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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이병기
사월과 오월에 떠나는 문학기행은 살가운 그리움으로 가슴을 울렁이게 만든다.
겨우내 앙상하던 나뭇가지들은 저마다 자기의 색상을 드러내며 녹색의 향연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숲도 자세히 보면 녹색이면서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색상이 존재한다. 이런 색상을 표현할 단어가 우리에게
없지 않은가. 자연이 위대하다고 하는 말은 이제 너무나 진부한 이야기다. 그러나 사월과 오월로 이어지는 시기에
숲의 변화를 보면 정말 자연은 신기하고 놀랍다.
이런 시기에 향기 지닌 민족문학의 작가 이병기시인(1891~1968)을 찾아 떠나는 문학기행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문학기행은 문화유산답사와는 사뭇 다르다.
문화유산답사는 역사적인 실체를 확인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그러나 문학기행은 문학적인 감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작가의 고향 언저리와 작품의 무대를 둘러보는 일임에도 작가와 작품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작가는 결국 자신의 문학 작품을 통해 평가받기 때문이다.
이병기 시조시인 생가
그런데 작가 중에는 생가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인근에 묘소까지 있는 분이 있다. 바로 가람 이병기 시조시인이다.
작가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그리고 생가 인근의 묘지로 돌아가는 문인은 희박하다. 이런 복은 아마도 천복이거나, 자연이 돕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그의 이런 생은 하늘이 합당한 삶을 인정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선생의 유명한 시 ‘별’을 낭송하거나 노랫말로 된 가곡을 불러보면 그가 얼마나 아름답고 순박한 분이었나를
알게 된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앞에 나섰더니
서산(西山)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이병기 시조시인 묘소
봄빛이 화려한 토요일 오후지만 자동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고 적막하다. 초가로 이은 지붕이 자아내는 옛 시골집 같은 시인의 생가를 보니 가슴 설렌다. 그 너머에 병풍처럼 펼쳐진 대나무 숲이 은밀한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대숲은 죽어 있다.
이병기 선생의 생가 전경
생가로 다가서니 수령이 200년 된 탱자나무가 반긴다. 늙은 탱자나무는 모정(茅亭) 옆에서 아름답고 순결한
흰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그러나 배롱나무는 아직 물이 오르지 않고 그 붉은 몸체를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다.
선생의 생가임을 알리는 안내 표지판을 읽는다. 이 표지판 아래 한국문인협회의 기념물이 생가 표지석과 함께
앉아 있다. 이 마을에 오랫동안 터를 잡아온 연안 이씨 가문의 내력이 숨어 있어서인지 생가는 비록 초가집이지만 선비적인 정결함과 반듯하다.
이병기 선생은 1891년 3월 5일, 6남 6녀의 장남으로 이 집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이채(李採)는 전북 부안에서
변호사업을 개업 했으니 이 집안의 수준을 알만하다.
수우재(守愚齋)는 생가의 당호인데 집 이름이 겸손하다. 선생은 조부로부터 10여 년간 한학을 배웠다.
신학문을 알게 된 것은 양계초(청나라인)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통해서였다. 이 책은 양계초의 개혁적이며 계몽사상을 담고 있으며 한용운, 신채호, 최남선을 비롯한 우리나라 개화 지식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병기 선생의 생가 탱자나무
은밀한 사랑이 숨겨져 있을 듯한 죽은 대숲은 바람이 불 때 마다 대나무 부러지는 소리로 요란하다.
싱싱한 대나무 숲이 되길 기원해 본다.
다시 선생의 행적을 더듬거린다.
19세 때 전주 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하고 6개월 만에 졸업하고 이듬해인 1909년 당시에 전국의 수재들만
입학한다는 한성사범학교에 합격한다. 주시경 선생의 문법 강의를 듣고, 큰 감동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한글운동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이듬해 나라가 망하니 선생은 망연자실하여 중국 망명을 시도하기도 했다.
1913년 한성사범을 졸업한 선생은 고향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 박봉을 쪼개어 고서를 수집하고, 시조를 쓰기
시작한다. 서울에서 휘문고보 교사로 재직할 때 방학을 이용하여 빼앗긴 조국의 유적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월급의 반을 수천 권의 고서를 사 모으는데 썼다. 선생은 이것을 애국이라고 생각했다.
선생은 이후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가 연구회 간사를 맡으면서 우리말 연구를 하는 것이 독립운동
이라고 여기면서 일했다. 1926년 ‘시조회’를 만들어 민족문학의 탐구와 보급에 앞장선다. 이후 일제의 한글에
대한 탄압이 악랄해지는 상황에서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버틴다. 끝내 조선어학회(1942)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서 약 1년 동안의 감옥살이를 한다.
가람 이병기 선생 동상
출옥 후 선생은 고향 마을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칠흑 같은 일제의 암흑기를 보냈지만, 이미 그때 광복의 새벽을 예감하였을 것이다.
‘시조란 무엇인가’라는 논문으로 현대시조부흥운동을 시작한다. 술과 난초와 매화를 유독사랑 하였지만,
인현왕후전, 한중록, 춘향가, 계축일기, 어유야담 신재효의 판소리 등 귀중한 문학 자료를 발굴하였다.
우리말과 글의 보존을 위하여 노력하신 선생의 지조와 민족사랑은 그 가문의 뿌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선생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功臣)인 이귀(李貴)의 11대 후손이다. 7대조인 이사한(李思漢) 때 공주(公州)에서 충남 연산(連山)으로 이주했다. 고조(高祖)인 이도술(李度術) 선생이 현재의 행정구역인 여산면 원수리 573번지에 살기 시작했다.
1945년 선생은 고향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정국의 여러 단체, 정당에서 많은 제의를 받았지만 나서지 않았으며, 학문에만 관심을 두었다. 가람은 현대시조를 짓고 장서를 모으고 국학에 관한 저작을 더 중시했다.
어떤 정치활동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학자적 소명으로 일관했다.
이병기 선생 묘비
선생의 묘소는 매우 초라하다. 후손들이 풍수학적으로 닭이 알을 낳는 형국을 믿기에 상석을 포함한 비석도
세우지 않았다. 묘소 참배객들이 이 내용을 알지 못하면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다. 나 역시 생존해 있는 가람의 며느리 윤옥병 여사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다.
생가 입구에 있는 작은 시비의 ‘고향으로 돌아가자’라는 가운데 장이 누락 된 시조를 읽는다.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암 데나 정들면 못 살리 없으련마는
그래도 나의 고향이 아니 가장 그리운가.
방과 곳간들이 모두 잿더미 되고
장독대마다 질그릇 조각만 남았으나
게다가 움이라도 묻고 다시 살아 봅시다.
삼베 무명옷 입고 손마다 괭이 잡고
묵은 그 발을 파고 파고 일구고
그 흙을 새로 걸구어 심고 걷고 합시다.
고향으로 돌아가자 시비
우리나라 시조발전에 영향을 끼친 선생의 업적은 지대하다.
우리 시조가 옛 형태 속에서 머뭇거릴 때 현대적인 서정을 담아 서정시조의 길을 열었다.
육당 최남선과 함께 시조 발전을 위해 이론적인 근거를 마련하는데 노력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람은 후진의 발굴, 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가람이 천거한 시인은 김상옥, 이호우, 이영도 등이다. 이들은 한국 현대 시조의 기라성이 되었다. 이들을 발굴하고 키웠기에 문단에서 가람을 현대 시조의 아버지'라 불러왔다. 시조집으로 저서에 ‘국문학 개론’을 비롯한 많은 저서들이 있다. 이중 ‘가람시조선’에는 시조에 열정을 보인 작품들이 오롯이 담겨있다.
또한 약 60년을 쓴 그의 ‘가람일기’는 유명하다. 가람일기는 단순한 개인의 일기가 아니다. 일제하의 체험과 사실적인 지식인의 일상사가 극사실로 그려져 있다. 이 일기 한 페이지를 읽으면서 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1921년6월24일의 가람의 일기는 마치 어제일 같이 선명하다.
(비 오다 그치다. 익채(益采)군이 찾아와 그 중형(仲兄)의 공판(公判)이 오늘이라기에 용해 군을 데리고 재판소로 갔다. 비는 쫙쫙 쏟아진다. 제8호 법정에서 공판을 열다. 벌써 만원이라고 순사가 소리를 지르며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을 어거지쓰고 들어갔다. 최익한(崔益翰)군이 나를 쳐다보며 빙긋이 웃는다.
군자금 (軍資金) 1,600원 모집해 주었다는 것을 강도범(强盜犯), 경찰범(警察犯)으로 몰아서 징역 8년이라고 검사가 말한다. 익한 군의 말대답이며 변호사 김병로(金炳魯)의 변론이 다 바르고 분명하다. 그러나 어떻게 판결할는지 오는 7월 1일에 다시 공판(公判)을 연다니, 그 때 보자. 쓸쓸한 판사의 얼굴은 아무리 보아도 따뜻한 정이 없는 듯, 맨 뒤에 익한 군의 하고자 하는 말을 마구 바사 뜨린다. 간수(看守)는 곧 대들어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머리에 용수를 씌우고 노로 허리를 묶어 가지고 나간다.)
이렇듯 가람일기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료적인 의미를 갖는다. 1909년부터 시작하여'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할 때를 제외하고 60년간 하루도 빠짐없다. 가람일기는 이 자체만으로도 당대의 역사서, 문학사 사회사다. 일제하 36년 동안 친일 문장도 남긴 일이 없고, 창씨개명을 거부한 선생의 일기는 오늘 읽어도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이은상과 함께 우리의 대표적인 시조 작가인 가람은 13세 때부터 시조를 쓰기 시작하였다. 조부로부터 한학을 익힌 이후 한시로 시를 쓰다가 한글을 사랑하여 한글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 다른 학자들과 다른 점이다.
더욱이 가람이 제대로 시작 활동을 하던 1930년대는 서구의 모더니즘과 낭만적이며 감각적인 이미지들이 작가들을 매료하던 시대였다. 많은 작가들이 소위 서구적인 사조에 세뇌 되어 우리 옛 문학을 골동품으로 취급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가람은 끝까지 우리의 시조를 사랑하는 지조를 지켰다.
결국 가람의 시조들은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불게 했다. 1939년 ‘가람시조집’ 출간되자, 정지용 시인은 가람을 송강 정철이후 최고 작가라고 선양했다. “가람 이전에 가람이 없고, 가람 이후에도 가람이 없다”는 발문으로 선배 작가를 선양했다. 발문을 통해서 정지용이 그의 지조와 문학적 업적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 것이다.
오후의 봄 햇살이 눈부신 날 선생의 생가를 거닐면서 주변을 살핀다.
사랑채 마루에 앉아서 천호산을 바라본다. 가까이에 국도 1호선의 차량들이 질주한다.
윤옥병 여사
‘모정’에는 한 사네가 행복한 잠을 청하고 있다. 생가 옆에 사시는 셋째 며느리 윤옥병 여사(75세)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이분은 유일하게 가람의 임종을 지킨 분이다.
“아버님은 말이 통 없으셨어요, 사랑채의 끝 방이 서재인데 그곳에서 늘 책을 읽으시고 멀리서 손님이 오시면 사랑방에서 약주를 즐겨 드셨서요”
“아들 셋과 따님 한분이 계셨지만 아드님들은 모두 돌아 가셨지라요, 긍께 따님 한 분만이 서울에서 사시지라요.”
윤옥병 님은 마음이 넓고 인정이 많으신 분이다. 사람들이 자주 찾아와 귀찮게 할 터인데도 그런 불평이 없고 세상을 관조하시면서 사는 분처럼 보인다.
“저 앞에 보이는 백일홍 꽃 피면 이뻐요. 꽃이 한 백일 핍니다.”
그녀의 시 아버님인 가람의 자연관과 닮아 있지 않은가?
선생은 서울대와 전북대 및 기타 여러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지리산’, ‘춘향가’, ‘청구영언’, ‘해동가요’의
주해를 달았다. 백철 선생과 함께 만든 ‘국문학 전사’를 쓰기도 했다.
이런 작업을 통해 서민 중심의 문학사 서술방식을 시도했다. 이는 우리 문학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1956년 ‘우리말 큰 사전’의 발간을 기념한 한글날 기념행사에서 마신 술로 귀가 길에 뇌일혈이 발생했다.
선생은 이 병마로 낙향하여 생가에서 1968년 세상을 떠나실 때 까지 명상하며, 대나무, 매화, 난초와 동무가 되었다.
생가인 ‘수우제’는 청렴한 선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채와 안채, 고방(광)으로 이루어진 가람의 생가는 모두 초가집이 특징이다. 작은 연못가에 모정이 있어 농사짓던 선비 집의 배치구조를 하고 있다.
집을 둘러싸고 있는 대나무 숲과 산수유와 배롱나무, 탱자나무 등은 가람의 자연적인 취향과 정갈하며 낭만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채 옆 모정에 앉아 가람의 대표작인 시조 난초를 읽으면, 문학기행의 감성이 살아난다.
가람 선생의 묘소에 참배를 하고 길을 내려오면서 대나무 숲을 들여다본다.
몇 시간을 머물러 있어도 아무도 찾지 않는 생가 주변에서 살포시 그리움을 가슴에 심으며 떠날 준비를 한다.
이제 가람 생가를 떠나야 한다. 며느님 윤옥병님께 인사를 하고 길을 나선다.
밤이면 그 밤마다 잠은 자야 하겠고
낮이면 세 때 밥을 먹어야 하겠고
그리고 또한 때로는 시도 읊고 싶구나.
지난봄 진달래와 올 봄에 피는 진달래가
지난 여름 꾀꼬리와 올 여름에 우는 꾀꼬리가
그 얼마 다를 까마는 새롭다고 않는가.
태양이 그대로라면 지구는 어떨 건가
수소탄 원자탄은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냉이꽃 한두 송이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