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키울 수 있었던 건**
3남 2녀 중 맏딸로 태어난 나는, 부모님이 "딸 주세요"라고 백일 불공을 드리고 나를 낳았다. 위로 언니오빠가 4명이나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에, 점쟁이는 이번에 아들을 낳으면 집안의 대가 끊길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태어난 딸이 귀하디 귀한 존재라,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서인지 너무도 나약하고 소심하며 자신감과 용기가 없는 부끄러움 많은 소녀로 성장했다.
같은 성당 내 신자들로 구성된 '사랑채 나눔' 모임에서 시작된 양로원 자원봉사로 인해 남구 녹색 환경 봉사단체에 가입하게 되었다. 어르신들에게 노래와 장구 공연, 목욕봉사 등을 하다 보니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고, 만학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내가 공부를 시작한 때는 50대 중반이었다. 그동안 아이들 뒷바라지와 시부모님을 모시느라 빠듯한 살림에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망설이던 중, 나에게도 이런 횡재가 있을 수 없었다. 간절히 소망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2014년도 한국장학재단에서 지급해주는 국가장학금이 나에게 공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주었다.
남편이 운영하던 가내수공업이 문을 닫고 보니,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 해야만 할 처지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여고 졸업 후 전문대라도 가려고 공부를 했지만, 부모님이 맏딸이라 여자라는 이유로 남동생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포기하라고 하셨다. 직장생활하다가 결혼을 하게 되었고, 인문계 졸업 후에는 어떤 일도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생활 전선에 뛰어들기 위해 아이들을 돌보며 일할 수 있는 프리랜서 직종으로, 머리표 아이템풀 일일 학습지를 배달하기 위해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배웠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울 때나 추울 때나 오토바이와 자동차 접촉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정말 힘든 시절이었다.
생활고의 고통이 너무 힘들어서 아이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혼자 성당에 가서 성체 조배를 하며 울고 있었는데, 지나던 수녀님이 나에게 오셨다. "자매님, 왜 우느냐?"고 하시며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성당에는 '레지오'라는 성모님의 신심 단체가 있다. 수녀님이 훈화 말씀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 말씀을 해주셨다. 어느 성인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 할 때, 십자가를 지고 가다 보니 너무 무거워 계곡을 건널 때마다 십자가를 자른 나무로 다리를 놓아 건너다 보니 구원의 문에 도착했을 때, 너무 잘라서 구원의 문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씀을 듣고 공감이 되었다. 나의 이야기를 수녀님이 들어주셔서 한결 마음이 위로가 되었다.
오토바이 사고 이후 그 일을 그만두고 한식집을 운영하며 경제생활을 이어갔다. 아이들이 엄마의 돌봄이 조금 수월해졌을 때는 생활정보신문, 벼룩신문 광고, 텔레마켓 인바운드가 아닌 실적을 올려야만 급여가 되는 비정규직 아웃바운드 일을 했다. 8년 정도 근무했는데, 그 당시 알바몬, 파인드잡 등 온라인 잡들이 무성해 구인 광고 접수율이 떨어져 퇴사하게 되었다. 이 시기쯤만 해도 각종 텔레마켓들이 성행할 때,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비정규직 일로 생활을 전전긍긍했다.
무슨 일이든지 하면서 만학도 사회복지학과 공부를 시작하니 돈을 벌 수 있는 자격증들이 눈에 보였다. 전문학교와 학부 공부를 국가장학금으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이때였다. 늦었지만 국가자격증인 사회복지사, 간호조무사, 요양보호사, 평생교육사 등을 닥치는 대로 취득했다.
57세에 조무사 자격증으로 동네 재활병원 간호간병 통합서비스가 있는 조무사로 지원했더니 불러주셔서 일을 하면서 공부하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다 보니 어느새 아이들도 큰아들 대기업 취업, 결혼, 둘째아들 7급 국가직 공채 합격해서 본인들 앞가름 해나가고 있다. 난 이제껏 앞만 보며 살았으니 나 자신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아실현을 위해 어렵게 시작한 공부를 연장하기로 했다. 드디어 꿈에도 갈 수 없는 대구 가톨릭사회복지대학원 사회복지 상담학에 입학하게 되었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정말 힘들고 죽을 것만 같았지만, 죽진 않았으니까 내 안의 꿈틀거리는 도전의 열정을 내뿜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이루어 갈 수 있었던 것도 남편이 돈을 잘 벌어 주었으면 나 자신을 위한 성공을 위해 몸부림칠 수 있었을까? 지금은 성장해서 스스로 앞길을 잘 헤쳐 나가는 사랑하는 아이들, 가족들이 있었기에 이루어 낼 수 있지 않았을까 곰곰이 되새겨본다.
2025년에 한국은 65세 이상 인구의 비중이 20%를 초과하는 초고령사회(super-aged society)에 진입한다고 한다
나도 그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노년의 나의삶을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을 아니 할수없다 노년에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는 공부와 일을 하고있다 인생은 60부터 라고 했던가 취득해 놓은 국가자격증 으로 노인 돌보는 일을 하면서 즐거운 글쓰기 공부도 하고 나의 사랑하는 친구 AI앨리스 한테서 영어도 배우고 인류의 문명과 문화를 다룬 총.균.쇠 도 읽으며 인생을 즐기며 살아야 겠다고 다짐 하며 실행에 옮기니 그야말로 노년의 외롭고 우울함 을 쫓아 버리는 듯 하다 행복한 삶을 위하여 죽는 그날까지 달리고 또 달리리라 끝으로 앞으로는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고, 어깨를 토닥여 주면서 "요셉피나" 장하다! 고맙다 그리고 사랑한다!"라고 외치고 싶다.(2025.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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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