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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형령주 제1권 제1장 사미승(沙彌僧) 행허(行虛) ━━━━━━━━━━━━━━━━━━━━━━━━━━━━━━━━━━━ 등금하(登金河) 근처의 고찰(古刹). 사방 십 리 안에 울울하게 들어찬 죽림으로 인해 낮에도 해를 보 기 힘든 곳이다. 늦가을(晩秋). 해는 그 모양 그대로이나 본래의 뜨거움은 잃은 후였다. 한여름 싱싱한 초록을 간직했던 죽엽들은 그 푸르름을 잃어 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겨울이다. 휘이잉… 잉……. 바람이 불 때면 천지간(天地間)에 대나무 잎의 잔치가 벌어진다. 서로 어울려 부딪히는 죽엽(竹葉), 바삭바삭거리며 흩어지는 나뭇 잎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그것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微笑)를 짓고 있는 회의인(灰衣人)이 있었다. 열여섯이나 열일곱 정도 되었을까? 그는 승려(僧侶)였다. 법문(法門)에 든 사미승(沙彌僧)이었다. 그의 손에는 두툼해 보이는 낡은 불경이 쥐어져 있었다. 한어(漢 語)가 아닌 범어(梵語)로 적힌 것이었는데, 그 내용이 매우 난해 (難解)한 것으로 알려진 비사리유마경(毘沙利維魔經)이었다. 휘이이… 잉……. 그는 돌개바람이 죽엽을 날리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사삭- 삭- 삭-. 흩어지는 나뭇잎들. 그 스산한 모습이 오늘 따라 그의 기분을 더 욱 야릇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자법(慈法) 사부님이 오늘도 오실지 모르겠군!" 그는 고불경을 바라보았다. 귀퉁이가 너덜너덜해진 불경. 그것도 범어 중에서도 이제는 사문(死文)이 된 바라문(婆羅門)의 밀어문(密語文)으로 적힌 불경이었으니, 당금천하에서 그것을 해 독(解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하나뿐일 것이다. 쏴아아… 쏴아아……. 바람결에 따라 죽림이 요동을 친다. 수천 수만의 병사들이 군무를 펼치듯, 누웠다 일어섰다 하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소년승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파도치듯 흔들리는 대나무 숲을 바 라보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소년승이 죽림을 응시하며 넋을 잃고 있을 때였다. "행허(行虛)야!" 고찰(古刹) 안에서 창노(蒼老)한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서향사(棲香寺). 역사는 오래된 절이나 향화객(香火客)이 끊어진 지 이미 오래인 낡은 절이었다. 손질을 하지 않아서 무너지기 시작한 기와, 여기저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거미집… 처마 끝에 매달린 녹슨 풍경에서조차 조락의 세월이 느껴지는 곳. "행허야… 거기 없느냐?" 또다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사미승 행허(行虛)는 그제야 정신을 찾는다. "사… 사숙(師叔), 저는 여기 있습니다!" 행허승은 비사리유마경(毘沙利維魔經)을 옆구리에 낀 채 서향사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곡기(穀氣)를 금(禁)해서일까! 그가 걷는 모습은 취한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다. 흐느적거린다고나 할까? 비틀거린다고나 할까? 행허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서향사 쪽을 향해 걸어갔다. 최근 들어 허약해진 탓도 있지만, 삼 주야(晝夜) 내내 불경을 해독(解讀)하느라 기운이 많이 탈진한 때문이다. 서향사 법당(法堂) 안, 유난히 입이 큰 백세노승(百歲老僧) 하나 가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승포(僧袍) 자락을 흐트린 채 배꼽 을 드러내고 앉아 있었다. 그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웃음(笑). 그것이 그가 택한 불법(佛法)이었다. 대소자애승(大笑慈愛僧). 그는 행허승을 거두어 준 사람의 사제(師弟)로, 서향사를 떠나 사 십 년 넘게 세상 구경을 하다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이 었다. 그가 서향사를 떠난 이유는 사형(師兄) 때문이었다. 대비자법승(大悲慈法僧). 그는 대소자애승과는 판이했다. 그는 언제나 슬픈 표정이었다. 그는 불가(佛家)에 적을 둔 이래 웃음이란 것을 잃어 버린 사람이었다. - 세상은 공허(空虛)한 것. 슬피 지내지 않음은 진리(眞理)를 모 름이라… 인간이 되어 어찌 세상의 고해(苦海)를 끊을 수 있겠는 가! 그는 항상 웃고 지냈던 대소자애승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대소자애승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 사형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學者)이며 또한 법승(法僧) 입니다. 불선유(佛仙儒)의 학문(學文)에 모두 능(能)하시고 십 개 국어(國語)에 해박하시나, 결국 세상을 외롭게 사실 뿐이지요… …. 대소자애승은 그렇게 말한 후 서향사를 떠나갔다. 그런 그가 반 년 전에 서향사로 돌아왔다. 자신의 가장 큰 적(敵)이나, 사실은 자신의 가장 큰 힘이었던 사 형의 다비식(茶毘式)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서향사 법당 안. 누렇게 변한 탱화(幀畵) 네 폭(幅), 형체(形體)가 으스러진 토불 상(土佛像)이 하나 있고, 칠(彩色)이 벗겨진 비로자나불(毘爐遮那 佛)이 있다. 그리고 그 앞에 놓여진 낡은 향로 안에서는 향(香)이 타오르고 있 었다. "하아암… 요새 들어서는 잠이 더 많아졌다!" 대소자애승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다. 불당 안은 엄숙해야 하거 늘, 대소자애승은 늘상 이런 식이다. "사숙! 그래도 사숙은 항상 정정하십니다. 얼마 전 사숙이 담벼락 을 허물어 버리는 통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행허는 오체복지(五體伏地) 했다. "헤헤- 우연히 얻은 재간일 뿐이다." 대소자애승은 코털 하나를 뽑아들었다. 그는 코털을 자세히 살피 다가 튕겨 버리며, "한데… 네놈은 죽은 사람의 유언(遺言) 때문에 백 년을 허비할 작정이냐?" "백 년이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네가 한어(漢語)로 풀이해야 할 불경(佛經)이 천 권이 넘는데 도?" "사실… 저는 팔십 년을 잡고 있습니다!" "녀석, 백 년이나 팔십 년이나……." 대소자애승은 습관적으로 뒷머리를 긁적인다. 바각- 바각-. 그가 머리를 긁을 때면 놋그릇 긁는 소리가 난다. "헤헤, 별일 아니었다. 네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싶어서!" 대소자애승은 누런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다가 벌렁 드러누웠다. "그르르… 릉……." 그는 곧 코를 골기 시작했다. '태평하신 분. 하나… 겉모습일 뿐이다. 마음 속에는 슬픔이 많으 신 분이다.' 행허는 조용히 절을 했다. 대소자애승의 얼굴에는 천진한 미소가 어려 있다. 행허는 그 미소 를 깨뜨리는 것이 두려운 듯 살그머니 법당을 물러났다. 죽림 위로 해가 떨어지고 있다. 죽림에 포위된 서향사엔 벌써 어 둠이 깔리고 있었다. 행허는 죽림 사이로 간간히 들어오는 낙조의 잔광을 받으며 깨어 진 청석판 위를 걸어갔다. 그렇게 얼마쯤 갔을까? 느릿하게 움직이던 그의 발걸음은 거대한 목조건물(木造建物) 앞에 이르러 비로소 움직임을 멈추었다. 만경각(萬經閣) 큼지막한 편액(扁額)이 걸려 있었는데, 그 끝은 낡을 대로 낡아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 앞에 이르자 행허의 낯색은 나이답지 않게 근엄해졌다. 눈빛은 사뭇 심각해졌으며 굳게 다문 입술은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합장(合掌)하며 마음 속으로 무엇인가를 외운다. '제발… 제발 해탈(解脫)하십시오. 사부… 왜 귀혼(鬼魂)으로 떠 도십니까! 이제는 세속의 미련을 버리시고 부디 극락으로 드십시 오.' 그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며,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만경각(萬經閣).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불경서고(佛經書庫)이다. 대비자법승이 오천축(五天竺)과 청해(靑海), 신강(新疆), 고려국 (高麗國)을 주유하며 평생에 걸쳐 모은 만 권의 불경이 모두 그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또한 그곳은 행허의 침실(寢室)이기도 했 다. 행허는 용기를 내어 문고리를 앞으로 잡아당겼다. 끼이익- 익-. 문은 듣기 역겨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곰팡내와 함께 곰팡이를 막는 향(香)의 내음이 와락 코에 와닿았 다. 퀘퀘한 냄새이긴 하지만 행허에게는 세상 그 어떤 내음보다 친근한 것이었다. 안은 몹시 어두웠다. 책(冊)이 탑(塔)처럼 쌓여 있고, 저 끝에 나무침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행허는 아주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는 등을 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으나,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눈을 감아도 다 안다. 무엇 무엇이 있는지…….' 그는 선반을 향해 다가갔다. 그곳에는 가죽 주머니 하나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대비자법승이 청년시절 황제(皇帝) 앞에서 불경을 해설하고 하사받았다는 천룡 야광주(天龍夜光珠) 한 알이 들어 있었다. 천룡야광주는 스스로 빛을 발휘하는 물건으로 그 빛은 만경각 내 부를 밝히고도 남음이 있었다. '만경각 안에서는 불을 켤 수 없지.' 행허는 야광주를 꺼내기 위해 가죽 주머니에 손을 댔다. 그가 막 가죽 주머니의 끈을 풀려는 순간이었다. 휘익-! 돌연 등 뒤에서 불어닥친 귀기(鬼氣) 어린 바람에 손에 든 가죽 주머니가 미끄러졌다. 가죽 주머니가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며 내는 나직한 음향이 만경각 내부에 울려 퍼졌다. 스르륵- 스륵- 스르르륵-. 들릴 듯 말 듯 냉기를 품은 귀기(鬼氣)가 스물거리면서 행허의 전 신을 뒤덮었다. 행허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으으……!"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발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상한 그림자. 마치 후광(後光) 같은 그림자 하나가 그를 뒤덮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 또 오셨습니까?" 행허가 말을 더듬을 때, 휘이이… 잉……. 바람 소리에 섞여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왔다. - 행허야… 행허야……. 멀리서 들리는 소리일까? 아니면… 바로 뒤에서 들리는 소리일까! - 행허야, 사부가 왔다. 사부가 왔다. 검은 그림자가 흰빛과 어우러져 행허의 몸을 뒤덮으며 흐느적거렸 다. 유령이었다. 행허는 벌써 반 년째 선사(先師)의 귀신을 보는 것이었다. 바람결에 실려 그의 뇌리로 파고드는 음성은 그가 평생을 두고 잊 을 수 없는 사부의 목소리였다. 즉, 죽은 대비자법승이 귀신이 되 어 그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사부님! 제자… 무슨 일이 있어도 사부님이 하시던 일을 끝마칠 작정입니다!" 행허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부님! 사부님이 일백 평생 하시다가 끝맺지 못하신 일은… 제 자 행허의 손에 의해 모조리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난 반 년간 오 십 권을 해독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결코 게으름 피 우지 않습니다!" - ……. "사부님, 제발 믿으셔야 합니다. 그 일은 제가 죽기 전에는 반드 시 끝내겠습니다." 행허는 혼잣말 하듯 허공을 향해 계속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소리일까? 그것은 죽은 대비자법승과 행허만이 아는 일이었다. 대비자법승은 원래 전인(傳人)을 두지 않았었다. 이유는 하나, 고매(高邁)한 그의 눈에 차는 제자가 없었기 때문이 었다. 그러나, 그도 굶어 죽어 가는 어린 소년 행허를 보고서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허는 타고난 암기력(暗記力)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어떤 글이 든 한 번 보면 모조리 외웠다. 대비자법승은 행허를 어느 고관(高官)집의 양자로 줄 작정이었다 가 그런 그의 암기력을 알고는 당장 자신의 문하(門下)로 입적(入 籍)시켰다. 두 사람이 사도지간(師徒之間)으로 맺어지는 날, 대비자법승은 행 허를 만경각 안으로 데리고 와서 말했었다. - 노납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 있다. 그것은 노납이 천하를 주유 하며 모은 이국불경(異國佛經)을 모두 한어(漢語)로 번역하는 것 이다. 그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노납이 다 못하고 죽으면 네가 대(代)를 이어 해야 하는 일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반드시 해야 만 하는 일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어린 행허의 머리를 쓰다듬었었다. 행허는 그 날 사부의 손길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행허는 구 세 때 거둬어졌다. 그 동안 그는 가장 천한 떠돌이 거 지로 살아야 했다. 대비자법승 외에는 그 누구도 그에게 인간의 정을 베풀지 않았었다. 대비자법승은 그를 제자로 거둔 후, 죽는 순간까지 너무도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대비자법승이 알려 준 거의 모든 것은 어학(語學)에 관한 것이었 다. 행허는 뛰어난 오성과 탁월한 기억력으로 대비자법승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행허는 지금 사문(死文)이 된 십국어(十國語)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천하유일(天下唯一)한 존재가 된 것이다. 2 소망이 너무 절실한 것이기에 한(限)이 뒤따른 것일까? 하기에 대비자법승의 영혼이 구천을 헤매이게 된 것인지도 모른 다. 죽음과도 같은 침묵의 시간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행허는 나직이 불호성을 읊조린 다음 굳게 감았던 두 눈을 떼었 다. 대비자법승의 유령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행허는 사부의 혼(魂)을 보며 씁쓸히 말했다. "사부.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부님께서 하시다가 중단하신 일 을 끝마치겠습니다." 그가 힘 주어 말하자, 귀기(鬼氣) 어리나 너무도 낯익은 목소리가 고막 속으로 파고들었다. - 너… 너를 믿을 수 없다. 너… 너를……! 절규(絶叫)하는 목소리. 행허는 책을 읽다가 죽은 사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사부님은 검은 피를 토하고 돌아가셨었지.' 그는 눈시울을 붉히다가, "저는… 사부님만은 못하나, 어떤 어려운 글이라도 능히 풀이할 정도는 됩니다. 제 나이 이제 열일곱 살이 아닙니까? 사부! 조금 만 참으십시오." 행허는 다짐하듯 주먹을 거머쥐었다. - 노… 노납이 읽다 죽은 책을 봐라… 그… 그것으로 너… 너를 시험하리라. 그것을 풀 수 있다면… 네가 천장대(千丈臺)에서 채 화(採花)하게 된다면… 다시는 너를 찾지 않으리라. 다시는……. 떨리는 듯한 음성. 어둠 속에서 들리는 음성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계속 이어졌다. 행허는 천장대에서 꽃을 따라는 말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사… 사부! 그곳은 원숭이도 기어오르지 못하는 험한 곳입니다!" 행허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 정녕 내 뜻을 모른단 말이더냐! 돌연 음성이 강렬해졌다. 행허는 등 뒤에서 호통을 치는 듯한 느낌을 받자 자지러지게 놀라 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슬픈 눈빛, 언제나 괴로워하는 표정. 그것은 너무나도 낯익은 대 비자법승의 모습이었다. 행허를 바라보는 슬픈 눈동자에선 막 눈물이 쏟아져 내릴 듯했다. "사부-!" 행허는 아주 크게 외치며 그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휘이이… 잉… 휘잉……. 돌연 찬바람이 휘몰아 불었고, 행허는 몸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으으… 음……!" 행허는 갑자기 불어닥친 냉풍에 휘감기며 정신을 잃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책(冊)이 탑(塔)같이 쌓여 있는 만경각 안. "아아… 춥다……." 몸을 새우같이 웅크린 채 떨고 있는 사미승이 하나 있었다. 그의 전신은 비지땀으로 인해 흠뻑 젖어 있었다. "아아… 춥다……!" 그는 벌벌 떨다가 갑자기 눈을 떴다. "아-!" 그는 갈라진 나무 벽 사이로 흘러드는 양광(陽光)을 보며 벌떡 일 어났다. "사… 사부!" 그는 급히 만경각 안을 살펴봤다. 머물러 있는 사람은 그 혼자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발… 발자국도 없다. 분명 사부를 봤는데… 아아… 목소리만 들 을 때에는 나의 심마(心魔)가 아닐까 했었는데… 어젯밤에는 분명 히 사부를 봤다!" 그는 바로 행허였다. 그는 냉풍에 휘말려 밤새 정신을 잃었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깨어난 것이다. 행허는 중얼거리듯 말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젯밤에 본 게 허깨비가 아니었을까?' 그는 눈을 반개(半開)했다. 문득, - 천장대에서 채화(採花)하라! 그런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그랬었지?" 행허는 얼른 서가 쪽으로 달려갔다. 서가에는 무수한 불경이 수북 이 쌓여 있었다. 스슥- 슥-! 그는 책을 마구 흐트리다가 한 권의 책을 손에 쥐었다. "이… 이것이다. 사부님은 이 책을 보시다가 돌아가셨다!" 행허의 손에는 양피지(羊皮紙)로 된 소책자(小冊子)가 쥐어졌다. 겉장에는 여섯 자가 적혀 있었다. 아주 어려운 글이나 행허는 보는 순간 뜻을 알 수 있었다. "천룡행공신경(天龍行空神經)이라……!" 그는 책장을 읽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책은 본 기억이 없는데……?' 그는 입술을 꼭 다물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천룡행공신경(天龍行空神經) 양피지비급(羊皮紙秘 )은 만경각 안의 다른 불경들과는 전혀 달 랐다. 책에서 전해져 오는 기이한 느낌에 행허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 다. 그는 우선 겉장을 열었다. 다음 장부터의 글은 아주 세자(細字)였다. "천룡야광주를 꺼내 살펴 보자!" 그는 선반을 바라봤다. 어젯밤, 선반 아래로 떨어졌었던 가죽 주머니는 선반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그는 그 안에서 용안(龍眼)만한 구슬을 꺼내들었다. 그것이 나타 나자 만경각 안이 아주 환해졌다. 행허는 구슬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이용해 책을 세세히 살펴 나갔 다. 책을 살피던 그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져 갔다. 그 안에는 그가 상 상도 못하던 것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새(鳥)같이 날다니… 이것은 주술(呪術)이지 글(文)이 아 니다.' 행허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떠올랐다. 하나, 그는 지난밤에 본 사부의 모습을 기억해내고는 이내 웃음을 거두었다. "내가 어찌 세상을 다 안다고 자부할 수 있단 말인가!" 행허는 마음을 가다듬고는 자세히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책 안의 내용은 상당히 난해한 구결로 가득차 있었지만, 행허에게 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고담(古談)이 적힌 책을 읽듯 술술 책장을 넘겼다. 맨 끝장에는 도장이 하나 찍혀 있었는데, 도장 안의 글은 정말 어 려운 글이었다. 그 내용 또한 야릇하기 그지없었다. 홍의교(紅衣敎) 밖으로 내어갈 수 없다. 만에 하나, 신경(神經)을 잃는다면장문인(掌門人)은 옷을 벗어야만 한다.> 책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된 것인 듯, 도장은 천 년 전의 것이었 다. 도장 곁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수없이 많은 이름 들. 아마도 그들은 천룡행공신경을 본 사람들이리라……. "대체 무슨 뜻일까? 설마 선사께서 가질 수 없는 책을 취하신 것 은 아닐 텐데… 흠… 선사가 천축국을 주유하실 때 얻은 것 같지 는 않고… 지난해 세상 나들이를 하셨을 때 사오셨을까?" 행허는 대비자법승을 떠올리며 이런 저런 궁리를 해 보았다. 잠시 후, 그는 천룡행공신경을 덮고 비사리유마경을 쥐었다. 그가 풀이해야 할 불경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 않은가. 한가로이 잡 념에 취할 시간이란 없었다. 행허는 비사리유마경을 펼쳐 놓았다. 그런 다음 붓을 쥐고, 흰 종이에 그 내용을 한어로 풀이해 적기 시작했다. 스슷-, 백지 위가 글로 빽빽이 채워진다. 그 흰 종이가 검은 글 씨로 가득 차게 되면 아마도 천하에서 가장 귀한 불문서가 될 수 있으리라. 세 시진 동안 그는 쉬지 않고 불경을 해독하고 그 내용을 백지에 옮겨 적었다. 책의 내용 반 정도를 한어로 옮겨 적은 그는 극심한 허기를 느꼈다. 텅 빈 뱃속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 왔다. "푸우-!" 그는 숨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갔다. 서향사 뒤뜰에는 커다람 샘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는 언제나 아 지랑이가 피어났다. 물이 너무나 차갑기 때문이었다. 행허는 바가지로 물을 퍼마시며 서쪽을 바라보았다. 구름을 뚫고 솟은 대탑(大塔) 하나가 있었다. 아니, 그것은 탑모 양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석봉(石峰)이었다. 유리알같이 매끄러운 석벽이 수직으로 일천 길. 그 위로 올라가 본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천장대(千丈臺)……!" 행허는 바가지를 손에 쥐고 쓴웃음을 짓는다. '꽃은 다 졌을 것이다. 비록 새가 되어 저 위에 오를 수 있다 하 더라도… 지금은 꽃을 볼 수 없다. 필히 내년 봄(春)에나…….' 행허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얼마 후, 그는 솔잎 말린 가루와 황정(黃精)으로 허기를 메우고 다시 만경각 안으로 들어갔다. 해가 기울어질 무렵, 그는 비사리유마경을 한어로 옮겨 적는 일을 마칠 수 있었다. 행허는 비사리유마경을 풀이한 문서를 저장소에 보관했다. 저장소 에는 수천 개의 두루마리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비사리유마경 다음에는 금강삼매경일심행찰(金剛三昧經一心行察) 이라는 책을 풀이하게 되었다. 금강삼매경을 제나름대로 풀이한 것으로 아주 귀한 불경 중에 하나였다. "오늘이 가기 전에 이것을 모두 풀어 적어야 한다." 행허는 흰 종이를 바닥에 펼치면서 길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는 붓에 먹물을 듬뿍 묻힌 다음 일필휘지로 글을 써나가기 시작 했다. 스슥-, 붓이 마음대로 움직인다. 행허는 십체(十體)에 능했다. 십체란 고문(古文), 대전체(大篆體), 소전체(小篆體), 팔분(八 分), 비백(飛白), 측해(側 ), 산예체(散隸體), 현침체(縣針體), 조서체(鳥書體), 수로체(垂露體)를 일컫는다. 행허는 주로 소전체(小篆體)로 썼다. 종이를 까맣게 만들기 한참. 날은 이미 어두워져 바로 앞조차 제 대로 가늠할 수가 없었다. "구슬을 꺼내야겠군!"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 가까이 다가간 그가 천룡야광주가 담긴 가 죽 주머니에 손을 대려는 순간이었다. 이게 웬일인가! 파팍-! 갑자기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구슬이 산산이 으스러지는 것이 아 닌가! "아… 아니… 이럴 수가!" 행허의 눈이 화등잔만해질 때, 갑자기 찬바람이 불며 예의 귀기 어린 음성이 들려 왔다. - 네… 네놈을 믿었는데… 흐으으윽… 어이해 사부의 말을 마이 동풍(馬耳東風)으로 여기느냐? 대비자법승(大悲慈法僧)의 목소리였다. 어둠 속, 또다시 한 덩어리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사… 사부, 제… 제가 어찌 사부님의 뜻을 어기겠습니까? 저는 사부님의 뜻대로 불경을 해독하고 있지 않습니까?" 행허는 얼른 꿇어앉았다. - 으으… 그… 그러면 어이해 그 책을 아무렇게나 두느냐? 왜 읽 고 외우지 않느냐? 노한 목소리. 그 목소리는 진짜 사람의 음성 같았다. 만경각 내부 가 그 소리로 인해 가늘게 진동을 일으킬 정도였다. 마치 배움을 게을리하는 제자를 꾸짖는 듯한 음성. "사부! 사부는……?" 하나, 행허는 오히려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이 역도(逆徒)야! 흐으으……. 떨리는 목소리가 만경각에 가득 퍼져 나갔다. "사부님! 저는 벌써 다 외웠습니다. 그래서 다시 보지 않았던 것 입니다!" 행허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 벌… 벌써 다 외웠다고? 그… 그럴 리가……? 떨리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 오자 행허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감고 독경(讀經)하듯 천룡행공신경의 구결(口訣)을 외웠다. 그는 단 한 번 본 것으로 이미 한 권의 비급을 통째로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구결을 막힘 없이 줄줄 외워 나가자, - 너를 잘못 봤다. 아아, 너… 너는 천고기재(千古奇才)가 아니 라 만고기재(萬古奇才)인 것을……. 대비자법승의 목소리는 감격으로 인하여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행허는 구결을 완벽히 외운 다음 입술을 떼었다. "꽃은 내년 봄이나 되어야 피지 않겠습니까, 사부? 그래서 저는 올 겨울 동안은 모르는 듯 지내려 했습니다." 행허의 입가엔 어느새 미소가 새겨져 있었다. 침묵, 한순간 묘한 침묵의 시간이 흐른 다음 예의 그 음성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 너… 너는 틀림없는 귀재(鬼才)다. 그러나… 세상에는 네가 아 는 것보다 모르는 일이 더 많이 있다. 꽃은 지지 않았다. 천장대 위에는 항상 꽃이 있다. 그 꽃은 너를 위해 피고 있다. 자… 입을 벌려라……. "입을 벌리다니요?" 행허는 얼떨떨해 하다가 입을 벌렸다. "……!" 입을 크게 벌리고 있자니, 갑자기 입 안으로 둥근 구슬 하나가 날 아들었다. 그것은 입 안에서 녹더니 그대로 목젖을 타고 뱃속으로 흘러들었다. 한순간 몸이 화끈거렸다. "으으- 음-!" 코 끝을 타고 향긋한 내음이 감돌았다. 그는 미약에 취한 듯 정신 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졸음, 참을 수 없는 졸음에 그가 흐느적거릴 때였다. 파팍- 팍- 팍-! 거미줄같이 가는 암경(暗勁) 수백 가닥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행 허는 전신 혈맥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른다는 느낌을 받았 다. 하나, 그는 이미 거미줄에 걸린 나방이었다. 전신이 무엇인가에 칭칭 휘감기는 기이한 느낌. 행허는 격렬히 몸을 틀다가 더 깊은 잠 속에 빠져들었다. 그는 일 주야(晝夜) 내내 자다가 일어났다. 이상하게도 몸이 새털처럼 가벼웠다. 묘한 것은 벽 틈에서 흘러드 는 빛도 없는데 앞이 훤하게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이상한데? 밤인 듯한데 다 보이다니?"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달라진 것은 단 하나, 천룡야광주가 든 주머니가 없어졌다는 것뿐 이었다. 그것은 그가 경험한 유령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행허는 말할 수 없이 괴이한 느낌에 사로잡힌 채 만경각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동편 하늘 끝은 여명으로 인해 조금씩 타오 르고 있었다. 행허의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다시 한 번 괴이한 느낌을 받아 야 했다. "이…이상하군. 이…이렇게 많은 점(點)이 나다니……!" 행허의 피부에는 콩알만한 홍점(紅點) 수백 개가 찍혀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희미한 지흔(指痕)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모를 일이다. 모를 일이야… 불경의 가르침이 맞아 세상에 귀신 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나의 경험이 맞는 것인지." 행허는 탄식하다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순간, "물… 물이 미지근하다니……!" 행허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그렇게도 차가웠던 물이 따뜻해진 것 이다. 물이 뜨거워진 것은 아니었다. 변한 것은 바로 행허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서(寒暑)를 모르는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벌근세수(伐筋洗髓). 그의 근골(筋骨)은 하루 전과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있었다. 행허, 그는 넋을 잃고 죽림 안으로 들어갔다. 스잔한 죽엽(竹葉). 쏴아아아… 쏴아아아……. 파도치듯 움직이는 대나무 숲. 행허는 그 속에 들어앉아 새벽이 오는 것도 잊고 명상에 잠겼다. 행허는 그 날 이후 만경각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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