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이제 편차함에 있어 그 대강과 요체를 취하는 데에 힘쓰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 흥함과 망함에 관계되어 경계가 될 만한 일은 모두 살펴서 기록하고, 그 나머지는 이미 정사(正史)에 있으므로 생략한다.
一.‘종(宗)’이라고 일컫거나 ‘폐하(陛下)’·‘태자(太子)’라고 부르는 것들은 비록 참람(僭濫)하고 분수 넘치는 것이지만, 옛 일을 따라 그대로 곧장 씀으로써 그 실상을 보존하였다. 조회(朝會)와 제사(祭祀)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변고가 있으면 기록하였고 왕이 친히 제사 지냈으면 기록하였다. 사원(寺院)으로 행차하거나 보살계(菩薩戒)를 받고 도량(道場)을 베푸는 등 당시 임금들의 일상적인 일들은 기록하기에 그 번잡함을 감당할 수가 없으니, 각각의 왕마다 처음 보이는 것을 기록하고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을 기록하였다. 반승(飯僧)한 수가 십만 명에 이르러 거금을 허비한 경우는 반드시 기록하였다. 상국(上國)의 사신이 오고 간 일이 비록 빈번할지라도 반드시 기록한 것은 중화[中夏]를 높임이다. 재이가 실제로 증험(證驗)된 것이 비록 작더라도 반드시 기록한 것은 하늘의 견책을 근신함이다. 들로 나가 잔치를 벌여 즐긴 일이 비록 여러 번이더라도 반드시 기록한 것은, 방일하게 즐기는 것을 경계함이다. 대신(大臣)의 임면과 어진 선비들이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난 자초지종을 다 기록하였으며, 문장이나 소(疎) 중에서 당시에 실행된 것과 사안에 있어서 중요한 것들도 또한 모두 기록함으로써, 상고할 수 있게 대비하였다.
一. 신우(辛禑)는 〈한(漢)나라〉 왕망(王莽)의 예에 의거하여 기년(紀年)은 세지 않고 다만 60갑자(甲子)만을 기록하였으니, 참람하게 도적질 한 죄를 바로잡기 위해서이다.
一.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왕망 직후의〉 기년은 뒤를 이어 즉위한 〈광무제(光武帝)를 기준으로〉 정하였다. 이제 이에 의거하여 공양왕(恭讓王) 원년 10월 이전은 비록 신창(辛昌)이 재위하고 있었지만 곧 공양왕 원년으로 기년을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