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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개요 |
Silk Road |
비단길(Silk Route)이라고도 함. 고대에 비단무역을 계기로 하여 중국과 서역 각국의 정치·경제·문화를 이어준 육해 교통로의 총칭.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이 말을 처음 사용했다. 총길이 6,400㎞에 달하는 실크로드는 중국 중원(中原) 지방에서 시작하여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가로질러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북변을 따라 파미르 고원, 중앙 아시아 초원, 이란 고원을 지나 지중해 동안과 북안에 이른다. 이것을 지형적 특성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그중 동쪽 부분은 중원에서 둔황[敦煌]까지 이르는 구간으로, 역대에 장안(長安 : 지금의 시안[西安] 또는 뤄양[洛陽])을 기점으로 했고, 허시후이랑이 중요한 길목이었다. 중앙 부분은 둔황 서쪽에서 파미르 고원 동쪽까지이며, 이 길은 타클라마칸 사막에 가로막혀 사막 남쪽(쿤룬 산맥[崑崙山脈] 북쪽)과 사막 북쪽(톈산 산맥[天山山脈] 남쪽)으로 가는 두 길로 나뉜다. 서쪽 부분도 중앙 부분과 마찬가지로 남·북의 두 갈래가 있어서 남로는 파미르 고원의 쿠시쿠르간에서 서쪽으로 쿠샨 왕국에 이르고, 여기서부터는 뱃길로 천축(天竺 : 인도의 옛 이름)에 들어갈 수 있다. 인더스 강을 따라 내려가 아라비아 해와 홍해로 들어가서 지중해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 이른다. 북로는 강거(康居 : 漢魏시대 중앙 아시아의 키르기스 평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투르크계 유목민족국가)에서 서쪽으로 이란을 지나 곧장 지중해와 로마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은 거의 수천 리로 이어져 지금의 러시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등 10여 개 국가를 거쳐간다. 이 세 부분 가운데 동쪽 부분은 역사적으로 변화가 크지 않았지만 중앙과 서쪽 부분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
개통과 발전 |
실크로드가 처음 열린 것은 전한(前漢 : BC 206~AD 25) 때이다. 한 무제(武帝)는 대월지(大月氏)·오손(鳥孫)과 같은 나라와 연합하여 중국 북방 변경지대를 위협하고 있던 흉노를 제압하고 서아시아로 통하는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2차례에 걸쳐 장건(張騫)을 중앙 아시아로 파견했다. 장건의 원정을 계기로 당시 서역(西域)이라고 칭해지던 중앙 아시아 및 서방 각지와 사절을 교환하게 되었고, 여러 문물이 왕래하게 되었다. 당시에 실크로드는 남·북 양 도로 나뉘어 있었다. 중국의 서쪽 관문이었던 위먼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을 기점으로 하여, 하나는 로프노르 호 남안의 미란으로부터 쿤룬 산맥의 북쪽을 지나 야르칸드에 이른 후 파미르 고원을 넘어 아프가니스탄 북부로 나가는 남로(南路)였고, 또 하나는 투루판[吐魯蕃]에서 톈산 산맥 남쪽을 지나 카슈가르에서 파미르를 넘어 페르가나로 가는 북로(北路)였다. 남로에는 다시 야르칸드의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파미르 고원을 넘어 인도 북쪽으로 가는 길도 있었다. 전한 때에는 반초(班超)가 서역으로 출사(出使)하여 전한말 이래 중단되었던 서역과의 관계를 개선시켰고, 나아가 AD 97년 감영(甘英)을 대진국(大秦國 : 로마)으로 파견했다. 감영은 결국 로마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파르티아와 시리아 및 페르시아 만까지 갔다옴으로써 실크로드의 서쪽 끝을 연장시키고 중국인들의 서아시아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주었다.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는 당대(唐代 : 618~907)였다. 당시 중국 북방에서는 돌궐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중원을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에도 큰 장애가 되었다. 마침 돌궐이 동·서 양국으로 분열되고 서돌궐에 내란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당 태종은 군대를 파견하여 서돌궐을 제압했다. 이무렵 로프노르 호 일대의 건조화(乾燥化)가 진행되어 남도의 이용도가 낮아졌고, 북도는 둔황에서 북상하여 하미[哈密]를 경유해 투루판에서 카슈가르로 향하는 길(톈산 남로)과 톈산 산맥 북쪽을 지나는 길(톈산 북로)이 주로 이용되었다. 태종은 구자(龜玆 : 한대의 서역국가)와 북정(北庭 : 짐사)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와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를 설치하여 톈산 남·북로를 관장하게 했다. 이후로는 비단 무역을 비롯한 동서무역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소그디아나(서투르키스탄)를 본거지로 하는 소그드 상인이 중개무역상으로 활약했다. 9세기 무렵에는 당의 세력이 쇠퇴하는 가운데 북아시아에서 이주해온 위구르족과 서쪽에서 진출해온 이슬람 상인이 그들을 대신했다. 송대 이후로는 광저우[廣州]를 지나 스리랑카·파르티아·홍해를 지나 카이로에 도달한 후 다시 이곳을 거쳐 시리아로 가는 해상 실크로드가 발전했다. 이와 함께 육로는 점차 쇠퇴해갔다. 당나라 때는 중국 전성기의 시기였다. 당나라의 서울 장안 (현재 서안)은 동서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 졌던 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점이었다. 중국 의 큰스님 현장이나 신라의 혜초 스님 등이 실크로드 따라 인도를 오간 것도 이 무렵이다. 혜초는 뱃길로 남양을 거쳐 인도의 성지를 순례한 후, 실크로드로 당나라를 거쳐 귀국하였다. 그의 10년 여행기 에 비단길의 여러 가지 사정이 기록되어 있다. 실크로드의 속살은 장려하다. 한나라 땅과 서역을 잇는 하서회랑, 투쟁과 대립의 상징-만리장성, 해골을 길잡이 삼아 떠났던 황량한 고비사막, 사막의 대화랑 돈황, 비극의 역사로 수놓은 고대 왕국, 수수께끼로 감싸인 이름 모를 승려들의 부도 등이 아직 남아 있어 폐허 속에서도 당시의 역사와 문화를 더듬어 볼 수 있다. |
# 하서회랑(河西回廊) |
황하를 건너면 곧바로 사막이 시작된다. 황하의 서쪽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이 길은 황하 서쪽의 복도라는 뜻의「하서회랑」이라고 불린다. 돈황 을 목표로 하는 여행자는 이 회랑을 지나가지 않으면 서쪽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난주에서 무위, 장액,주천,가욕관,그리고 돈황으로 하서회랑은 계속된다. 열차나 자동차는 대체로 하서회랑 루트를 따라 서쪽으로 간다. 옛 사람들 은 말이나 낙타를 이용해서 이 길을 갔을 것이다. 한(漢)나라가 이 곳을 개척하기 전까지는 유목민들의 땅이었다.
기원전 121년 한 무제 때 하서회랑은 중국에 편입되 었다. 그것은 뛰어난 지력과 계략을 갖춘 장건(張騫)이라는 장수에의해서였다 장건은 어떠한 경위를 통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한(漢)민족과 북방 기마민족『흉노』의 공방전에 대해 눈을 돌 리지 않으면 안된다. 한나라 왕조가 성립한 기원전 200년께, 만리장성 북쪽에서는 흉노 왕 목특선우가 북아시아 초원 일대를 평정하여 장대한 유 목 제국을 만들어 냈다. 이에 대해 한나라 제국을 구축한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그 여세를 몰아 북방 흉노를 치려고 원정에 나섰다. 그런데 기 마전에 뛰어난 흉노의 군대는 고조의 군대를 7일간에 걸쳐 포위, 섬멸시켰다. 한나라는 흉노에게 완패한 것이다.
13년이 지나서 장안에 돌아 왔을 때에는 100여명의 부하를 다 잃었고, 자기와 감부 단 둘뿐이었다.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장건은 한나라 서쪽에 있는 대원(大苑)이라는 나라에 천마(天馬), 한혈마(汗血馬)라 고 불리는 명마들이 있음을 알고 그 나라를 쳐 말을 얻어 흉노와 다시 대적하는 것이 어떠냐고 왕에게 아뢨다. 무제의 허락을 얻어 장건은 대원 을 쳐 멸망시키고 명마를 확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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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비사막 |
강우량이 150 - 200㎜로 반사막이라 불린다. 고비사막은 모래, 자갈로 덮여 있고, 사막 식물만 존재한다. 섭씨 40도 이상의 열기가 가득한 대낮에 는 끝없이 맑게 개인 푸른 하늘과 황토색 들판이 강렬한 콘트라스트를 연출한다. 어두워질 무렵부터 밤중까지 고비에서는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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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초(慧超) |
신라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활약한 밀교 승려. 인도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을 지었다. 700년을 전후하여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찍이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밀교를 배웠다. 그후 금강지의 권유로 구법여행에 나서 인도의 불교 유적을 순례하고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중앙 아시아 일대까지 답사했다. 그가 다시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것은 30세 전후로 추정된다. 733년 장안의 천복사(薦福寺)에서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 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敎王經〉을 연구했다. 740년 1월 금강지가 이 경을 번역할 때 필수(筆受)를 맡았다. 그러나 이듬해 가을 금강지가 죽어 이 사업은 중단되었으며, 금강지의 유언에 따라 이 경의 산스크리트 원문은 742년 다시 인도로 보내졌다. 그후 773년경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금강지의 제자 불공(不空)으로부터 이 경의 강의를 들었다. 불공은 유서에서 자신의 법을 이은 6대 제자 가운데 2번째로 혜초를 꼽았다. 불공이 죽은 후 동료들과 함께 황제에게 글을 올려, 스승의 장례 때 보여준 은혜에 감사하며 아울러 스승이 세웠던 사찰을 존속시켜달라고 청원했다. 그뒤 수년 동안 장안에 머물다가, 780년 불공이 활동했던 오대산으로 갔다. 그뒤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 머물면서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의 한역과 한자음사(漢字音寫)를 시도하여 약 20일 동안 이 한역본을 다시 채록했다.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신라로 귀국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오천축국전〉 3권 가운데 일부와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서 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敎王經序〉 및 〈하옥녀담기우표 賀玉女潭祈雨表〉가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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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서역 정벌에서 뛰어난 군사전략으로 전승을 거두어 명성을 떨쳤다. 고구려가 망하자 당나라 사진교장(四鎭校將)이었던 아버지 사계(舍鷄)를 따라 당나라 안서(安西)에 가서 음보(蔭補)로 유격장군(遊擊將軍)에 등용되고, 20세 때 장군에 올랐다. 740년경 병력 2,000명을 이끌고 톈산[天山] 산맥 서쪽의 달해부(達奚部)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가 되고, 이어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에 올랐다. 747년과 750년 1, 2차 서역원정에서 당나라의 중앙아시아 지배를 위협하던 토번족과 그의 동맹국인 소발률국(小勃律國) 및 타슈켄트 지방의 석국(石國) 등 서역의 여러 나라를 정벌하여 명성을 떨쳤다. 이 공으로 홍려경어사중승(鴻卿御史中丞), 특진겸좌금오대장군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을 거쳐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다. 751년 서역 각국과 사라센의 연합군이 석국 정벌을 보복하려고 쳐들어오자, 다시 7만의 정벌군을 편성하여 탈라스(Talas) 대평원으로 제3차 원정에 출전했다. 그러나 당나라와 동맹을 가장한 카르룩[葛邏祿] 군에 의해 배후에서 공격을 받고 섬멸당해 후퇴했다. 귀국 후 하서절도사로 전임되어 우우임군대장군(右羽林軍大將軍)에 임명된 후, 755년 밀운군공(密雲郡公)에 봉해졌다. 그해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토적부원수(討賊副元帥)로 출전했다. 그런데 마음대로 방어 담당지역인 섬주(陝州)를 떠나 동관으로 이동한 사실을 감군(監軍) 변영성(邊令誠)이 현종에게 과장하여 모함해 진중에서 참형(斬刑)되었다. 서역제국의 정벌에서 보여준 그의 뛰어난 군사전략은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하여 높이 평가되었고, 탈라스 전투에서 아라비아의 포로가 된 중국인에 의해 제지법이 아라비아에 전파되었다. |
# 몽골(Mongolia) |
북쪽의 시베리아와 남쪽의 중국 사이에 위치한 내륙국. 중앙 아시아 북부에 속하며, 면적은 아시아에서 6번째로 넓지만 인구는 가장 적은 편이다. 북위 42∼52°, 동경 87∼120°에 걸쳐 있는 이 나라의 모양은 길쭉한 타원형이며, 동서 길이는 2,392km이고 남북길이는 가장 긴 곳이 1,259km이다. 수도는 울란바토르이다. 면적 1,566,500㎢, 인구 2,373,000(1997). |
# 자연환경 |
북부에는 3개의 주요산맥이 있다. 알타이 산맥은 가장 길고 높은 산맥으로, 빙하로 뒤덮인 산도 있다. 이 산맥은 다시 몽골알타이 산맥과 고비알타이 산맥으로 나뉘고, 몽골의 북서쪽 끝에서 남동쪽으로 약 1,600km에 걸쳐 뻗어 있으며, 산봉우리들의 높이는 약 3,350∼4,250m에 이른다. 2번째 산맥은 한가이 산맥인데, 이 산맥 역시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있고 높이 3,650m를 넘는 산봉우리가 있다. 한가이 산맥은 몽골의 중심부 근처에서 단층 지괴를 이룬다. 3번째 산맥인 헨틴(헨테이) 산맥은 울란바토르 북동쪽에 있으며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뻗어 있다. 헨틴 산맥은 가장 규모가 작은 산맥으로 산봉우리들의 높이도 1,800∼2,400m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낮다. 북서부 지역의 아름다운 분지 복합체인 대호수 지역에는 300개가 넘는 호수가 있다. 그보다 더 북쪽의 한가이 산맥 북부에 있는 호르고 지역에는 화산활동으로 생긴 수많은 호수가 있으며, 중북부 국경 근처에는 거대한 지하동굴들로 유명한 회브스괼 호가 있다. 국토의 약 1/3은 나무가 없는 반건조 지대인 고비 사막으로 덮여 있다. 고비 사막은 돌이 많으며, 일부만 모래로 덮여 있다. 오르혼 강의 본류에 해당하는 셀렝가 강이 몽골에서 가장 대표적인 강으로 중북부 지역을 흐른다. 몽골알타이 산맥의 빙하에서 발원하는 호브드(코브도) 강은 북서부 지역을 흐른다. 몽골의 강들은 가끔 홍수의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상당한 수력발전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우브스 호는 면적이 거의 3,370㎢에 이르는 함수호(鹹水湖)이다. 회브스괼 호는 주요한 담수호(2,620㎢)이며, 수심이 240m가 넘는 가장 깊은 호수이다. 몽골은 지질활동이 활발해서 때로는 엄청난 위력을 지닌 지진이 일어나기도 한다. 몽골의 뚜렷한 대륙성기후는 강수량이 매우 적고 기온변화가 잦으며 기온차가 큰 것이 특징이다. 겨울은 춥고 맑으며 건조하여 거의 눈이 내리지 않는다. 여름은 따뜻하고 짧다. 겨울평균기온은 -26∼-18℃이고, 여름평균기온은 17∼23℃이다. 연간강수량은 북부 산악지대는 350㎜이고 고비 사막은 100㎜인데, 강수량의 3/4이 7∼8월에 집중되어 있다. 기후의 뚜렷한 특징은 해가 비치는 맑은 날이 많다는 것인데 연평균 220∼260일이 된다. 몽골 북부지역에 자라는 식물로는 시베리아낙엽송·시더·소나무류·자작나무류·가문비나무류 등이 있다. 북부 삼림에는 스라소니·큰뿔사슴·말코손바닥사슴·흰표범·멧돼지·담비와 아시아산 붉은사슴 등이 서식한다. 산간 분지의 초원과 강유역에는 마못과 몽골가젤영양이, 반(半)사막지역에는 낙타·야생양·야생말·곰 등이 산다. 또한 광물 자원도 풍부하여 석탄·철광석·주석·구리·아연·몰리브덴·인회암·텅스텐·금·형석·준보석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그러나 몽골에서 가장 중요한 천연자원은 목초지이다. 또한 광물자원도 풍부하여 석탄·철광석·주석·형석·준보석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
# 칭기즈 칸(成吉思汗) Chinggis Khan |
1155 또는 1162/67 몽골 바이칼 호 근처~1227. 8. 18. 몽골의 무사·통치자. 그의 손자 쿠빌라이(忽必烈)가 원(元)을 세운 후 원의 태조(太祖)로 추증되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복왕 가운데 하나이며, 유목민 부족들로 분산되어 있던 몽골을 통일하고 제위(帝位 : 칸)에 올라(1206) 몽골의 영토를 중국에서 아드리아 해까지 확장시켰다. 역사적 배경 야담(野談)으로 가득 차 있는 〈몽골족 비사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1240경)를 제외하고는 몽골 쪽의 자료가 아닌 사료들이 칭기즈 칸이 살았던 시대와 비슷한 시대적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유사 이래 유목민과 정착민은 늘 접촉관계를 유지했다. 이 두 사회는 정반대되는 생활양식을 유지했기 때문에 늘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의존적인 처지에 있었다. 북방의 유목민들은 남부지역의 일부 주요산품과 그 지역의 사치품들을 필요로 했다. 유목민들이 이같은 물품을 얻는 방법은 무역·대상(隊商)·무력약탈의 3가지가 있었다. 중국의 정착민들은 유목민들이 사는 스텝 지역의 생산품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는 않았지만, 유목 야만족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유목민들의 내침을 막아내야만 했다. 스텝 지역 유목민들의 단합과 분열은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에 따라 결정되었다. 유목민들은 세력이 강성할 때 결단력 있는 지도자를 옹립하여 다른 유목민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그후 중국의 왕조가 쇠망의 길을 걷고 있으면 그들의 세력을 스텝 지역 밖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러나 유목민들이 이같이 세력을 확장하여 남방정착민들의 문화를 수용하게 되면 결국에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유목민들은 원래 기동성이 뛰어나 후방에서 별도의 물자보급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세력확장 이후에는 이 전통적인 우월성을 상실해 끝내는 그들이 복속시킨 중국인들에 의해 동화되고 말았다. 그후 중국에는 다시 강력한 제국이 일어나고 유목민들은 족장들끼리 끊임없이 싸움을 벌여 분열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흥망성쇠는 계속 반복되었다. 몽골 정복의 역사는 이같은 형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정치적 갈등과 긴장을 배경으로 하여 칭기즈 칸의 생애가 검토되어야 한다. 그는 자신이 속한 부족들 내부에 재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고 또 그당시 중국과 기타 정착문화를 가진 나라들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정복자의 길로 나선 것이었다. |
# 장보고(張保皐) ?~846(문성왕 8). |
본명은 궁복(弓福)·궁파(弓巴).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장보고(長寶高)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서남해안 지방의 토호 출신일 가능성이 크며, 장씨 성은 당나라에 있을 때 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예에 자질이 있어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徐州)의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이 되었다. 당에서 귀국한 뒤 828년(흥덕왕 3) 왕에게 청해(淸海)를 진수(鎭守)할 것을 청했다. 당시 서남해안에서는 당의 해적들이 신라인을 노략질하여 노비로 팔거나 무역선을 약탈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는 왕의 허락을 받아 군사 1만 명을 모아 청해진(淸海鎭 : 지금의 완도)을 건설했다. 청해진은 7세기말에서 8세기초에 걸쳐 설치된 군진(軍鎭)의 하나이지만 건설 당초부터 독자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에게 내려진 대사(大使)라는 직명도 다른 군진의 진두(鎭頭)·두상(頭上) 등 신라의 정규 관직과는 다른 것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청해진이 건설된 뒤 그는 해적을 소탕하여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당·신라·일본을 잇는 해상무역로를 통한 무역활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신라 지배체제의 외곽적 존재로서 해상무역을 통해 일종의 해상왕국을 형성한 그는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와 함께 교관선(交關船)이라는 무역선을 보내 교역활동을 했다. 840년(문성왕 2)에는 일본에 회역사(廻易使)를 파견하여 서신과 물건을 보냈다. 일본측은 이를 사교(私交)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무역은 허용했고, 그 사자와 이충(李忠)·양원(楊圓) 등에게 식량을 지급하기도 했다. 그의 세력은 국제적으로 극히 번성하여 중국에 유학한 일본 승려 엔닌은 그에게 정중한 편지를 써서 귀국할 때의 뱃길을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무역활동을 통해 확보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중국의 산둥 성[山東省] 원덩 현[文登縣] 츠산춘[赤山村]에 법화원(法華院)이라는 절을 세웠다. 이곳에는 500석을 수확하는 장전(莊田)이 속해 있었는데, 많은 승려가 머물며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고, 청해진과의 연락기관 구실도 했다. 그는 경제력과 무력을 배경으로 중앙의 권력쟁탈전에도 개입하게 되었다. 836년(흥덕왕 11) 왕위계승분쟁에서 패한 김우징(金祐徵)이 청해진으로 와 그에게 의탁했다. 838년(희강왕 3)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자 김양(金陽)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와서 먼저 와 있던 김우징을 만나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장보고는 정년(鄭年)으로 하여금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김양과 함께 경주로 진격하게 했다. 이들은 중앙군을 물리치고 경주에 침입하여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켰다. 신무왕은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고 식읍(食邑) 2,000호를 봉해주었다. 신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성왕은 즉위와 함께 그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 장복(章腹)을 내렸다. 그러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중앙정부에서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845년(문성왕 7)에 왕이 장보고의 딸을 차비(次妃)로 들이려 했으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이듬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중앙정부는 무력으로 그를 토벌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閻長)을 자객으로 보내 그를 살해하게 했다. 청해진의 세력은 그뒤에도 얼마 간 유지되었으며, 851년에야 청해진을 없애고 주민을 벽골군(碧骨郡 : 지금의 김제)으로 옮길 수 있었다. |
# 원측(圓測) 613(진평왕 35)~696(효소왕 5). |
이름은 문아(文雅). 신라왕족으로서 경주 모량부(牟梁部) 출신이다. 3세에 출가했으며, 일찍이 중국에 유학하여 15세에 법상(法常)과 승변(僧辨)에게 유식학을 배웠다. 당나라 태종이 그 명성을 듣고 직접 도첩(度牒)을 내려 출가를 허락하고 원법사(元法寺)에 머무르게 했다. 그곳에서 비담(毘曇)·성실(成實)·구사(俱舍)·파사(婆娑) 등의 학문을 폭넓게 연구했다. 어학에 소질이 있어서 중국어·범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하여 나중에 불경 번역에도 참여했다. 645년 현장(玄)이 인도 구법여행에서 돌아오자 원측은 그에게서 새로운 유식학을 배웠다. 658년 서명사(西明寺)가 낙성되자 대덕(大德)이 되어 신유식학 관계의 저술에 힘쓰는 한편, 현장을 도와 유식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한때 서명사를 떠나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에 머무르다가, 다시 그곳에서 30여 리 떨어진 외딴 곳에 암자를 짓고 8년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은 채 수행에 정진했다. 그후 서명사 승려들의 요청에 따라 서명사로 돌아가 〈성유식론 成唯識論〉을 강의했다. 676년 인도 승려 지바하라(地婆訶羅:日照)가 인도에서 〈대승밀엄경 大乘密嚴經〉과 〈대승현식경 大乘顯識經〉 등의 불경을 가지고 와 중국어로 번역할 때, 번역을 도울 대덕 5명 중 한 사람으로 뽑혀 증의(證義)로서 참여했다. 당시 당나라 고종의 황후인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원측을 살아 있는 부처처럼 존경하여, 신라 신문왕이 여러 번 원측의 귀국을 요청했으나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693년에는 인도 승려 보리유지(菩提流志)가 가져온 〈보우경 寶雨經〉을 번역했다. 695년에는 실차난타(實叉難陀)가 우전국(于國)에서 가져온 〈화엄경〉을 새로 번역할 때 참여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입적했다. 제자들이 사리를 용문산 향산사(香山寺)에 안치했다. 그뒤 제자인 자선(慈善)과 승장(勝莊) 등이 사리를 나누어 종남산 풍덕사(豊德寺)에 사리탑을 세웠다. 현재 중국 시안[西安]의 흥교사(興敎寺)에 그의 탑묘가 남아 있으며 탑묘 안에 초상이 새겨져 있다. 후대에 송복(宋復)이 지은 〈대주서명사고대덕원측법사불사리탑명 大周西明寺故大德圓測法師佛舍利塔銘〉이 있다. 그의 불교사상은 유식학이 중심이다. 당시 현장은 인도에서 호법(護法) 계통의 신유식(新唯識:有相唯識)을 연구하고 돌아와서 재래의 진제(眞諦) 계통의 구유식(舊唯識:無相唯識)을 비판했다. 현장은 나아가 유식사상과 나란히 대승불교철학의 양대 조류를 형성하고 있던 중관(中觀) 사상과는 더욱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현장을 계승한 자은사(慈恩寺)의 기(基)는 이러한 입장에서 호법의 학설을 정통으로서 강조했는데, 기 일파는 법상종(法相宗)에서 정통파로서 장안(長安) 불교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원측은 유식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심식설(心識說)과 삼성·삼무성설(三性三無性說)의 해석을 둘러싸고 진제 계통의 구유식을 비판하면서도 그 영향을 많이 받고 있어 기의 학설과는 경향을 달리했다. 중관 사상에 대하여도 대립을 화합시키려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중관과 유식을 폭넓게 수용하여 정확한 이해에 힘쓰는 한편 양자의 사상적 대립을 지양하고자 했고 법상종이면서도 성종(性宗)적인 색채를 뚜렷이 띠었다. 인간관에 있어서 기 일파가 주장하는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에 반대하고 화엄학이나 천태학에서 주장하는 일성개성설(一性皆成說)에 따랐다. 그결과 원측의 이러한 사상은 법상종 정통파를 자처하는 기 일파로부터 비판을 받고 이단시되었다. 그러나 원측의 사상은 계속 이어져 하나의 학파를 이루었는데, 여기에는 신라 출신의 승려들이 주로 참여했다. 원측의 제자 도증(道證)은 692년(효소왕 1)에 신라로 귀국하여 원측의 유식학을 신라에 전했다. 또한 원측의 후계자 담광(曇曠)이 원측의 〈해심밀경소 解深密經疏〉를 둔황[敦煌] 지방으로 가지고 간 것이 계기가 되어 법성(法成)에 의해 티베트어로 번역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해심밀경소〉 10권, 〈성유식론소 成唯識論疏〉 20권, 〈주별장 周別章〉 3권, 〈유식이십론소 唯識二十論疏〉 2권, 〈관소연연론소 觀所緣緣論疏〉 2권, 〈인명정리문론본소 因明正理門論本疏〉 2권, 〈반야심경찬 般若心經贊〉 1권, 〈인왕경소 仁王經疏〉 6권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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