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1970년 대중반에 한국내에서 “윤동주는 저항시인이 아니었다.”라는 목소리가 높았는데요 <문학사상>지에서 몇 명의 집필자중 여덜명이 그렇게 썼답니다.
그런데 그 의견을 뒤집어도 남는 발견을 일본의 국회 도서관에 근무하는 우지고오씨가 한 겁니다. 그는 특고 경찰의 기관지 <특고월보>에서 “교토에 사는 한국 학생들이 민족 운동을 계획하고 주진시키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체포됐다 속에 윤동주도 포함되어 있다“그런 내용에 기사를 발견하고, 윤일주씨에게 복사물을 보냈습니다. 그것이<문학사상>1977년 12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일어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번역자 이부귀씨는 사법성형사국이 발행한 <사상월보>에서 교토지방재판소의 반결문을 찾아냈습니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으로 처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자료는 복사가 금지되있고 이부키씨는 카메라맨을 동원하여 슬그머니 촬영하고 나왔답니다. 그 내용은 <문학사상>1982년 10월호에 게재됐습니다.
다음은 제 이야기가 되고 뻔뻔 스러운 감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벌써 31년 전입니다.
1980년 10월의 <현대문학>지에 <윤동주 그 죽음의 수수께끼>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그 내용은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맞고 있던 주사에 관한 추리였습니다.
이 글을 발표하게 된 경의에 대해서는 아직 한번도 발표한 적이 없어서 이번 기회로 발표해 해놓을까 합니다.
저는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 강의를 1980년부터 받았는데. 그중에 시인 김창호 교수의 현대시인론이 있었습니다.
레포트를 제출해야 하기 때문에 교수 연구실을 찾아가 어떻게 쓰면 좋을까 물었습니다.
김교수는 “한국 시인중 누구를 알아요?”라고 묻고 저는 “저... 윤동주 정도...”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교수는 “윤동주 시집이 한 권 밖에 없으니 그걸 읽고 그에 관한 평론을 몇 편 읽고 그걸로 레포트를 써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학교 도서관에 가서 시집과 “나라 사랑”윤동주 특집호를 빌리고 노트에 메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씨가 남긴 글인데 동주 시체를 찾아간 그가 거기서 아직 살아있는 송몽규를 만납니다. 살이 다 빠진 송몽규를 보고 영춘씨는“어떻게 된거예요 그 상태는?”이라고 묻습니다. 송몽규는 “저 사람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하고 맞았는데 이런 모습이 됐어요. 동주도 같이...”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가지고 가지 않으면 규슈대학으로 보내고 해부용으로 처한다는”는 통지서
저는 어디에서 듣던 이야긴데 했습니다. 그리고 유학생 친구 시라카와 유타카씨에게 “규슈대학은 후쿠오카에 있어요?”라고 물었습니다.“예 후쿠오카에 있어요.”
시라카와씨는 그런 당연한 질문을 왜 하느냐? 그런 표정이었습니다.
저는 그점을 확인하자 중앙 일보사 자료실을 찾아갔습니다. 아는 기자의 이름을 말하고 좀 자료를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간단이 승낙이 되어 “문예춘추” 백넘버를 봤습니다.
신기하게도 몇 권 안봐 않아 찾고 싶었던 기사를 찾았습니다. 그 부분을 복사하고 레포트와 별도로 “윤동주 그 죽음에 관한 한 고찰”이란 제목을 붙어 그 당시 <현대문학지>와<월간문학>지의 주간이자 문인협회 이사장 그리고 저의 대학원지도교수였던 조연현 선생님께 보여드렸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글을 발표해도 당신은 당신은 괜찮아요?”
라고 물으셨습니다. 일본의 우익한테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 제자 걱정을 해주신 겁니다.저는 “일본인이 이런 일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조 선생님은
“알았다. 이 제목은 너무 학문적이라 윤동주 , 그 죽음의 수수께끼 이정도로 하는게 어때?” 라고 물으시고 저는 그걸로 좋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일본의 작가 엔도오 슈사크의 <바다와 독약>이라는 소설을 유학 오기전에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전쟁말기 규슈대학에서 미군포로에게 가한 생체실험을 그린내용이었습니다. 실험은 세가지이며
1) 혈액에 생리적 심염수를 주입하고 사망까지의 극한 가능 양을 조사한다.
2) 혈관에 공기를 주입하고 사망까지의 공기량을 조사한다
3) 폐를 절제하고 사망까지의 한계를 조사한다.
였습니다. 특히 첫 번째 실험은 전쟁의학에 꼭 필요한 것이였습니다.
보통 혈액을 대용하는 생리적 식염수는 증류수100%에 식염을 0.85%혼합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용혈액을 수혈을 필요로 하는 환자에게 어느 정도까지 주입 할 수 있는가 그 부분은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대중 2~3L 정도는 괜찮다고 되어 있었지만 더 이상은 몰랐습니다.
B29의 포로 여덟명에게 이 세가지 실험을 하고 당시 격추당한 자들은 나중에 재판 받았습니다. 당사자는 모두 열두명, 그중 두명은 간호원이 었습니다. 주임교수는 곧 자살하고 그 밖에 피고들은 큰 징역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세명의 의국원만이 징역 2년이었습니다.
이름 모르는 주사와 규슈대학이 나온다는 점, 그리고 시간과 공간과 동기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저는 DSB동주가 맞은 주사 내용은 심염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리 했습니다.
제 글이 발표되자 한국의 신문들이 그 내용을 소개했습니다. 윤동주 옥사 그 당시 자기도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는 분이 신문에 자기 이야기를 발표하고 이것도 그 때 규슈대학의 학부 학생이었다는 의사가 제 추리가 맞을 것이다 라는 글을 발표 했습니다. 이런 방향은 저도 예상하지 않았는데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2009년에는 SBS<그것이 알고 싶다>
광복절 특집으로 제 주장을 뒷받침해줄 내용의 프로를 만들어 방송했습니다. 제 추리는 전설이 된 느낌이 였습니다.
세 번째로는 와세다 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가 윤동주 무덤의 위치를 찾아낸 일입니다. 오오무라씨는 1985년 4월부터 1년 동안 중국 길림성 연변에 체재했습니다.
연길시는 개동도시라 외국인이 자유스럽게 다닐 수 있었는데 용정현은 공안국의 허가증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찾게 했는데 그 사람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 한달 후 허가증을 입수하고 연변대학의 교수 두명과 와 함께 차를 타고 나서서 묘비를 확인했습니다. 생가 터도 확인하고, 광명 중학 학적부도 발견했습니다.
오늘 날 쉽게 윤동주 묘를 찾아갈 수 있는 것도 오오무라씨 수고 덕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네 번째는 야나기 하라 하스코라는 주부에 의한 이야기입니다.
릿쿄 대학 시절의 윤동주에 관한 조사입니다. 윤동주가 왜 한 학기만 릿쿄대를 다니고 교토 동지사로 옮겼는지 그 원인을 밝힌 겁니다. 야나기하라씨는 릿쿄 졸업생이며 이 학교는 부잣집 애들이 다니는 학교 입니다.만 기독교 학교라 군국주의 시절에는 감시 대상이 됐습니다. 이 릿쿄에 배속된 장교는 철저한 군국주의자였고 일주일에 한번 군사교련을 맡았습니다. 자기에게 반항하는 학생은 교련 출석 처분 했습니다. 이 처분이 내리면 바로전쟁터로 가야 했습니다. 윤동주는 교련거부를 생각하고 교수에게 상의했다. 그 사실을 야나기 하라씨가 알아냈습니다. 야나하라씨에 대해서는 불가사의한 인연을 느낍니다. 전에 저는 전철을 타고 동경에서 30분 떨어진 시바현 가시와시에 살았습니다. 그 때 시가 주최는 문학 강연회에서 한국문학에 대해서 한 시간 반을 강연했습니다. 고전문학부터 현태 문학까지 이야기 했는데 질문시간이 되자 “윤동주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세요” 이렇게 질문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야나기하라씨 였습니다. 그녀는 “윤동주의 고향을 찾아가는 모임” 이라는 그룹의 중심멤버였고 이 모임은 한 달에 한번 도쿄 이케부쿠로에서 윤동주강좌를 열고 있었습니다.
저도 한 번 그 강좌에서 발표하게 돼었는데 놀란 것은 야나기하라씨가 맏아들을 낳았을 때 담당한 의사가 그 규슈대 생체실험 사건에 당사자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 입니다.
즉 세명의 의국원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 입니다. 그 점과 야나기하라씨는 우리집과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산다는 점 저는 윤동주의 영혼의 힘 처럼 느껴져서 그 넓은 수도권에서 왜 윤동주와 깊이 관련이 있는 사람이 가까이에 살고 있나? 마치 경기도에서 부천의 한 단지에 그 두사람이 산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 같았습니다.
야나기하라씨는 윤동주에 빠진 사람이며 계속 윤동주를 소재로 써왔습니다. 시인 고정애씨가 번역한 시를 하나 소개 하곘습니다.
말씀은 이윽고 바람과 같이
송신한 메일의 얼굴 문자를 보고
당신은 알아차리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품위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그 만두는 편이 좋다 라고
친구로 부터 회신이 왔다
그렇지만 언어는 만능이 아니라고 생각해 모조리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특히 억양을 전할 수 없는 문어체에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라고 대답을 쓰려다가
작가로 사는 친구에게 있어서
언어에 대한 생각의 깊이를 헤아려 보았다
건네주기 위해 말을 선택하고 실어나르고
얼마만큼의 심음이 반복될 것인가
문어체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며
반론하려 했던 것이 어리석게 생각 되었다.
민족의 언어로 시를 쓰는 일에 목숨을 걸고
옥사한 시인이 남긴 말은 명맥을 보전하고
오랜 세월을 거쳐 살가운 바람처럼
지금 사람들의 마음에 잔물결을 일으킨다.
우리는 남겨진 얼마간의 시어를 통하여
진지하게 과거의 진실과 마주보려 하고있다.
시인은 지금도 우리 마음에 시 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내일 아침 친구에게 답신을 보내자
언어는 무궁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굳게 닫은 가슴 벽을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방편
당신의 펜촉은 지나가 버린 세월을 상기시키고
내일의 문으로 이끌어주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언어는 이윽고 시대의 기억을 날라주는 바람이 되어 시대를 넘고 국경을 넘어
사람들 마음에 이야기의 연속을 써갈 것이다 라고
야나기하라씨는 그 후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의 모임”대표가 되어 매년 모교에서 추모 행사를 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매년 크게 후쿠오카, 교토, 도쿄 세 곳에서 추모 행사가 열리는 시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 이유를 생각하는 것이 다음 부터 이야기 할 일본인과 시 그런 내용 입니다.
2 일본인과 시
2011년 1월 6일에 아사히 신문에“99세 할머니 시집 100만부 돌파” 라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도치기현에 사는 시바타 도요라는 할머니의 “양ㄱ해지지 마세요”라는 시집이 출간된지 10개월 만에 100만부를 돌파했다는 내용인데 그 책을 읽고 용기를 얻었고 자살할 생각이 사라졌다 이런 의견이 독자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영풍문고에는 벌써 한국어로 번역된 책이 나와있었습니다. 시를 별로 안 읽는 나라 일본에서 왜 이렇게 히트가 되었을까?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원인이라고 생각됩니다.
1) 일본인들은 전통시 하이쿠와 단카를 좋아하듯이 원래 자유시도 좋아한다.
2) 그러나 이른바 현대시<난해시를 편애하는 사람들이 그 동안 계속 시단을 지배해왔다
3)알기 쉬운 시를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시세계에서
소외 당하고 옛날 같은 좋은 시 명시를 접할 기회가 없다.
4) 시바타 할머니의 시는 그런 독자의 기대를 만족시켜 100만부 돌파라는 기적 같은 성과를 얻었다.
5) 시집 <약해지지 마세요는 숨어있던 100만명의 시애호자도 발굴했다 앞으로 알기 쉬운 시 명시가 나오면 이들 독자들에게도 환영받을 것이다.
이런 구조가 일본 시의 상황 이였습니다. 시바타 할머니의 경우 백살 가까운 나이가 화제가 됐다라기 보다 역시 시가 좋아서 인정 받은 것이고 수록 작품들의 대부분은 산케이 신문 “아침의 시”란에 뽑히고 게재된 작품들이 었습니다. 몇번이고 다시 읽어도 싫증이 안나며 공감이 되는 시들 입니다.
생각하면 시를 좋아하는 일본인 독자들은 불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난해시가 판을 치고 읽고 싶은시 시다운 시를 읽지 못했으니까요
그 동안 독자들의 갈망을 만족시킨 시인으로서 가네코 미스츠라는 시인이 있는데 이 여류시인이 야말로 시인다운 시인 마치 윤동주 처럼 비극의 시인이 였습니다.
가단히 두 사람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윤동주
항목
가네코 미스츠
아버지는 학교 교사, 할아버지는 기독교 장로 였고 유아 세례를 받았다
가정
세살때 아버지가 죽고 열한살 때부터 가업의 책을 도우면서 학교를 다녔다
남의 부탁은 다 들어 주었다.
성격
남이 싫어하는 짓은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사랑 받았다
동시가<가톨릭 소년>에 많은 게재됐음(열아홉살 떄)
투고
네 잡지에 투고한 동요가 다 게재됐고 좋은 평을 받았다(스무살 떄
원고지에 필사하고 3부 만들었다. 생전에 시집을 못냈다
시집
손으로 청서한 3부의 동요집을 만들었다 생전에 작품집은 못냈다
일제한테 체포당함 징역 2년 반결
수난
남편이 시 쓰기를 금지 시킴 문우와의 편지 왕래도 금지 당했다
옥사
죽음
자살(26세)
이렇게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가네코 미스츠는 1903년에 야마구치 현 센자키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여학교도 다니고 스무살이 될 때까지 고향에서 살았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은 미스츠가 교원이 될 길을 기대했는데 본인은 “교무실 분위기 싫다”는 이유로 시모노세키시에 있는 책방에서 일을 했습니다.
여러 가게들이 모여있는 건물의 작음 커너였고 미스츠 한 사람이 맡은 가게였습니다.
스물세살로 결혼할 때까지의 삼년 동안 매달 오는 잡지를 보고 투고하는 행복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잡지<동화>에는 그녀의 작품이 매달 같이 싣게 되어 애독자들은 미스츠를 구름 위에 여신처럼 느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상대는 문학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닐 뿐만 아니라 아내를 존경할 사람도 아니 였습니다. 곧 이혼 이야기가 나왔는데 임신한 관계로 헤어지지 못했습니다. 딸을 난 후 남편이 얻어온 성병을 앓게 되어 조금 일해도 몇일 누워야 할 정도로 몸이 나빳습니다.
그리고 음독자살로 죽는 날 딸을 목욕시켜 오랫동안 딸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이런 가네코 미스츠의 생애가 알려진 것은 그다지 옛날이 아니라 1984년에 한 연구자의 힘으로 그 유고가 발간된 후였습니다. 전 512편에 이르는 작품이 세권의 책으로 발간되어 고향에는 시비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영화도 만들어지고 연극도 상연 됐습니다.
그리고 생탄 100주년에 맞추어 고향에 기념관도 개관 됐습니다.
그 대표작을 소개 합니다.
쌓인 눈
위의 눈
춥겠다.
차가운 달빛 내려 있고
아래의 눈
무겁겠다
몇 백명을 등에 업고
가운데 눈 외롭겠다
하늘도 땅도 못보고...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
내가 양팔을 펴도
조금도 하늘을 못 날지만
작은 새는 나 처럼
빨리 땅을 못 달려요
내가 몸을 흔들어도
아름다운 소리는 안 나지만
방울은 나 처럼
많은 노래를 몰라요
방울과 작은 새와 그리고 나
서로 다르지만 다 좋다
신기한 일
나는 너무 신기해요
검은 구름에서 내리는 비가
은빛으로 반짝이는 일이
나는 너무 신기해요
파란 뽕잎 먹는
누에가 하얗게 되는 일
나는 너무 신기해요
아무도 안 만진 박꽃이
혼자 살짝 피는 일
나는 너무 신기해요
누구에게 물어도 그냥 웃고
당연하다는 대답이
동요라 알기 쉽습니다만 자유시 못지 않는 시상이 엿 보입니다. 인텔리전스에 뒷받침된 그리고 따뜻한 점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2003년이 생탄 100주년이 였는데 가네코 미스츠의 시는 21세기에 맞는 시라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별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시각 동물과 식물 그리고 광물까지 그 역활을 인정하는 사상 낙오자는 없고 다 의미가 있다 등등 이런 평화와 조화의 정신이 시대적 요청이기 때문 입니다.
윤동주와 같이 단순이 시로써의 훌륭한뿐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철학, 우주과, 인간성이 사람들에게 공감을 느끼게 하고 영향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윤동주와 가네코 미스츠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앞으로 본격적인 비교 연구가 많이 나오라 믿습니다.
3 번역의 문제
박영우 대표님 덕분에 <윤동주 대표 시 한미중일 4개국 대역시집> 중 일본어역을 맡았습니다.
윤동주의 시 52편을 번역했는데 무슨 뜻인지 한국사람 그것도 잡지 편집장에게 물어도 모르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황혼이 바다가 되어>중에 “옷고름 너어는 고아의 설음”
이라는 부분입니다. 여러분은 옷 고름을 아십니까? 이 “옷 고름 너어는”라는 표현...
저는 옷 고름을 밎는 건가?풀은건가? 그 이외에 생각이 떠오지 않았지만 박영우 대표님이 해결해주셨습니다. 연세대 출판부가 낸 <원본 대조 윤동주 전집>에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는 것입니다.
옹ㅅ고름 너어는: 옷 고름 빠는 <너얼다>는 <빨다>의 함경도 방언
이부키씨가 일역한 책을 보면 제대로 번역이 되어있었습니다. 그 때는 윤일주씨가 살아 계셨고 이부키씨는 철저하게 모르는 부분을 윤일주씨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4개국어 일을 맡은 김에 저도 모든 작품을 번역해봤습니다. 연세대판 시집에 들어 있는 시 118편 산문 5편입니다.
이 작업을 통해 이부키씨역은 신뢰할 수있다고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런이하게도 그런 이부키씨가 그 가장 유명한 <서시>만은 왜 이상하게 의역하고 많은 사람들한테 공격 받는 짓을 했는지 의문입니다.
이부키씨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이부분을 조금 관용구적인 표현으로 <살고 살아있는 것을 소중히 해야지> 이런 식으로 옮겨 버린 것이였습니다.
1984년에 나온 이부키역은 93년 시점에서 세번 증쇠하고 있습니다. 이만 큼 나가면 시집으로는 대성한 것 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팔리겠지요
일본어역은 그밖에 우메노 준 역 김시종역이 있습니다만 이쪽은 무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편수도 적었기 때문 입니다.
문제는 전역한 것이 하나 밖에 없고 그 번역이 괜찮은지 비교할 재료가 없다는 점 입니다. 바꿔 말하면 이부키역은 어떤 특징이 있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저녕ㄱ에 도전하는 동안 이부키역의 특징은 지나치게 명역, 명시로 만드려는 자세가 강하다고 느꼈습니다.
우아한 시어로 바꾸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어로도 충분이 효과가 있는데 너무 만들려 합니다. 그렇게 지적해 높을까 합니다.
아직 출간 안된 제 번역의 특징을 한마디 설명하면 원문의 뉴앙스에 가깝게 옮겼습니다. 일부러 명시, 명역으로 만들 생각은 버리고 원문을 읽는 듯한 기분이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이 설명만 들어도 이부키 역과의 차이점이 명백하지요?
아무튼 윤동주는 그동안 시인 다운 시인을 원했던 일본인들의 기대를 만족시킨 시인이 였고 그점이 가장 일본에서 인기가 생긴 열쇠였다고 생각 합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속죄의식도 자극시키는 시인이라 더욱 관심이 높아졌다고 봅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많이 남아있습니다. 연세대판 원본대조 윤동주 시집에 관계한 심원섭교수는 “1999년 윤동주의 모든 것이 사진판으로 세상에 공개된 후로 5년째를 맞는다 원본이 공개되었으니 이제 남은 일은 윤동주의 의도를 정확하게 찾아내어 이를 현대 한국어로 복원해 내는 일. 즉 이상적인 ”정본“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러나 그곳을 ㅗ가는 길은 또한 얼마나 먼가, 많은 부분이 미확정 상태로 남아 있는 윤동주 원복 텍스트들은 수많은 연구자들의 땀과 피를 기다리는 미개척림과도 같다. 그 이상이 실현되는 날까지 이 징검다리 하나를 비롯한 수많은 다리들이 계속 놓아져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진판에는 아직 정확한 현대한국어로 되어있지 않는작품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작업을 그냥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원어민도 아닌 제가 얼마나 읽어 낼 수 있을지 이것이야 말로 고대문자를 해독할 정열이 필요하겠지요
4맺는말
앞에서 윤동주에 관한 중요한 발굴은 다 일본인들이 했다고 말했는데 물론 한국 사람도 큰 역활을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윤동주 평전>을 쓴 송우혜씨가 그렇고 주관적으로 봐도 객관적으로 봐도 윤동주 시인의 언덕 그리고 윤동주 문학관 실현에 이르기까지 노력해온 박영우 대표님의 공적은 오래 오래 칭찬받을 것 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1980년 10월 <윤동주 그 죽음의 수수께끼>를 발표했을 적에 저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일본에서 윤동주에 대해서 말해도 아는 사람은 전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이 이 예감은 벗어나고 NHK와 KBS가 제작한 윤동주 특집으로 갑자기 팬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시에 곡을 붙이는 가수도 나타났고 윤동주 시를 소재로 그림을 그리고 화가도 나타났습니다.“겨울 연가”는 용사마지만 윤동주 팬들은 우리는 윤사마가 좋다고 주장합니다.
마지막 목표는 일본의 명문 출판사에서 윤동주 시집이 문고판으로 출간되어 사람들이 포켓에 넣고 다니는 상황이 왔으면 하는 기대입니다. 그런 시대를 하루 빨리 맞이하도록 저도 나름대로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본은 극우만 판치는게 아니라 고노 에이지씨 같은 일본의 양심도 존재하는 군요! 그 외 양심있는 분들에 의해 우리가 윤동주 시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주 조금밖에 모르던 생체주사의 의미도 죽음의 이유도 조금은 가닥이 잡혀 다행입니다. 좋은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시인의 언덕을 볼수 있었고, 윤동주 문학관을 볼 수 있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노 에이지씨를 통해 일본에 대한 생각도 수정되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노 에이지씨 좋은 글 너무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첫댓글 잘 읽엇씁니다. 그간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많은걸 배우고 갑니다. 몇번 더 읽어야 이해가 갈 부분도 있어서 자주 들려서 읽어 보겟습니다. ㅎ감사..
일본은 극우만 판치는게 아니라 고노 에이지씨 같은 일본의 양심도 존재하는 군요! 그 외 양심있는 분들에 의해 우리가 윤동주 시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주 조금밖에 모르던 생체주사의 의미도 죽음의 이유도 조금은 가닥이 잡혀 다행입니다. 좋은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시인의 언덕을 볼수 있었고, 윤동주 문학관을 볼 수 있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노 에이지씨를 통해 일본에 대한 생각도 수정되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노 에이지씨 좋은 글 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