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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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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추억 스크랩 [국립민속박물관] 우리민족의 생활상과 한국인의 일생편을 보다 / 2편
정 태 철 추천 0 조회 123 12.03.30 17: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국립민속박물관의 제3전시관은

한국인의 일생편으로

 조선시대(1392-1910) 양반 사대부 집안의

개인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겪게 되는 주요한 과정을 전시하고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집의 형태이다

 

까치구멍집은 지붕 용마루의 양쪽 합각에 둥근 구멍이 있는데,

공기의 유통을 위하여 낸 둥근 구멍이 까치둥지를 닮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초가집은 갈대나 볏짚 등을 이용하여 만든 집이다.

일반적으로 농경시대 이후 농사의 부산물인 볏짚을 주로 사용했으나

자연적인 풀인 새(억새·새풀)와 띠풀 등을 쓰기도 했다

주로 서민 등이 살던 자연 재료로 만든 초가이다

 

 

 

 

 

너와집은 지붕을 붉은 소나무 껍질을 모아 만든 집으로

산간지방의 서민층 집이다

아직도 산간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집으로서

나무를 잘라 널빤지를 만들어 지붕을 지은 집이다.

 

 

 

 

 

기와집은 흙을 다듬어 불에 구워 만든 기와를 사용한 집이다.

 

조선 시대 상류층의 주택은 유교의 생활 양식과 정서를 잘 보여 준다.

우선 남녀에 따라 채가 나눠지고 나이가 많고 적음, 신분이 높고 낮음에 따른 분리를 엄격하게 했으며,

조상을 모시는 사당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 때문에 '별당 아씨', '작은사랑 서방님', '행랑 아범' 등의 호칭이 생겼는데,

이는 각각별당, 작은사랑, 행랑에서 살던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그이외의 집의 종류는

막집은 나뭇가지나 낙엽, 가죽으로 임시로 만든 집. 원시시대 때 사용했다.

움집은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까지 사용. 이엉을 덮어 만든 반지하 가옥이다.

귀틀집은 통나무를 귀틀로 짜 만든 집이다

 

 

 

 

 

겨울철 함박눈이 내리면 마을 뒷산이나 깊은 산으로 사냥을 나간다.

 미리 설치해 놓은 창애[덫]에 부족한 먹이를 구하기 위해 날아든 꿩을 잡으면,

곳간에 매달아 보관하며 겨울부터 봄까지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추운 겨울은 열량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냥으로 얻은 꿩·멧돼지 등의 동물로 겨울을 버텨낼 수 있는 동물성 단백질을 공급받는다.

납평날 잡은 짐승은 조상께 바친 후 잡은 고기를 나누어 먹는다.

 

 

 

 

 

겨울철에 외출할 때는 솜두루마기와 토시, 여러 종류의 방한모자를 써서 추위를 막는다.

여인들은 가족들의 따뜻한 겨울나기를 위해 옷감 안팎 사이에 솜을 두어 누빈 누비옷이나 솜옷을 만든다.

특히, 아이의 누비옷은 ‘백 줄을 누비면 백 살을 산다’고 하여 더욱 정성을 들인다.

 

 

 

 

 

겨울에 방에 놓았던 화로는 숯불을 담는 그릇이다

 

 

 

 

 

콩으로 두부와 메주를 만들어 단백질을 보충하며,

특히 이 시기에 만드는 메주는 우리나라 음식의 기본인

된장·간장·고추장 등의 장류를 만드는 기본 재료로 이용된다.

김장은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 한꺼번에 김치를 많이 담그는 행사이며,

이때 만든 김장김치로 비타민을 섭취한다.

 대표적인 발효식품이 보관되는 장소인 장독대는 대개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만들며 항아리를 소중하게 관리했다.

한편 마른 곡식을 저장하는 곳간에는 겨우내 먹을 충분한 양식을 비축하고 이듬 해 밭에 뿌릴 종자를 보관한다.

 

 

 

 

 

동지가 되면 사람들은 동지팥죽을 쑤어

나쁜 귀신을 물리쳐 집안이 평안하기를 기원한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인 동지는,

 다음 날부터 낮이 다시 길어지기 때문에

태양이 다시 되살아나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민간에서는 동지를 ‘작은 설’이라고 해서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한 살을 더 먹는다’고 여겼다.

 

 

 

 

 

다식을 만들어 먹는 다식판이다

 

 

 

 

 

 

 

부엌의 모습

 

 

 

 

 

저장음식을 두는 곳간이다

 

 

 

 

 

겨울은 채소를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겨울동안 먹을 김치를 마을 부녀자들이 함께 모여 한꺼번에 담았는데 이를 ‘김장’이라 한다.

김치는 채소를 주재료로 하여

소금에 절여 양념을 버무린 후 일정한 시간 발효시킨 음식이다.

현재는 배추김치가 일반적이지만, 예전에는 주로 무와 동과를 이용해 김치를 담구었다.

예로부터 ‘겨울의 반양식’이라고 해서 대부분의 가정에서 필수적으로 담근 김장김치는

겨울에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을 보충해 준다.

김치를 신선하게 보관하기 위해 김장독은 땅에 묻어 보관한다.

 

 

 

 

 

김치의 종류로 보쌈김치, 오이김치, 총각김치, 동치미,

깍두기, 배추김치등이 보인다

 

 

 

 

 

장독대는 우리나라 음식의 기본 재료로 사용되는

간장ㆍ된장ㆍ고추장 등의 장류와 젓갈 등을 담은 질그릇을 두는 곳이다.

 대개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만들며, 칠성 등 가신을 모시기도 하는 신성한 공간으로 항상 정결하게 관리한다.

장류는 몇 년씩 묵혀가며 먹을 수 있는데,

항아리 표면의 작은 숨구멍을 통해 드나드는 공기로 인해 장맛을 신선하게 유지시킬 수 있다.

항아리 사이에도 공간을 두어 통풍이 잘 되게 하여 음식물이 쉽게 상하지 않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가계 계승이

사회적인 관습이기 때문에 아들을 바라는 마음은 어느 집안에서나 간절하였다.

대부분의 집안에서는 삼신할머니에게

'자손번창과 '부귀다남을 기원하며 건강한 남자 아이의 출산을 기원하였다.

출산 후에는 대문에 금줄을 쳐 아이의 출생을 알리고 부정한 출입을 막았으며,

태를 태항아리나 깨끗한 곳에 묻거나 불에 태워 아이가 잘 자라기를 기원하였다.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이 높았으므로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 후에 백일잔치를 하여 비로소 축하하고,

1년 후에는 돌잔치를 하여 아이의 장래를 점쳤다.

 

 

 

 

신방은 혼례를 마친 신랑과 신부가 첫날밤을 보내는 방으로,

꽃과 새, 나비그림 병풍에 한 쌍의 원앙을 수놓은 원앙금침을 깔고,

나비촛대에는 화촉을 밝혔다.

화조도나 화접도 병풍은 부부화합을 뜻하며,

원앙금침은 한 쌍의 원앙처럼 부부가 오래도록 함께 살기를 염원한 뜻이 담겨 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집안의 가계 계승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신부는 아들 낳기를 기원하면서 기자도끼를 차거나,

열쇠패와 수저집 등에 부귀다남 또는  자손번창子을 새겼다.

 

 

 

 

 

삼신상

삼신은 아이를 점지해주고 출산 후에는

아이와 산모의 건강을 돌봐주는 신으로 산신이라고도 한다

삼신상은 출산을 도와준 삼신에게 감사의 의미로 올리는 상으로

흔히 방안 윗목에 두었다

 

 

 

 

 

태실은 왕실이나 양반 상류층에서 아이태를 테항아리에 넣어 보관하였다

특히 왕실의 경우는 태기운이 국운과 관련된다고 하여 태실을 만들어 산에 묻고 특별히 관리하였다

 

 

 

 

돌은 아이가 태어난 지 1년이 되는 첫 생일로,

아이가 무사히 첫 생일을 맞이한 것을 기념하고 장차 잘 자라기를 바라는 뜻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돌상에는 아이의 장수를 기원하는 백설기와 실타래 이외에 ‘돌잡이’ 물건을 놓고 아이의 장래를 점쳤다.

남자 아이가 돈이나 곡식을 잡으면 부자, 책ㆍ붓을 잡으면 문관, 활ㆍ화살을 잡으면 장군이 되고,

여자 아이가 실패나 가위를 잡으면 바느질을 잘할 것으로 여겼다.

 

 

 

 

 

아이들의 옷과 신방등 장신구

 

 

 

 

 

혼례식 장면

조선시대는 남녀 구별이 엄격한 유교 사회로 중매결혼이 일반적으로 행해졌다.

중매에는 남자와 여자의 생년 월, 일, 시간을 적은 사주단자로 궁합을 맞추고,

혼사가 정해지면 혼서지와 예물을 담은 납폐함을 보내 약혼을 증명하였다.

혼인 절차는 신랑이 신부 집에 나무 기러기를 바치는 전안례 신랑과 신부가 맞절을 하는 교배례

 합환주를 나누어 마시는 합근례순으로 진행되었다.

중국의 가족 예절서인 주자가례에는 신랑이 신부를 자기 집으로 맞이하여

초례를 치르는 친영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우리는 관행적으로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초례를 치렀다

 

 

 

 

 

친영은 신랑이 신부를 친히 맞이한다는 뜻으로

신랑이 신부를 자기 집으로 맞이하여 혼례식을 치르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는 엄격한 신분 사회였지만,

법적으로는 과거시험을 통해서 신분 상승이 가능한 사회였다.

음직이라 하여 조상의 공으로 벼슬에 오르기는 했지만,

과거 시험을 통해 벼슬에 오르는 것을 가장 정상적인 출세로 여겼다.

학문을 숭상하는 유교 사회에서는 무관보다 문관을 우대하였다.

그래서 문관으로서의 출세는 개인의 사회적 성공이자, 가문의 영광이었다.

또한 유교적 소양을 지녔던 관료들은 왕에 대한 충성과 절개를 당연한 도리로 여겨

목숨을 걸고 왕에게 충언을 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는 학문을 숭상하는 유교사회였기 때문에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관리로임용되는 것은 출세길이자 가문의 영광이었다.

 

 

등용문은 큰 물고기가

물살이 세고 거친 중국의 용문에 뛰어 올라 용이 되었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과거 급제가 입신출세의 관문이었으므로 이는 곧 등용문을 뜻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사람들도 과거시험이 출세길이기 때문에 잉어를 새긴 벼루나 잉어가 뛰어오르는

그림인 약리도나 연리도를 공부방에 걸어두고 과거 급제의 꿈을 꾸기 바랐다.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들은 일상생활을 벗어나 자연 속에서 휴식하면서 풍류를 즐겼다.

깊은 산속 초당에서 홀로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시를 읊거나, 친척ㆍ친구들과 경치 좋은 곳에서 노래와 춤으로 친목을 다졌다.

또한 판소리나 거문고와 같은 악기 연주를 감상하면서 술을 마시거나,

시를 주고받으며 그림도 감상하면서 사대부로서의 소양을 길렀다.

또 바둑, 장기, 투호 등으로 여가를 즐기며, 산과 들에서 활쏘기를 하면서 심신을 단련하였다.

 

 

 

 

 

장고와 대금 그리고 단소

 

 

 

 

 

 

굿청

특별한 치료법이 없던 조선시대에 천연두와 홍역은 가장 두려움 질병이었다

 

인간이 초자연적인 힘을 빌어서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할 때 행하는 원초적인 술법이 주술이다.

주술은 세시풍속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주로 병을 예방하거나 치료를 위해 무당의 능력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는 귀신이나 재앙을 쫓고 복을 부르기 위해 부적을 쓰기도 하였다. .

 

 

 

회갑상은 부모님의 회갑을 맞이하여

자식들이 그 은혜에 감사하며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차려 드리는 상이다.

회갑상은 다른 잔치상과 달리 효성을 나타내고자 밤? 대추 등의 과일을 높이 쌓아 올리고,

‘희, ‘수 등 기원하는 글자를 장식하였다.

 

회갑상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잔치이기 때문에, 남자는 동쪽에 여자는 서쪽에 앉지만,

산 제사라고 하여 반대로 앉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회갑상 앞에는 술과 잔이 놓인 헌주상을 따로 놓고,

자손과 친척들이 연령순으로 잔을 올리고, 큰 절로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였다.

 

 

 

 

 

상여는 상례 때 시신을 묘지까지 운반하는 기구로, 규모에 따라 대여,소여라고도 한다.

상여는 원래 소나 말, 또는 사람이 끄는 수레였으나  사람이 어깨에 메는 것으로 바뀌었다.

 

 

 

수의는 상례 절차 가운데 시신을 목욕시키는 습을 하고 죽은 자에게 입히는 옷이다.

수의는 보통 생전에 입던 예복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새로 옷을 마련하는 경우도 있었다.

새로 수의를 제작할 때에는 생전의 옷보다 크게 하였고, 색깔은 염색하지 않은 소색을 쓰지만,

평상시 예복과 같이 화려한 색을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수의를 미리 만들어 놓으면 장수한다는 속설에 따라

부모님의 회갑이 가까워지면 윤달을 택하여 수의를 준비하거나,

 장수하는 노인을 모셔다가 바느질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명기는 무덤 안에 죽은 사람과 함께 넣어 매장하는 부장품을 말한다.

 

 

삼년상을 지내다

삼년상은 자식이 부모가 돌아가신 이후 3년 동안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에 대한 보은과 효도를 다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지냈다.

장사를 마친 후에도 상청 영좌에 부모의 신주를 모시고 여막에 거처하며,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올리는 등 마치 살아계신 듯이 섬겼다.

외출할 때에는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여겨 방갓을 쓰고 다녔다.

삼년상이 끝난 이후에도 자식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제사를 통해 부모에 대한 못다 한 효를 하였다.

 

 

 

 

 

제사는 돌아가신 조상을 사당에 모시고 때마다 추모하는 의례로 모시는 것을 최고의 '효로 여겼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인 제례에 따라 집안에 사당을 짓고,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 등 4대 조상의 신주를 모셨다.

이들 4대 조상은 돌아가신 날에 안채 대청에서, 설ㆍ추석 등

명절에 사당이나 묘소에서 제사를 통해 후손들과 감응하였다.

반면에 5대 이상의 조상에게는 한식이나 10월에 묘소에서 제사를 지냈다.

사당을 두지 못하는 집에서는 벽감을 만들어 조상을 모시거나,

사당을 그린 감모여재도를 만들어 지방을 붙이고 제사를 지냈다.

 

 

 

 

 

제기는 제사에 사용되는 각종 그릇 및 도구를 말한다.

 

 

 

 

 

 

감모여재도

집안에 사당이 없거나 외지에서 지방으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그림으로,

조상 제사를 마치 계신 듯이 추모하여 지낸다고 하여 ‘감모여재도라고 하며

사당이 그려져 있어서 ‘사당도라고도 한다.

감모여재도는 사당을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관하거나 휴대하기 쉽도록 족자 형태로 만들며,

지방을 붙였다가 뗄 수 있도록 사당 중앙의 위패 자리를 비워 놓았다.

위패 앞에는 촛대와 과일 등이 놓인 제사상을, 그 아래에는 항합과 향로가 놓인 향상을 그렸다.

제사상에는 석류나 포도 등의 과일을 그려서 제사를 통한 자손번창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경복궁에서 들어가는 민속박물관은 무료이다

화창한 날에 아이들과 한번 국립민속박물관을 둘러보면

어려웠던 시절의 우리민족의 생활상도 보여주고 민족의 애환도 알려줄겸

아이들에게 큰 공부가 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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