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년(李兆年)은 고려 말의 혼란한 시기를 지켜내며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다.
공암나루에서 네째 형 억년(億年)과 함께 주은 금덩어리를 놓고 고심하다 강에 던진 투금탄(投金灘) 형재애로 유명하다.
그의 백년(百年) 천년(千年) 만년(萬年) 억년(億年) 조년(兆年) 다섯형제는 모두 문과에 합격하는 기록을 수립한다.
신라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형제가 모두 문과에 합격한 것은 조년의 형제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다정가(多情歌)>를 지은 문장가이기도 하다.
이화(梨花)에 월백하고 은한(銀漢)이 삼경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아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이조년은 난세에 태어나서 수많은 변고와 험난함을 겪으면서도 혼미한 임금을 받들어 지조가 금석 같았고
충직한 깊이가 후세에 우뚝하여 고려 500년 역사의 제1인자”퇴계 이황은 이렇게 평했다.
그로부터 500년 뒤 조선 정조시대 조선 최고의 시인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5)가 <다정가(多情歌)>를
리메이크한 자규제(子規啼 두견새 울음소리)를 내놓는다.이는 우리나라 문학사상 처음 있는 일로 평가된다.
자규제(子規啼 두견새 울음소리)
-자하(紫霞) 신위(申緯)-
梨花月白五更天
배꽃에 달은 밝고 하늘은 오경인데
啼血聲聲怨杜鵑
피 토하며 우는 소리 원망하는 두견새
儘覺多情原是病
알겠네! 잠 못 이룬 그 뜻을, 다정도 병인 양하니
不關人事不成眠
세상일에 무심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5)는 익제 이제현 이래 조선조의 500년 문예를 집대성한 대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신위는 1769년(영조45)에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한수(漢叟), 호는 자하(紫霞)ㆍ경수당(警修堂)이다.
김택영의 <자하연보 紫霞年譜>에 의하면 신위의 호는 원래 홍전이었는데 관악의 자하동 별장에서 수학했으므로 호를 자하로 바꾸었다고 밝히고 있다. 아버지는 대사헌 대승(大升)이며 어머니는 이영록(李永祿)의 딸이다.서울 장흥방에서 출생하여 9세에 처음으로
학문을 시작하였으며 일찍부터 재주가 널리 알려져서 정조 임금이 불러 시험해 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정조 23년(1799)에 알성문과에 급제해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된다.
순조 12년(1812)에는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갔다.이때 신위는 벌써 차 마시기에 익숙했던 듯하다.
만주를 지나다 동정수(東井水)를 길어 찻물로 이용했다는 다시가 보인다.
신위는 청나라 대학자 옹방강(翁方綱)을 만나 학문의 눈이 열렸다.
이후 시서화(詩書畵) 삼절로 불렸는데 신위 사후에 김택영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림은 시에 버금가는데, 묵죽화에 더욱 묘하여 중국인들이 다투어 보배로 삼았고,
글씨 또한 그림에 버금가므로 세상에서는 삼절이라고 말한다."
1870년 7월 시흥 자하동천(현 과천)으로 물러나 은거하기도 하지만 한 달 뒤 강화유수 때
국가재정을 남용했다는 윤상도의 모함을 받고 추자도로 유배를 간다. 신위는 옥에 갇히거나 유배를 가면서도
차 도구를 가지고 다닐 정도로 차에 인이 박인 차꾼이었다. 유배지 추자도에서 지은 듯한 다시에 차 도구인
차 화로와 구리병이 나온다.
서울 관악산 자락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규장각 근처에 ‘자줏빛 노을이 내리는 연못’ 자하연(紫霞淵)이 있다.
그 연못 가에 자하 신위(申緯1769-1845) 동상을 얹은 기념비가 우람하게 서 있다. 바로 이곳이 신위가문의 세거지였다.
17세기 어느 땐가 평산신씨 신여석 (申汝晳), 여철(汝哲) 형제가 입주하여 제일계산(第一溪山)이라 불렀고
그 들은 이곳 자하동에 묻혔다. 대를 이어 내려오다가 신위가 태어나 16살 때 이곳 자하산장(紫霞山莊)에 올라 독서를 하였다.
30살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 오랫동안 자하동을 떠났으나 아호를‘자하’라 하고서 바꾸지 않았으며
50살이 넘어선 1822년에도‘자하산 아래 이르지 못한 것이 어언 19년,
그곳은 원래 우리집 산’이라고 읊조려 결코 잊을 수 없을 고향으로 가슴에 두고 있었다.
신위(申緯)는 예원의 총수 강세황의 말년 제자로 그 대통을 이어 19세기 전반기 예원에 군림했다.
신위는 당쟁이 심한 조류 속에서도 초당파적(超黨派的)인 교류를 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호탕하고 시ㆍ서ㆍ화의 재주로 한 시대를 주도한 인물이기에 그러하다.
북학을 연구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등과 모두 친교가 있었고,
자신은 소론에 속한 인물이었으나, 소론의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과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뿐만 아니라
남인에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 낙하(洛下) 이학규(李學逵) 등과 막역한 사이였고,
노론에 풍고(楓皐) 김조순(金祖淳),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등과도 가깝게 지내는 등 넓은 인간관계를 맺었다.
그는 물론 남인으로 세도가와는 거리를 두어 화려함을 다투지 않았거니와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인품과 역량으로
예원의 흐름을 이끌었는데 당대 지식인들이 시서화가 하나의 법임을 모른 채 그림 그리는 일을 화원에게만 맡겨 두고 있어
이처럼 예원이 낙후되었다고 꾸짖었다. 조선 오백년 최고의 시인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고 또 대나무 그림에서 절정의 경지에
이르렀다.그는 왼쪽에 추사 김정희(左 秋史), 오른쪽에 우봉 조희룡(右 又峰)을 거느린 당대 예원의 좌장이었다.
강화유수 재직시인 1830년 탄핵으로 사퇴하고서야 비로소 자하동으로 퇴거할 수 있었다.
이 때 자하동 곳곳을 시로 읊었고 또한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 <소악부(小樂府)>와 같은 절창을 냈다.
그러나 시절은 신위를 요구하여 1832년 4월 도승지로 임명되어 자하동을 떠나야 했고 1845년 끝내 돌아오지 못한 채
한양 땅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먼저 별세하여 자하산에 묻힌 부인의 묘소 바로 곁에 자신의 자리 보아 두었다.
죽어서야 비로소 돌아왔던 것이다. 지금 신위의 묘소는 어딘지 흔적조차 없거니와 자하산은 관악산 자락 국사봉(國士峯)으로
지금 상도동 약수터 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