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바빌로니아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위치한 이라크의 남부를 바빌로니아라고 했다. 최초의 주민들은 수메르 인들로 기원전 3천년 이전부터 문자를 발명해 그들의 문화와 종교·예술을 고대 서아시아 전역에 전파시켰다. 수메르 인들은 전반적인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예술·종교·문학에 있어서도 고대 동방의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었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예술가와 장인의 구별이 없었으며 그들은 모두 존경을 받았고, 그들의 기술을 지혜의 화신인 에아신에게서 부여받았다고 생각했다.
기원전 3천년 초 바빌로니아의 도기 제작은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앗시리아의 아르파시야와 이란의 수사에서 출토된 도기는 모양도 아름답고 채색한 장식의 취향과 기술도 뛰어났던 것을 보여준다.
바빌로니아의 건축에는 진흙과 짚으로 만든 벽돌과 삼목이 주재료로 사용되었다. 궁전이나 신전의 외벽은 화려한 장식을 붙여 치장했으나 내구성이 없는 진흙 벽돌로만 되어 있어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바빌론의 건축물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바빌론 건축의 특징적인 요소는 약간 튀어나온 버팀벽이 달린 정면과 계단을 쌓거나 삼각형 모양으로 된 수직의 수로와 총안이다. 또 가장 독특한 건축물은 "지구라트"라고 하는 거대한 계단식 탑이다. 이것은 모든 주요 신전에 필수적인 것이었는데 거대한 진흙 벽돌을 층층이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지게 쌓고 꼭대기에는 성전을 만들어 바깥 계단으로 가게 되어 있다.
기원전 2500년경에는 팔장을 낀 자세의 자연스러운 환조 석회석상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돌 공예의 진정한 매체는 저부조이다. 벽화와 함께 발달한 이 부조는 채색이 되어 있으며, 입체적 효과를 덧붙인 정교한 벽화의 변형이다. 벽화는 고운 바탕의 흰색 석고벽에 검은색으로 윤곽을 그린 다음 붉은 색과 검은색과 칠했으며, 청·황·녹색을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벽화는 전형적인 왕실 의식·제사·서임식·사자의 사냥 장면등을 묘사한 것으로 릴리프에서와 같이 인습에 따라 머리와 다리는 옆 모습, 몸통은 앞 모습이며 눈은 보통 앞을 바라보고 있다. 바빌로니아 고유의 특징적인 조각은 매우 단단한 돌로 만든 작은 원통형 도장에 무늬를 조각한 "미니아튀르"이다. 기원전 5천∼3천년 사이에 거의 보편적으로 사용된 이 도장은 서 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발달 순서가 분명히 나타난다. 가장 훌륭한 작품들은 아카드 시대에 제작된 것들로 주제도 흥미롭고 완성품의 아름다움도 뛰어나다. 그 외에 조개나 유리·돌·상아로도 모양을 만들고 조각을 해서 큰 작품을 장식하거나 모자이크 조각으로 사용했다. 동이 사용된 예는 유사 이전에도 발견되었으나 많은 양을 사용하고 또 장식용으로 금속을 쓴 것은 바빌로니아인들이 최초였다. 그들은 금·은·동으로 많은 작품을 제작했으며 처음에는 망치로 두들겨 펴서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청동 적조물로 신전이나 궁전 입구에 괴물상을 만들어 세우기도 했다.
5. 앗시리아 (기원전 1,000년경 ∼ 612)
앗시리아 미술은 메소포타미아 미술의 슈메르·악카드의 전통을 잘 소화시켰고 그 위에 전혀 다른 경지를 열어 고대 오리엔트 미술에 하나의 새로운 유형을 명확히 창조해 그 지리적인 환경에 따라 시리아, 소아시아, 더 나아가 에게해 주변의 미술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앗시리아 미술의 새 경지란 공적과 권위를 과시하는 것이어서 외정(外征), 향연, 사자사냥등을 주제로 한 묘사가 아주 구체적이며 기록성을 중시했다. 특히 동물의 표현에는 박진감 넘치는 사실성을 발휘하고 있다. 현실주의 스타일로 강력한 힘의 표현을 하였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생에 대한 억척스러운 집착을 고집하는 성격을 이런 앗시리아 미술에서 볼 수 있다.
6. 에게 미술
에게 해는 크레타 섬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만이며, 에게 미술은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생성된 미노스 문명의 해양 미술 문화이다. 그들은 배를 타고 다니며 경제활동을 하였고, 따라서 사치를 좋아하고 쾌락적이었다. 이 습성이 미술에도 반영되었는 데, 대표적으로 투우사의 프레스코 라는 작품이 미노스의 궁전에서 발견되었다. 미노스 문명이 그리스 영토의 미케네에 영향을 미쳐 생성된 것이 미케네 문명이다. 미케네의 궁전은 미노스와는 달리 요새화 되어 있으며 견고한 벽면과 큰 돌로 축조되어 있다. 미케네의 사자문은 이러한 양식을 극명히 나타내고 있는 건축물로, 상부에 입구를 지키는 거대한 돌로 된 두 마리의 사자 부조가 새겨져 있다.
7. 그리스 미술
북방에서 그리스 본토로 이동해 온 도리아족은 선주 민족을 정복하고 이들의 문화에 이집트 문화의 영향을 더하여, 서양 문화의 모체인 눈부신 그리스 문화를 만들었다. 그리스인은 초기에는 이집트인처럼 형태를 중시한 개념적인 작품을 만들기는 했어도 생각하는 근본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생각했고, 또 세계 최초의 민주정치를 발명한 그들의 마음 밑바닥엔 현실의 인간을 모든 세계관의 척도로 하는 사고법이 있었다. 이 정신이 미술을 형식주의에서 탈피시켜 바로 자연주의에로 이행시켰던 원인이었다. 그리스 미술의 특징은 이상미, 조화미, 균형미를 추구하고 인간 중심 사상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건축으로는 신전 건축이 중심이고 조각은 수학적인 비례에 의해 인체의 이상미를 추구하고자 했다. 그리스 미술은 서양 미술의 근원이라 칭한다.
그리스 미술은 세 시기로 구분한다.
1. 아르카익 시대(기원전 7세기~6세기)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의 아르카익 시대에는 소박하고 신선한 미를 추구했다. 소아시아,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인상 조각으로 대표된다. 정면성의 법칙, 치졸한 안면 표정, 이른바 아르카익 스마일이라 불리는 미소를 특색으로 한다. 아르카익 초기의 조각은 강한 정면성(正面性)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훗날 그리스 조각이 개척한 충실한 관찰에 기초하는 자연적인 표현과 거리가 멀다. 육체의 각 부분의 조립을 사실에 입각한 묘사적 의지에 의하기 보다는 견고한 형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구축적 의지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개발 정신으로 현대 문화의 중요성을 깨달아 그 미술을 탐구하고, 도입한 선구자들은 코레의 "소녀상", 코우로스의 "청년상" 등이 대표적이다. 아르카익 시대 중기로 가면 주제와는 관계없는 가로 기어 다니는 뱀이나 괴수를 박공벽 끝의 좁은 공간에 넣어 공간을 해결하였다. 이 시대의 말기로 가면 그리스 미술 특유의 충실한 관찰을 기본으로 한 묘사가 더해져서 아르카익 초기의 구성주의는 뒤로 밀려 나갔다. 그것은 아르카익 스마일의 소실이고, 유각(遊脚)의 탄생이었다.
2. 클래식(고전) 시대(기원전 5세기~4세기)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의 클래식(고전) 시대에는 조화미, 이상미를 추구한 그리스 미술의 전성기였다. 아르카익에 나타난 그리스인의 창조력은 클래식 시대로 가면 묘사주의의 확립을 가져왔다.
이 클래식 시대의 전기에는 저명한 3인의 조각가가 있었다. 뮈론, 페이디아스,폴뤼클레이토스이다. 뮈론은 운동의 순간적인 자세를 표현하는데에 재능을 발휘했다. 감정의 절제된 운동미를 잘 표현한 "원반 던지는 사람" "아테네와 마르쉬아스"에서 볼 수 있는 뮈론의 의도는 예리한 관찰에 의해 인체의 구조를 밝히며 그것을 묘사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페이디아스는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신 그것을 나타냈다"라고 할 정도로 칭찬되었는데 조각의 형태를 통해서 그 배후의 정신을 표현하려고 했다. "파르테논 신전의 장식 조각", "렘노스 섬의 아테네 여신상", "아테나·렘니아"는 이런 페이디아스의 특질을 잘 표현하고 있다. 페이디아스의 이런 정신 내용을 드높이려는 이상주의에 대해서 외형의 이상미를 추구한 것이 폴뤼클레 이토스이다. 그는 인체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두부가 전신의 7분의 1일 때 드러난다고 하여 "창을 든 사람" "승리의 머리띠를 매는 사람"을 만들었다. 미를 수치로 나타내려는 데에 그리스인의 이지적·합리적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신전 건축은 장중하고 남성적인 도리아식과 우아하고 여성적인 이오니아식 신전이 발달되는데 도리아식의 대표적인 것으로 익티노스가 설계한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데 파르테논 신전은 페이디아스의 조각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이오니아식 신전의 대표적인 것으로 "에렉테이온 신전" 과 "니케 신전" 이 있다.
3. 헬레니스틱 시대
기원전 3세기에서 1세기의 헬레니스틱 시대는 세속적이고 감성적인 화려한 미를 추구했다. 격동적이고, 극적이고, 관능적인 것은 클래식 시대와는 다른 방식이다. 자연이나 현실의 관찰이 세밀해지고 사실 묘사가 행해져 초상 조각이 발달하기도 하고, 소재 범위도 확장되어 노인·다른 인종
·동물들과 그 밖에 세속적인 것들이 다루어진다. 관능적인 묘사로서는 많은 비너스 상이 있는데 헤르메스와 "크니도스의 비너스", 밀로섬에서 출토되어 8등신의 비례미를 잘 표현한 "밀로의 비너스"가 있다. 운동감을 주는 표현으로는 사모트라케에서 출토되어 날개·옷주름등을 이용하여 움직임의 착각을 강조한 "니케 여신상", 격정의 표현으로는 "라오콘 군상", "페르가몬의 제우스 제단의 부조", 다른 인종과 결합한 것으로는 "죽어가는 갈리아 인", "자살하는 갈리아 인과 그의 부인" 등의 조각이 있다. 헬레니스틱 문화는 서로는 로마에 유입되어 서양 문화의 주류를 이루고, 동으로는 인도에까지 이르러 간다라 미술과 아쇼카 왕 치하에서의 불교 미술을 탄생시킨다.
8. 로마미술 (기원전 1,000년 ∼ 395)
그리이스 패권을 둘러싼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헬레니즘 제국과 카르타고의 싸움이 치열할 무렵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작은 마을에서 출발한 로마 공화국이 그리이스인들보다 정치력과 군사적으로 우세한 힘을 기르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리이스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로마인들의 그리이스 세계정복은 평소 그리이스 미술에 절대적 동경을 가지고 있던 로마인들에게 그리이스의 미술을 단번에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의 우수한 문화 유산을 바탕으로 로마인들은 국제적 성격을 띤 미술을 전파하게 된다. 그리이스와 로마 미술이 매우 유사하게 보이는 것은 로마 시대때 활동하던 미술가들이 대부분 그리이스 출신이던가 거기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고, 로마인들은 그리이스 시대의 미술품을 복제하거나 수집하였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그리이스 미술을 그대로 복제한 것만은 아니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 그리이스 형식을 변형하였다. 로마인들은 멀리 북아프리카, 영국, 스페인, 페르시아만, 카스피해까지 그 들의 우수한 유물을 남기게 되었다.
1. 건축
로마인들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토목공학을 얘기할 수 있다. 그들의 건축은 공중목욕탕, 도로,수로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은 그들의 정복자로서의 자신감과 실용적 가치를 추구한 일면을 엿보게 한다. 예로 콜로세움은 로마 건축 중 가장 유명한데, 이것은 거대한 투기장으로 내부에 계단식 관람석을 받쳐 주는 아치들인 세개의 층 각각에 로마인들은 그리이스의 세 가지 건축양식을 사용한다. 이것은 로마식 구조와 그리이스 형식과의 결합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이고 이 후의 건축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이 건축물에 아치와 궁륭을 사용했다는 것은 로마인들의 또다른 업적이다.
2. 조각
로마인들은 주로 그리이스의 조각을 모방, 수집하여 그들의 화려한 저택을 치장하는 데 사용하였다. 로마의 조각은 초상 조각과 설화적 부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초상 조각에서 그들은 전쟁 영웅의 두상을 신성의 지배력을 지닌 모습으로 표현, 영웅적으로 이상화하여 제작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의 초상이 인물의 미묘하고 심리적인 묘사에 치중하였다면 로마의 초상조각은 훨씬 사실적이고, 치밀했으며 정확하고 의지력 있는 개성적 표현에 중점을 두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선조의 모습을 미이라로 만들던 풍습과 연관된 듯한 관심이 로마에도 있었는데 그것은 사자의 초상을 밀랍으로 만들던 것이었다. 이것은 나중에 더 견고한 대리석으로 초상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로마인들은 그리이스인보다 더 실물처럼 있는 그대로의 초상제작에 힘썼다. 설화적 부조에서는 로마의 황제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역사적 사건을 과시하기 위한 기록으로서의 면을 보여준다. 그리이스 인들이 신전의 프리즈에 새겨넣었던 주제가 일상적인 행렬이었다면 로마인들은 일시적 사건을 다룸으로써 로마 조각가들의 예술적 의도가 기록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로마인들은 부조제작에 있어서 환조처럼 느껴지게 하는 깊이감 있는 작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3. 회화
로마인들이 제작한 회화는 남아 있는 것이 없으나 그당시 로마의 통치하에 있었던 이집트에서 발견된 유물로 로마의 회화를 짐작해 볼 수 밖에 없다. 조각에서 처럼 회화에서도 그리이스의 화가나 최소한 거기서 교육받은 사람에 의해 제작되었을 가능성으로 보아 그리이스 회화의 특성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집트의 파이윰에서 발견된 소년의 초상은 납화법으로 그린 패널화인데, 이것은 내구성이 강한 엔카우스틱 기법(납화법. 뜨거운 납을 섞은 안료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고대 회화의 중요한 기법으로 기원전 4세기경 파우시아스가 완성했다. 주로 천정의 패널에 조그마한 인물들을 그릴 때 사용했다.) 으로 색채가 밝고 생생하다. 이 기법은 로마 벽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명 프레스코(벽화를 그릴 때 쓰는 화법, 이태리어로 신선하다 는 뜻. 덜마른 회반죽 바탕에 물에 갠 안료로 채색한 벽화. 그림물감이 표면에 애어들면 벽이 마르면 그림은 완전히 벽의 일부가 되어 물에 용해되지 않으며 수명도 벽의 수명만큼 지속된다. 석고가 마르 기 전에 빨리 그림을 그려야 하며 그림의 수정도 불가능하다. 기념 건조물의 벽화 그리기에 적합하다. 건조한 지방에서 가장 영구적. 이탈리아에서 많이 사용 ) 와 함께 벽장식에 이용되었다. 로마 벽화는 1979년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 당시 묻힌 나폴리 부근의 폼페이와 그 밖의 곳에서 발견된 것들이다. 이들 벽화 그림에서 로마인들은 완벽한 단축법과 빛과 그림자에 의한 정교한 모델링으로 사물이 실물 과 같은 입체감을 띠고 있고 미약하게나마 원근법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각에서와 같이 회화에서도 그리이스의 것들보다 훨씬 깊이감이 있는 공간을 표현했다. 로마의 미술은 헬레니즘 시대 이후 그리이스 미술의 전통을 잇고 그들의 미술을 수용, 모방, 수집하여 나름대로 필요한 부분을 차용하였으며 무수한 복제품을 만들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로마 미술은 그들의 정복지역의 종교와 관습등과 어울려 국제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며 신과 영웅들의 아름다운 형태를 시각화하는 방법을 후대에 가르쳐 주었고, 이것은 서양 미술의 모태가 되었다.
9. 중세초기 미술
로마에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예술가들에 의한 초기의 회화들이 있다. 이들 그림은 초기 그리스도교 들이 사자를 매장한 지하묘소, 즉 카타콤(지하묘소)의 벽과 전장에 그려진 것들이다.성 피에트로에 마첼리노의 카타콤 천장화(4C초, 로마)을 보게 되면 로마의 이교도 그림 양식을 답습한 것이 분명하다. 다만 인물상들의 자세가 경직되어 있고 약간 평평한 면에 그려져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일 뿐이다. 이 카타콤에서는 현세에서의 행복보다는 구세주와 내세의 생활에 집중되어 있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사를 알아볼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화가들이 갑작스럽게 이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 은 아니고, 상징, 다시 말해서 그 어떤 다른 존재세계에 속하는 것,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나타내는 형태 또는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을 각 장면으로 구획하며 또 결합시키는 그림의 틀은 그 자체가 복잡한 상징적 구조이며 각 틀의 장면도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카타콤
4세기(311)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기에 이르렀고 이는 미술에 있어서도 혁신적인 계기를 만들어 이곳저곳에 거대한 성당이 세워지고 이에 따라 광대한 벽면에 그릴 그림의 필요성이 대두되게 된다. 이에 비해 카타콤은 상대적으로 너무 소박한 그림이었고, 이는 고도로 훈련된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계기를 창출하게 되었다. 바로 이들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벽면 모자이크를 만들어낸 장본인 들이었다. 이것이 주는 효과는 여지껏 카타콤이 주는 초라함을 한층 웅장함으로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2. 채색사본
이러한 설화적인 모자이크를 생각한 사람들은 성서에서 그 소재를 찾아왔다. 이러한 성서를 사본화 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벽화나 모자이크, 패널화의 예술성에 필적하는 작품을 생성해내었다. 이것들의 초기 양식은 그리스,로마 회화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채색사본의 등장으로 한정된 화면 안에 많은 얘기들을 효율적으로 넣을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3. 비잔틴 미술
4세기로부터 5세기에 걸치는 동안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미술이 상대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몰락을 겪은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에서 6세기에 이르러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그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는 데, 이를 비잔틴 미술이라고 부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