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기문정순왕후.hwp
돈피갖옷을 벗어 정순왕후에게 바친--이사관
이사관(1705__1776)의 본관은 한산이고 자는 숙빈, 호는 장음이다. 영조 13년
(1737)에 문과에 급제하고 48년(1772)에 정승에 임명되어 좌상에 이르고 시호는
효정이다.
영종의 계비 정순황후 김씨가 어릴 때 서산에 살았다. 지극히 가난하여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가 일찍이 친척의 집에 우거하고 있었는데 이 때
돌림병이 크게 성하여 온 마을 이 모두 전염되자, 야외에 초막을 지어 피하였다.
정순왕후와 그의 모부인이 나가 피하였는데 정순왕후는 그 때 겨우 3세였다.
도깨비들이 정순왕후가 묵고 있는 초막 밖에 떼를 지어 와서 말하였다.
"곤전(왕비)이 임어하셨으니 시끄럽게 떠들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모두 흩어져 가므로 모부인이 사뭇 이상하게 여겼다.
영조 23년(1747) 정월, 정순왕후가 3세 때 김한구가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 때 이사관이 호서 지방의 수령으로 부임하는 도중에
여관에서 만났는데 예전에 이미 서로 아는 처지였다. 눈바람이 휘몰아치는 매우
추운 날씨였다. 이사관이 김한구에게 말하였다.
"날씨가 이처럼 추운데 그대의 딸이 추위에 고생이 없을 수 있겠소."
그리고 드디어 돈피갖옷을 벗어 그에게 주었는데, 김한구가 그것을 매우 고맙게
여겨 항상 정순왕후에게 익히 들려주었다.
김한구가 서울에 와서는 남촌의 학주 김홍욱의 옛집에 우거하였다.
貞純王后 정순왕후
至后十五歲己卯 貞聖王后喪期已盡 英廟親臨揀擇
지후십오세기묘 정성왕후상기이진 영묘친림간택
聚集士夫女子於宮中 后獨避席而坐 上問曰 何避也?
취집사부녀자어궁중 후독피석이좌 상문왈 하피야?
后曰 父名在此 安敢當席而坐? 蓋揀擇時 書其父名於方席之端故
후왈 부명재차 안감당석이좌? 개간택시 서기부명어방석지단고
上問衆女子 何物最深? 或言山深 或言水深 衆論不一 后獨曰 人心最深
상문중녀자 하물최심? 혹언산심 혹언수심 중론불일 후독왈 인심최심
上問其故 后對曰 物深可測 人心不可測也
상문기고 후대왈 물심가측 인심불가측야
上又問 何花最好? 或言挑花 或言牧丹花 或言海棠花 所對不一
상우문 하화최호? 혹언도화 혹언목단화 혹언해당화 소대불일
后獨曰 綿花最好 上問故 對曰 他花不過一時之好
후독왈 면화최호 상문고 대왈 타화불과일시지호
惟綿花 衣被天下 有溫煖之功也
유면화 의피천하 유온난지공야
時適雨下滂沱 上曰 能數月廊瓦行耶? 皆以手指數一二三四
시적우하방타 상왈 능수월랑와행야? 개이수지수일이삼사
后獨低頭沈黙而坐 對曰 幾行也 上曰 何以知之?
후독저두침묵이좌 대왈 기행야 상왈 하이지지?
以數簷溜故知之也 上瞿然異之
이수첨류 고지지야 상구연이지
其翌朝 彩虹自闕中起 揷於后盥洗器 以其有后妃之德 特揀正宮
기익저 채홍자궐중기 삽어후관세기 이기유후비지덕 특간정궁
將入宮之時 女官欲爲衣樣 請后回坐 后正色曰 爾不能回坐乎? 女官惶恐
장입궁지시 여관욕위의양 청후회좌 후정색왈 이불능회좌호? 여관황공
(大東奇聞대동기문 金商悳談금상덕담)
卯: 토끼 묘 揀: 가릴 간 聚: 모일 취 安: 어찌 안 蓋: 덮을, 무릇 개
棠: 팥배나무 당 惟: 생각할 유 煖:따뜻할 난 滂: 비 퍼부을 방 沱: 물이름 타
廊: 행랑 랑 瓦: 기와 와 皆: 모두 개 簷: 처마 첨 溜: 방울져 떨어질 류
瞿: 놀라서 볼 구 翌: 다음날 익 彩: 무늬 채 虹: 무지개 홍 闕: 대궐 궐
盥: 대야, 낯 씻을 관 樣: 모양 양 爾: 너 이
정순왕후가 15세 되는 영조 35년(1759)에 이르러 정성왕후의 상기가 이미 다하자, 영조가 친히 왕비감을 간택할 적에 사대부의 딸을 궁중에 모았는데, 정순왕후가 홀로 지정된 자리를 피하여 앉았다.
영조가 물었다. "어찌하여 피해 앉는가?"
정순왕후가 대답하였다. "아비의 이름이 여기에 있는데 어찌 감히 그 자리에 앉겠습니까."
대개 왕비를 간택할 때 그 아버지의 이름을 방석 끝에 썼기 때문이다.
영조가 여러 처녀들에게 물었다. "무엇이 가장 깊은고?"
그러자 어떤 처녀는 산이 깊다고 말하고, 어떤 처녀는 물이 깊다고 말하여 중론이 일치하지 않았는데, 정순황후는 홀로 말하였다.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습니다."
주상이 그 까닭을 물으니, 정순왕후는 대답하였다. "사물의 깊이는 헤아릴 수 있거니와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주상이 또 물었다. "무슨 꽃이 가장 좋은가?"
그러자 어떤 처녀는 복숭아꽃이 좋다고 말하고, 어떤 처녀는 모란꽃이 좋다고 말하고, 어떤 처녀는 해당화가 좋다고 말하여 대답하는 바가 일치하지 않았다.
이 때 정순왕후가 홀로 말하였다. "목화(면화)가 가장 좋습니다."
주상이 그 까닭을 물으니, 정순왕후는 대답하였다.
"다른 꽃은 일시의 좋은 데 지나지 않고 오직 목화는 천하 사람에게 옷을 지어 입혀 따뜻하게 해주는 공이 있습니다."
이 때 마침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주상이 물었다. "월랑의 기왓골이 몇 줄인지 세어보아라."
처녀들이 모두 손가락으로 하나, 둘, 셋, 넷 하며 세었으되, 정순왕후는 머리를 숙이고 침묵하고 앉아 있다가 줄 수를 말하였다.
주상이 물었다. "어찌하여 기왓골이 몇 줄인 줄 아느냐?"
정순왕후가 대답하였다. "처마의 낙숫물을 세어 보았으므로 알았습니다."
주상이 깜짝 놀라며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그 이튿날 아침에 채색 무지개가 대궐로부터 일어나서 정순왕후의 세수하는 그릇에 꽂히니, 후비의 덕이 있다 하여 특별히 정궁으로 간택하였다.
장차 입궁하려 할 적에 여관(상궁)이 옷 치수를 재기 위하여 정순왕후에게 돌아앉기를 청하니, 정순왕후가 정색을 하며 말하였다.
"너는 돌아앉을 수 없느냐?"
여관이 황공하게 여겼다.
정순왕후가 궁궐에 들어오게 되자, 주상이 말하였다.
"옛날 후가 곤궁할 때 돌봐준 사람이 없었는가?'
정순왕후가 대답하였다.
"옛날 정묘년(영조 23, 1747)에 서울로 들어오는 도중에 마침 극심한 추위를
만나 장차 동상을 입게 되었는데, 만일 이사관이라는 사람이 돈피갖옷을 벗어
주지 않았으면 지탱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에 영조가 그를 발탁해 썼는데 그 뒤 14년 만에 덕망이 높아 정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