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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검증보다 일정이 앞선 i-SMR
--2035년 상용화 계획은 무엇으로 안전성을 입증하는가--
이정윤 원자력안전과미래 대표
이 글은 2026년 9월 13일 원전공익정보센터 위원회 줌(Zoom) 회의에서 진행된 이정윤 원자력안전과미래 대표의 강연 내용입니다.
원자로는 정부가 준공 연도를 발표한다고 완성되는 설비가 아니다. 먼저 설계를 확정하고, 실제 운전조건을 대표하는 시험으로 설계가정을 확인해야 한다. 시험에서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 나타나면 해석모델과 설계를 고치고 다시 시험해야 한다. 이 반복 과정이 충분히 축적된 뒤에야 규제기관은 해당 설계가 법령과 안전기준을 충족하는지 판단할 수 있다.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으면 일정은 늦춰져야 하고, 핵심 가정이 성립하지 않으면 사업을 멈출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인 i-SMR 사업은 이러한 순서가 뒤집혀 있다는 의문을 낳는다. 국가 전력계획은 2035년 무렵의 상용화를 먼저 반영했고, 사업단은 2028년 표준설계인가 획득과 2035년 최초호기 준공을 목표로 제시했다. 그 사이에 무붕산 노심, 내장형 제어봉구동장치, 일체형 원자로의 열수력, 나선형 증기발생기, 핵심 안전계측, 다중모듈 통합운전 및 원격정비를 검증해야 한다. 이 가운데 일부 시험은 표준설계인가 목표 시점과 겹치거나 그 이후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시험은 확정된 설계를 확인하는 절차인가, 아니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설계를 찾아가는 연구개발 과정인가.
이 글은 SMR이라는 기술 범주 전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형 냉각재배관을 줄이고 피동안전계통을 채택하며, 공장 제작과 모듈화를 시도하는 방향에는 검토할 가치가 있다. 문제는 그러한 개념상의 장점을 실제 원자로의 안전성·운전성·정비성·경제성으로 입증했는가에 있다. 기존 경수로 기술을 활용한다는 설명만으로 새로운 결합설계의 성능까지 입증되지는 않는다. 아직 확인해야 할 기술적 질문이 남아 있는데도 상용화 연도와 후속 예산을 먼저 확정한다면 연구개발의 실패가 규제와 재정의 실패로 확대될 수 있다.
이 장의 결론은 간명하다. 현재 공개자료만으로는 i-SMR의 설계성숙도와 핵심기술의 실증 수준이 2035년 상용화 일정을 뒷받침한다고 보기 어렵다. 필요한 것은 낙관적인 일정표가 아니라 기준설계, 시험과 합격기준, 설계변경 절차, 단계별 중단조건을 연결한 검증체계다. 시험을 하겠다는 약속과 검증을 통과했다는 사실은 전혀 다른 것이다.
1. 2035년을 먼저 못 박은 정책
i-SMR 추진일정은 2028년 표준설계인가, 2030년 건설허가, 2032년부터 2034년 사이 원자로 설치와 핵연료 장전, 2035년 최초호기 준공으로 이어진다.[1] 일정표만 보면 연구개발과 인허가, 건설이 빈틈없이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원자로 개발에서는 뒤 단계의 날짜를 먼저 고정할수록 앞 단계의 심사와 시험이 일정 준수 압력을 받는다. 특히 국가 전력계획이 특정 시점의 설비용량까지 반영하면 기술개발의 실패나 지연을 정책적으로 인정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표준설계인가는 단순히 개념의 유망성을 인정하는 절차가 아니다. 건설허가 단계에서 반복 사용할 원자로의 기본 안전설계를 규제기관이 미리 승인하는 제도다. 따라서 신청설계가 무엇인지, 핵심 안전기능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해석결과를 뒷받침하는 시험근거가 무엇인지가 충분히 확정돼야 한다. 신청 후에도 연구개발이 계속될 수는 있지만, 시험결과에 따라 안전계통이나 주요 기기의 형상이 달라진다면 처음 심사한 설계와 최종 제작설계가 달라질 수 있다.
개발사업이 목표 일정을 갖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일정이 기술적 판단을 대신하는 경우다. 시험이 성공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다는 계획은 정상적이다. 반면 다음 단계의 날짜를 지키기 위해 시험범위와 규제요건을 조정하거나, 핵심자료의 후속 제출을 통상적인 보완으로 취급한다면 규제의 독립성이 약해진다. 일정은 검증결과의 종속변수여야 한다. 검증이 일정의 종속변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
2035년이라는 목표가 신뢰를 얻으려면 정부와 사업자는 최소한 세 가지 경우를 공개해야 한다. 첫째, 모든 핵심시험이 성공할 경우의 기준일정이다. 둘째, 시험결과가 해석과 일치하지 않아 설계변경이 필요한 경우의 수정일정이다. 셋째, 핵심 안전개념이 성립하지 않아 사업을 재검토하거나 중단하는 조건이다. 현재 공개된 자료에서는 첫 번째 경로가 강조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경로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성공 일정만 있고 실패 일정이 없는 연구개발은 계획이라기보다 희망에 가깝다.
2. 핵심자료가 남은 서류적합성
KINS의 심사계획 자료에 따르면 표준설계인가 신청서의 서류적합성 검토 과정에서 225건의 보완요구가 제기됐고, 212건을 보완한 뒤 13건은 향후 제출하는 방식으로 서류적합성이 인정됐다.[1] 숫자만 보면 대부분의 보완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남은 자료의 수가 아니라 그 성격이다.
후속 제출 대상에는 내진범주 I 구조물과 기초 해석, 제어건물 구조해석, 제어봉구동장치의 상세설계, 계측제어계통 공통원인고장 분석 등이 포함된 것으로 제시됐다. 통합제어실과 원격정지실의 기본설계, 항공기 충돌평가, 건물 단면과 배치정보도 안전성과 방호성을 판단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이런 문서는 표현을 다듬거나 도면번호를 바로잡는 행정적 보완과 성격이 다르다. 안전기능의 구현 방식과 사고 대응 가능성을 판단하는 설계근거에 해당한다.
따라서 서류적합성 판단에서 물어야 할 질문은 “13건이 남았는가”가 아니다. “남은 13건 없이도 본심사에 필요한 설계경계와 안전논리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가”다. 서류적합성은 안전성 승인이 아니므로 후속자료를 받으며 본심사를 진행할 수 있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하지만 신청서의 핵심 설계가 미완성이라면 본심사 과정에서 심사대상 자체가 계속 변할 수 있다. 그 경우 규제기관은 완성된 설계를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자와 함께 설계를 완성해 가는 위치에 놓일 위험이 있다.
규제기관은 신청 전 사전설계검토 단계에서 다수 분야가 초기 설계여서 구체적인 입장을 제시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평가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1] 그렇다면 사전검토 종료와 신청서 제출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는지 설명해야 한다. 단순히 문서의 양이 늘어난 것인지, 아니면 객관적인 설계성숙도 기준을 통과한 것인지가 중요하다. 주요 계통의 형상 확정률, 안전등급 기기의 설계완료율, 설계 인터페이스의 해소 정도, 시험으로 확인된 핵심 가정의 비율처럼 판단 가능한 기준이 필요하다.
이 문제를 제기하는 목적은 심사를 시작하지 말자는 데 있지 않다. 심사를 시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설계성숙도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제출 예정일만으로 핵심자료의 공백을 수용하면 향후 다른 원자로 신청에도 같은 선례가 남는다. 사업자는 일정을 맞추기 위해 미완성 설계를 제출하고, 규제기관은 후속 제출계획을 조건으로 본심사를 시작하는 관행이 굳어질 수 있다. 표준설계인가 제도의 신뢰성은 개별 사업의 속도보다 중요하다.
3. 움직이는 기준설계
표준설계인가 심사에서 가장 먼저 확정해야 할 것은 기준설계다. 기준설계는 특정 시점의 도면과 계산서, 기기 사양, 재료, 계측위치, 안전계통 구성 및 설계 인터페이스를 하나의 통제된 형상으로 묶은 것이다. 규제기관의 질의와 사업자의 답변, 시험결과와 설계변경은 모두 이 기준선과 비교돼야 한다. 그래야 어떤 가정이 바뀌었고, 변경이 다른 안전분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추적할 수 있다.
i-SMR에서는 신청 시점의 설계, 225건 보완 뒤의 설계, 13건 후속자료가 제출된 뒤의 설계, 2028년 이후 시험결과가 반영된 설계가 서로 같다는 보장이 필요하다. 제어봉구동장치의 설치구조가 달라지면 원자로 헤드, 전기 관통부, 냉각, 정비공간 및 구조해석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노내계측기의 위치와 인출경로가 달라지면 원자로 내부구조와 격납용기의 관통부, 연료교체 및 정비절차가 함께 바뀔 수 있다. 펌프나 나선형 증기발생기의 형상이 바뀌면 압력손실, 유량분배, 열수력 해석과 사고해석을 다시 검토해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피하기 어려운 딜레마가 있다. 향후 시험결과에 따라 설계가 바뀐다면 변경 전 설계를 먼저 표준설계로 승인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반대로 시험결과가 어떻든 설계를 바꾸지 않는다면 그 시험은 무엇을 검증하기 위해 수행하는가. 물론 모든 시험결과가 설계변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점은 변경 여부를 판단할 정량기준과 변경 시 재심사 범위가 사전에 정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준설계 목록과 형상관리 기록을 공개 가능한 범위에서 제시해야 한다. 각 핵심 설비에 대해 설계상태, 관련 안전해석, 미완료 시험, 시험 완료 예정일, 합격기준, 불합격 시 조치 및 영향을 받는 문서를 하나의 매트릭스로 연결할 필요가 있다. 인허가 문서가 서로 다른 시점의 설계를 전제로 작성되면 개별 문서가 정교하더라도 전체 안전논리는 모순될 수 있다.
4. 무붕산 노심이 옮겨 놓은 안전부담
i-SMR은 정상운전에서 용해성 붕산을 사용하지 않는 무붕산 노심을 주요 특징으로 내세운다. 기존 가압경수로는 냉각재에 녹인 붕산의 농도를 조절해 장기적인 반응도 변화를 관리한다. 붕산 사용을 줄이면 붕산 희석사고의 일부 시나리오와 수화학 관리 부담을 줄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용해성 붕산이 담당하던 기능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연료주기 초의 과잉반응도는 가연성흡수체와 연료배치로 억제해야 하고, 운전 중 출력과 반응도 변화에는 제어봉이 더 큰 역할을 맡게 된다. 제논 변화, 연료 연소에 따른 반응도 변화, 온도계수, 고착제어봉 조건과 정지여유도도 전 주기에 걸쳐 관리해야 한다. 따라서 무붕산 설계는 위험을 제거했다기보다 반응도 제어의 부담을 가연성흡수체, 제어봉구동장치, 노심설계 및 계측계통으로 옮긴 것으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2][3]
HIGA와 같은 고성능 가연성흡수체를 사용한다면 조사 중 흡수능의 변화, 잔존독성, 팽윤이나 균열, 피복과의 상호작용, 제조편차를 실제 조사시험으로 확인해야 한다. 계산상 목표한 속도로 흡수능이 감소하더라도 제조편차나 조사거동이 예상범위를 벗어나면 출력분포와 정지여유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무붕산 노심에서는 운전 중 붕산농도를 조정해 설계편차를 보완하기 어렵기 때문에 연료와 흡수체의 제조오차, 열수력 오차 및 계측오차의 결합을 더 엄격하게 평가해야 한다.
제어봉구동장치의 중요성도 커진다. i-SMR은 원자로용기 안에 구동부를 배치하는 내장형 CEDM 개념을 적용한다. 외부에 긴 구동축과 하우징을 두는 기존 방식과 달리 원자로 상부구조를 줄이고 제어봉 이탈사고의 가능성을 낮추려는 취지다. 그러나 고온·고압 냉각재와 방사선 환경에서 전자기 코일, 걸쇠, 그리퍼, 위치센서 및 전기절연이 장기간 기능해야 한다. CRUD의 침착, 마찰 증가, 부품 마모, 열화에 따른 구동력 변화, 센서 드리프트, 제어봉 고착과 낙하시간을 대표 환경에서 확인해야 한다.
공개 일정에서 CEDM의 주요 기능검증이 표준설계인가 목표 시점과 맞물리거나 이후로 이어진다면 규제기관은 분명히 답해야 한다. 검증시험에서 낙하시간, 반복 위치정밀도, 내구성 또는 고착 조건이 합격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 2028년 인가목표를 늦출 것인가. 원자로 내부의 설치형상과 정비방법까지 바꿀 필요가 생기면 관련 구조 및 사고해석을 어디까지 다시 수행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사전 답변이 곧 Hold Point다.
무붕산 기술을 혁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명칭이나 특허가 아니라 입증자료가 결정한다. 제어수단과 감시수단이 함께 완성되지 않았다면 무붕산 안전논리도 완성되지 않는다. 현 단계에서 무붕산 노심은 성공이 확인된 결론이 아니라 시험으로 확인해야 할 설계 가설이다.
5. 제어할 수 있어도 측정할 수 있는가
안전계통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계통이 실제로 기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다르다. 피동안전계통이 작동하더라도 운전원과 보호계통이 원자로 압력, 온도, 냉각재 재고량, 노심수위, 중성자속 및 격납상태를 신뢰성 있게 측정하지 못한다면 사고의 진행과 냉각 성공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
i-SMR 공개도면에서는 유동의 개략적인 방향을 확인할 수 있지만, 4대 원자로냉각재펌프 각각의 유량과 차압을 어디서 어떻게 측정하는지, 노심 입출구 온도와 집합체별 냉각 불균형을 어떻게 파악하는지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여기서 “도면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곧바로 “설계에 없다”는 결론으로 바꿔서는 안 된다. 다만 표준설계의 타당성을 외부에서 판단할 공개근거가 부족하다는 지적은 가능하다.
특히 펌프 한 대가 정지하면 단순히 전체 유량이 4분의 1 줄어드는 것으로 가정할 수 없다. 일체형 용기 내부의 유로저항과 펌프특성, 상부 플레넘과 하부 플레넘의 혼합, 노심 집합체별 압력손실에 따라 3차원 비대칭 유동이 형성될 수 있다. 정지한 펌프 경로의 역류나 우회유동, 특정 노심영역의 유량저하가 발생할 가능성도 평가해야 한다. 평균 노심유량만으로 국부적인 DNBR 저하와 출력첨두를 놓치지 않는지 확인해야 한다.
노내계측기의 전체 설치경로도 중요하다. 센서가 어디에 배치되고 신호선이 원자로용기와 격납용기를 어떻게 관통하며, 연료교체와 내부구조물 인출 때 어떤 절차로 분리되는지가 설계돼야 한다. 반사체 바깥의 노외 중성자계측만으로 국부 출력왜곡, 유로막힘 또는 냉각 불균형을 어느 정도까지 탐지할 수 있는지도 정량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안전계측에는 측정범위, 정확도, 응답시간, 사고환경 적합성, 중복성과 독립성, 교정방법, 고장진단 및 교체계획이 필요하다.
수화학과 방사선 감시도 빠질 수 없다. 원자로냉각재의 정화와 CRUD 제거, 핵연료 파손 시 방사성핵종 감시와 시료채취, 장기 운전 중 부식생성물 관리가 계통설계에 연결돼야 한다. 이러한 기능이 기존 대형 원전과 다른 방식으로 구현된다면 기능의 명칭보다 유량, 제거효율, 검출한계와 정비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6. 기존 해석코드는 출발점일 뿐이다
i-SMR은 가압경수로이므로 기존 경수로의 방대한 운전경험과 해석기술을 활용할 수 있다. UO₂ 연료와 피복재, 압력용기와 용접, 품질보증, 중성자 해석 및 열수력 코드의 경험은 중요한 자산이다. 하지만 검증된 요소를 재사용하는 것과 새로운 결합설계를 검증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다.
기존 대형 경수로의 안전해석은 주로 배관으로 연결된 계통과 1차원 평균유동 모델을 사용해 발전해 왔다. i-SMR은 원자로용기 안에 펌프, 증기발생기, 가압기, 제어봉구동장치와 내부구조를 고밀도로 배치한다. 크기가 작아지면 부력, 마찰, 열용량, 구조진동과 열전달이 같은 비율로 변하지 않는다. 일체형 용기 내부의 3차원 비대칭 유동, 나선형 증기발생기의 압력손실과 진동, 피동안전계통의 상호작용은 기존 코드의 검증범위를 벗어날 수 있다.
SPACE, CAP, CINEMA와 같은 해석도구를 이용해 사고와 계통거동을 계산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계산결과가 정교해 보인다는 이유로 실제 설비의 거동을 입증했다고 볼 수는 없다. 해석코드는 사용한 모델과 상관식, 경계조건 및 입력형상을 전제로 한 계산결과를 제공한다. 실제 원자로의 형상과 현상이 코드의 검증범위 밖에 있다면 계산은 원자로의 거동보다 연구자가 가정한 모델의 거동을 보여줄 수 있다.
코드 간 비교도 실증을 대신하지 못한다. 두 코드가 유사한 결과를 냈더라도 같은 실험자료에서 만든 상관식이나 비슷한 단순화 가정을 사용하면 같은 방향의 오류를 재현할 수 있다. 따라서 확정된 형상에 대한 개별효과시험, 일체형 원자로 통합 열수력시험, 펌프 한 대 정지시험, 나선형 증기발생기 시험, CEDM과 흡수체의 환경·수명시험을 수행하고 계산값과 측정값을 비교해야 한다. 제조오차와 계측오차, 규모효과 및 모델 불확실도도 안전여유에 반영해야 한다.
안전성 입증의 순서는 기존 경험의 활용, 개별효과시험, 코드 보정과 검증, 통합시험, 규모효과와 불확실도 평가, 최종 안전해석으로 이어져야 한다. 시험결과가 해석과 맞지 않으면 상관식과 모델을 고치고 필요할 경우 안전계통의 용량과 설계여유도 다시 평가해야 한다. 이런 반복을 허용하려면 표준설계인가 목표보다 시험결과가 우선해야 한다.
7. 나선형 증기발생기와 80년 열화관리
i-SMR의 나선형 증기발생기는 제한된 원자로용기 안에 큰 열전달면적을 배치하기 위한 핵심 설비다. 소형화에는 유리하지만, 복잡한 곡선형 전열관 다발은 제작검사와 운전 중 검사, 결함의 위치 특정, 마개처리와 보수에서 새로운 과제를 만든다. “관이 작고 견고하다”는 설명은 열화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검사요건은 열화기구의 규명에서 출발해야 한다. 유동유발진동과 프레팅, 열피로, 응력부식균열, 공식과 틈부식, 이물질 마모, 수화학 이상과 복수기 누설에 따른 염화물 유입 등을 재료·응력·온도·유동조건과 연결해야 한다. 실제 제작공정에서 생길 수 있는 결함도 포함해야 한다. 어느 위치에서 어떤 방향의 결함이 얼마나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지 알아야 검사범위와 주기, 검출성능 및 합격기준을 정할 수 있다.
원자로용기에는 조사취화, 열피로, 용접부와 관통부의 균열 및 지지부 마모 가능성이 있다. 일체형 가압기에는 열성층화와 반복 열피로, 히터·계측·밸브 관통부의 장기 건전성 문제가 있다. 철제 격납용기는 부식과 용접부 피로, 밀봉과 관통부의 열화뿐 아니라 정상상태의 진공 외압과 사고 시 내압, 지진하중의 조합을 견뎌야 한다. 80년 설계수명을 주장하려면 이들 구조물·계통·기기에 대한 열화지도를 먼저 제시해야 한다.
열화지도는 단순한 고장목록이 아니다. 취약위치, 접근경로, 검사방법, 검출한계, 검사주기, 판정기준, 보수방법과 교체 가능성을 하나로 연결해야 한다. 검사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검사범위나 주기를 완화해서는 안 된다. 검사할 수 없는 설계라면 검사규정을 완화할 것이 아니라 검사할 수 있도록 설계를 변경해야 한다.
8. 분해 가능성과 복구 가능성
일체형 원자로는 기기를 한 용기 안에 배치해 대형배관 파단 가능성을 줄이는 대신 검사와 정비의 접근성을 낮출 수 있다. 원자로 헤드를 열고 내부기기를 꺼낼 수 있다는 개념 설명만으로 정비 가능성이 입증되지는 않는다. 실제 정비는 격납 개방과 인양에서 시작해 배관·케이블 분리, 헤드와 CEDM 분해, 내부구조물과 연료 취급, 검사와 보수, 재조립 및 압력경계 복구까지 이어진다.
각 단계에는 공간과 중량의 제약이 따른다. 크레인의 용량과 천장고, 장비 이동거리, 수중 접근, 차폐와 작업공간, 장비 반입과 회수경로를 실제 치수로 확인해야 한다. 원격장비가 볼트와 케이블, 배관을 분리할 수 있어야 하고, 장비가 걸리거나 전원·통신을 잃었을 때 이를 회수할 별도의 수단도 필요하다. 원격장비는 원자로가 완성된 뒤 개발해 끼워 넣는 부속품이 아니다. 원자로의 검사성과 정비성을 결정하는 설계계통이다.
재조립은 분해보다 더 엄격한 관리가 필요하다. 정렬과 체결, 절단과 재용접, 비파괴검사, 이물질 관리와 세정, 압력시험과 누설시험, CEDM과 계측기의 기능시험을 거쳐야 한다. 정비과정에서 압력경계가 손상되거나 이물질이 잔류하면 정비 자체가 새로운 안전위험을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최초호기에 핵연료를 장전하기 전에 1대1 실규모 통합정비 실증을 완료해야 한다. 실제 간격과 중량, 접속부를 재현한 모형에서 모의결함의 탐지부터 분해·보수·재조립·압력경계 복구까지 반복 수행해야 한다. 수중작업과 제한된 시야, 차폐, 오염과 방사선에 따른 작업시간 제약도 대표해야 한다. 공구 낙하, 장비 걸림, 전원·통신 상실과 같은 실패조건도 시험해야 한다.
실증의 합격기준은 “가능함을 확인했다”가 되어서는 안 된다. 검사범위, 결함 크기별 검출확률과 오차, 작업시간, 인력투입, 집단선량, 재조립 후 누설률과 기능시험 결과를 수치로 제시해야 한다. 규제기관과 독립된 제3자가 입회하고 성공 기록뿐 아니라 실패와 재시험 기록도 보존해야 한다. 실규모 통합정비 시험에 불합격하면 제작과 건설, 핵연료 장전의 다음 단계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Hold Point를 설정해야 한다.
9. 네 개 원자로와 세 명의 운전원
i-SMR의 사업개념은 4개 원자로 모듈을 하나의 발전소로 구성하고 통합제어실과 고도 자동화를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KINS 심사계획에는 3인 운전조 구성과 자동화에 관한 내용이 표준설계인가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각주가 제시됐다.[1] 이것이 사실이라면 4모듈 발전소의 실질적인 운전개념을 어느 인허가 단계에서 완결적으로 심사할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정상상태에서 세 명이 네 모듈을 감시할 수 있다는 시연만으로는 부족하다. 한 모듈에서 사고가 발생해 운전원 한두 명이 대응하는 동안 다른 모듈의 운전과 공통계통을 누가 감시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한 모듈이 정비나 기동 중일 때 다른 모듈에서 이상이 발생하는 상황, 둘 이상의 모듈에 경보가 동시에 발생하는 상황, 지진·화재·침수·소외전원상실이 여러 모듈에 영향을 주는 공통원인사건을 시험해야 한다.
고도 자동화는 운전원 부담을 줄일 수 있지만 새로운 인간공학 문제도 낳는다. 경보 폭주, 자동화의 예기치 않은 동작, 운전모드 혼동, 정보의 과도한 통합과 모듈 간 오인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주제어실을 사용할 수 없을 때 원격정지실에서 어느 범위까지 대응할 수 있는지도 중요하다. 최종 운전인력은 구호가 아니라 완전범위 시뮬레이터의 human-in-the-loop 시험과 업무부하 분석을 바탕으로 정해야 한다.
10. 정비성과 운전신뢰성이 결정하는 경제성
SMR의 경제성은 원자로가 작아졌다는 사실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대형 원전은 큰 설비를 현장에서 건설하는 부담이 있지만 한 기의 출력도 크다. SMR은 공장제작과 반복생산으로 건설위험을 줄이겠다고 주장하지만, 같은 발전용량을 확보하려면 여러 모듈을 제작·설치·운영해야 한다. 경제성을 확보하려면 제작단가를 낮추는 것과 함께 높은 이용률, 짧은 계획예방정비, 적은 인력과 낮은 비계획 정지율을 장기간 동시에 달성해야 한다.
i-SMR의 일체형 설계는 대형 냉각재배관과 원자로냉각재펌프 밀봉을 줄이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주요 기기를 원자로용기 안에 배치하면 고장 발생 후 접근·검사·인출·교체에 걸리는 시간이 늘어날 수 있다. 기기의 고장률이 낮더라도 한 번의 고장으로 장기간 정지한다면 발전소 생애 전체의 이용률과 비용에 큰 영향을 준다. 따라서 평균고장간격만 제시해서는 부족하고 평균수리시간, 강제정지 빈도와 복구시간, 작업인력, 집단선량 및 발전손실을 함께 평가해야 한다.
나선형 증기발생기에서 검사 지시가 발견되거나 CEDM이 고착되고, 원자로 내부의 펌프 또는 계측기가 교체 대상이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결함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추가 비파괴검사, 안전성 평가, 전용장비 반입, 차폐와 수중작업, 부품 인출, 재조립과 압력시험이 계획정비의 주공정이 될 수 있다. 처음부터 준비되지 않은 고장복구 절차는 며칠의 계획정비를 수개월의 비계획 정지로 바꿀 수도 있다. 다중모듈 발전소에서는 한 모듈의 정비가 공통설비와 인력, 방사선 작업구역을 점유해 다른 모듈의 운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사업자가 제시하는 짧은 정비기간은 모든 장비가 정상이고 검사에서 새로운 결함이 발견되지 않으며, 공구·인력·방사선 조건이 계획대로 유지되는 최선조건과 구분해야 한다. 경제성 평가에는 정상적인 계획정비뿐 아니라 대표적인 단일고장이 발견된 조건과 복합 정비조건을 포함해야 한다. 부품별 고장분포와 공통원인고장, 예비품 확보시간, 공급망과 전용장비의 가용성도 반영해야 한다.
60년 또는 80년의 생애주기 경제성은 낙관적인 목표 이용률을 입력해 계산하는 방식으로는 신뢰를 얻기 어렵다. 주요 기기별 시험자료에서 고장률 분포를 도출하고, 실규모 정비시험에서 얻은 실제 작업시간과 선량을 적용하며, 불확실성을 포함한 확률분석을 해야 한다. 설계변경과 최초호기 시행착오, 장기부품 공급, 폐기물 발생과 해체비용까지 고려해야 한다. 이 결과로 자본비·운영정비비·연료비·발전손실을 합산한 균등화발전비용의 범위를 제시해야 한다.
안전성과 경제성은 이 지점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정비가 어려운 설비를 계속 운전하기 위해 검사요건을 완화하거나 결함평가의 허용범위를 넓히면 경제성 압력이 안전여유를 잠식할 수 있다. 반대로 충분한 검사와 장기간 정비를 수행하면 당초 약속한 이용률과 발전단가가 무너질 수 있다. 따라서 규제기관은 경제성 목표를 지키기 위해 안전기준을 조정해서는 안 되며, 정책기관은 현행 안전기준과 현실적인 정비조건을 적용한 비용을 국민에게 공개해야 한다.
11. 개발기관과 규제기관의 책임 경계
혁신기술을 개발하는 기관과 이를 심사하는 규제기관은 목적이 다르다. 개발기관은 기술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성능을 높이며 사업일정을 관리한다. 실패를 고치고 다시 시도하는 것이 연구개발의 본질이다. 반면 규제기관은 기술개발의 성공을 지원하는 기관이 아니라, 제출된 설계가 안전기준을 충족하는지 독립적으로 판단하는 기관이다. 개발기관의 일정이 늦어지는 것보다 불충분한 근거로 안전결론을 내리는 위험을 더 무겁게 봐야 한다.
사전설계검토는 개발 초기의 규제쟁점을 확인하고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줄이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규제기관이 장기간 사전검토에 참여한 뒤 본심사에서도 미완성 설계를 계속 보완하도록 허용하면 심사자와 설계자의 경계가 흐려질 수 있다. 규제기관이 제시한 의견에 따라 만들어진 설계를 다시 규제기관이 승인하는 자기확증의 위험도 생긴다. 이를 막으려면 사전검토에서 제공한 자문과 본심사의 적합성 판단을 문서상 분리하고, 미해결 현안과 사업자의 조치결과를 투명하게 관리해야 한다.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책임도 중요하다. KINS가 기술심사를 수행하더라도 표준설계인가의 법적·정책적 책임은 최종 의결기관에 있다. 위원회는 단순히 심사보고서의 결론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준설계가 확정됐는지, 핵심시험이 완료됐는지, 후속 제출자료가 안전결론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불확실성이 충분히 보수적으로 처리됐는지를 물어야 한다. 미완료 시험을 인가조건으로 넘길 수 있는 범위와 반드시 인가 전에 끝내야 할 시험을 구분해야 한다.
정책부처와 전력계획 수립기관은 안전심사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2035년 설비계획이 이미 반영됐다는 이유로 규제기관이 심사기간을 맞춰야 할 의무는 없다. 오히려 전력계획은 i-SMR이 지연되거나 상용화되지 않는 경우를 포함한 대체전원과 수요관리 시나리오를 마련해야 한다. 검증되지 않은 원자로를 필수전원으로 전제하면 규제기관에 일정 압력이 생길 뿐 아니라, 기술개발 실패가 전력공급 계획의 공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독립검증은 사업 참여기관과 이해관계가 분리된 전문가가 원자료를 확인할 수 있어야 의미가 있다. 시험을 수행한 기관의 요약보고서만 검토해서는 부족하다. 계측 원자료, 보정기록, 시험 중 이탈과 장비고장, 실패 후 변경된 시험조건, 반복시험 결과를 확인해야 한다. 중요한 시험에는 규제기관이나 제3자의 입회를 의무화하고, 합격결과뿐 아니라 불합격과 설계변경의 이력도 보존해야 한다.
책임구조를 명확히 한다는 것은 실패했을 때 처벌할 사람을 먼저 찾는다는 뜻이 아니다. 누가 어떤 근거로 다음 단계 진입을 승인하고, 어떤 결과가 나오면 멈출지를 미리 정한다는 뜻이다. 책임이 분명하면 개발자는 정치적 일정에서 벗어나 기술적 문제를 솔직하게 보고할 수 있고, 규제기관도 사업의 성패와 무관하게 안전판단을 내릴 수 있다.
12. 혁신형이라는 이름과 수출 독립성
i-SMR을 독자적인 혁신형 원자로라고 부르려면 기술적 독립성과 수출 가능성도 확인해야 한다. 한국형 가압경수로의 제어봉구동장치는 과거 CE 계열 기술에서 출발했다. i-SMR이 새로운 내장형 구조에 관한 국내외 특허를 확보하더라도 신규 특허의 존재만으로 이전기술과의 실질적 단절이 입증되지는 않는다. 공개 특허심사 과정에서 웨스팅하우스의 선행특허가 인용됐다면 기술적 관련성을 보여주는 공식 단서가 될 수 있다. 다만 선행특허 인용 자체를 특허침해 판정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2025년 한전·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 사이의 합의 세부조건은 비공개다. 일부 언론은 독자 개발 SMR도 수출 전에 기술자립성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이런 조건이 실제로 적용된다면 i-SMR은 설계가 완성된 뒤에도 웨스팅하우스의 동의, 로열티, 물품·용역 조건이나 시장 제한 문제와 마주할 수 있다. 미국 원산 기술이나 기술자료가 사용됐다면 미국 수출통제 절차도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
이 문제는 현재 자료만으로 침해 여부를 단정할 사안이 아니다. 오히려 국책사업의 수출성을 주장하는 쪽이 CE·웨스팅하우스의 도면, 해석코드, 시험자료, 제작 노하우와 어떤 방식으로 단절했는지 입증해야 한다. 기술자립성 검토를 상용화 직전에 미룬다면 막대한 개발비를 투입한 뒤 수출조건이 드러날 수 있다. 지식재산권과 수출통제는 기술개발의 부수적인 법률검토가 아니라 초기 단계의 사업 타당성 조건이다.
13. 해양 MSR에서 되풀이되는 선결조건 부재
국가 SMR 정책의 문제는 i-SMR에 그치지 않는다. 해양 용융염원자로 사업에서도 개념설계 이후 대규모 기술개발로 넘어가기 전에 해결해야 할 선결조건이 남아 있다. 용융염원자로는 원자로뿐 아니라 고온 화학설비와 액체연료계통을 함께 검증해야 한다. 모사염을 이용한 루프시험과 단기 부식시험은 초기 연구에 유용하지만 실제 핵분열과 조사환경을 모두 대표하지 못한다.
원자로 분야에서는 고온 용융염의 장기 부식, 방사선 조사에 따른 재료열화, 염의 동결과 재용융, 배수계통과 붕괴열 제거를 확인해야 한다. 연료주기 분야에서는 연료염 조성과 반응도, 핵분열생성물의 이동과 침착, 삼중수소와 기체성 핵종의 처리, 핵물질 계량과 비확산성을 검증해야 한다. 해양 적용에서는 충돌·침수·좌초·화재·전복, 파랑과 진동, 경사에 따른 연료염 유동변화, 항만과 연안사고의 비상대응, 육상과 해상 규제기관의 책임경계를 추가로 다뤄야 한다.
이 세 영역을 한꺼번에 추진하면 실패 원인과 책임주체를 구분하기 어렵다. 육상에서 원자로와 연료주기 기술을 먼저 입증하고, 그 다음 해양환경에서 구조와 운항 안전성을 검증하는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 실제 핵연료를 사용하지 않으면 핵분열생성물 거동과 조사부식, 장기 방사선 환경의 안전성 및 폐기물 저감 효과를 충분히 입증하기 어렵다. 반대로 Pu·TRU 등 협정상 제약을 받는 핵물질을 사용하려면 한미원자력협정에 따른 동의, 핵물질 공급경로와 적격 실증시설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8]
개념설계 단계의 약 290억 원 사업이 약 8,960억 원 규모의 기술개발로 확대되는 계획이라면 예산의 증가폭보다 무엇을 실제로 입증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핵물질의 종류와 공급원, 실증시설과 인허가 절차, 국제협정상 동의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연구비가 늘어나도 핵심 병목이 해소되지 않는다. 실제 연료를 사용하지 않으면 목표를 입증하기 어렵고, 실제 연료를 사용하려면 선결조건이 마련되지 않은 모순이 발생한다.
따라서 예산 확대 전에 핵연료 공급, 협정상 동의, 지정시설, 규제주체와 단계별 실증계획을 먼저 확정해야 한다.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후속 예산의 집행을 보류하는 Hold Point가 필요하다. 연구개발의 필요성과 대규모 국책사업의 타당성은 같은 말이 아니다.
14. 실패를 관리하는 검증체계
i-SMR 약 5,906억 원과 해양 MSR 약 8,960억 원을 합하면 두 사업의 계획규모는 약 1조 4,866억 원에 이른다.[6][7] 국책사업에서는 기술적 성공 가능성만큼 실패를 발견하고 손실을 제한하는 구조가 중요하다. 실패를 숨기거나 다음 단계로 넘기는 사업은 예산을 많이 투입할수록 중단하기 어려워진다. 이미 투입한 비용과 정치적 약속이 과학적 판단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첫째, 심사의 기준이 되는 설계형상과 변경관리 이력을 확정해야 한다. 둘째, 핵심기술별 시험항목, 일정, 완료 여부, 합격기준, 설계반영 결과를 하나의 시험 매트릭스로 관리해야 한다. 셋째, HIGA·CEDM·4대 펌프 유량분배·노내계측·나선형 증기발생기·피동안전계통에 대해 다음 단계 진입을 금지하는 Hold Point를 설정해야 한다. 넷째, 제작·검사·시험·해석과 정량적 합격기준을 ITAAC와 유사한 방식으로 연결해야 한다.
다섯째, 기존 검사요건을 대체하거나 완화하려면 현행 요건과 동등하거나 그보다 우월한 안전성을 정량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여섯째, 4모듈 통합운전에 대해 다중사고와 공통원인사건을 포함한 인간공학 실증을 실시해야 한다. 일곱째, 주요 구조물·계통·기기의 열화기구, 검사방법, 검사주기, 합격기준과 보수·교체방법을 연결해야 한다. 여덟째, 1대1 원격정비 실증을 통과하기 전에는 최초호기 장전으로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아홉째, 해양 MSR은 핵물질 공급과 협정상 동의, 실증시설이 확정되기 전에 대규모 후속사업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중단 결정권자다. 사업을 추진하는 기관이 스스로 실패를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독립된 기술검증위원회가 원자료와 시험실패 기록에 접근하고, 규제기관은 사업일정과 별개로 인허가 판단을 내려야 한다. 중대한 불합격이 발생하면 설계변경, 일정연기, 예산조정 또는 사업중단을 결정할 책임주체와 절차가 사전에 정해져야 한다.
맺음말
SMR은 작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으로 안전하거나 경제적인 원자로가 되지 않는다. 대형배관을 줄이고 피동안전계통을 채택하는 장점은 고집적화된 내부기기, 새로운 열수력 현상, 제한된 검사와 정비 접근성, 다중모듈 운전이라는 다른 부담과 함께 평가해야 한다. 장점은 설계개념에서 주장할 수 있지만 안전성과 경제성은 시험과 운전경험으로 입증해야 한다.
i-SMR의 현재 문제는 연구개발을 시도한다는 데 있지 않다. 국가계획이 2035년 상용화를 먼저 약속하고, 핵심설계와 시험, 인허가 및 건설이 그 날짜를 향해 동시에 달리고 있다는 데 있다. 시험결과가 설계가정을 부정할 경우 무엇을 바꾸고 어느 단계에서 멈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면 규제심사는 개발일정을 승인하는 절차로 변질될 수 있다.
국가 연구개발은 실패할 수 있다. 오히려 실패 가능성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조기에 발견하는 것이 과학기술 정책의 책임이다. 그러나 핵연료를 장전하는 원자로 사업에서는 실패를 건설현장이나 상업운전 단계까지 미뤄서는 안 된다. 실패를 허용한다는 말은 안전기준을 낮춘다는 뜻이 아니라, 검증단계에서 문제를 발견하면 과감히 설계를 고치고 일정을 늦추며 필요하면 사업을 중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험을 하겠다는 계획만으로 검증체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무엇을 시험하고 어떤 수치로 합격을 판단하며, 불합격하면 누가 다음 단계를 멈출 것인지가 정해져야 비로소 검증이라고 부를 수 있다. 2035년이라는 날짜보다 먼저 확정해야 할 것은 성공 일정이 아니라 실패를 인정하고 멈출 수 있는 기준이다.
핵심 검증 요구사항
참고자료
[1]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i-SMR 표준설계인가 심사계획(안)」, 2026년 8월 27일 및 2026년 원자력안전규제정보회의 공개자료.
[2] Idaho National Laboratory, soluble-boron-free small modular reactor core design 관련 연구자료, 2014.
[3] KEPCO E&C and MPR Associates, soluble-boron-free SMR core 및 반응도 제어 관련 공동연구자료, 2014.
[4] i-SMR 기술개발사업단, i-SMR 설계개요, 카탈로그 및 개발일정 공개자료.
[5] 한국수력원자력 중앙연구원, “Maintenance Strategy for i-SMR,” IAEA International Conference on Small Modular Reactors and their Applications, 2024.
[6] 정부 및 i-SMR 기술개발사업단,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 기술개발사업 예산·사업기간 자료.
[7] 해양 용융염원자로 관련 전략계획서·평가자료 및 7대 SEED 추진방안.
[8] 대한민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 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력협정.
[9]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 소형모듈원자로 설계심사 및 NuScale 관련 공개자료.
[10] 이정윤, 「SMR 기술검토」 발표자료, 2026년 9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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