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회상을 마치며
양력이긴 하나 계미년을 시작하는 정월 초하루에 이백 자 원고지 백 장에 가까운 글을 쓰고 작심대로 난초나 달마 대신 매화를 치기 시작했다.
난초는 잘 알려진 대로 극도로 섬세하고 변덕스러울 정도로 귀티가 있어 쉽게 모험적인 시도를 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책기운(書卷氣)이나 글자향기(文字香), 선비로서의 높은 교양과 수련에 의해 다져진 깊은 인품을 요구한다. 멀리는 지난 20여 년, 가깝게는 재작년 봄부터 그야말로 파천왕(破天荒)의 무진장한 파지를 내면서 이리저리 갖은 실험과 온갖 시도를 다 해봤지만, 결국은 동양 삼국의 고금을 다 통틀어 완당의 <불이선란不二禪蘭> 단 한 작품으로 끝이 나는 지극한 예술의 경지(至藝之境)가 난초였던 것이다.
고전의 세계에 깊이 파묻히거나 금석(金石)을 통해 전서(篆書), 예서(隸書), 초서(草書)에까지 달통하지 않으면 가까이 가기도 힘든 영역이 바로 난이라는 걸 새삼 뼈져리게 느꼈다.
건방진 소리로 들릴는지 모르겠으나 20여 년의 사란(寫蘭)에서 얻은 결론이란 게 겨우 다음과 같은 한 가닥 오기뿐이다.
소남(所南)과 판교(判敎)와 노곤봉(盧坤峰)은 모두 너무 사실적이라 권태롭고, 석파(石坡)는 그 세심법(細心法)이 교활할 정도여서 지겨운 데가 없지 않고, 운미(芸楣)는 청초하긴 하지만 아예 풍류가 없다. 남는 것은 겨우 명나라 때의 중 백정(白丁)의 산란 몇 폭과 완당의 단 한 점 <불이선란>뿐이다.
왜 그러한가?
두 가지다. 난은 애당초 '바람의 항구'랄까, '변화의 역려'랄까, 곧 장자의 용어로 하면 '이시(移是)의 집'이어서 바람과 난을 동시에 잡지 못하면 백전백패다. 속도와 위상 사이의 불확정성 원리와도 같다.
난은 분명 형사(形似) 또는 실사(實寫)가 아니지만 끊임없이 변하는 기운과 변함없는 뼈기운(骨氣)을 함께 못 갖추면 성립이 안 되는 것이니, 사실은 실사가 아닌 것도 아닌 셈이 되고 만다. 그러나 요컨대 꼭 닮은 것의 실사(semblance)가 아니라 숨은 본체, 즉 탁월한 의미의 '리얼리티'가 잡혀 나와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기운(氣)인데, 자유로워야 한다. 그림에 떨어지면 망한다. '그리지 말고 쳐야 한다.' 기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석도(石濤)의 주장처럼 '한 획(一劃)'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한 획을 유지하려면 불(佛), 즉 선(禪)적인 텅 빈 마음과 선(仙)적인 피나는 몸, 즉 기의 수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완당이 스스로 불도 선도 아니라고 한 것은 사실은 불이요, 선으로서의 유(儒), 즉 참선비라는 소리다. 흉내로 될 일이 아니다.
작년 연말 그믐밤에 홀로 앉아 스스로에게 가만히 물었다.
'너는 선비냐?'
대답은 즉각 나왔다.
'아니다.'
'그럼, 너는 무엇이냐?'
이번엔 대답이 천천히 나왔다.
'예술가다.'
'난초를 잠시 멈춰라.'
'그러면 달마를 할까?'
또 질문이 이어졌다.
'너는 중이냐?'
'아니다.'
'그럼, 너는 무엇이냐?'
'시인이다.'
'예언자로구나.'
'∙∙∙∙∙∙.'
'달마도 하지 마라.'
내가 다급하게 물었다.
'먹장난은 나의 유일한 낙이요, 노후의 저승 가는 길닦기이고, 또 그말이 허용된다면 하나의 먹참선이다. 절대로 안 할 수는 없다.'
이번엔 천천히 한마디가 떨어졌다.
'그러면 새해부터 매화를 해봐라. 그것도 한매(寒梅)를! 꽃이 많지 않고 등걸이 기괴하고 고색창연한 매화, 한창 추울 때 꽃이 처음 피기 시작하는 얼음꽃 같은 백매(白梅)말이다.'
'화형(花兄)'말인가?'
'그래, 빙기(氷肌)다. 너는 매화로 수련하는 게 좋다. 매화는 사실 목숨이고 예언이고 고독이다. 바로 그게 선(仙)이다. 매화를 집중하는 체험이 없이는 달마의 기초랄 수 있는 예스러움(古)과 기괴함(奇怪)에 못 간다. 그러나 달마는 항상 켵에 놓아라. 목숨없이 몸 없는 것과 같다.'
'∙∙∙∙∙∙.'
이렇게 해서 계미년 초하루부터 매화를 치기 시작했다.
이 말을 왜 하는가?
지난 팔월에 회고록을 탈고하며 붙인 '회상을 마치며'에서 내 생애를 실패작이라고 실토한 것까지는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너무 처량하고 곡조 슬프게 그 점을 강변한 것이 좀 지나쳐서다.
일본에서는 '실패학(失敗學)'이 대유행이다. 그들은 심지어 '21세기에는 실패를 잘 활용해야 한다'라고까지 주장한다. 실패학은 내 경우에 어떤 교훈, 어떤 태도 변경, 어떤 마음의 결정으로 나타나야 할 것인가?
내가 그리 오래 살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사는 동안 무엇을 어찌할 것인가에 대해 지난 연말과 올 연초만큼 선명하고 깊이 있게 생각해본 적은 따로 없었다. 사회적으로는 홀로 내 나름대로 이미 밝힌 바 있는 문화운동의 세 가지 과제에 천착할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매화 그림과 함께 매화음(梅畵吟) 같은 창연(蒼然)하고 고독한 시를 쓰고 싶다. 우주 너머 흰 그늘의 길 말이다.
난초와 달마를 안 한다는 게 아니다. 하긴 하는데 매화를 중심에 분명히 세우겠다는 것이고, 천년 묵은 매화 옛 등걸의 그 '괴'와 '기'와 '추'의 '창건기굴(創建奇崛)'위에 '얼음꽃[氷花]'이라고도 부르고 '꽃우두머리'라고도 부르는 몇 송이 아리따운 '꽃예언자'를 피워올려 검은 고대와 새하얀 미래를 함께 잡는 신선의 '먹참선', 즉 '선불(仙佛)'수련을 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곧 '숭고'요 생태변혁의 미학이며, 심오요 명상의 영성미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입고출신(入古出新)'이니 나의 문예부흥이자 나의 문화혁명일 것이기 때문이며, 마침내는 나의 '흰 그늘'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생애가 '모로 누운 돌부처'임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실패한 부처, 벌판에 버려져 잊힌 돌부처라고 해서 그 조성할 떄의 깊고 큰 원(願)이 '모심[侍]'이어서는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가? 성공이냐 실패냐는 이제 거의 내 심중에도 안중에도 없다. 오직 내가 '모시느냐, 안 모시느냐'만 있을 뿐이다. '흰 그늘'이다. 이것이 나의 '실패학'이다.
매화를 그리는 데는 다섯 가지 요령이 있다. '몸체는 늙고 줄기는 괴상하고 가지는 깨끗하고 잔가지는 힘차고 꽃은 기이하게 하라'이다.
밝고 밝은 후천개벽의 큰 운수는 각각 제 나름 나름으로 밝힌다고 했다. 내 나름의 모심을 생각하고, 내 나름의 모심의 예술을 생각하고, 고색창연한 괴기와 추의 검은 등걸 위에 예언자의 깨끗하고 희디흰 얼음매화가 몇 송이 눈부시게 피어 '흰 그늘'의 '모심'이 한 호흡, 한 획에서 미친 듯이 춤추듯이 이루어지는 그 한매를 나의 군자가 아닌 신선으로 세우고, 거기에 난초의 군자와 달마의 선승을 더하며, 동이와 동학의 영적인 생명론 위에 인의론과 허공론을 다잡는다면 그 아니 좋겠는가! 실패라 하더라도 그리 곡조 슬픈 실패작만은 면할 수 있을는지 모를 일 아니겠는가?
회상을 마치는 글을 '실패학'을 들어 다시 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무슨 구체적인 계기라도 있었는가?
있었다.
첫째가 작은놈 세희를 면회하고 돌아오면서 각오한, '제대로 살다 가야겠다'는 아비로서의 슬픈 결심 때문이다.
둘째, 세희 나이 또래의 붉은 악마들이 언젠가는 또 다른 형태로 다시 오리라던 나의 예언 그대로 이제 '촛불'로 되살아나 우리 세희까지를 포함한 젊은 그들이 바로 민족의 성배를 실현하는 역사적 주체라는 전망이 너무나도 확연하고 뚜렷하게 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내 주위의 여러 좋은 아우들이 모두 다 하나같이 문화나 미학이나 '문∙사∙철'에 관한 나의 평소의 생각과 촛불들의 미래를 함께 이어주어야 한다는 확신과 집념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지난 팔월의 마침글에서는 비가 오고 있었다. 한데 지금은 눈풍년이다.
구슬프기보다는 숭고하고 심오하다. 내 속에 있는 진정한 희망의 정체가 바로 다름 아닌 이 추운 정월 초하루의 밤거리에서 고즈넉이 타고 있는 저 촛불이라는 사실, 이것이 나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와 낙관의 구체적인 근거요, 계기인 것이다.
향우 5년 안에 새로운 문화운동의 세 가지 당연한 과제 이외에 '모심'이라는 이름의, 아담하고 시적인 산문집 한 권을 덧붙여 쓰고 싶다. 물론 그 내용은 생각하고 생각한 그 생각, '흰 그늘'이겠지만.
내 생애를 통틀어 더듬어 찾아온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을 한마디로 줄여 말하라면 '모심', 즉 '侍' 한 글자라고 즉시 대답하겠다. 아마도 내 삶의 마지막 정리작업일 터이다.
오늘 병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몇몇 기수들이 잡담을 하며 노래도 부르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의 노래, 대중가요를 들으면서 웬일로 '보석'이라는 낱말이 슬며시 뇌리에 떠올랐다. 대중적 민중의 삶, 그 어설프고 고달픈 삶 속에 숨겨진 한 보석이 바로 저 대중가요들은 아닐는지?
옛날 술과 친구와 노래를 즐기며 사방을 떠돌아다니던 때가 떠올랐다. 아득한 옛날이다. 이제 나는 술도 담배도 마저 끊었고 따라서 노래도 아예 끊었다. 어떤 경우에도 노래는 부르지 않는다. 작년 연말에 원주 시절의 선배 세분과 인사동에서 밥 먹고 술 먹는 자리에서, 술이 한잔 돌고 나서 질펀하게 벌어진 노래판에서 단 한 소절도 떠오르지 않는 나의 먹통 가슴을 바라보며 나도 선배들도 기이한 슬픔에 잠긴 일이 있다.
대중적 민중, 카오스 민중의 삶에서 대중가요는 시보다 더 값진 시요, 보석보다 더 빛나는 보석일 수 있다. 나는 오늘 신효범과 이동기의 노래를 들으며 나의 모심이 이들이 부르고 또 빛을 내는 대중의 시, 민중의 보석, '대중가요'까지도 깊이 모셔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신문을 보니 조용필 아우가 상처(喪妻)했다고 한다. 슬픈 일이다. 생각나는 일이 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가 나에게 한 말이, "저는 대중가수예요"였다. 자기를 낮추는 말이었다.
거기에 즉각 "나는 대중시인일세"라고 대꾸한 나의 생각은 도리어 나와 대중을 한없이 높이는 말이었다. 감옥 안에서 숱한 도둑님들이 나를 음으로 양으로 도왔기 때문이다. 나는 대중들에게 큰 빚이 있는 것이다.
나는 그와 매우 친해져서 호형호제하며 지냈다. 그러나 작년이던가, 그가 자기 콘서트에 와달라고 전화했을 때 바빠서였지만 냉정하게 거절한 일이 있다. 그 뒤로 마음이 편치를 않았다.
그렇다. 문상을 가야 한다. 내일이든 모레든 꼭 가야 한다.
왜?
그의 노래를 듣고 상처를 위로받곤 하던 지난날들의 고마움을 '모시기' 위해서다. 더욱이 그의 노래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던 노래는 <촛불>이 아니었던가! 그의 '촛불'을 '홋불'로 패러디할 만큼.
그렇다.
'촛불'을 모시러 가야한다.
폴 발레리의 난해한 시구들 중의 가장 대중적인 시구,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대신 이제 나도 한마디 해야겠다.
'촛불을 켜라. 모셔야겠다.'
단기4336년(2003년) 계미년
양력 1월8일 저녁 7시
일산에서
김지하 모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