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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남도 진도군의 세거성씨 중 하나. [연원] 시조는 문다성(文多省)이다. 문다성은 신라 자비왕 대의 사람으로 5세에 문사에 스스로 통달하고 무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총명하여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지라 성을 문으로 하고 이름을 다성이라 칭했다고 한다. 그 후 삼중대광 벽상공신으로 남평백에 봉해지고 98세까지 살았다고 하여 후손들이 남평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입향 경위] 전라남도 장흥, 보성, 광주 등지에 주로 사는 남평문씨들은 모두 문익점(文益漸)을 증조로 내세운다. 문익점의 다섯 아들 중 둘째 문중성(文中誠)의 후손들을 순질공파(純質公派)라 하는데, 진도군 남평문씨들은 대부분 순질공파에 속한다. 진도 입향조는 문익점의 9세손 문덕연(文德連)이다. 문덕연은 진도에 거주하는 창령조씨의 사위였고 그의 아들 문억매(文億每)의 처가가 진도 지산 지역의 전주최씨였던 연고로 현재의 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오류리 지역으로 들어와 활곡, 곤우, 임회, 석교 집안을 이루었다. [세거 현황] 문덕연(文德連)이 현재의 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오류리 지역으로 들어온 이래 활곡, 곤우, 임회, 석교 등지에 13세손들이 모여 살고 있다. 문익점의 9세손으로 문덕연과는 촌수가 먼 문만(文萬)은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등지로 들어와서 그 후손들이 주로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에 살고 있다. 또한 1670년대에는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에서 11세손 문종(文宗)이 진도군 군내면 대사리로 들어온 이래 이 지역에도 남평문씨들이 세거하고 있다. 전라남도 진도군에서 남평문씨는 성씨 순위 12위의 규모로 255가구가 살고 있다. 남평문씨 국내 순위가 23위인 것과 비교하면 진도군에 많이 사는 편이다. |
남평문씨(南平文氏)
◀ 시조 문다성(文多省) 단소 전경
- 소재지 : 전남 나주시 남평읍 풍림리
남평(南平)은 전라남도(全裸南道) 나주군(羅州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을 통일신라(統一新羅) 때 경덕왕(景德王)이 현웅현(玄雄縣)으로 고쳐 무주(武州 : 광주의 옛 이름)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조(高麗朝)에서는 남평(南平) 또는 영평(永平)으로 불리웠고, 그후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913년 나주군(羅州郡)에 합쳐져서 지금의 남평면(南平面)이 되었다.
문씨(文氏)의 본관(本貫)은 남평(南平)을 비롯하여 단성(段城)·감천(甘泉 : 경동 안동지방)·정선(旌善)·강성(江城)·함평(咸平)·파평(坡平) 등 156본(本)까지 문헌(文獻)에 기록되어 있으나, 감천과 정선을 제외한 관향(貫鄕)은 모두가 남평 문씨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신라(新羅) 자비왕(慈悲王) 때 사람인 문다성(文多省)을 시조(始祖)로 하며, 감천 문씨(甘泉文氏)는 경주 김씨(慶州金氏)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고려 태종(太宗) 때 중국(中國)에 건너가 문명(文名)을 떨침으로써 문씨(文氏)의 성(姓)을 하사(下賜)받았다고 한다.
정선 문씨(旌善文氏)는 본래 전씨(全氏)였으나 시조 문임간(文林幹)이 역시 중국에서 문장(文章)으로 명성을 떨쳐 문씨로 사성받고, 돌아와서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와 태자소부(太子少傅)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문씨(文氏)의 대종(大宗)인 남평문씨(南平文氏)의 시조 문다성(文多省)은 신라 말에 남평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출생에 대한 설화(說話)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서기 472년(신라 자비왕 15) 전남 나주군 남평현 동쪽에 장자지(長者池)라는 큰 못이 있고 그 못가에는 큰 바위가 솟아 있었다. 하루는 군주(郡主)가 그 바위 아래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면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신기하게 여긴 군주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바위위에 올라가 보니 석함(石函)이 놓여 있었다. 함을 열어보니 그 속에는 피부가 옥설(玉雪)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들어있었다.
기이하게 생각된 군주(郡主)가 아이를 거두어 기르니 나이 불과 5세에 문사(文思)에 저절로 통달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총명(聰明)하여 사물(事物)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지라 <문(文)>을 성(姓)으로 삼게 하고 이름을 <다성(多省)>으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후 대장군(大將軍)을 거쳐 삼중대광벽상공신(三重大匡壁上功臣)으로 남평백(南平伯)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관향(貫鄕)을 남평으로 하게 되었으며, 시조의 탄강지인 바다 위에다 <문암(文巖)>이라는 비(碑)를 세우고, 못가에 장연서원(長淵書院)을 디어 매년 음럭 9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享祠)하고 있다.
고려조에서 주로 명성을 떨쳤던 남평 문씨는 중시조(中始祖) 익(翼)이 고려 문종(高麗文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1098년(숙종 3) 좌·우찬성대부(左·右贊成大夫)를 지내고, 급사중(給事中)과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거쳐 우산기상시(右散騎常寺)에 올라 상주국(上柱國)으로 풍산군(楓山君)에 봉해져서 가문(家門)을 크게 중흥시켰으며,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명문(名門)의 기초를 다졌다.
당세에 명필(明필)로 유명했던 공유(公裕)는 익(翼)의 막내 아들로 예종(睿宗)과 의종조(毅宗朝)에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묘향산(妙香山) 보현사(普賢寺)의 창사 비문(創寺碑文)을 남겼다. 공유(公裕)의 아들 극겸(克謙)은 문무겸직의 시초를 만든 충직(忠直)한 현상(賢相)으로 이름이 높았고, 그의 아들이 고종(高宗) 때 참지정사(參知政事)와 판예부사(判禮部事)를 지낸 유필(柳필)이다.
우리 나라 의복혁명(衣服革命)의 기수 삼우당(三憂堂) 익점(益漸)은 남평 문씨가 자랑하는 인물(人物)이다. 그는 1329년(고려 충숙왕 16) 강성현 원당리 배양촌(江城縣元堂里培養村 : 지금의 경남 산청군 단성면 배양리)에서 세칭 청도선생(淸道先生)으로 불리웠던 충정공(忠貞公) 숙선(叔宣)의 아들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고 김해부 사록(金海府司錄)을 시작으로 벼슬에 등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1363년(공민왕 12)에 좌정언(左正言)이 되어 계품사(計稟使)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원(元)나라에 갔다.
이때 원나라에서는 공민왕의 배원책(排元策)에 대한 응징문제로 공민왕의 폐위론을 의논하자 이를 극구 반대하다가 원제(元帝)의 노여움을 받아 교지국(交趾國 : 지금의 월남)에 귀향갔다가 돌아올 때 금수품(禁輸品)인 목화(木花)씨룰 붓대 속에 넣어온 것으로 우리나라의 혁명을 일으켰다.
특히 그는 공만왕(恭愍王) 때 우문관 제학(右文館提學)에까지 올랐으나 고려가 망하자 9년간이나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세상과 인연을 끈고 살자 아태조가 친히 불러 벼슬에 등용시키러 하였으나 끝까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으며, 효행(孝行)이 지국하여 왕명(王命)으로 그가 살던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慶南山淸郡丹城面沙月里)에 효자정각(孝子旌閣)을 세우고 마을 이름을 효자리(孝子里)로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익점의 아들 중용(中庸)·중성(中誠)·중실(中實)·중진(中晋)·중계(中啓)도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크게 명성을 떨첬으며, 간의대부(諫議大夫)중실의 맏아들 래(萊)는 이 색(李 穡)의 문하(文下)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성리학(性理學)을 비롯한 천문(天文)·지리(地理)·산수(算數) ·율려(律呂)에 이르기까지 정통했던 학자로 목화에서 실을 뽑는 <물레>를 발명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권 율(權 慄)의 휘하로 들어가 역전의 훈공을 세웠던 위세(緯世 : 익정의 9세손)가 용담 현감(龍潭縣監)을 지내고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홍헌(弘獻)은 진주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강물에 투신자살하여 광해군 때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지낸 희성(希聖), 병자호란에 왕을 호종하고 경상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한 재도(載道),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순절한 기호(基浩)와 함께 가통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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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문익점 선생님 후손들이네요!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