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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예제문제
Examination Paper – The Old Testament
1. 이스라엘의 7절기를 열거하고 각각의 신학적 의미를 논하라 (레위기 23장을 근거로). 이 7절기가 본인들이 목회하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견을 기술하시오.
1) 유월절 (The Feast of Passover). 히브리어는 ‘페사’인데, “지나다”, “용서하다”, “통과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 때 애굽에 임한 10가지 재앙 중에서 마지막 장자를 죽이는 재앙에서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신학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인간의 구원을 상징하는 것이다. 목회적으로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받는 죄의 권세로부터의 구원을 가르치는데 사용될 수 있다.2) 무교절 (The Feast of Unleavend). 무교절은 애굽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특별한 구원에 부수된 절기이다. 이 규례는 유월절 제정시 함께 지시되었다(출 12:15~20, 레 23, 민 28, 신 16). 그 시기는 유월절 다음 날인 니산월 15일부터 7일간이었다. 신학적인 의미는, 예수의 살과 피가 우리의 구원의 양식임과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의 양식임을 상징한다. 목회적으로는 성찬의 영적 의미와 말씀의 중요성을 가르치는데 사용될 수 있다. 3) 오순절 (The Feast of Weeks). 오순절이란 명칭은 유월절 후 50일째 행해지는 절기라는 의미이다. 칠칠절이라고도 하는데, 무교절로부터 49일째를 계산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또한 늦봄의 밀 추수시기에 단 하루 지켰던 절기였기 때문에 맥추절이라고도 한다. 오순절은 출애굽 후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에 감사하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신앙고백의 의미를 가진다. 신학적 의미는 바로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되었다. 그러므로 목회적으로 성도들이 받을 성령과 성령 안에서의 삶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4) 나팔절 (Seventh New Moon). 나팔절은 유대인에게 새해의 첫날을 기념하는 원단절(元旦節)이라 할 수 있다. 이 날 나팔을 불어 기념한데서 유래한다. 그 시기는 유대력으로 7번째 달인 티쉬리월 1일이며, 이 날을 안식일로 삼아 신년성회로 모여 일 년 중 첫날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일 년을 하나님께 예배로 시작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학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을 상징한다. 주님은 나팔과 함께 공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이날은 목회적으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신생의 의미를 가지므로, 새로운 삶과 헌신을 가르치는데 사용될 수 있다.5) 속죄일 (Day of atonment - 욤 키푸르). 티쉬리월 10일을 속죄일로 정해 성회로 모여 큰 안식일로 지킨다(레 16:31). 전 국민적인 대속죄일로서, 일 년에 한 번씩 전 국민의 죄를 속하는 절기이다. 이는 신학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상징하고, 또한 성도가 자신의 삶에서 범한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반성하는 것을 상징하므로, 목회 적으로도 주님의 대속의 은혜와 성도의 거룩한 삶을 가르치는데 사용될 수 있다.6) 장막절 (The Feast of Tabernacles). 장막절은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출애굽 후에, 광야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초막이나 장막에 거하며 살던 40년 광야 생활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수장절, 또는 초막절이라고도 한다. 농경적 입장에서 보면, 실과의 추수기에 지키는 과실제이며, 유대인의 신앙적 역사 회고에서 보면,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계약 갱신, 즉 구원의 역사 기념일로 볼 수 있다. 시기는 키쉬리월 15~22일이다. 신학적 의미는, 대체로 성도들의 지상에서의 교회 생활과 나아가 영원한 천년왕국을 상징한다. 목회 적으로는 이 세상이 우리의 고향이 아니라 영원한 본향이 있으며, 우리는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나그네임을 상기시키고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게 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7) 초실절. 정월 16일에 지켰다(레 23:10). 추수한 곡식의 처음 이삭을 하나님께 가져가서 요제로 흔들어 바쳤다. 이는 신학적 의미로는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3일 만에 부활한 사건을 상징한다. 그리스도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어 사망을 영원히 철폐하셨음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회 적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 신앙을 가르치는데 이 절기를 사용할 수 있다.
2. 여호수아에 나오는 가나안 인들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21세기의 기준으로 보면 인종 학살 (Genocide)에 해당하는 잔인한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없도록 교인들에게 설명할 것인지를 설득력 있게 기술하시오.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붙이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고 진멸하고 그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신 7:16).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으로 진입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그 땅에 거주하는 이방민족에 관해 지시한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가나안 7족과 일체 외교도 타협도 하지 말고 그들을 갓난아기와 짐승새끼까지 전부 진멸(annihilation)해서 지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릴 것을 명령하고 있다. 왜 그런가?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2) 속사도시대의 마르시온은 이 부분을 가지고 구약신과 신약신은 다른 신이라고 교회에서 가르치다가 이단으로 정죄되었는데, 그 이유는 마르시온이 보기에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범죄자를 멸하는 진노와 정죄의 신이라는 것이었다. 요즘 TV강의로 인기를 끄는 철학자 도올 김용옥도 이 같은 점을 들어 구약의 여호와를 “사막의 깡패 하나님”이라고 자기 저서에서 비방함으로써 기독교계의 물의를 빚기도 했다.
3) 분명히 본문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한다면 그같이 볼 수 있는 견지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좁은 당시 정황이 아닌 구속사적인 컨텍스트와 영적 비유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구속사적으로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 금송아지를 만든 죄로 3천명이 죽임 당했고, 40년을 광야에서 살면서 불순종과 범죄로 “한 세대가 완전히 진멸된 후에야” 다음 세대에 와서 가나안에 들어갈 기회가 주어졌다. 가나안 입성은 구속사적으로 본다면 성도가 세상에서 광야 생활을 마치고 죽어 천국에 올라가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천국에 들어가는 우리가 호리만큼의 죄라도 허용한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천국은 완전한 거룩함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신 18:13)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우리 안의 일체의 죄를 제거해야 한다. 철저히 죄를 멸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결하고 흠없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바로 이 같은 영적 교훈을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즉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가르치고, 죄와 추호라도 타협하지 말고 죄를 멸할 것을 본문은 가르치는 것이다.
4) 고고학에 의해 밝혀진 당시 가나안의 영적, 도덕적 수준은 최악이었음을 보게 된다. 가나안인들은 다신교를 믿었는데, 아나트와 바알이 주신(主神)이었다. 바알은 남신, 아나트는 여신으로 오누이 사이인데, 오라비 바알이 아나트를 강간하자 아나트는 피를 흘리면서 기뻐 날뛴다는 것이 가나안 종교의 신화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알과 아나트를 본받아 제사지낼 때 산 사람을 죽여 바쳤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벌거벗고 신전에서 혼음을 재현하며 날뛰었다. 이 같은 극한에 이른 도덕적 타락상이 당시 가나안 종교의 도덕적 현실이었다. 그래서 처녀는 결혼 전에 성문에서 일주일 동안 창녀 짓을 해서 받은 화대(花代)를 바알 신전에 드려야 했고, 유부녀들은 일생에 한번 이상 바알신전의 창녀로 봉사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국가 체제가 처녀의 순결과 결혼의 정조를 조직적으로 말살하는 악마적인 체제였다... 나아가, 고고학에서는 몰록의 제물로 바쳐진 어린아이들의 유골 항아리가 발견되었다고 보고하는데, 이는 인신(人身)을 악마에게 공양으로 바치는 무서운 살인 풍습이 종교적 제의의 탈을 쓰고 실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당시 가나안의 영적 도덕적 상태는 최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5)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창 15:16)고 하셨다. 이는 곧 가나안 족속의 죄가 관영(reached its full measure)하면 그때에야 그들을 진멸하고 이 땅을 주시겠다는 말씀이었다. 그같이 되는데 걸린 시간이 430년이었다. 이를 볼 때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의 죄의 단계에 이르면 하나님은 그들을 더 이상 붙들지 않고 멸하신다고 이해할 수 있다. 즉 영적인 회귀불능선이란 게 있는 것이다. 창 6:5를 봐도,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했다. 즉 세상 사람들의 죄가 관영하자, 하나님은 홍수로 온 세상 인류를 진멸하셨다. 또한, 소돔과 고모라가 도덕적으로 완전히 타락하자 하나님은 하루에 불과 유황으로 그 도시들을 진멸해 버리셨다(창 18-19장). 이처럼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단계의 죄악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당시 가나안 7족이 그와 같은 단계에 이르렀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다윗도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어 버리울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사르이리로다”(삼하 23:6-7)라고 말한 바 있다.
6) 나아가서, 오늘날도 성도덕의 타락으로 에이즈나 매독 같은 무서운 질병이 만연하는 것처럼, 당시 가나안 거민들도 무수한 음란으로 인해 당시 의학 수준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 수많은 질병(특히 성병)으로 감염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럴 때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서 그들과 친교하고 결혼한다면 같은 질병에 걸려 고통당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들과의 타협도 접촉도 일체 금지하신 것이다(딘 셔먼의 견해).
7) 당시 가나안 땅은 외면적으로는 풍요의 땅이요 낙원처럼 보였으나, 사탄적인 가나안 종교가 번성하고 있었고, 그 도덕은 철저히 혼음적(混淫的)이고 타락된 것이었다. 그들을 말로 타이른다고 고쳐지는 것도 아니고, 그들을 개종시킨다고 그들이 변하여 새로워지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선민이 그들과의 접촉을 통해 더러워지고 여호와 신앙에서 떠날 수밖에 없게 될 것이 너무나 분명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처음부터 전부 제거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구약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을 처음에 완전히 제거하지 않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인 올무에 걸려 마침내 하나님 신앙을 떠나 타락의 길로 가고 말았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는 사실상 이 같은 타락의 슬픈 역사였다. 그래서 나라가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갈리어 마침내 멸망함으로 끝나고 마는데, 이는 바로 이 같은 가나안 종교의 영적, 도덕적 유혹을 완전히 단절하지 않았던 처음 과오의 누적된 결과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고, 추호라도 죄와 타협하지 않도록 깨어서 경성해야 할 것이다.
3. 다윗의 언약 (Davidic covenant)의 내용을 쓰고 구약에서 이 언약이 차지하는 신학적 중요성을 논하라. 그리고 그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어떤 연결이 있는지도 기술하시오.
삼하7:1-16에는 하나님이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내리신 언약이 나온다. 언약은 장차 인류의 구속자로 오실 예수의 메시아 왕국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언약이라는 점에서 구속사적으로 매우 큰 의의를 갖는다.
1) 다윗 언약의 내용
① 다윗을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는다(삼하7:8-11). 또 주권자로서 그의 이름을 존귀하게 만들어 주며, 사방의 모든 대적에게 벗어나 평안케 해주겠다.
② 다윗의 후손을 통하여 그 나라를 영원히 견고케 해주겠다(삼하7:11-12).
③ 다윗의 후손을 통해 여호와 이름을 위해 집(=성전)을 건축할 것이다.
④ 다윗의 후손은 여호와의 아들이 되고 여호와는 그의 아버지가 된다(삼하7:14).
⑤ 그 후손이 범죄시 징계는 하되 그 위(位)는 결단코 빼앗지 않는다(삼하7:14-16).
2) 다윗 언약본문의 3가지 요소
① 집(베트)
다윗 언약 속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이 용어는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다윗의 육적 인 가문(11절), 둘째, 다윗의 왕국(12-13), 셋째,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킨다. 성전은 좁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넓게는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성도들 즉, 교회를 가리킨다.
② 후손(자라)
이 용어도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즉 집합적인 의미로서의 후손과 한 집단을 대표하는 자로서의 후손, 또는 씨를 뜻한다. 여기서 “씨”는 직접적으로 솔로몬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나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는 13절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장차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 예수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③ 나라(말쿠트)
이는 영토, 국민, 주권의 3요소를 갖춘 국가를 의미하기도 하나, 단순히 왕의 통치권을 의미하기 도 한다. 또한 이 나라는 일차적으로는 다윗 왕국을,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 만민 중에 구원받은 성도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를 가리킨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 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3) 다윗 언약이 갖는 신학적 의미
다윗 언약은 한 마디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사 인류의 구속주가 되심으로써 택한 백성의 영원한 왕이 되실 메시아 예수의 혈통과 왕권,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 건설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는 예언적 언약이다. 이는 그 자신이 성전의 실체(마12:6)였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이 어떻게 교회를 통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되며,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또 역사적으로 볼 때, 다윗 언약은 먼저 유다 지파 출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야곱의 예언(창49:10)의 성취이며, 궁극적으로는 우리 주님에 대한 예언이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성취된 세대에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 다윗의 언약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사역이 당신의 말씀 그대로 확실히 진행됨을 보여 주는 증거인 것이다.
4. 말라기는 어떤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를 기술하시오.
1) 개론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말 1:1). 말라기는 구약 선지자들 중에 가장 마지막에 예언한 선지자였다. 말라기의 개인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말라기”란 말이 “나의 사자”라는 뜻이며, 고유명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자유주의 비평가들은 이 책이 원래 익명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에서 “사자”라는 말은 “천사”라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어떤 교부들은 말라기를 성육신한 천사로 보기도 했다. 이 책은 특히 제사장에 대해서 두드러지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말라기가 제사장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하간 하박국과 오바댜처럼 말라기도 그 혈통과 출생지에 대해서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구약에서 익명으로 전해진 선지서는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말라기가 바로 이 책을 기록한 사람의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2) 말라기의 배경
① 그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페르시아 총독이 팔레스틴을 다스리던 시기에 활동했다. 당시에는 이 미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통해 성전이 재건되었으며, 제사장들을 통해 모세의 희생제사가 정기적으로 드려지고 있었다(말 1:7, 10; 3:1).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 으로 침체해 있었고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멀었다.
② 말라기는 학개와 스가랴보다 약 1세기 정도 후에 활동했다. 본문에 총독이란 말(페하)이 나오지 만(말 1:8), 그게 총독 느헤미야를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느헤미야는 구약 원어로 ‘티르샤타’ 라고 되어 있다). 느헤미야의 통치가 B. C. 445-433이었는데, 아마 말라기는 그의 이전 총독 시 대에 나타나 백성들에게 예언하고 경고했다고 보인다. 따라서 그의 예언은 대략 주전 5세기 후반 에 주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3) 말라기의 주제
① 학개와 스가랴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격려하고 인도했던 것처럼, 말라기도 포로로부터 귀환 한 유대 백성들을 신앙적으로 격려하고 인도했다. 말라기의 메시지는 대부분 백성들의 죄에 대한 책망이었다. 그가 책망한 죄는 제사장들의 게으름(말 1:6), 십일조를 외면함으로 레위인들이 굶주 린 것(말 3:7-12), 종교가 다른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이 증가한 것(말 2:16) 등인데 동일한 내용 이 느헤미야에도 나온다. 이를 볼 때 말라기가 이 같은 일을 미리 경고했다고 추정된다.
② 본서에는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돌아온 남은 자들의 영적 생활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들 은 자기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해 무감각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뜻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으며, 희생 제사를 멸시하기 까지 했다. 그들은 영적 인식이 부족해서 자기들의 행위가 지적을 받을 때에도, 자기들이 왜 책망 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을 책망하는 선지자들에게 다시 그 말의 의미를 묻고 있다(말 1:7; 3:7).
③ 말라기는 백성 중에 있는 신실한 남은 자들의 위치와 전망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메시야 의 사자의 도래를 예고한다(말 4:5-5). 이 책은 연속되는 일련의 설교이다. 말라기는 직설적이며 신랄한 산문 문체를 취하고 있다. 본서의 서문은 후기 유대교에 널리 알려진 변증법적 형태의 가 르침이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일어난 8회에 걸린 논쟁이 나타나고 있다(말 1:2, 6, 7, 2:14, 17, 3:7, 8, 13). 결국은 극렬한 심판의 날이 올 것이므로 다들 영적으로 깨어서 대비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말 4:1-3).
5. 진실된 선지자와 거짓선지자는 어떻게 구분하는지를 구약성경을 근거로 기술하시오.
참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구별 방법으로 예언 분별의 프리즘(신18:2-22)이 있다. 신명기 18장은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데 있어 혼란을 잘 보여주는 곳으로, 왕의 규례, 제사장의 규례, 선지자의 규례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선지자의 규례는 가나안 땅에서 부딪칠 여러 영적인 혼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한 주님의 말씀 대신에 가나안 토착 점쟁이들과 그 점술과 주술에 빠질 것을 경고한다. 선지자직의 기초를 다루는 신명기 18장에 대해 레이몬드 딜라드는 계시의 수단, 메시지, 메신저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고 있다. 김정우 교수는 계시 방법(영성), 계시 전달자의 인격(윤리), 계시 내용(신학)이란 프리즘을 사용한다.
1) 계시의 방법(영성): 가나안 토착 종교와 영매에 대한 성경의 표현은 ‘가증한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은 곧 진멸당할 것이다. 가나안 종교를 비롯한 이방 종교는 그 영성을 기본적으로 점술과 마술과 강령술에 두고 있다. 이 세 가지 형태의 술법이 9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이들을 소개한 후 모세는 신학적인 정리를 해준다(12-14절).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 내시느니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이 장차 포로로 잡혀간다면 바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데 있어서 이교적인 방법을 택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가나안 사람들을 그들의 땅에서 내어 쫓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은 ‘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라’는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 이 온전함은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차원을 다 포함하고 있다. 그들의 삶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높은 윤리적 수준을 추구하며 살도록 부름 받은 삶이다.
2) 계시 전달자의 인격(윤리): 하나님은 점쟁이, 마법사, 신들린 자 대신 자신을 대신해 선지자를 세워 말씀을 주신다고 하였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 지니라’(15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참된 자신의 말씀과 그들의 올바른 영성지도를 위하여 선지자를 주시되 한 번이 아닌 지속적으로 세우신다. 우리에게 선지자가 필요한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와 주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는 일차적으로는 ‘선지자 제도’이나 궁극적으로는 ‘모세와 같으면서도 모세보다 큰 이’를 기다리고 있다.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그 입에 두리니 너희는 그를 들으라(18절)고 하신다. 이 약속은 궁극적으로 모세보다 더 큰 선지자를 바라보고 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이는 참으로 오실 그 선지자라’(요 6:14)고 고백했다.
3) 계시 전달자의 내용(신학): 거짓 선지자들은 방자히 말할 것이다. 자기의 마음에 지어낸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다. 그 근거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속이는 자일수도 있고, 혹은 스스로 속은 자였을 수도 있다. 또한 거짓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 예언이다. 비록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말했다 하더라도 후에 증험이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주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다(22절). 만약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가 비록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다른 신에게로 유인하면 그는 거짓 예언자요, 그의 예언은 거짓이다. 참예언자와 거짓 예언자의 차이는 이스라엘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과 헌신에 달려 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와 유혹이 우리에게 허락된 것과 거짓 선지자의 예언도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6. 예레미야의 시대적 배경을 논하시오.
1) 예레미야의 시대적 배경은 유다왕 요시야 13년(B.C 626)부터 유다가 멸망하는 B.C 586년까지 40년간에 걸쳐 강대국에 의해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를 배경으로 한다. 유다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후에 앗수르의 속국으로서 조공을 바치면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에브라임 전쟁 때에 반(反) 앗수르 동맹에 가담하라는 아람과 북 이스라엘의 요청이 있었지만 아하스 왕이 그 요청을 거절하고 친(親) 앗수르 정책을 썼기 때문에 유다가 멸망하지 않고 존속했던 것이다(사7-8장). 그 후 앗수르의 위협이 계속되었으나 B.C 612년 앗수르가 신흥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자, 이제는 바벨론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당시 유다 왕들은 바벨론에 굴복하는 대신 반기를 드는 것을 상책으로 오판하여 결국 여호아하스-여호야김-여호야긴-시드기야 왕 때에 이르러 바벨론의 침공으로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애굽 왕 바로느고가 요시야(B.C 609)의 후계자 여호아하스를 3개월 후에 폐위하고 바로에 동조하는 여호야김(B.C 608)을 세웠으나, 10년 후 바벨론이 애굽에 승리하자 친 애굽파인 여호야김은 폐위되고 그 아들 여호야긴(B.C 598)이 뒤를 이었는데, 느부갓네살은 다시 그를 폐위하고 시드기야를 왕(B.C 597)으로 삼았으나 시드기야가 애굽을 믿고 바벨론에 반기를 들자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침공하여 마침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것이다.
2) 이러한 국가 멸망으로 치닫는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나타난 선지자가 베냐민 지파 출신의 제사장 예레미야로서, 그는 요시야 왕 13년부터 40년간 애굽으로 피난가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유다 왕들과 백성들에게 눈물로 회개를 전파하며 선지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시야 시대에는 아무런 박해도 당하지 않았고, 왕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요시야가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하자 애가를 지어서 불렀다(대하 35:25). 그러나 그 이후부터 왕실의 심한 박해로 고통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죄를 범하는 왕과 백성들을 직설적으로 책망하고 회개치 않을 시에 유다가 멸망할 것을 가감 없이 예고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그의 메시지는 당시 우상숭배를 회개치 않고 국수주의적 풍조가 지배했던 유대왕국에서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으며, 그 결과 그는 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동족에 의해 비방과 심한 박해를 당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소수의 장로들과 왕자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면서 예루살렘 도성의 멸망 때까지 살아남게 되었다.
3) 예언의 초점
예레미야의 예언의 초점은 유다의 멸망은 국제 역학에 의한 것이거나 우연이 아니라,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한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인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지배에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연히 당시 민족주의적인 국민 정서를 역행하는 심히 매국적인(?) 예언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외세에 의존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회피하고 대항하려는 행위는 영적인 배교 행위임을 가르쳤다. 그 결과 동족에게 돌로 맞고 왕에 의해 수배당하기도 하고 지하 우물에 감금되기도 했다. 이를 볼 때 선지자는 세상 사람들의 인기나 판단에 영합하지 말고 진정 하나님의 올바른 메시지를 목숨을 아끼지 말고 선포해야 함을 알 수 있다.
7. ‘남은 자들’의 신학에 대해 논하시오.
1) 남은 자(the ramnants)는 구약의 핵심 사상의 하나이다. 그리고 신약에서 사도바울에 의해 사용됨으로써 중요한 구원론적인 신학적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다. “남은 자”란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전개되어 나갈 때 인간의 불순종과 범죄로 인해 구원이 단절될 위기의 때에 하나님은 그 시대마다 모든 심판으로부터 보호하여 남겨두신 소수의 의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가 말한 그루터기 또는 거룩한 씨(사 6:13)가 바로 이들을 가리키는데, 이 소수의 의인들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역사를 계속 진행시키시며, 마침내 완성하신다. 그러므로 남은 자 사상은 기독교사관 및 종말론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2) 구약의 남은 자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 6:13)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사 10:20-22)
구약에는 이 같은 개념이 540회나 사용되었다. 창 6-9장의 홍수 기사는 온 인류의 멸망 때 오직 노아의 가족 8인만이 살아서 후대에 인종을 보전했음을 보여준다. 열왕기에도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당신 백성 7천 명을 남겨두었다고 하셨다(왕상 19:18). 선지서에는 당시 이스라엘-유다의 멸망의 정황과 연관되어 남은 자 사상이 예언으로 선포되었지만, 이는 포로들의 귀환 예언에만 머무르지 않고, 마지막 종말의 때에 메시야의 나라가 지상에 임할 때 흩어진 “남은 자”들이 다시 모여 메시야의 나라를 이룬다는 종말론적 예언으로 변화, 발전하고 있다. 이들 남은 자들은 여호와를 참으로 경외하는 자들이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 역사를 완성시키신다는 것이다.
3) 신약의 남은 자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롬 9:27)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4-5)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 12:17)
이 같은 남은 자들은 신약에서도 구원론의 핵심 개념으로 사용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은혜로 택정된 남은 자들에 관해 말하는데, 동족 이스라엘 인들이 예수와 복음을 거부하고 교회를 핍박하는데 대해,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선택받아 구원의 자리로 이끌려나온 소수의 무리를 준비해두셨음을 말하고 있다. 즉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에 이르는 게 아니라 택함 받은 소수만이 구원에 이른다. 예수님도 이에 관해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마 22:14)고 말씀하셨다. 이 같은 사상은 요한계시록의 14만4천 명 사상으로 연결된다. 마지막 때에 온 세상은 적그리스도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남은 자”들이 있어 지상에서 교회의 명맥을 이어가며, 마침내 그들을 통해 사단이 쫓겨나고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 소수의 남은 자들을 통해 구원역사가 완성된다. 이들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되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들은 거룩한 씨인 예수 그리스도에 접붙임 받아 참 이스라엘이 되어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리는 복락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네 백성이 바다 모래보다 많게 되리라”(창 22:17)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성취하신다. 결론적으로 남은 자 사상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불가항력적 은혜에 의한 구원의 확실성, 승리의 확실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8. 지혜문학에서 ‘지혜’를 어떻게 정의할 것이며 지혜문학을 자신의 목회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논하시오.
1) 구약성경의 지혜문학
구약성경의 지혜문학은 본래 일상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실천적인 생활의 지혜를 주로 다루다가 신앙 안에서 하나님이 지혜의 참된 원천이심을 깨닫고, 그의 은혜로 참된 지혜를 얻어 성도로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이스라엘을 교훈하는 성문학(聖文學)으로 정의할 수 있다. 구약에서 지혜문학으로는 잠언, 욥기, 집회서, 전도서, 지혜서가 있다. 이들 지혜문학 작품은 구약의 다른 책들과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내용면에서 이스라엘이 역사적인 사건들을 통해 체험했던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에 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지혜문학의 일차적 관심의 대상은 인간의 실제적 삶이었다. 지혜문학은 인간이 자신의 구체적인 생활 가운데 추구해야 할 올바른 삶의 지혜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발견하고, 교훈적 가르침의 형태로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데 일차적인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2) 지혜문학에서의 ‘지혜’
구약에서 히브리어 ‘호크마’로 표기되는 ‘지혜’는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일반적인 의미의 지혜는 인생의 방향을 잡는 삶의 기술이며,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가르치는 지식을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슬기롭게 살아 갈 수 있게 하는 총체적 능력 또는 영적 지성(spiritual intellect)이라 정의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지혜란 일상의 삶 안에서 겪는 경험에 뿌리를 둔 사고의 축적으로서 시공간을 초월해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며, 특정한 문학양식을 통해 표현되어진 전통적인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잠 2:6은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라고 하는데, 이처럼 참된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임을 지혜문학은 명시하고 있다. 또한 이 지혜는 의인적인 표현으로 자신이 태초부터 존재했고 천지창조의 일을 했다고 표현하는데(잠 8:12-31), 이러한 의미에서 지혜는 구약에서 제2위 하나님을 예표 하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구원론적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지혜문학의 목회 적 적용
지혜문학은 경구와 노래와 교훈의 형식을 통해 참된 지혜를 가르치고 있다. 이는 교인들에게 구원에 이르는 삶의 요령과 방식을 가르치는데 적합하다. 지혜문학의 본문은 성도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교재로서 사용될 수 있다. 잠언을 날마다 한 절씩 설교하고 삶에 적용하도록 할 수 있다. 지혜문학에는 매우 실제적인 다양한 현장의 이야기가 나오므로, 성도들의 실제 삶의 각 분야 즉 가정생활, 직업, 대인관계, 경제 문제, 정치 사회 활동 등의 분야에서 아주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 요컨대 지혜문학은 날마다 조금씩 읽고 조금씩 실천하기 위한 교훈을 제시하도록 목회에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혜를 통해 그 지혜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텍스트로 목회에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9. 전도서 (Ecclesiastes)를 이해하기 위해 어떤 견해들이 있는지를 쓰라. 그 중 본인은 어디에 동의하는지 기술하시오.
1) 전도서의 난해성
전도서는 구약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정경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욥기, 잠언과 함께 지혜문학으로 분류되어 왔다. 그렇다고 전도서에 대한 논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혜문학에서 특히 전도서는 난해한 책으로 간주된다. 전도서는 일차적으로 인생의 근본적인 모순에 대해 일관되게 해설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게 진정 잘사는 게 아님을 말하고 있다. 삶의 ‘모순’에 대해 서술할 뿐만 아니라, 서술방식 자체도 모순적이다. 그러므로 해석에 어려움이 많다. 그리고 내용 전개는 서술보다는 관찰 형식으로 되어 있다. 자신이 어떤 명제를 서술하고 설명하는 게 아니라 제3자 위치에서 관찰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내가 보니”가 40회 이상, “내가 깨달았다”가 9회 등장하고 있다. 이는 이해에 적잖은 어려움을 준다.
2) 전도서의 저작자 문제
우선 저작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다.
① 전도서 본문은 저자를 전도자(코헬렛)로 표기하는데, 이것은 한 개인이 아니라 원어상 “지혜 자 체”를 가리키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지혜 자체의 교훈”이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② 전도자라는 말은 원어상 “모이게 하는 자”(assembler), 또는 설교자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전 도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백성을 집회에 모으는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③ 그러나 전통적으로는 저작자를 솔로몬으로 이해한다. 전 1:1을 보면,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이 구절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솔로몬뿐이다. 유대 전승도 솔로몬 저작 설을 지지하고 있다.
④ 그러나 성서학자들 중에는 전도서의 히브리어 원문이 솔로몬보다 훨씬 후대에 속한다는 언어학 적 근거로 후기 저작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⑤ 탈무드는 히스기야 왕과 그의 신하들을 저작자로 보고 있다. 그리고 노년의 솔로몬은 영적으로 많은 범죄와 과오가 있었음을 고려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본인의 생 각으로는 전도서는 노년의 솔로몬이 저술했을 것으로 본다. 전 1-2장을 보면 그는 왕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온갖 사업과 일들을 했음을 고백한다. 온갖 사업과 부귀 향락을 누렸고, 남보다 탁월 한 지혜와 명예를 가졌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같은 조건을 충족시킬 자는 솔로몬밖에 없다고 보 인다.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본 후에 인생의 허무 앞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이 책을 통해 가르치는 것이다.
3) 전도서의 교훈 문제
전도서는 우리의 삶은 허무하지만, 이것이 결국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아는 게 참된 행복의 비결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이 세상 삶은 허무와 모순으로 가득 차있고, 빠른 경주자라 하여 선착하는 것도 아니고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도 아닌데도, 인간은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전 9:3) 악하게 산다. 그래서 본질상 허무의 굴레를 벗지 못한다. 이는 유한한 육체에 무한한 영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상에서 유한하게 지음 받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혼의 무한성으로 인해 존재론적 허무에 빠질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이 존재론적 허무를 벗어나는 것이 참된 지혜인데, 이는 자기 영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귀의함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전 12:1).
이를 볼 때 전도서는 본질상 “우리 영혼의 고향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교훈의 책이다. 이 세상의 삶은 유한하고 추악하고 허무하지만,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경외한다면 그것이 인간의 진정한 본분이다. 이는 인간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형상만큼의 공백이 있어서 그 공백을 하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허무를 벗어날 수 없다고 했던 파스칼의 말과 일치한다. 전도서는 현대인을 위한 많은 귀한 지혜를 준다. 거기엔 인간의 피상적인 지식을 넘어서는 깊이와 신비가 있다. 그 신비 앞에서 우리가 취할 올바른 태도는 겸손일 것이다.
10. 목회를 하는데 구약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기술하시오. 예를 들면 본인은 구약에서 얼마만큼 설교를 할 것이며 구약과 21세기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피력하시오.
구약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을 기반으로 하되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보편적 진리, 하나님의 창조섭리,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구원사적 계시가 녹아 있는 부분이기에 관과 할 수 없다.
구약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본분을 성도들에게 가감 없이 전달해야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목회자들은 자신이 연구하고 또 지난 세대의 위대한 학자들이 밝혀 놓은 성경의 진리들과 원칙들을 단순히 현대의 교회 시스템에서는 말하기 부담스러워 덮어 버리는 경향이 많이 있다.
특히 오늘날 많은 문제가 되고 있는 교회의 부패와 부정들은 상당부분 성경의 말씀에 역행하거나 왜곡하고 있는데서 벌어지고 있는데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들의 안위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침묵하는 것은 신앙인의 믿음을 외면하는 심각한 불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자신이 배우고 연구하여 깨달은 성경의 진리와 내용들을 온전히 성도들에게 전하고 일깨우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구약의 핵심적 내용들이 바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그리고 하나님의 진실함과 신실함에 근거한 긍휼과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느끼는 감정은 마치 사람들이 방치해 놓은 잡동사니 더미에서 보물을 찾은 느낌과도 같을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선민 이스라엘의 관계가 우리가 도식적으로 혹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확인해 볼 때, 오늘날 현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빠뜨리고 살고 있는 가를 새삼 느끼게 될 것이다.
구약의 학문적 주제들은 사실 상당부분 오늘날의 교회와 교인들의 신앙적 현실과 맞닿아 있다. 그 이유는 사람 사는 세상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근본은 별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역설된 핵심적 주제들이 케케묵은 곰팡내 나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삶 가운데 그대로 적용되는 이유는 인간에게 필요한 진리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구약성경이 결코 퇴색되지 않는 이유이다. 구약은 신약의 존재하기 위한 근거와 기반이 된다. 그래서 구약의 주제들을 깊이 생각해보고 이와 관련된 내용들을 다른 책을 통해 더 깊이 연구하고자 한다. 성경의 본문의 내용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분석하고 이해하고자 한다. 구약성경에 대한 연구를 전혀 살펴보지 않고 자신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학자적 소견과 무지에서 오는 억측을 구별하는 지혜가 있기 위해서 겸손히 연구하고자 한다.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다를 수가 없다. 애굽의 권능과 가나안 족속들의 힘, 바벨론 제국의 위용 등 모든 위대한 제국들의 힘은 영구한 것이 아니며 얼마 되지 않아서 사라지고 만다.
하나님과 그의 선민 이스라엘의 관계가 최고의 특권을 지니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최고가 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하며 자기 과시욕에 도취되어 물질만능과 화려함과 향락과 쾌락에 빠져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며 무엇으로도 만족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구약의 사건들을 통하여 본성을 깨우는 설교를 하고자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실 때 기쁨과 만족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