 꽃의 향연
누군가 불을 지피는
저 황홀한 음모들
-작렬하는 꽃의 모습
영국의 시인 T. S Eliot은 황무지에서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는데 우리의 현대사에도 4월에는 피마디가 있다. 꽃 같은 젊은이가 정의(正義)의 깃발을 들었던 우리의 역사, 그것은 하나의 반란이지만 ‘향연(饗宴)’이었다. 이 시인(李詩人)은 젊은 날의 그 기억을 여기에 되살려 투영시킨 것이 아닐까. 겉으로 조용하나 속으로 들끓어 약동하는 ‘4월’ ‘입술이 타듯’ 간절하게 그리고 화려하게 확 피어난 꽃의 개화, 그것은 ‘꽃의 향연’이며, 자연이 일으킨 ‘황홀한 음모’가 아닐 수 없다. 이 시조에서의 ‘꽃’은 ‘황홀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등장한다. 그렇다. 4월의 꽃은 생동(生動)하는 젊은이를 닮아 빛나고 아름답다. 그래서 황홀하다. 이 작품에서의 ‘꽃’은 젊은이의 시적 변이이다.
3)-3. 소절별배행시조
심부름/ 서우승
미래사
가는 길에
來生만한
꽃을 만나
스치는
눈인사에
절이 한 채
생겨나서
심부름
까마득 잊고
逍風 속에
노닌다.
-자연 속에서 자연이 되는 심경, 불교적 비움의 세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리듬과 티 없이 고운 말결로 직조된 시로 고도의 상징과 은유적 표현에 깃든 선문답 같은 내용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는 시조이다. 심부름은 심부름일까, 아니면 소풍일까. 절로 나들이하는 소풍 길에 만난 꽃은 무엇일까. 아마도 탈속한 절대 존재만 같다. 그 꽃에 눈인사(자상한 눈길을 줌)하니 무심, 탈속, 비움의 상징인 절이 생겼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세속적인 일을 다 잊고 자연 속에 자연이 되는 몰아(沒我)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감정 조절이 잘 된 시조로 주관적 정서가 보편적 정서로 발전된 시조작품이다.
들풀/ 민병도
허구한 날
베이고 밟혀
피 흘리며
쓰러져 놓고
어쩌자고
저를 벤 낫을
향기로
감싸는지…
알겠네.
왜 그토록 오래
이 땅의
주인인지.
-들꽃에서 느끼는 인간미
자연의 무한한 포용력을 보여준 작품이다. 인간의 몰인정함과 들풀의 따뜻한 감정을 대비시켜 표현하고 있다. 허구한 날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마구 베어대어 인간에 무차별적으로 희생당하면서도 이를 무한한 포용력으로 감싸고 아름다운 향기로 오히려 인간을 위무하는 모습에서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을 확인하는 시조이다. 들풀은 가장 힘이 없는 이들의 상징이다. 들풀은 여리나 강인한 생명력을 가졌는데 이런 들풀의 속성을 나라의 진정한 주인공인 백성으로 환치하고 있다. 이 시대의 주인 의식을 일깨우는 시조이다. ‘낫’으로 상징되는 통치자, 지배계급의 난폭함도 따뜻이 수용하는 너그러움이 이 작품을 지배 심상이다.
3)-4. 혼합형배행시조
종(鐘)/한분순
섧어서 섧지 않은 은회색 강이었던가.
날개듯
비늘이듯
늦가을의 속살 속에
돌아와 꽃물을 드리우네.
일만(一萬) 꽃물을 드리우네.
-종소리가 피워내는 꽃물 같은 가을
장별 배행, 소절별 배행, 구별 배행이 섞인 작품으로 종소리가 퍼져 돌아오는 모습을 나는 날개로, 비늘로 표현하면서 그 종소리가 늦가을의 꽃물이 되어 울긋불긋 산천을 물들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鐘)’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상념은 퍼져나간다는 것인데 이 시조를 보면 그 반대로 전개되고 있다. 즉 “돌아와 꽃물을 드리우네./일만(一萬) 꽃물을 드리우네.”로 표현하였다. 그렇다면 종소리를 매개로 한(종소리가 환기시키는) 심적인 작용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만 그것이 ‘꽃물’로 유형화되어 정조(情調)를 일으킨다. 최종적인 ‘꽃물’이 되기 이전에 ‘종(鐘)’은 ‘은회색(銀灰色) 강(江)’이었다가 ‘날개’와 ‘비늘’이기도 하고 ‘늦겨울의 속살’이기도 하였다. 그러다 종소리는 ‘꽃물’로 귀착되고 있다.
맷돌 타령/ 송귀영
육신을
비비다가 아픔도 부딪치고
한 바퀴 돌때마다
어금니를 갈고 있어
삐거덕 장천(長川)을 갈아
고운 목청
남길건가.
-고단한 삶
이 작품도 장별 배행, 구별 배행, 소절별 배행을 섞어 쓴 것으로 맷돌의 역할을 통하여 인간사의 고단함을 보여주고 있다. 장천(長川)은 주야장천(晝夜長川)의 준말이다. 낮밤 없는 삶을 표현하는 말이다. 마치 맷돌을 사람처럼 의인화하여 아픔을 겪으며 억척스럽게 산다고 하였다. 이렇게 낮밤 없이 억척으로 사는 것은 삶에 좋은 결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시인은 보고 있다.
4) 단시조의 주제구 배치, 시조의 맺음 형태에 유의
모든 작품에는 주된 표현 의지가 숨어 있다. 단시조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개별 작품에서 주제로 나타난다. 이 주제가 되는 시구를 주제구라 한다. 이 핵심구가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시조의 맺음 형식이 달라지기도 한다. 단시조의 경우 일반적으로 종장에 위치하는 것이 관례이다. 이 경우 대개 종지형 맺음이 된다. 그러나 상상형, 단절형 맺음도 있다.
4)-1 종지형 맺음
기상보1. 불쾌지수/ 김영배
고기압권 뇌신경에 찬바람이 부딪는다.
맞물린 톱니바퀴 등지고 돌아서면
바위 등 깨지는 소리 비가 되어 쏟아진다.
-고달픈 현실 상황
이 작품은 악마적(惡魔的) 이미져리가 지배하는 현실(現實) 지향적(指向的) 작품이다. 현대라는 삶의 광장(廣場)이 얼마나 분화(分化)되고 얼마나 바쁘며 메마른 바람소리만 들리는 곳인가. 그리하여 뇌신경(腦神經)은 고기압권(高氣壓圈)에 들어 혈압(血壓)이 상승되어 아프고, 살로 느끼는 현실은 찬바람이 일고, 여유(餘裕)없이 돌아가는 이웃만 있기에 ’비‘로 상징(象徵)되는 슬픔이 쏟아지는 것이다.
목련/ 이근배
누이야, 네 스무 살 적
이글거리던 숯불
밤마다 물레질로
뽑아 올리던 슬픔
누이야, 네 명주빛 웃음이
눈물처럼 피었다.
-목련과 누이의 자태와의 접목
목련을 스무 살 누이의 청순한 처녀 시절 속불 타는 모습을 초장에 배치하고 중장에서 전통적인 여자 삶의 애잔한 모습을 물레질에 비유하여 놓고 종장에 가서 목련의 활짝 핀 모습을 명주 빛 웃음이라고 환치 은유하여 보여주고 있다.
4)-2 상상형 맺음
벽공(碧空)/ 이희승
손톱으로 툭 튀기면 쨍하고 금이 갈 듯
새파랗게 고인 물이 만지면 출렁일 듯
저렇게 청정무구(淸淨無垢)를 드리우고 있건만
-청정무구한 자연에 대한 세속의 어지러움
이 시조는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회화미를 보여주고 있다. 맑고 깨끗한 하늘을 찬미해 세속의 더러움과 대비하는 수법으로 청정한 가을하늘을 표현하고 있다. 원관념을 드러내지 않고 보조관념들로만 된 시(視), 청(聽), 촉각(觸覺)을 동원한 기법이 뛰어난 작품이다.
발을 씻다/ 강인순
산행 뒤에 냇가에서
지친 발을 씻는다.
그런데 저것 보소.
개미 한 마리 풍덩
기껏해 발이나 씻는
나를 보고 비웃듯
(온몸을 씻을 것이지)-인간의 협소성을 탓함
강 시인은 경북 안동 시조시인으로 현재 향토문화사랑방 <안동>의 편집위원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자신의 행위와 개미의 행위를 대비시켜 개미만도 못한 자신의 모습을 자조(自嘲) 섞인 마음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는 개미는 물에 빠져 익사할지도 모르는 생사의 다툼을 하고 있고, 자신은 발을 씻으며 피로를 풀고 있는 안락한 기쁨을 누리는 것인데 이를 역발상으로 자기를 고작 발이나 씻는 존재라고 비하(卑下)하여 표현하고 있다.
4)-3 단절형 맺음
대/ 김교한
맑은 바람소리 푸르게 물들이며
어두운 밤 빈 낮에도 갖은 유혹 뿌리쳤다.
미덥다 층층이 품은 봉서 누설 않는 한평생
-대나무의 특성(곧은 절의, 언행의 신중성)
대나무나 소나무에서 부는 바람은 티 없이 맑고 깨끗하다. 바람을 푸르게 물들이고 있다고 하여 청량감(淸凉感)을 자아내게 하고, 시속(時俗)에 물들지 않는 꼿꼿한 선비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신의(信義)를 중시하는 침중(沈重)한 모습을 이 대나무의 특성에서 유추하여 시화(詩化)하고 있다. ‘층층이 품은 봉서’란 말은 대나무의 마디마디마다 닫혀 있음을 은유하여 표현한 말이다. 이 시조 속 대나무는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 과묵함이 조선조 사관(史官) 같다. 그를 강조하는 듯 맺음도 단절형으로 하고 있다.
매미/ 박옥위
이레를 울고 말 걸 더 푸르게 울어야지
작은 그 몸매야 울음소리에 닳겠구나
한더위 능선을 가르는 눈부신 소나기
-매미의 열렬한 울음소리
매미는 알에서 애벌레를 거쳐 짧게는 7년 길게는 15년까지 걸려 매미가 되는데 실상 매미로서의 삶은 여름 한철 일주일 남짓 살다가 죽는다고 한다. 이런 매미의 생태적 특성을 시적 제재로 잡아 쓴 작품이다. 초, 중장에서 그 안타까움을 펼쳐 보이고 종장에서 그 울음소리를 ‘눈부신 소나기’라고 은유하고 있다. 이 구절이 주제구이다. 단절형으로 작품 맺음을 하고 있다.
위에서 본대로 단시조는 표현 면에서 간결하면서도 응축된 정서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완결되는 시상으로 뭔가를 연상하게 하는 상상의 공간을 제공하는데 그 묘미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