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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집(聾巖集) 이현보(李賢輔)생년1467년(세조 13)몰년1555년(명종 10)자비중(棐仲)호농암(聾巖), 설빈옹(雪鬢翁)본관영천(永川)소명유경(有慶)시호효절(孝節)
농암집 제1권 / 시(詩) / 청학동을 유람하고 서우지 복경 의 시에 차운하다〔遊靑鶴洞 次徐祐之 福慶〕
번화한 짝과 함께 유람하기 몹시 싫어 / 從遊剛厭繁華侶
참으로 솔직한 서옹 그대와 약속했네 / 眞率徐翁與子期
초라한 행장에 식은 밥을 쌌으니 / 草草行藏裏宿飯
저 솥과 나무 합이야 어디에 쓰랴 / 鼎鐺木榼彼何爲
솥〔鼎鐺〕은 의춘 영(宜春令)을 말하고 나무 합〔木榼〕은 이 정랑(李正郞)을 말하는데, 두 사람은 모두 부귀한 집 자식들이라 이날 희롱하여 물리치고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른 것이다.
[주-D001] 청학동(靑鶴洞) : 서울의 남산 아래 청학동을 가리킨 듯하다. 지금의 중구 예장동 남산한옥마을에 있던 마을로서, 골이 그윽하고 풍치가 아름다워 신선이 푸른 학을 타고 목욕하러 온다고 전해지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주-D002] 서우지(徐祐之) : 서복경(徐福慶, 1468~?)으로, 우지는 그의 자이다. 서거정(徐居正)의 서자(庶子)로, 의영고 영(義盈庫令), 안악 군수(安岳郡守)를 지냈다. 《농암집 속집》 권2 〈영양별장(永陽別章)〉에 이현보에게 준 오언율시 2수가 실려 있다.
ⓒ 한국국학진흥원 | 장재호 김우동 (공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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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집 제1권 / 시(詩)
정연이 국화를 보내왔기에 사례하다〔謝挺然送菊〕 지난여름에 서우지(徐祐之 서복경(徐福慶))가 반죽(斑竹) 한 떨기를 보내왔고, 그 뒤에 사계화(四季花) 작은 화분을 얻었다. 정연(挺然)이 또 국화 몇 송이를 보내왔기에 시를 지어 사례한다.
함초롬한 푸른 잎은 소상강의 정취이고 / 婆娑綠葉瀟湘趣
반쯤 터진 붉은 꽃은 사계화 떨기라네 / 半拆紅葩四季叢
다시 국화 화분 빌려 아름답게 장식하니 / 更借菊盆粧點好
작은 마루 맑은 완상 함께하기 바라네 / 小軒淸玩冀來同
[주-D001] 함초롬한 …… 정취이고 : 반죽(斑竹)의 정경을 말한 것이다. 요(堯) 임금의 두 딸로 순(舜) 임금의 왕비가 된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순 임금 사후에 상강에서 슬피 울다가 물에 빠져 죽었는데, 이때 흘린 눈물방울이 대나무에 얼룩져서 소상 반죽(瀟湘斑竹)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博物志 卷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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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집 속집 제2권 / 부록(附錄) / 영양별장〔永陽別章〕[서복경(徐福慶)]
일찍이 강직한 신하로 알려졌는데 / 曾聞骨鯁臣
지금은 고굉 같은 고을을 맡았네 / 今作股肱州
구순을 빌리려 붉은 인끈 만류하고 / 借寇挽朱紱
황패를 부르니 백성들이 숭상했네 / 徵黃尙黑頭
편지 두려워 범이 새끼 업고 옮겨 갔고 / 畏書移負虎
칼을 잘 쓰니 온전한 소가 없었네 / 投刃欠全牛
어찌 진번의 의자가 번거롭겠나 / 安得煩陳榻
남쪽 고을에서 이응의 배를 몰았네 / 南州御李舟
오마 수레로 영천 가는 길에 / 五馬穎川路
행장에 학 한 마리 따랐네 / 行裝一鶴隨
허리에는 염범의 인끈이 있고 / 腰間廉范綬
몸에는 노래자의 색동옷 입었네 / 身上老萊衣
자식이 되어 효도를 다해야 하고 / 爲子孝當竭
임금을 섬기면 충성에 옮겼네 / 事君忠可移
공은 좋은 덕을 온전히 하여 / 公應全令德
임금의 알아줌 저버리지 않으리 / 不負聖明知
[주-D001] 서복경(徐福慶) : 1468~? 본관은 달성, 자는 우지(祐之)이다. 서거정(徐居正)의 서자(庶子)이다. 서자이지만 양첩(良妾)의 아들이라 하여 의영고 영(義盈庫令), 안악 군수(安岳郡守)를 지냈다.[주-D002] 고굉(股肱) 같은 고을 : 경사(京師)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고을이란 뜻이다. 한나라 문제(文帝)가 하동 태수(河東太守)인 계포(季布)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임명하려고 불러들였다가, 그가 술주정이 있어 가까이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듣고 경사에 머물게 한 지 한 달 만에 도로 하동으로 돌려보냈다. 이때 계포가 문제에게 나아가 불만스러운 뜻을 나타내니 문제가 부끄러워하다가 한참 만에 “하동은 나의 고굉과 같은 고을이므로 특별히 그대를 불렀을 뿐이다.” 하였다. 《史記 卷100 季布列傳》[주-D003] 구순(寇恂)을 …… 만류하고 : 백성들이 선정을 베푼 지방관이 더 머물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에 구순이 하내 태수(河內太守) 등을 역임하면서 누차에 걸쳐 군도(群盜)를 평정하여 백성들을 편히 살게 해 주었으므로, 그가 뒤에 광무제를 따라 영천(穎川)의 도적을 평정하고 돌아갈 적에는 백성들이 광무제의 행차를 가로막고 엎드려서 “구순을 다시 1년간 빌리고자 하옵니다.”라고 하소연하자, 이에 구순을 머물게 하여 백성들을 진무하게 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16 寇恂列傳》[주-D004] 황패(黃覇)를 …… 숭상했네 : 훌륭한 정사를 펼쳐 백성들에게 추앙을 받았다는 말이다. 황패는 한나라 때의 어진 수령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으로, 자는 차공(次公)이다. 선제(宣帝) 때 양주 자사(楊州刺史)ㆍ영천 태수(潁川太守) 등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었는데, 특히 영천 태수를 두 차례 역임하면서는 농상(農桑)을 장려하고 먼저 교화를 베푼 뒤에 나중에 죄를 다스려 호구가 날로 불어나게 해 치적이 천하에서 제일이라고 칭해졌다. 《漢書 卷89 黃覇傳》[주-D005] 범이 …… 갔고 : 선정을 베풀었다는 뜻이다. 후한 시대 유곤(劉昆)이 일찍이 홍농 태수(弘農太守)가 되었을 때, 본디 그곳은 효산(崤山)의 도로가 험난한 데다 역로(驛路)에 호환(虎患)이 많아서 사람이 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는데 유곤이 3년간 선정을 베푼 끝에 어진 교화가 크게 행해져서 호랑이들이 모두 새끼를 등에 업고 강을 건너가 버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역시 후한 때 구강 태수(九江太守)를 지낸 송균(宋均) 또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79 儒林列傳》[주-D006] 칼을 …… 없었네 : 정사를 펼치는 솜씨가 훌륭하다는 말이다. 《장자》 〈양생주(養生主)〉에 “처음에 내가 소를 잡을 적에는 보이는 것 모두가 소 아닌 것이 없었는데, 삼 년 뒤에는 온전한 소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始臣之解牛之時, 所見無非牛者, 三年之後, 未嘗見全牛也.]”라고 한 ‘포정 해우(庖丁解牛)’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주-D007] 어찌 …… 번거롭겠나 : 서로 가장 의기투합한 친구 사이였음을 의미한다. 진번(陳蕃)은 후한(後漢) 때의 고사(高士)로 일찍이 예장 태수(豫章太守)가 되었는데, 그는 본디 빈객을 전혀 접대하지 않았지만, 다만 당대의 고사였던 서치(徐穉)가 찾아오면 특별히 걸상 하나를 내려서 그를 정중히 접대하고, 그가 떠난 뒤에는 다시 그 걸상을 걸어 두곤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53 徐穉列傳》 전하여 여기서는 주객(主客)이 서로 가장 의기투합한 친구 사이임을 의미한다.[주-D008] 이응(李膺)의 배를 몰았네 : 존경하는 사람을 모셨다는 말이다. 후한(後漢) 때 이응(李膺)의 풍도를 사모한 사대부들이 그의 접견을 받기만 해도 용문(龍門)에 올랐다면서 기뻐했는데, 순상(荀爽)이 그를 위해 수레를 몰고는 집에 돌아와서 “오늘 내가 비로소 이 선생님의 수레를 몰 수 있었다.[今日乃得御李君矣]”라고 자랑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67 李膺列傳》[주-D009] 오마(五馬) …… 길 : 오마는 지방 장관의 수레를 말한다. 한(漢)나라 때 태수(太守)가 다섯 필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탔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영천(穎川)이라 한 것은, 이현보가 부임하는 영천(永川)이 황패가 선정을 베풀었던 영천(潁川)과 음이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주-D010] 행장에 …… 따랐네 : 행장이 조촐함을 의미한다. 송(宋)의 조변(趙抃)이 필마로 촉(蜀)에 들어갈 때 하나의 거문고와 한 마리의 학이 따랐을 뿐이라는 말에서 왔다. 《宋史 趙抃傳》[주-D011] 염범(廉范) : 후한(後漢) 때 두릉(杜陵) 사람으로 자는 숙도(叔度)이다. 명제(明帝) 때에 여러 관직을 거쳐 뒤에 운중 태수(雲中太守)ㆍ촉군 태수(蜀郡太守) 등을 역임하면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後漢書 卷31 廉范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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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선생연보 제1권 / 농암 선생 연보〔聾巖先生年譜〕
황명(皇明) 헌종(憲宗) 성화(成化) 3년(1467) 세조 13년 정해
○ 7월 29일 - 해시(亥時) - 선생이 예안현(禮安縣) 분천리(汾川里) 집에서 태어났다. - 선생의 선조는 본래 영천군(永川郡)에 세거하였는데, 고조부 소윤공(少尹公)이 예안현 동쪽 분천의 산수를 사랑하여 비로소 정착하게 되었다. ○ 이보다 앞서 조부 참판공이 용수사(龍壽寺)에 우거하였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말하기를 “선행을 쌓은 집안에 반드시 복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잠에서 깨어 선생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기이하게 여겨서 마침내 어릴 적 이름을 ‘유경(有慶)’이라 하였다. -
20년(1541, 중종36) 신축 선생 75세
○ 연이어 소장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 선생은 이때에 이미 사직할 나이가 지났고 예에 의거해 보아도 오히려 늦었기 때문에 힘써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체력이 여전히 강건하고 임금의 배려가 더욱 돈독하여 과감하게 돌아오지 못하였다. -
○ 3월, 서우지(徐祐之) - 복경(福慶) -와 청학동(靑鶴洞)을 유람하고, 또 장의사(藏義寺) 북쪽 계곡을 유람하였다. - 서경복의 시에 차운한 것이 있다. -
○ 7월, 권충재(權冲齋)의 새 집에 모여 술을 마셨다. - 이때에 충재 선생이 예조 판서가 되어 영미정(永美亭) 뒷 편에 새집을 지었다. 선생이 그곳에 갔다가 참의 장대훈(張大訓), 첨지중추부사 조적(趙績), 위장(衛將) 조수천(趙壽千)과 우연히 모임을 가졌다. 주객 다섯 명이 모두 일찍이 밀양 부사를 지냈기 때문에 선생의 시에 “자리 앉은 이 전날 응천(밀양의 고호) 수령을 지냈으니, 다섯 사람의 정회가 어떠하겠는가.〔座上凝川前後守, 五人情抱更如何.〕”라고 하였다. 또 절구 한 수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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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 성종 19년 무신 > 12월 24일 > 최종정보
성종 19년 무신(1488) 12월 24일(계축) / 19-12-24[03] 달성군 서거정의 졸기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이 졸(卒)하였다. 철조(輟朝)ㆍ조제(弔祭)ㆍ예장(禮葬)을 관례대로 하였다. 서거정의 자(字)는 서강중(徐剛中)이며, 경상도 대구(大丘) 사람인데,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의 외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나이 여섯 살에 비로소 글을 읽고 글귀를 지었는데,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고 하였다. 정통(正統)무오년에 생원시(生員試)ㆍ진사시(進士試) 두 시험에 합격하고, 갑자년에 문과(文科) 3등으로 급제하여 사재 직장(司宰直長)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뽑혀서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에 보임(補任)되고 부수찬(副修撰)과 지제교(知製敎) 겸 세자 우정자(世子右正字)에 올랐으며, 여러 번 옮겨서 부교리(副校理)에 이르렀다. 을해년에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와 지제교(知製敎) 겸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와 세자 우필선(世子右弼善)에 제수되었다가, 병자년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 옮겼다. 덕종(悳宗)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 세조(世祖)가 좌우에게 이르기를,
“보필(輔弼)하는 사람은 마땅히 학문이 순정(醇正)하고 재행(才行)이 함께 넉넉한 자를 골라서 삼아야 할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서거정을 좌필선(左弼善)으로 삼았다. 서거정이 일찍이 조맹부(趙孟頫)의 적벽부(赤璧賦) 글자를 모아서 칠언 절구(七言絶句) 16수(首)를 지었는데, 매우 청려(淸麗)하여, 세조가 보고는 감탄하기를,
“보통 사람이 아니다.”
하였다. 정축년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특별히 통정 대부(通政大夫) 사간원 우사간(司諫院右司諫) 지제교(知製敎)에 제수되었다. 이때에 세조가 사방을 순수(巡狩)하고자 하므로, 서거정이 논간(論諫)하기를 격절(激切)히 하니, 물론(物論)이 아름답게 여겼다. 세조가 여러 신하와 더불어 후원에서 활쏘기를 하니, 서거정이 간하기를,
“신하와 더불어 짝지어 활을 쏘면 사체(事體)를 잃을까 두렵습니다. 또 정전(正殿)이 있어 신하들을 접견할 수 있는데, 하필이면 활쏘는 것으로 인하여 착한 말을 듣고 하정(下情)을 통하도록 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세조가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승손(李承孫)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서거정의 말이 매우 오활(迀闊)하여 사체를 알지 못하니, 내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이승손이 말하기를,
“서거정의 말이 지나치기는 하나, 옛말에 ‘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곧다.’고 하였으니, 이제 전하께서 성명(聖明)하시기 때문에 서거정이 그 말을 한 것입니다. 신은 그윽이 하례드립니다.”
하였으므로, 세조(世祖)가 기꺼이 받아들였다. 무인년에 정시(廷試)에서 우등하여 통정 대부(通政大夫)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옮겼다. 하루는 세조가 조용히 서거정에게 이르기를,
“《녹명서(祿命書)》도 유자(儒者)가 궁리(窮理)하는 일이니, 경이 가령(假令)을 지어서 올리라.”
하니, 이때에 《오행총괄(五行總括)》을 지었다. 경진년에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옮기고 사은사(謝恩使)로 부경(赴京)하여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국(安南國) 사신 양곡(梁鵠)을 만났는데, 그는 제과 장원(制科壯元) 출신이었다. 서거정이 근체시(近體詩) 한 율(律)로 먼저 지어 주자 양곡이 화답하였는데, 서거정이 곧 연달아 10편(篇)을 지어 수응(酬應)하므로, 양곡이 탄복하기를,
“참으로 천하의 기재(奇才)다.”
하였고, 요동(遼東) 사람 구제(丘霽)가 서거정의 초고(草稿)를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의 문장은 중원(中原)에서 구하더라도 많이 얻을 수 없다.”
하였다. 신사년에 가선 대부(可善大夫)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오르고, 계미년에는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었으며, 을유년에는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하였다. 병술년에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여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제수되고 곧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합격하여 특별히 자헌 대부(資憲大夫) 행 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에 가자(加資)되고, 《경국대전(經國大典)》 찬수(撰修)에 참여하였다. 정해년에 형조 판서(刑曹判書)와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지냈고 이어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과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임하였는데, 대개 문형(文衡)을 맡은 것으로서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 손에서 나왔다. 겨울에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옮기고, 무자년에 세조가 영릉(英陵)을 옮길 뜻을 두었는데 조정 신하가 마땅히 옮겨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많았으나 세조가 어렵게 여겨서 서거정을 불러 물으니, 대답하기를,
“근세에 산수 화복(山水禍福)을 논하는 말이 대저 방위(方位)와 산수의 미악(美惡)으로써 자손의 화복을 삼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홍범(洪範)》 한 책은 성인(聖人)이 도(道)를 전한 글인데, 우(雨)ㆍ양(暘)ㆍ욱ㆍ(燠)ㆍ한(寒)ㆍ풍(風)은 숙(肅)ㆍ예(睿)ㆍ철(哲)ㆍ모(謀)ㆍ성(聖)의 반응(反應)으로 삼았는데, 이는 단지 그 이치가 이와 같다는 것을 논한 것 뿐입니다. 만약 하나하나 배합(配合)하는 데 대해서는 신은 그 가함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물며 산수설(山水說)은 후한(後漢) 제유(諸儒)에서 비롯하였는데, 신은 믿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또 세상에서 천장(遷葬)하는 것은 복을 얻기를 희망하는 것인데 왕자(王者)로서 다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큰 일이므로 성상의 마음의 영단(英斷)에 있을 뿐이며, 신이 감히 억측으로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하자, 세조가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내가 다시 능(陵)을 옮길 뜻을 두지 않겠다.”
하였다. 가을에 세자 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을 맡았고 겨울에는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옮겼다가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옮겼다. 경인년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제수(祭授)되었다. 금상(今上)이 즉위한 3년 신묘년에는 순성 명량 좌리 공신(純誠明亮佐里功臣)의 호(號)가 내려지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겨울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제수되자 신숙주(申叔舟) 등이, ‘문형(文衡)을 맡은 자는 외방에 내어 보낼 수 없다.’고 아뢰니, 그대로 따랐다. 임진년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옮겼다. 고사(故事)에 무릇 대간(臺諫)에서 일을 아뢰는 자는 승지(承旨)를 통하여 중관(中官)에게 말을 전해서 임금에게 전달되었으므로, 그 사이에 말이 혹시 누설되고 잘못되는 근심이 있었는데, 서거정이 차자(箚子)를 쓰기를 청하여, 무릇 말하는 바를 모두 서계(書啓)할 수 있게 되어서 하정(下情)이 모두 상달되었으므로, 모두들 편리하다고 하였다. 을미년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이 되고, 병신년에 낭중(郞中) 기순(祈順)과 행인(行人) 장근(張瑾)이 사신으로 오자, 서거정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는데, 기순은 사림(詞林)의 대수(大手)로서 압록강에서 서울까지 도로와 산천의 경치를 문득 시로 표현해 읊으니, 서거정이 즉석에서 그 운(韻)에 따라 화답하되 붓을 휘두르기를 물흐르는 듯이 하며, 어려운 운을 만나서도 10여 편(篇)을 화답하는데 갈수록 더 기묘해지니, 두 사신이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기순이 태평관부(太平館賦)를 짓자 서거정이 차운(次韻)하여 화답하니, 기순이 감탄하기를,
“부(賦)는 예전에 차운하는 이가 아직 있지 아니하였으니, 이것도 사람이 하기 어려운 것이다. 공과 같은 재주는 중조(中朝)에 찾아도 두세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하였다. 우찬성(右贊成)에 올랐는데 정유년에 어떤 일로써 체직(遞職)되었다가 곧 달성군에 봉해졌다. 무술년에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겸대(兼帶)하였다. 임금이 시학(視學)하고 여러 선비가 문난(問難)하는데 서거정이 아뢰기를,
“옛 제왕(帝王)의 정치는 모두 마음에 근본을 두었습니다. 요(堯)ㆍ순(舜)ㆍ우(禹)의 정일 집중(精一執中)과 상탕(商湯)ㆍ주무왕(周武王)의 건중 건극(建中建極)은 모두 이 마음입니다. 이러므로 채침(蔡沈)의 《서경(書經)》 서(序)에 이르기를,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은 이 마음을 잃지 않고 나라를 보전하였고, 하(夏)나라 걸왕(桀王)과 상(商)나라 주왕(紂王)은 이 마음을 잃고서 나라가 망하였다.’고 하였으니, 원하건대 전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 마음을 한결 같이 하소서.”
하니, 임금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얼마 안되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제수하였다. 기해년에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옮겨서, 송조(宋朝)의 거자 탈마(擧子脫麻)의 고사(故事)에 의하여 문과(文科)의 관시(館試)ㆍ한성시(漢城試)ㆍ향시(鄕試)에 일곱 번 합격한 자는 서용(敍用)하는 법을 세우기를 건의(建議)하고, 또 명경과(明經科)를 설치하기를 헌의(獻議)하였다. 신축년에 병조 판서로 옮기고, 계묘년(癸卯年)에는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제수(除授)하였다. 무신년에 한림 시강(翰林侍講) 동월(董越)과 공과 우급사중(工科右給事中) 왕창(王敞)이 사신으로 와서 서거정을 보고 존경하는 예(禮)로 대우하고 매양 논담(論談)하는 데에 반드시 손을 모아 잡고 일어나 섰으며, 망원정(望遠亭)에서 유관(遊觀)할 때에 두 사신이 서거정에게 이르기를,
“공은 사문(斯文)의 노선생(老先生)이신데 오늘 공을 수고롭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명하여 최부를 돌려보내게 하였는 데, 중국의 문인들로 최부를 본 자는 필히 서거정의 안부를 물었다. 이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69세이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인데,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임금을 섬기는 데에 절의를 다한 것을 충(忠)이라 한다. 적처(嫡妻)에는 아들이 없고 서자(庶子) 서복경(徐福慶)이 있다. 서거정은 온량 간정(溫良簡正)하고 모든 글을 널리 보았고 겸하여 풍수(風水)와 성명(星命)의 학설에도 통하였으며, 석씨(釋氏)의 글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문장(文章)을 함에 있어서는 고인(古人)의 과구(科臼)에 빠지지 아니하고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어서, 《사가집(四佳集)》 30권이 세상에 행한다. 《동국통감(東國通鑑)》ㆍ《여지승람(輿地勝覽)》ㆍ《역대연표(歷代年表)》ㆍ《동인시화(東人詩話)》ㆍ《태평한화(太平閑話)》ㆍ《필원잡기(筆苑雜記)》ㆍ《동인시문(東人詩文)》은 모두 그가 찬집(撰集)한 것이다. 정자를 중원(中園)에 짓고는 못을 파고 연(蓮)을 심어서 ‘정정정(亭亭亭)’이라고 이름하고, 좌우에 도서(圖書)를 쌓아 놓고 담박(淡泊)한 생활을 하였다. 서거정은 한때 사문(斯文)의 종장(宗匠)이 되었고, 문장을 함에 있어 시(詩)를 더욱 잘하여 저술에 뜻을 독실히 하여 늙을 때까지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혹시 이를 비난하는 자가 있으면, 서거정이 말하기를,
“나의 고황(膏肓)인지라 고칠 수 없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가장 선진(先進)인데, 명망이 자기보다 뒤에 있는 자가 종종 정승의 자리에 뛰어 오르면, 서거정이 치우친 마음이 없지 아니하였다. 서거정에게 명하여 후생(後生)들과 더불어 같이 시문(詩文)을 지어 올리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서거정이 불평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자격이 없을지라도 사문(斯文)의 맹주(盟主)로 있은 지 30여 년인데, 입에 젖내나는 소생(小生)과 더불어 재주를 겨루기를 마음으로 달게 여기겠는가? 조정이 여기에 체통을 잃었다.”
하였다. 서거정은 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하는 양(量)이 없고, 또 일찍이 후생을 장려해 기른 것이 없으니, 세상에서 이로써 작게 여겼다.
[주-D001] 정통(正統) : 명나라 영종의 연호.[주-D002] 무오년 : 1438 세종 20년.[주-D003] 갑자년 : 1444 세종 26년.[주-D004] 을해년 : 1455 세조 원년.[주-D005] 병자년 : 1456 세조 2년.[주-D006] 정축년 : 1457 세조 3년.[주-D007] 오활(迀闊) : 실제와는 관련이 멂.[주-D008] 무인년 : 1458 세조 4년.[주-D009] 경진년 : 1458 세조 4년.[주-D010] 부경(赴京) : 명(明)나라 북경에 감.[주-D011] 신사년 : 1463 세조 9년.[주-D012] 계미년 : 1461 세조 7년.[주-D013] 을유년 : 1465 세조 11년.[주-D014] 병술년 : 1466 세조 12년.[주-D015] 정해년 : 1467 세조 13년.[주-D016] 무자년 : 1486 세조 14년.[주-D017] 영릉(英陵) : 세종(世宗)과 그 비(妃) 소헌 왕후(昭憲王后)의 능.[주-D018] 경인년 : 1470 성종 원년.[주-D019] 신묘년 : 1471 성종 2년.[주-D020] 임진년 : 1472 성종 3년.[주-D021] 을미년 : 1475 성종 6년.[주-D022] 병신년 : 1476 성종 7년.[주-D023] 사림(詞林) : 문단.[주-D024] 대수(大手) : 대가.[주-D025] 중조(中朝) : 중국.[주-D026] 정유년 : 1477 성종 8년.[주-D027] 무술년 : 1478 성종 9년.[주-D028] 시학(視學) : 임금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유생들이 공부하는 상황을 돌아보던 일.[주-D029] 문난(問難) : 풀기 어려운 문제에 대하여 논의함.[주-D030] 정일 집중(精一執中) : 사욕(私欲)을 버리고 마음을 전일(專一)하게 가져 중도(中道)를 지킴을 뜻하는 말.[주-D031] 건중 건극(建中建極) : 중정(中定)의 도(道)를 정(定)하여 만민(萬民)의 모범적인 법칙을 세우는 것을 뜻하는 말.[주-D032] 채침(蔡沈) : 주자(朱子)의 문인.[주-D033] 이제(二帝) : 요(堯)ㆍ순(舜).[주-D034] 삼왕(三王) : 우(禹)ㆍ탕(湯)ㆍ문ㆍ무(文武).[주-D035] 기해년 : 1479 성종 10년.[주-D036] 송조(宋朝) : 송나라.[주-D037] 신축년 : 1481 성종 19년.[주-D038] 계묘년(癸卯年) : 1483 성종 14년.[주-D039] 무신년 : 1488 성종 19년.[주-D040] 사문(斯文) : 유학.[주-D041] 온량 간정(溫良簡正) : 온화하고 무던하며 간소하고 바름.[주-D042] 석씨(釋氏) : 석가.[주-D043] 과구(科臼) : 규범.[주-D044] 고황(膏肓) : 고칠 수 없는 병.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김익현 (역) |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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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 연산군 11년 을축 > 7월 24일 > 최종정보
연산군 11년 을축(1505) 7월 24일(정미) / 11-07-24[03] 서거정의 양첩자 복경을 사로에 통하도록 허가하다
전교하기를,
“서거정(徐居正)의 양첩자(良妾子) 서복경(徐福慶)은 사로(仕路)에 통하도록 허가하라.”
하였다.
복경이 전비(田非)에게 금백(金帛)ㆍ전지(田地)로 많은 뇌물을 주어 사로에 통하는 것을 허락받아, 처음에 의영고 영(義盈庫令)에 제수되었다가 낙안 군수(樂安郡守)로 옮기매, 의기가 양양하여 진신(縉紳)을 깔보았다. 그러자 무뢰한 무리가 이를 본받아, 나인(內人)에게 뇌물을 주어 벼슬을 얻은 자가 많았다.
[주-D001] 진신(縉紳) : 신분ㆍ지위가 높은 사람.
ⓒ 한국고전번역원 | 정연탁 (역) |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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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 연산군 11년 을축 > 11월 5일 > 최종정보
연산군 11년 을축(1505) 11월 5일(병술)
11-11-05[05] 충의위 서복경을 의영고 영으로 차정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충의위(忠義衛) 서복경(徐福慶)을 의영고 영(義盈庫令)으로 차정하라.”
하였다. 서복경은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의 서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조석주 (역) |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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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 연산군 12년 병인 > 1월 28일 > 최종정보
연산군 12년 병인(1506) 1월 28일(무신)
12-01-28[02] 의영고 영 서복경에게 안악 군수를 제수하게 하다
“의영고 영(義盈庫令) 서복경(徐福慶)에게 안악 군수(安岳郡守)를 제수하라.”
하였다.
복경은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의 서자[孽子]인데 전비(田非)를 인연하여 벼슬길에 허통(許通)되어 초직(初職)으로 의영고 영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이 명령이 있었다. 이로부터 잡류(雜類)의 서얼(庶孽)과 미천한 사람들이 다투어 나인(內人)에게 뇌물을 주어 모두 드러난 벼슬에 올랐다.
ⓒ 한국고전번역원 | 조석주 (역) |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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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 중종 1년 병인 > 9월 4일 > 최종정보
중종 1년 병인(1506) 9월 4일(경진)
01-09-04[04] 임사홍에 빌붙어 벼슬한 자들을 추치하다
대사헌 반우형(潘佑亨)ㆍ집의 김사원(金士元)ㆍ장령 김언평(金彦平)과 김지(金祉)가 아뢰기를,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신자건(愼自建)은 성종조에 죄를 얻었는데, 근래에는 초방(椒房)의 친속으로 임사홍에게 빌붙어 높은 벼슬에 올랐습니다. 관찰사는 중임(重任)이니 마땅히 속히 개정하여야 합니다. 또 우리 국가는 삼면으로 적을 받아, 변경의 경계를 봉수(熢燧)가 아니면 속히 전달할 수 없으며, 순장(巡將)도 또한 야경(夜警)을 주관합니다. 모두 군무의 중대한 일인데 폐주가 혁파했으니, 다시 세우게 하소서. 가산(嘉山) 군수 김세용(金世庸)ㆍ안악(安岳) 군수 서복경(徐福慶)ㆍ남원(南原) 판관 윤삼수(尹三壽)ㆍ수원(水原) 판관 김숙담(金淑淡)ㆍ정주(定州) 목사 김문경(金文卿)ㆍ남원 부사 조상(趙祥)ㆍ강화(江華) 부사 장준손(張俊孫)ㆍ연원도(連原道) 찰방 김세영(金世榮)은 나인에게 빌붙어 이에 이르게 되었으며, 이장길(李長吉)은 의성(義城) 현령으로 아직 품질이 차지 않고서도 특별히 부정(副正)에 올랐습니다. 그 나머지 잡직을 함부로 제수한 자도 자못 많은데, 역시 나인에게 빌붙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추치(推治)하소서.
또 당상(堂上)의 중요한 품계는 가볍게 올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의원(醫員)과 같은 무리는 본래 천한 소임인데, 폐주 때는 술업(術業)의 정통하고 졸렬한 것을 가리지 않고 높은 품계에 올려주었으니, 선왕의 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아울러 품계를 내려 서용(敍用)하소서. 정세명(丁世明)은 감역(監役)으로 당상이 올랐고, 박세준(朴世俊)은 군수로 2품에 올랐으니, 모두 폐세자빈(廢世子嬪)의 친속인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그대로 주어서는 안 되오니 개정하소서.”
하니, ‘정승에게 물으라.’ 전교하였다. 정승 등이 아뢰기를,
“대관(臺官)의 말이 매우 마땅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주-D001] 초방(椒房) : 왕비의 궁을 지칭한 것임.
ⓒ 한국고전번역원 | 박천규 (역) |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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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 중종 1년 병인 > 9월 2일 > 최종정보
중종 1년 병인(1506) 9월 2일(무인)
01-09-02[03] 장녹수 등을 참하고 폐주의 금인ㆍ화압ㆍ승명패를 철폐하다
대신 등이 모두 아뢰기를,
“숙용(淑容) 장녹수(張綠水)ㆍ숙용(淑容) 전전비(田田非)ㆍ숙원(淑媛) 김귀비(金貴非) 등 세 사람은 모두 화근의 장본인이니, 마땅히 속히 제거하여야 합니다.”
하니,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모두 참형에 처하고, 가산을 적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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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 중종 6년 신미 > 12월 29일 > 최종정보
중종 6년 신미(1511) 12월 29일(을사)
06-12-29[01] 종실 영천 부정 감의 아들 주가 상언하니 의논하다
종실(宗室) 영천 부정 이감(寧川副正李淦)의 아들 이주(李鑄)가 상언(上言)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의 아비 감은 충의위(忠義衛) 서복경(徐福慶)의 딸을 아내로 삼았으니, 매빙(媒聘)의 예가 이미 바르고 적첩(嫡妾)의 구분이 이미 나뉘었는데, 종부시(宗簿寺)가 서복경이 서거정(徐居正)의 서자(庶子)라 해서 신을 첩산(妾産)으로 논합니다. 당시에 좌의정 성준(成俊)이 의논드리기를 ‘이감이 이미 예를 이루어 성혼(成婚)하였으니, 마땅히 처(妻)로 논해야 하며, 그의 자식은 강등(降等)하여 관직을 제수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드디어 이 의논을 옳다고 여겨, 선원록(璿源錄)에 신의 어미를 처로, 신을 적자(嫡子)로 기록한 것입니다. 이미 처가 되고 적자가 되었는데, 강등하여 관직을 제수함은 유독 무엇에 근거한 것입니까? 당초에 서거정이 처에게서 자식을 두지 못하고 서복경을 낳았으며, 서복경은 또 생원 안유문(安有文)의 맏딸을 아내로 삼았으니, 그 문지(門地)는 비록 한미한 지파(支派) 서출(庶出)이라 하더라도, 내외(內外)가 모두 사족(士族)으로, 창기(倡妓)의 서얼 출생과는 같지 아니합니다. 신은 부정(副正)의 적자로서 전례에 따라 마땅히 실수(實守)를 받아야 하거늘, 이제 종부시가 신을 강등하여 부수(副守)를 삼았습니다. 이는 국론(國論)이 이미 적자로 정하였는데, 종부시가 신을 서얼로 대접함이니, 원통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명하여 정부에 의논하게 하였다. 김수동은 의논드리기를,
“《대전(大典)》에 ‘종친의 양첩(良妾)의 소생은 한 등을 낮추고 천첩(賤妾)의 소생은 또 한 등을 낮추어 관직을 제수한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적첩의 구분은 문란시킬 수 없습니다. 이주에게 강등하여 직을 제수함은 법에 마땅합니다.”
하고, 김응기ㆍ이손 등의 의논도 같았다. 유순정은 의논드리기를,
“전일에, 이주의 어미를 처(妻)로 하고 이주를 적자로 만들어 이미 《선원록》에 기록하였으니, 이주의 강등하여 직을 제수함은 과연 온당하지 못합니다. 적자의 예에 따라 직을 제수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성희안은 의논드리기를,
“이감은 종친으로서 서얼인 서복경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비록 예(禮)로 장가든 것이요 야합한 것은 아니나 마땅한 짝은 아니니, 예를 이루어 성혼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고쳐서 첩으로 삼아 명분(名分)을 바루어야 합니다. 명분이 바루어지면, 그 자식의 직은 자연 제수하는 전례를 따르면 됩니다.”
하니, 유순정의 의논을 따랐다.
[주-D001] 매빙(媒聘) : 혼례.[주-D002] 첩산(妾産) : 첩의 소생.[주-D003] 문지(門地) : 문벌.[주-D004] 내외(內外) : 친가와 외가.
ⓒ 한국고전번역원 | 권영대 (역) |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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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 중종 15년 경진 > 윤 8월 5일 > 최종정보
중종 15년 경진(1520) 윤 8월 5일(경인)
15-윤08-05[03] 서거정의 첩의 아들을 충의위에 소속시켜 그 아비 거정의 제사를 받들도록 허락하다
충훈부(忠勳府)의 당상(堂上)이 아뢰기를,
“《대전(大典)》의 충의위(忠義衛) 조에 ‘공신(功臣)의 첩자손(妾子孫) 중에서 승중(承重)한 자는 소속되는 것을 허가할 수 있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천첩자(賤妾子)도 적장(嫡長)이 되는 것을 허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득정(徐得楨)은 그 아비 서복경(徐福慶) 【달성군(達城郡) 서거정(徐居正)의 첩자이다.】 이 폐조 때에 나인(內人)에게 빌붙어 갑자기 안악 군수(安岳郡守)가 되고 또 의영고 영(義盈庫令)이 되었으므로 이미 영불 서용(永不敍用)에 처하였는데, 아직 살아 있으니 서득정이 어찌 그 적장을 이을 수 있겠습니까? 국가에서 공신을 대우하는 것이 오히려 중한데, 거정의 자손 중에 녹(祿)을 받는 자가 없다면, 복경에게 충의위에 소속되는 것을 허가하여 대를 이어 녹을 받도록 해서 그 아비 거정의 제사를 받들게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나인에게 빌붙은 일은 관계가 없을 듯하나, 충의위는 사로(仕路)에 통하는 곳이니 삼공(三公)에게 의논하라.”
하였는데, 삼공의 의논이 충훈부가 아뢴 것과 같으므로 상이 그대로 따랐다.
[주-D001] 승중(承重) : 제사를 받드는 중임(重任)을 이어받는다는 뜻. 장자(長子)가 먼저 죽어 장손이 조부를 계승하여 제사를 받드는 경우, 먼저 죽은 장자에게 후사(後嗣)가 없으므로 지자(支子)가 계승하는 경우, 적자손(嫡子孫)이 없으므로 서자손(庶子孫)이 계승하는 경우 등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연탁 (역) |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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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정조 > 정조 24년 경신 > 3월 22일 > 최종정보
정조 24년 경신(1800) 3월 22일(갑술)
24-03-22[13] 상언(上言) 133도(度)를 각 해당 관사에 판하(判下)하였다.
또 아뢰기를,
“광주(廣州)의 전 수위관(守衛官) 서종화(徐宗和)의 상언에 ‘저의 9대조인 문충공(文忠公) 서거정(徐居正)은 적자(嫡子)가 없어 양첩(良妾)의 아들인 서복경(徐福慶)이 제사를 받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서익정(徐益禎)이 병이 있어 장가들지 못하는 바람에 문충공의 백형(伯兄)인 언양 현감(彦陽縣監) 서거광(徐居廣)의 증손 서죽수(徐竹壽)가 후사를 잇는 규례대로 문충공의 제사를 모셨습니다. 그런데 지난 임오년(1762, 영조38)쯤에 보청(譜廳)을 설치할 때 일을 주관하는 사람이 적(嫡) 7촌 조카가 문충공의 후사가 된 일을 쓰지 않는 바람에 세상 사람들의 의심을 사게 되었습니다. 적자(嫡子)와 서자(庶子)를 변별하여 보첩(譜牒)을 바로잡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달성 서씨는 모두 언양 현감의 후손이고, 매우 번성하여 선비들 중에서 으뜸입니다. 문충공 서거정은 문단의 종장(宗匠)이자 좌리 공신(佐理功臣)이지만 후손이 영락하는 바람에 간신히 언양 현감의 후손을 얻어 대신 제사를 받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적자와 서자를 변별하지 못하게 된 것은 실로 불쌍히 여기고 한탄할 만한 일입니다. 그 문장(門長)에게 분부하여 정말로 상언의 내용과 같다면 사실대로 바로잡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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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락당고(希樂堂稿) 김안로(金安老)생년1481년(성종 12)몰년1537년(중종 32)자이숙(頤叔)호희락당(希樂堂), 퇴재(退齋), 우수(愚叟)본관연안(延安)특기사항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인
希樂堂文稿卷之八 / 雜著 龍泉談寂記 / [有朴生者嘗染癘熱]
有朴生者。嘗染癘熱。危革十許日而氣盡。魂蘧蘧有所適。如有更卒追押。奔騰而去。歷曠漢至一處。不宮不室。除地甚平敝。循壇露設。朱櫺周匝。如今搶纍然。有官人列坐其內。牛頭人身。夜叉之屬。森立庭下。見生至。踊躍而前。拿致于庭。旋付湯鬵。生見僧尼男女雜錯湯沸中。竊念若入積人下。懼不得出。卽以兩手分據鬵面。仰臥浮游。良久。夜叉以鐵串貫出置之地。猶不覺痛苦。俄今夜叉。轉付上司。行至大宮闕。入重門。設倚子左右几卓。如今官府。峨冕繡裳者列踞其上。輿衛之盛如君王。簿牒雲堆。署判雷下。靑頭胥吏羅伏案下行文書。淸嚴峻肅。迥非人世。引生問曰。爾在世有何行事。且爲何等任職。生對曰。在世別無異行。職隷醫局。掌出納方書。供畢。吏白諸官人遍。諸官人議曰。此人運不窮。不當來。吏按冥籍失審覈。以貽此謬。何以處之。其中一官人。容儀郁穆。似若我先代王。私引生至座後謂曰。今當賜爾餠餌。爾若食下則更不返世矣。生拜伏喘汗而退。果以一榼盛餠餌。逼令生喫。生佯食潛納懷中盡。擡首傾耳。聽殿上言議聲。僉曰。此子可人。因留任用可也。一官人曰。數不當來。而緣誤遂非。不亦戾乎。往復辨難。已而判云可令遣還。又見吏以一牒押下。牒云。朴孝山,尹崇禮。可陞堂上階。徐 福慶。可守安岳郡。生不曉所以。將行出。似若我先代王。裁帛書鎖玉函。裹以紅綿袱付生曰。可傳與爾國主。聲聞大不佳。在予何以爲顏。生拜辭。擎書函而出。到初至湯鬵之所則初押之卒。拘執不使放過。生詰卒曰。官旣遣我。爾敢擅拘。恣獰無憚乎。卒厲氣答曰。吾。門者也。非官驗。不可出。生示書函曰。此非官驗乎。卒曰。非關出門。吾將質于官。去良久而返曰。已得官旨。汝可去。付一白狵。犬多毛 使導之出境。至一大江。狵乃跳越如飛。生亦騰身躍入。旋墮江心。有物承之。安與如坐。但聞風水聲。不知所之。忽覺開睫則身臥床席。妻孥傍泣。召集親黨。方爲斂襲之具矣。生精神戃恍。呼叫大索云。失吾玉函書。且云。朴孝山,尹崇禮俱珥玉。徐福慶分郡符。吾當往報之。排戶欲走。妻孥以爲譫言狂走。群持之。以竟一晝夜。始惺惺歷其所爲。蓋朴孝山,尹崇禮。醫者也。徐福慶。四佳公支出也。國制。士仕之路。不許令支庶通。生且平生不知有徐福慶。竊心怪之。未幾。燕山主特除朴,尹折衝西衛職。福慶因內嬖。冒顯班爲安岳。其言俱驗矣。玉函書。似戒勖燕山荒亂。而不覺所謂云。生名世擧。今官內醫院。頗以業精名世。嘗道其事甚詳。忍性子曰。子言正類釋氏誣世之說。語怪述異。君子所不敢。然彼醫者之僭干榮秩。支孼之貸冒不分。固是昏朝政紊。而若有數存乎其間。凡人得表禍福。營集圖求。若係其人之巧拙癡黠。而實非人爲。前定之數。時至欲發。則必生出妙幾奇軸。使其人有以乘假之。及其成也。人自不知。妄謂容人智力。疲心憊精。死不知止。可笑也。雖然。乘除報應。由人善淫則理也。以理推之。數亦可以轉移。彼醫者支孼之獲不眼。喪失旋隨。豈非窺竊冒濫。不顧涯分之致然耶。
[주-D001] 敝 : 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