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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미국의 지도자들 사이에는 태평양 섬들의 발전을 위하여 두가지 논쟁이 대립되고 있었다.
미국의 군대는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후 괌과 푸에토리코를 합병했던 것과 같이 태평양 섬들을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그 섬들을 점령하기 위해 수 많은 미국인이 희생을치렀기 때문에 소유권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 방법만이 태평양의 평화를 지킨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의 마음은 군대 지도자들을 압도하였고 트루먼 대통령은 루즈벨트대통령이 원했던 바와 같이 이 섬들을 국제연합의 신탁통치하에 두고 시민의 정부에 의하여 통치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1947년 7월18일 트루먼 대통령은 신탁통치안에 사인을 하였으며 태평양 섬들의 신탁통치(Trust Territory of the Pacific Islands, TTPI) 최고위원으로 태평양 함대의 지휘관인 Louis E. Denfold 제독을 임명하였다.
그는 그의 부관으로 Carton H. Wright 해군소장을 임명하고 괌에 사무실을 차리게 하였으며 북마리아나의 거버너로 Donald H, Smith 대령을 임명하였으며 사이판에 사무실을 차리게 하였고 사이판 지역의 행정관으로 R. A. Wilhelm 사령관을 임명한 바 이 체제는 1948년 4월17일 Dewitt C. Ramsey 제독이 최고위원으로 임명된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1949년 5월1일 최고 위원으로 임명된 Arther W. Radford 제독은 TTPI는 진주만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괌에 있는 부관에게 더 이상 대리권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국제연합에서 파견된 Francis B. Sayre 대사는 TTPI의 본부는 마이크로네시아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첫 번째로 마이크로네시아의 중심에 있으나 시설이 없는 Chuuk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두 번째로 시설이 있는 사이판으로 할 것인가? 선택을 해야 할 상황이었으나 실제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후에 Chuuk 에 임시연락 사무소를 두고 괌에도 연락 사무소를 두어 혼란만 야기 된다,
미국이 태평양 섬들을 위한 행정권이 있었기 때문에 국제연합의 신탁통치 위원회에 년례보고서를 제출할 의무가 있었으며 국제연합은 신탁통치를 감시하는 기구를 만들어 1950년 4월15일 TTPI를 방문하여 신탁통치 지역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발전 과정을 확인했다.
그리고 위원회가 로타를 방문하였을 때 로타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부를 구성하기를 원하였고, 사이판을 방문하였을 때 사이판 사람들은 미국에 편입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이 두가지 사안은 현실적이든 아니든 섬들의 개별적인 단위가 아닌 마이크로네시아를 한단위로 묶어 정치적 발전을 꾀하려는 국제연합의 기본적인 취지에 어긋나는 사안이였다.
한편 사이판 북쪽의 아나타한섬에는 1951년 6월까지 항복하지 않고 남아 있는 일본군 병력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1944년 6월12일 Chuuk 섬으로 가던 일본 어선의 호위선에 있던 사람들로 미군의 어뢰공격을 받고 총 31명이 살아 남았는데 그들은 해군수병 8명, 육군병사 2명와 21명의 징용된 시민들로 해안으로 헤엄쳐 와서 겨우 살아 남았다.
이 때 아나타한 섬에는 43명의 캘롤리니안사랍들과 Kikuichiro Higa 라는 오키나와인 남자1명과 Kazuko Higa 라는 여자 1명이 있었다.
1945년 2월 불시착한 B-29의 생존자들을 찿기 위해 상륙했던 미군들은 찿지를 못하고 켈롤리니안 사람들만 데리고 오며 그 곳에 일본인들이 있다는 사실은 알게 된 미군들은 1945년 9월 이후 여러 번 섬을 방문하여 전쟁이 끝났음을 알리고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일본인들은 미군이 거짓 흉계를 꾸민다고 생각하였으며 항복하지 않고 계속 버틴다.
그 후 그들은 불시착한 B-29 비행기를 발견하게 되고 그 곳으로부터 많은 도구들을 얻게 되는데 그 중에는 후에 그들 사이에 폭동이 일어날 때 사용되는 45구경 자동 권총 2정이 있었다.
1947년 11월17일 처음으로 그들 사이에 살인 사건이 발생되었으며 최소 4명이상의 남자들이 섬의 유일한 여자인 Kazuko 와의 싸움에서 살해 되었다.
1949년말 사이판 지방 행정관으로 임명된 James B. Johnson은 중령은 아나타한 섬에 있 는 일본인들을 시민의 정부로 넘어 가기전 모두 제거하기로 마음 먹고 첫 번째 항복 권유를시도를 하였으나 단지 Kazuko 라는 여인만 항복 한다.
Johnson의 두 번째 시도는 성공적이였다.
1951년 6월 "Optional Removal" 이라고 불리운 작전으로 아나타한 섬에 그들이 살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진 후 일본으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았고 그 편지에는 항복으로 마음을 돌리려는 내용들이였으며 Johnson 은 그 편지들을 아나타한섬으로 보내 주었다.
그 편지 중 하나는 이런 내용이였다고 한다.
“사랑하는 여보!
오랜 기간 끝없는 인내심으로 고통을 참아 낸 당신에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11월11일 신문에 당신이 아직 남태평양의 아나타한섬에 살아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정말 놀랬고 누이와 같이 신문을 보고 또 보았으며 당신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고생 이 많았을까를 생각하며 손을 마주 잡고 울었답니다.
전쟁은 이미 5년전에 끝이 났고 지금의 일본은 평화스러우며 미국인들은 친절합니다.
제발 빨리 돌아오세요.
누이는 당신이 올 때 어떻게 마중할 지를 걱정하고 있답니다.
지난 세월 당신의 무덤까지 만들어 잘 모셨었어요
쇠약해진 건강 잘 돌보세요“
Johnson은 1951년 6월30일 세계의 기자들과 함께 아나타한섬에 도착하였으며 일본군들은 항복을 하는데 그 다음날부터 신탁통치를 하던 섬들의 행정권은 해군성에서 내무성으로 전환된다.
1951년 6월29일 트루먼 대통령은 태평양섬의 신탁통치에 대한 행정권을 해군성에서 내무부로 소관으로 전환하여 1951년 7월 1일부터 시행한다는 명령서에 사인을 했으며 내무부는 해군성에서 실시하던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되 TTPI의 본부와 최고위원들은 하와이에 두었다.
해군성에서 내무부소관으로 이전되기 6개월전인 1951년 1월18일 Elbert D. Thomas가 최고위원으로 부임하였으며 미이크로네시아의 기본적 발전은 운송, 경제, 교육, 건강 부분에 있다고 판단하였으며 그중에서도 자립경제가 관건이였는데 이것의 발전없이는 사회적, 정치적 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단지 값싼 노동력을 구하기 위해 들어오려는 외국인들의 사업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마이크로네시아의 자원부족과 적은 인구는 경제 발전을 저해 하였다.
Thomas 최고위원의 1952년 6월30일 끝난 회계연도의 연례보고서에도 주요 문제는 운송부분에 있었다.
예를 들어 1949년부터 운항을 시작한 Transocean Airline은 당시 사이판과 괌을 일주일에 3번만 왕복 운행하였고 로타섬은 1개월에 1번만 방문하였다.
국제연합감시단은 TTPI의 본부를 하와이에서 마이크로네시아로 이전을 추진하였으나 최고 위원의 사무실은 여전히 하와이에 남았고 운송, 보급, 병원, 통신부분의 행정관들로 괌에 연락 사무소를 두었다.
Thomas 최고위원은 이 때 지방행정관 회의를 창설하였으며 북마리아나에 3가지 농작물의 생산 계획을 세우는데 사이판에는 커피와 카카오를 로타섬에는 괌으로부터 들여 온 채소들을 심는 것이였으며 외부 사업과의 단절로 수출경제를 위한 농작물 사업은 발전시킬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전쟁전 토지 소유자들에게 토지를 돌려주는 정책을 세워 그 절차를 간소화시켰으며
토지는 외국인들에게 팔지 못하도록 법률로써 정하였다.
1952년에는 이민법과 내국법이 제정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괌에 살고 있던 수백명의 북마리아나 차모로들이 괌을 떠났으며 이러한 제한이 있더라도 가족을 유지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제한하지는 못하였다.
1952년 12월1일 트루먼대통령은 1953년 1월1일부터 사이판과 티니안을 다시 해군성의 통제하에 둔다는 명령을 내리는데 이 명령은 1953년 2월11일 최고위원으로 부임한 Frank E.
Midkiff 의 업무를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1953년 7월17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사이판 북쪽에 있는 섬들 모두 해군성 소관으로 한다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로타섬 북쪽에 대한 책임이 없어진 최고 위원은 연례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게 되어 1952년부터 1962년까지 이 섬들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으며 이섬들에 대한 소관부서를 내무부에서 해군성으로 이전을 한 이유는 사이판과 티니안을 군사훈련 지역으로 활용할 계획 때문 이였다.
1952년 미국 정부는 사이판의 캐피탈힐에 해군기술훈련부대(N.T.T.U)를 창설하는데 이는 C.I.A가 중국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중국의 민족주의자들을 훈련시키는 장소였으며 태풍을 방지하는 콘트리트형 건물로 건축하였고 이 공사에 참여한 차모로와 캘롤리니안사람들은 많은 소득이 올렸으며 영어 언어능력을 개선시키는 등 섬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을 촉발 시켰다.
이 곳은 해군성의 허가 없이는 아무도 그 지역에 있을 수 없었으며 철저한 보안을 요구되었다.
아무튼 사이판에 미군의 유입은 마이크로네시아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괄목할 만한 사회적,
경제적 성장을 가져 왔다.
1953년 5월11일 국제연합 감시단이 제출한 보고서에는 북마리아나 사람들의 사고가 더욱 진보되었음을 보여 주는데 그 보고서에는 그들이 전쟁으로부터 입은 피해에 대한 배상과 1944년 7월10일부터 1949년 6월말까지 개인의 토지를 수용당한 것에 대한 보상, 태평양의 신탁통치를 위한 기본법 제정을 요구한다는 내용 이였다.
1953년부터 62년까지 로타 북쪽의 섬들은 매우 느린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데 어느 누구도 해군성의 허가 없이는 섬들을 여행 할 수가 없는 군사보안 지역이였으며 해군성의 책임 하에 건강, 교육, 복지문제가 다루어졌고 해군의 규정내에서만 농업과 어업활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 이였다.
1954년 9월1일 Delmas H. Nucker가 최고위원으로 임명되어 9월29일 신탁통치 본부와 최고위원의 사무실을 괌으로 이전시켰으며 코프라안정기금과 관련 부서를 만드는데 이 부서는
코프라 시장 가격을 조절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경기 좋을 때의 이익으로 경기 나쁠 때의 손실을 보전하는 방법으로 가격을 유지하여 코프라 산업을 성장시켰으며 1957년에 Atkins, Kroll and Company가 코프라 시장을 넘겨 받는다.
1960년말 Transocean Airline 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운송 계약을 이행하기 어려워져 1960년 9월 Pan America Airways 로 계약이 넘어 갔고 이 때 사이판에는 3개의 사업체가 있었는데 Saipan Shipping Company, Herman Guerrero`s Bakery, 그리고 Nothern Marianas Development Company 로 마지막 북마리아나개발회사는 Juan M. Ada가 아그리한섬과 아나타한섬의 코프라 자원을 발전시키기 위해 1948년 설립된 회사였다.
Nucker의 관심사는 마리아나섬들의 분리로 인한 주민들의 불만에 있었는데 그 불만은 괌이나 사이판을 다닐 때 여행증명서가 요구되었기 때문이였다.
1961년 국제연합 감시단은 미국에 많은 자극을 주었는데 그것은 미국이 신탁통치 지역의 경제 발전에 무신경하고 학교를 유지하는데 실패하였으며 마이크로네시아 사람들을 다루기 어렵게 만드었다는 내용들이였다.
이 보고는 미국의 새로운 지도자 Jojn F. Kennedy 의 주목을 받았고 1961년 M.W.Goding을 최고위원으로 임명하였으며 그의 첫 번째 과업은 TTPI의 본부를 괌에서 사이판으로 이전시키는 것이였고 1961년 1월13일 내무부가 사이판이 다시 돌아 간다고 발표되었다.
이렇게 신탁통치의 수도로써 사이판이 지명된 것은 마이크로네시아의 다른 섬들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으며 특히 신탁통치 지역의 중앙에 위치하고 1950년 이래로 장래 수도 지역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 되어 왔으며 10년동안 야전 사령부가 있었던 Dubbon, Chuuk 의 사람들에게는 충격이 더 컸었다.
하지만 Chuuk에 새로운 본부를 세우려면 2백-4백만불의 비용이 들 것이 추산되었던 반면 사이판에는 1962년 6월30일 폐쇄한 해군기술훈련부대가 사용하던 수백만불의 건물들이 그대로 있었다.
1962년 7월 케네디대통령은 사이판 지방을 내무부소관으로 두는 명령서에 사인을 했으며 로타섬은 7월21일 사이판지역에 편입되었으며 TTPI 본부를 사이판에 두는데 이로 인하여 북마리아나의 섬들은 다시 연합케 된다.
TTPI의 예산은 수년동안 6백만불이였다.
이 예산은 외형적으로 마이크로네시아 사람들이 독립을 하여도 결코 여유롭지 못한 금액이였고 이러한 예산 정책을 취한 것을 점진주의 또는 현상주의 정책이라고 언급되어졌다.
이후 케네디 행정부는 TTPI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며 예산을 1,000만불로 증액시켜 마이크로네시아에 지원을 하였으며 전후 20년동안 마이크로네시아는 현대 미국과 같은 세계로 인도되어지며 북마리아나 사람들은 상승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