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琢窩(탁와) 鄭璣淵(정기연)은 누구인가?
琢窩(탁와) 鄭璣淵(정기연)은 貫鄕(관향)이 草溪(초계)이며 高麗末(고려말)에 慶山(경산)으로 自靖(자정)해 온 淸州牧使(청주목사) 良獻公(양헌공)
鄭 珚 (정연)의 後孫(후손)이다.
1877년 10월 26일 慶山市(경산시) 玉谷洞(옥곡동)에서 출생하여 鄕里(향리)에서 학업을 닦다가, 1896년 弱冠(약관)에 忠淸道(충청도)로 가서 淵齋(연재) 宋秉璿(송병선)과 心石齋(심석재) 宋秉珣(송병순) 兄弟(형제)의 門下(문하)에서 受學(수학)하였다.
그 뒤 師門(사문)의 高足弟子(고족제자)가 되어 畿湖學派(기호학파)의 巨儒(거유)로 성장하던 琢窩(탁와)는 乙巳條約(을사조약) 때는 淵齋(연재)가, 庚戌年(경술년) 合邦後(합방후)에는 心石齋(심석재)가 殉國(순국) 自決(자결)함에 이르러, 나라와 두 스승을 동시에 잃게 되었다.
鄕里(향리)로 돌아와 聖巖山下(성암산하) 寓敬齋(우경재)에 隱居(은거)한 그는, 儒學者(유학자)들이 온통 나라를 망하게 한 것처럼 들고일어나는 비판의 소리를 귀담아 들으면서 儒學傳統(유학전통)의 繼承(계승)과 守護(수호)를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었다.
11冊(책)의 文集(문집)을 남겼는데, 그 속에서 그는 당시의 儒學(유학)에 대한 비난을 外面(외면)하지 않고 경청하면서 부당한 批判(비판)에는 적극 解明(해명)하고 또 儒學(유학)의 참된 모습을 제시하는데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今言辨:금언변」에서, 儒敎(유교)에도 변화의 原理(원리)가 있음을 확인하는 적극적 자세를 볼 수 있고, 「聖化論:성화론」에서는 今世紀(금세기)부터의 정치는 民主時代(민주시대)에 들어감을 설명해주고 있다.
「毁儒辨說:훼유변설)」에서는, 天理(천리)를 넓게 열고 人慾(인욕)을 막자는 儒敎的(유교적) 開明(개명)에 反(반)하여, 慾望(욕망)만을 개발하는 開化派(개화파)의 開明(개명)은 진정한 開明(개명)이 아니라고 辨說(변설)하였다. 「心性論:심성론」에서는 栗谷(율곡)의 主理論(주리론)을 취하였고, 朱子(주자)의 定義(정의)에 따라 心卽氣說(심즉기설)을 고수했다.
특히, 1947년에는 漢字(한자)의 文化的(문화적) 價値(가치)를 옹호하는 「玉石問答:옥석문답)」을 지어 한글專用論(전용론)의 不當性(부당성)을 지적하고, 國漢文混用(국한문혼용)을 적극 주장했으며, 「二耕傳:이경전」에서는 頹敗(퇴패)한 儒敎(유교)의 再建方策(재건방책)을 提示(제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琢窩(탁와)는 時代的(시대적) 適應(적응)을 요구하면서도 傳統(전통)의 固守(고수)에 철저한, 兩面(양면)의 一致(일치)를 나름대로 탐색한 儒學者(유학자)였다.
守舊(수구)와 開化(개화)가 左衝右突(좌충우돌)하던 思想的(사상적) 葛藤(갈등)가운데서 끝까지 儒敎眞理(유교진리)의 永遠性(영원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속에 살았던 琢窩(탁와)는 한편으로 조국을 倭賊(왜적)에게 빼앗기게 된 참담한 逆境(역경)속에서 일생을 보냈다.
그는 1909년 「傷秋賦:상추부」를 지어 國運(국운)의 衰退(쇠퇴)를 통탄하고, 時利(시리)를 쫓아 허둥대는 人心(인심)의 야박함에 애써 超然(초연)하려고 했지만, 이듬해 庚戌年(경술년)에는 나라가 日帝(일제)에게 송두리째 倂呑(병탄) 당하자 「述志三首:술지삼수」로 亡國(망국)의 恨(한)을 토로하면서 무심한 하늘을 怨望(원망)하기도 했다.
1912年 日王(일왕) 明治(명치)가 죽자, 그네들은 우리 百姓(백성)에게도 검은 徽章(휘장)을 달고 服喪(복상)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 目不忍見(목불인견)의 世態(세태)와 그 비참한 처지를 「掩扉吟:엄비음」에 담아 신음하면서, 琢窩(탁와)는 聖巖山下(성암산하) 寓敬齋(우경재)에 은거하게 이른 것이다.
그 뒤로는 「聖巖七絶:성암칠절」로써 自身(자신)과 後進(후진)들의 갈 길을 읊조리면서 여생을 窮理(궁리)와 著述(저술)로 보내더니, 1952년 5월 3일, 76세의 생애를 마치고 「내가 자신을 아는 것으로 족하니, 남이 알고 모르고 가 무슨 상관이 있으랴」는 自製墓碑(자제묘비)곁에 安葬(안장)되어 있다.
첫댓글 멋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