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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왕룽의 생활에도 행복을 맛볼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이튿날 아침 왕룽은 잠자리에 누워서 그의 아내가 된 사랑스런 오란을 쳐다보았다. 오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흩어져 있는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헝겊 신을 신고 뒤꿈치에 달린 끈을 졸라 매었다. 아침 햇살이 봉창 구멍으로 실같이 흘러 들어와 오란의 얼굴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것이 왕룽에겐 놀랄 만큼 이상했다. 그는 지난 밤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란은 평상시처럼 그의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마치 여러 해 동안 그렇게 한자리에서 자기라도 한 것 같았다. 늙은이의 기침 소리는 불평스러운 듯 한결 높았다. "아버지는 속이 안 좋으시니까 얼른 물을 데워 가져가야 해. 속을 뜨겁게 해야 하니까." 오란은 어제처럼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차를 끓일까요?" 이 말에 왕룽은 매우 당황했다. 그는 대뜸 '물을 끓여야지. 거지라고 생각하나!' 하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는 아내에게 차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알려 주고 싶었다. 물론 황부잣집에서는 종들까지도 언제나 진한 차를 마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코 맹물은 마시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늙은 아버지는 며느리가 첫날 아침부터 차를 넣어 가져간다면 살림살이가 헤프다고 야단할 게 뻔한 일이었다. 그뿐 아니라 사실 그들은 그렇게 차를 끓여 마실 만큼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대답했다. "차? 차는 그만 둬. 폐에 나쁘니까." 그리고 아내가 부엌에서 불을 지피고 물을 끓이는 동안 포근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젠 늦도록 잘 수 있는 팔자니까 좀더 자고 싶었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아침 일찍 일어나는 버릇이 되어 있어서인지 그는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반듯하게 누운 채 몸과 마음으로 오랜만에 게으름의 즐거움을 느꼈다. 그는 자기의 아내가 된 오란을 생각하니 아직도 어딘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한동안 밭에 심어 둔 밀이 비가 내리기만 하면 풍년이 들 것이라는 것과 곡식 값만 그럴 듯하면 칭 서방한테 사려고 했던 배추씨 같은 것을 생각했다. 그는 매일같이 생각하던 일이나 이런저런 생각을 되풀이하다가 문득 아내가 정말로 자기를 좋아할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에겐 새로운 의문이었다. 이제까지는 자기가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느냐, 또 그녀가 내 집같이 구차한 살림살이에 만족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 뿐이었고, 그녀의 생각이 어떻다는 것은 상상도 해 보지 않았다. 그녀는 얼굴이 펑퍼짐하고 손도 매우 거칠었지만 뚱뚱한 몸집의 부드러운 처녀였다. 그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며 지난 밤에 캄캄한 이불 속에서 웃었던 것처럼 키득거렸다. 황부잣집 젊은 서방님들은 부엌에서 일하는 그 못난 얼굴밖에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아름다웠다. 뼈대는 세고 굵지만 그 살결은 포근하고 부드럽다. 그는 아무튼 그녀가 자기를 남편으로서 사랑해 주기만 하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또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아내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시기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는 일어나서 그것을 받았다. 더운 물 위에 차 이파리가 떠 있는 것을 본 그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겁이 나는 듯이 멈칫거리며 말했다. "아버님에겐 찻잎을 넣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당신에겐." 왕룽은 아내가 자기를 겁내는 것을 보자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아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 나는 차가 좋아. 차를 무척 즐기니까." 하고 말하고 흡족한 듯이 후룩후룩 마셨다. 그녀는 나를 무척 좋아하는 모양이다. 왕룽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새로운 기쁨에 흥분했다. 몇 달 동안 왕룽은 아내의 동정에만 마음이 쏠렸다. 자기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예전과 똑같이 많은 일을 해 왔다. 호미를 들고 밀밭에 나가 김을 매기도 하고, 소에 쟁기를 채워서 밭을 갈고 마늘과 파를 심기도 했다. 한낮이 되어 집에 돌아오면 정성이 깃든 점심이 준비되어 있다. 밥상은 말끔하게 닦여 있고 밥그릇과 수저도 보기 좋게 놓여 있다. 지금까지는 일에 시달려서 매우 지쳤어도 자기 손으로 식사 준비를 했던 것이다. 때로는 늙은 아버지가 시장기를 참지 못해 부엌에 나와서 손수 죽을 끓이거나 밀가루를 반죽해서 빵을 구워 마늘 줄거리를 감아 놓기도 했으나 대부분 그가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것들이 오직 그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그는 그저 밥상 앞에 앉아서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었다. 부엌 바닥도 언제나 깨끗이 치워져 있고, 구석에는 땔나무가 언제나 가득 쌓여 있는 것이다. 그가 들에 나간 뒤면 아내는 갈퀴와 새끼를 들고 마을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나뭇가지나 낙엽 따위를 긁어 모아서 점심을 짓는 데 쓰고도 남을 만큼 나무를 해 오는 것이다. 왕룽은 나무를 살 걱정이 없어진 것에 대해 아내에게 여간 고맙지 않았다. 오후가 되면 오란은 호미와 소쿠리를 들고 큰 길로 나갔다. 수없이 지나가는 마소의 똥을 긁어 모아다가 집 앞에 쌓아 올렸다. 밭에 거름으로 쓰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묵묵히 일을 잘 했다. 그리고 해가 지고 하루의 일이 끝나도 소에 여물을 주고 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길어다 놓기 전에는 결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떨어진 헌 옷들을 꺼내어 손수 물레로 뽑은 실로 정성껏 꿰매기도 하고 침대를 밖에 내다 볕에 쬐고 이불깃을 뜯어 빨기도 했다. 여러 해나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그을고 굳어진 솜을 새로 타고 그 속에 틀어 박혀 있는 빈대를 잡기도 했다. 이렇게 매일 쉬지 않고 집안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세 개의 방이 놀랄 만큼 깨끗해져서 제법 풍족한 살림같이 보였다. 늙은 아버지도 기침이 점점 나아졌으며 집안 일이 마음에 흡족하게 느껴져서인지 이젠 아무 걱정도 없다는 듯이 양지쪽에 나와 앉아 햇볕을 쬐면서 낮잠을 자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오란은 말이 없었다. 꼭 해야 할 말 이외에는 말이 없었다. 왕룽은 그 큼직한 발로 집안을 걸어다니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아도, 또 네모진 얼굴을 보아도 약간 겁을 내는 듯하면서 아무 표정도 찾아볼 수 없는 아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밤이면 그 탱탱하고 부드러운 육체의 촉감을 느낄 수 있었으나 날이 밝으면 언제나 그 푸른 무명 옷이 그녀의 온몸을 감싸버리니 그저 말이 없는 하나의 종처럼 되고 만다. 그녀는 종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묵묵히 일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왜 그렇게 말을 안해.' 하고 꾸짖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내로서 일만 충실히 잘 해 나가면 될 테니까. 왕룽은 때로 밭에서 일하다가도 그녀에 대한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 수없이 많은 뜰을 가진 황부잣집에서 그녀는 무엇을 보아 왔을까? 그가 생각할 수 없는 어떤 생활을 했었을까? 그에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호기심을 갖고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요컨대 아내는 그저 평범한 한 여자일 뿐이다. 세 개의 방을 치우고 세 끼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만으론 대갓집의 종으로 새벽부터 밤 늦도록 고되게 일하던 오란에겐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날 왕룽이 익어가는 밀밭에서 고된 일에 허리가 아픈 것도 참으면서 고랑을 갈고 있노라니 밭둑 위에 여자의 그림자가 보였다. 오란이 삽을 어깨에 매고 나온 것이다. "해가 질 때까지 집에 할 일이 없어요." 오란은 이렇게 한마디하고 왕룽과 나란히 서서 이랑을 갈기 시작했다. 이른 여름이라 그녀의 머리에선 곧 땀방울이 흐르기 시작했다. 왕룽은 옷을 훌훌 벗어 버리고 일했으나 오란은 엷은 적삼을 입은 채 땀을 흘려가며 일을 했다. 마침내 그녀의 적삼이 땀에 젖어서 몸에 착 달라붙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 장단에 맞추어 삽을 움직일 뿐이었다. 몇 시간 동안 묵묵히 일하면서도 고된 줄을 몰랐다. 그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그들의 집이 되고 그들의 양식이 되고 또 그들의 신을 받드는 이 흙을 일구어서 햇볕에 쬘 뿐이었다. 기름진 검은 흙덩이는 삽이 내려 찍힐 때마다 가볍게 갈라졌다. 때로는 기와 조각이나 나무 조각이 나왔다. 그런 것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옛날에는 사람의 시체를 묻었을 것이고 집을 짓기도 했을 것이다. 그 모든 게 이젠 모두 흙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모든 것은 흙에서 나서 다시 흙으로 변하는 법이니까. 그들도 지금 나란히 서서 부지런히 일하여 이 대지의 열매를 얻으려고 하지만 마침내는 다시 대지로 돌아가는 것이다. 해가 지자 왕룽은 가만히 허리를 펴고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굴은 땀으로 젖어 있었고 흙먼지가 얼룩져 흙처럼 검었다. 땅에 흠뻑 젖은 거무스름한 옷이 펑퍼짐한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는 삽질하던 것을 천천히 끝내고는 보통 때와 같이 평범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고요한 저녁 공기 속에서 아무 꾸밈 없는 음성은 어느 때보다도 평범하게 들렸다. "애를 가졌어요." 왕룽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얼마나 좋았는지 할 말을 잃었을 정도였다. 오란은 발 밑에 있는 기와 조각을 주워서 이랑 밖으로 던졌다. '차를 가져왔어요.' 라든가 혹은 '잡수세요.' 와 같은 말을 한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녀에겐 보통 일과 같은 평범한 일로만 생각되는 듯했다. 그러나 왕룽에겐 큰 사건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리고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렇다. 지금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그들에게도 이제 아이를 낳을 차례가 온 것이다. 왕룽은 아내의 손에서 급히 삽을 빼앗으며 목이 메인 듯한 소리로 말했다. "이제 일은 그만해. 해가 졌으니.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도 이야기해야지." 그들은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아내답게 남편보다 여섯 걸음쯤 떨어져서 따라왔다. 늙은 아버지는 시장기를 참으며 문 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며느리가 들어온 이후로는 아무리 시장해도 손수 음식을 장만하지 않았다. 늙은이는 왕룽을 보자 몹시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저녁이 이렇게 늦어서 어떡하느냐. 늙은이가 어디 시장기를 참을 수 있니." 그러나 왕룽은 그 말은 못 들은 체하며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애를 가졌대요." 그는 '오늘은 건너 밭에 씨를 뿌렸어요.' 라고나 말하듯이 이야기하려 했으나 자신도 모르게 흥분된 소리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늙은이는 한동안 눈을 껌벅거릴 뿐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으나 갑자기 소리를 내어 크게 웃었다. "그래, 하하하......" 그는 좀처럼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이윽고 며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곧 손자를 보겠구나." 어두워져서 며느리의 얼굴을 잘 볼 수 없었다. 평범한 오란의 음성만이 들렸다. "곧 저녁 준비를 하겠어요." "오냐, 오냐. 저녁도 빨리 지어야지." 늙은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철부지 아이들처럼 며느리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손자를 본다는 바람에 저녁 생각을 잊고 저녁이란 바람에 손자 생각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왕룽은 어둠침침한 방안으로 조용히 들어가서 팔짱을 끼고 탁자 옆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몸에서, 내 자신의 몸에서 새 생명이 창조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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