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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문학』10년에 즈음하여
『의령문학』10년의
발자취를 더듬어
김영곤
1. 문학의 불모지에 뿌린 씨앗
의령에서 “문학”이라는 말만 떠올려도 너무나 높은 거대한 벽이었던 90년대 말. 막연하게 글을 취미로 쓰는 사람은 있었어도 문단이니 등단이니 하는 말은 누구에게나 낯설고 호사스러운 용어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의령엔 출향문인은 있어도 의령내의 문학텃밭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누구 한 사람 선뜻 나서서 문학을 해보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 차제에 당시엔 보기 드물게 의령군청에서 군 홍보지 성격의 신문인 의령월보가 등장하였고 신문 말미에 겨우 양념격으로 독자들의 시를 게재하는 란이 신설되었다.
이를 계기로 의령군민들 중 취미삼아 시를 쓰던 사람들이 어눌했지만 글을 게재하기 시작하였고 의령에서도 시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고무되어 1995년 말 서울에서 문학활동을 하던 출향문인 백한이 선생께서 필자에게 편지를 보내와 문학인 결성을 권유하였고 이에 뜻있는 몇 사람이 모여 문학 동아리를 한번 결성해 보자며 마음을 모아 1차적으로 의령군민회관에서 모임을 가졌다.
당시 모임에 응한 사람은 필자를 비롯한 윤재환, 등등이었으나 1차 모임 후 별다른 성과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그런 와중에 당시 의령문화원장이었던 허백영 원장께서 해마다 개최되는 의병제전 문화가족 작품전시회에 의령문학 동인회를 결성하여 참여해 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의가 있었다.
이를 계기로 1997년 3월 18일 마침내 의령문학의 첫발을 내딛는 “의령문학동인회” 창립을 천명하고 발기인 대표 모임을 거쳐 그해 4월 17일 허백영 원장을 고문으로 하여 회장에 이재섭, 총무에 윤재환 시인을 선임한 후 본격적인 문학 활동에 돌입하였다.
그해 처음 회원 작품을 선보인 것은 제25회 의병제전 행사의 일환인 의령문화원 주관 문화가족 작품 전시회였고 참여한 회원은 필자를 비롯하여 총 10명이었다. 당시 시화전을 관람한 군민들은 의령에도 글쓰는 사람들이 있었구나 라는 의외의 반응을 보이면서도 시화작품에 꽃송이를 달고 격려의 글을 남기는 등 나름대로의 성과가 있었다.
이에 한껏 자신감을 얻은 우리 회원들은 모임을 더욱 공고히 하자는 스스로의 다짐을 하기도 하였으며 그해 5월에는 그동안 공석이었던 부회장직에 당시 교직에 몸담고 있던 이경옥 선생을 선임하고 감사에는 양창호 일간신문 기자를 선임하여 명실상부한 문학회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문학회 운영을 위한 회칙과 회원명부, 문학의 지향점을 밝힌 것은 물론이고 10월에는 소수 회원이었지만 십시일반 호주머니를 털어 전남 구례 화엄사 “시의 동산”에 문학기행을 다녀오면서 우선 회원 상호간의 서먹서먹한 인간관계 해소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연말 그토록 염원했던 “의령문학” 창간호를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우선 창간호 편집을 위해 표지에서 내용구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지만 일차적으로 회원작품을 모으고 출향문인들의 작품을 함께 엮어 문학의 역량을 축적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렇게 하여 창간호 표지의 제호는 우리군 출신 서예가 허중자, 윤판기 씨에게 의뢰하였고 표지 사진은 사진작가 제광모씨에게 부탁하여 가례면 백로 서식지에서 촬영한 백로의 어미가 새끼를 안아 보호하는 사진으로 결정하였다. 내용 구성에 있어 전 회원이 문학 초보임을 감안하여 기성 출향문인들의 작품을 앞면에 싣고 회원 작품들은 뒤로 돌리는 겸양을 갖추었다. 어렵사리 도서출판 경남에 원고를 맡기고 회원들은 옥동자가 태어나는 설렘으로 동인지 탄생을 기다렸다.
마침내 우리 회원들의 기대감 속에 1000부의 책이 빛을 본 그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의령 문학사 감동의 한 폐이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 군민회관에서 전문수 경남문인협회장과 조현술 사무국장 하영 시인은 물론 군수와 회원가족까지 참석한 가운데 창간호 출판기념회를 열었고 다소 부족했지만 회원들이 시를 낭송할 때는 우리의 존재가치가 무엇인지 정말 가슴 뿌듯했었다. 그러나 사람이 항상 함께하기란 그토록 힘든 것일까? 당시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여 고생한 총18명의 회원 중 현재까지 남아 활동을 하고 있는 회원은 필자를 비롯하여 윤재환, 박래녀, 장인숙 정도이니 10년 세월이 그리 무색치는 않으리라.
2. 배고프고 힘든 고개를 넘어
더불어 문학활동을 한지 일년을 넘겼지만 당당하게 의령에도 문학회가 있다는 자부심만을 가지기엔 우리 의령문학의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의령하면 누구나 함께 마시고 떠들며 놀 수 있는 놀이들과 무슨 체육대회 등은 숱하게 많아도 제대로 문학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과 여건은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런 현상을 모르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회원간 모임을 한 번 가질 때 마다 부담할 금전문제에서부터 문학행사를 기획할 때 마다 사소한 자금문제들은 늘 발목을 잡기 일쑤였다. 이를 전적으로 회원들에게 의지하는 것도 무리였기에 당시 총무를 맡았던 윤재환 시인의 고충을 곁에서 지켜본 필자로서 이건 숫제 소리없는 아우성 그 자체였다.
의령문학 창간호 발간비에서 부터 제2호까지 도서출판 경남에 외상거래라는 피치 못할 문제점을 노정시켰고 심하게 말해 아예 문학회 총무의 직책은 무슨 외상값을 청산하는 자리로까지 전략하고 말았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각고의 노력 끝에 당시 초대회장의 결단과 협조로 자금문제는 가까스로 해결하였지만 여전히 의령문학의 나아갈 길은 그리 밝지 않았다.
어렵사리 제2호를 출판하긴 했지만 다수 회원들이 중도에 문학을 포기한 상태에서 동인회의 존립마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누군가는 반드시 힘든 고충을 넘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남은 몇몇 회원들이 의기투합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다졌고 당시 총무라는 어려운 직책을 맡았던 윤재환 시인의 열정도 커서 시인 자신은 회원 중 첫 문단 등단이라는 영예까지 만들어냈으니 이에 힘을 얻은 문학회는 더는 깨질 수도 깨어졌어도 안되는 그 어떤 사명감마저 갖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뜻밖에 자금문제를 해결한 초대회장이 어떤 일신상의 이유(?)로 사의를 표명하였고 의령문학회는 또다시 선장없이 표류하며 문학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누군가가 회장을 맡아 활동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문학적 인프라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회장이 문학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자금문제를 일차적으로 떠맡아야 했기에 선뜻 나설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돈 많은 어떤 독지가가 나서서 의령문학을 돕겠다는 사람도 없었고 형편이 그리 넉넉한 회원도 없었으니 이래저래 고민은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의령문학 제2호까지는 그런대로 해결했다 하지만 당장 회장도 없이 제3호를 발간하기엔 모든 것이 역부족이었다. 고충 끝에 의령예술촌에서 소수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임원진을 재구성하기로 하였으나 그 어떤 대안도 찾지 못한 상태에서 회장을 끝내 선임조차하지 못하고 필자만 덩그러니 총무직을 맡은 기형적인 문학회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몇 개월이 흐르고 어느 날 전임 총무 윤재환 시인이 필자를 찾아왔다. 아무래도 회장 선임은 당분간 어려울 것 같으니 필자가 바로 회장을 맡고 총무를 새로 선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의였다. 당시 총무였던 필자 혼자선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인지라 문학회 존립을 위해 그 뜻을 선뜻 거절할 수조차 없어 엉겹결에 회장직을 수락하고 말았다.
이후 윤재환 시인을 부회장으로 장인숙 시인을 총무로 이계수 시인을 감사로 선임하여 그런대로 문학회의 모양새는 갖추었으나 돈 없고 배고픈 여정은 계속되었다. 모임 시 마다 회원들의 호주머니를 털었고 다행히 필자 친구의 광고협찬과 특별회비로 겨우 제3호를 발간하고 나자 다소 한숨은 돌릴 수 있었다. 어려웠지만 다행히 문학활동은 활기를 띄어 윤재환 시인을 정점으로 의령예술촌이 개촌되었고 우리 문학회가 시화를 만들어 전시회에 참여하였는가하면 회원간 격의없는 작품토론회와 건전한 비판을 통해 상호간 점점 스스럼없는 사이로 변해갔다.
그 사이 등단한 윤재환 시인은 세 번째 시집을 발간하는 등의 활동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었다. 필름을 되돌려 그 당시 산고 끝에 제2.3호 문학지를 엮어내고 편집후기에서 쓴 글이 이채롭게 다가온다.
꽃씨는 꽃을 피운 후 땅속이 답답했다고 말하지 않고 한여름의 모진 비바람에 떠밀렸던 태양은 천둥의 거만함을 탓하지 않는다고 말한 필자나 작년에 감꽃을 땄었는데 올 가을엔 익지 않은 감을 땄다는 장인숙 시인의 겸양과, 의령문학의 텃밭이 너무 척박하여 옳은 나무는 자라지 못하고 개잡초만 무성하다고 자성한 윤 재환 시인 그리고 지금은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적은 수의 회원으로 의령문학을 위해 시간시간 토해낸 작품들을 모으며 나래를 펼친 정성에 숙연함마저 느낀다던 고 오경환 님의 글을 새삼 들추니 그 감회가 더욱 새로워짐은 인지상정일까?
3. 의령문학 그 도약의 햇살
드디어 새천년의 시작인 2000년이 열리고 의령문학도 새로운 도약의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한다. 우선 그동안 얼음장 같은 문학환경이 서서히 풀리고 우리 의령문인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많은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당당하게 문학의 밭을 일군 회원들의 꾸준한 노력의 결실임엔 두말 할 여지가 없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토록 애태웠던 문학활동의 토대였던 지원금의 뒷받침이 속속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의령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이룩한 의령예술촌 또한 서서히 성공적인 평가를 얻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동안 어려움을 겪었던 자금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면서 하고 싶었던 문학활동의 기획도 가능해졌다. 이와 더불어 문학활동에 더욱 탄력을 받아 이계수 시인과 필자가 문단에 등단하는 기쁨을 누렸고 평소 글쓰기에 취미를 갖고 있으면서 홈페이지를 손수 만들 수 있는 김양채 시인이 우리 문학회에 들어옴으로써 사이버 문학이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김양채 시인의 손을 빌어 의령문학 홈페이지를 자체 제작하여 의령문학은 명실공히 사이버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를 맞게 된다.
이와 더불어 연말 의령문학 제4호 출판기념회를 겸하여 전국 최초로 인터넷 시화전을 개최하여 독자들의 호평을 받았고 의령문화지와 의령신문 그리고 각종 일간지에 의령문인들의 활동상이 속속 알려지면서 의령문학회는 전례없는 도약의 해를 보내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2001년 새해 벽두부터 우리 문학회의 2000년 연말 인터넷 시화전이 KBS 창원 방송국의 7시 뉴스에 방영되었고 경남신문 동아리 탐방란에 우리 문학회의 활동상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특히 그해는 의령예술촌에서의 활동이 돋보였는데 3월에 있은 아트피플전 시화 전시회에 이어 5월에 함안, 창녕문인들이 함께 참여한 가운데 “강을 건너야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전을 펼쳐 많은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이처럼 의령문인들의 활동상이 나날이 두드러지면서 의령예술촌 2주년 글짓기 대회와 제2회 한우산 철쭉제 글짓기 대회를 주관할 수 있었고 이 대회를 계기로 매년 우리 의령문학회가 행사를 주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회원 개인적으로 김양채 시인의 시집 ”담배“, 최진의 고문의 수필집 ”기다리는 산그늘“, 김판식 시인의 시집 ” 남강아 남강아“, 윤재환 시인의 5번째 시집 ”청보리“가 세상에 빛을 보는 등 그야말로 의령 문학의 문예부흥기를 구가하게 된다.
특히 한국문화예술진흥회의 지원 하에 우리와 다소 소외된 삶을 사는 경남종합복지마을을 찾아가 원생들과 더불어 시화전과 글짓기 대회를 개최하여 지역문인의 역할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그해 연말 ”아름다운 문학제“를 통해 지역문인과 예술인 기관단체장이 한 자리에 모여 펼친 시낭송회와 의령문학 제5호 출판기념회는 저물어 가는 한해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얼마 못가 우리에게 정말 충격적인 비보가 날아들었으니 다름 아닌 이계수 시인의 갑작스러운 타계 소식이었다. 그동안 여러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문학회를 탈퇴하는 일은 있었어도 우리 곁을 소리없이 등진 문인은 없었기에 그 충격은 실로 대단했다. 그것도 어느 누구 못지않게 의령문학을 사랑했고 늘 굳은 일이 있으면 앞장서 달려오던 시인이 불의에 39세라는 짧은 나이로 타계했으니 우리 회원들의 마음은 오죽했겠는가?
당시 우리 의령문학회 홈페이지에 얼룩진 시인에 대한 추모의 글은 지금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슬픈 소식 뒤의 연속이었을까 한해를 그렇게 보내고 2002년 새해 벽두 경남도민일보에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 기사 한편이 실렸으니 문인들의 작품 이중 발표가 그것이었다.
그때까지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 회원들이 그저 악의없이 여러 지면에 자신의 좋은 작품을 알리기 위해 같은 작품을 낸 것이 문제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지금까지 이중 발표는 철저한 금기사항으로 잘 지켜지고 있으니 사람은 역시 많이 알아야 하나 보다.
이렇게 시작된 2002년은 그래도 새로운 역할과 제2의 도약을 위해 임원진을 새로이 확대 개편하여 새 부회장에 양창호 시인, 감사에 박래녀 소설가를 선임하고 문학회 홍보를 위한 홍보담당을 신설하여 김양채 시인을 선정하였다. 그러면서 의령문학의 연속성 추구와 회원 증원을 한 결과 신규회원으로 손대영, 허영옥, 곽향련, 김종홍, 장동재, 안영도 회원이 우리회에 새롭게 얼굴을 내밀었다. 문학은 무엇보다도 스스로 글쓰기에 전념하는 것이라고 백번을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겠지만 늘 혼자 가는 길 보다 여럿이 어울려 가는 길이 덜 힘들기에 문학기행을 통해 문우들의 친밀감을 좁히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중 하나가 전남 강진에 있는 김영랑 생가를 찾아 문학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 열정을 느껴 본 것이다. 또 그해 5월에는 의령군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전남 무안군의 문인협회와 의령문인들과의 만남전을 가졌고 김양채 시인은 담배에 이어 술이라는 기호 식품을 통한 두 번째 시집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이어 장인숙, 김양채 두 시인이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정삼희 시인은 두 번째 시집 찰비산의 그리움을 상재하여 독자에게 갈채를 받았다.
특히 2002년 우리 문학회가 큰 주목을 받았던 점은 시인 개개인의 활발한 문학활동으로 속속 시집을 낸 것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다른 문학단체와 비교하여 우리 회원들이 젊고 기운차며 거의 대부분이 개인 홈페이지를 소유함으로서 스스로의 작품활동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는 점이다.
그런가 하면 한해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끝자락엔 원로 김정숙 회원이 ”길 끝에도 길은 있다“라는 시집을 선보였고 무엇보다도 잊을 수 없었던 것은 불의에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나버린 이계수 시인의 추모 1주기를 맞아 그의 유고시집 ”이파리 연가“를 발간하여 그의 영혼이 잠든 의령예술촌에 시비를 세워 추모하고 문인은 문학을 통해 영원히 함게 할 수 있다는 슬픔속의 작은 행복을 만끽하기도 하였다. 비록 의령문학이 걸어온 5년은 실로 가시밭길 같은 험로였지만 회원들 스스로 문학 역량을 배가하여 문단 등단과 더불어 많은 시집들을 상재하면서 의령문학회도 더 이상 동아리 성격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맥락에서 의령문학회의 전신을 이어 2002년 12월 17일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의 인준을 받아 의령문학회가 의령문인협회로 승격되었다. 그해는 그 정도로 마무리 하고 새로운 내년을 맞이할 찰나에 정삼희 시인의 문단 등단 소식이 들려왔고 우리의 홈페이지는 또 한번 축하인사로 들썩거렸다.
그해 이 같은 기쁨의 연말 종소리가 우리에게 축복을 들려주는 가운데 불우시설인 혜림학원을 찾아 원생들을 위문하였고 우리는 문학을 통한 밝은 내일을 꿈꾸며 모두 축복의 잔을 높이 치켜들 수 있었다.
4. 불어나는 몸에 맞는 미래를 향해
2003년은 필자가 초대 의령문인협회장으로서 불어난 몸에 걸 맞는 문인단체를 만들어 내야하는 사명감을 가져야 할 원년이었다.
물론 외관상 정관을 만들고 사무국장을 선출하고 각종 분과위원장을 두긴 하였으나 소수회원으로 많은 문학활동을 소화하기엔 여전히 무리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문학 특성상 여타 단체처럼 막무가내식 회원영입을 할 수도 없었기에 어느 광고처럼 작지만 큰일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작품의 내실을 다지는 일에 착수하여 등단한 문인이나 신입 회원이나 상호간 스스럼없는 작품토론을 통해 작품성을 한 단계 끌어 올려 보려 했지만 스스로 열심히 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끊어진다는 등의 이유로 접근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지금까지의 활동 흐름을 그대로 이어가는 선에서 마무리하고 그동안 해왔던 활동들에 탄력을 불어넣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그 일환책의 하나가 문우들의 활동범위를 넓히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2003년 5월 경남문학관에서 주관한 시화전에 우리 회원들이 적극 참여한 것이었고 6월에 곽향련 시인 외 6명의 뜻있는 회원들이 함께 모여 7인시집 “차”를 펴낸 그것이다. 그리고 작품 외적인 요소의 하나이지만 경남일보 “경일춘추” 란을 통해 필자를 비롯하여 윤재환, 장인숙, 정삼희, 김양채, 이광두 회원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2004년 들어 연초엔 경남신문에 창립회원으로서 그동안 자굴산속에서 열심히 작품활동을 하고 있던 박래녀 작가를 직접 조명한 강촌별곡이 대서특필 되었고 3월에는 월간 문예사조에 곽향련 시인의 시가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경남문인협회에서 “경남문학” ‘경남 명소의 문학적 형상화 의령편’을 통해 그동안 문학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의령의 문학을 새로이 조명함으로서 의령문학을 불모지의 오명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2004년 역시 회원들 각자의 역량이 한껏 드러난 해로서 허영옥 시인이 경남민족작가회의 신인 공모를 통해 문단에 등단하였고 필자의 경남문협 주최 전국환경백일장 대회 심사를 비롯하여 박래녀 작가의 경남작가회의 학생백일장 심사 등이 있었는가 하면 허영옥 시인의 경남작가회의 사무차장직 참여로 자칫 획일화되기 쉬운 의령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 오기도 하였다.
6월에는 2003년에 이어 정삼희 시인 외 회원 4인이 “추억”이라는 동인지를 발표하였고 이어 이광두 시인이 문단에 등단하였다. 9월에는 우리 의령문학에 누구 보다 애착을 많이 가졌던 백한이 시인께서 제24회 세계시인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여 그 부대행사의 일환으로 40여명의 세계시인들이 의령의 충익사를 참배하였고 대의 머릿재에서 “열애”라는 시비를 세워 그 뜻을 기리기도 하였다.
이어 문학의 활동 영역을 부산으로 넓혀 부산 벡스코에서 벌어진 의령민속 소싸움 대회의 부대 행사격으로 회원 12명이 참여한 가운데 소를 주제로 한 작은시집 제작과 더불어 36점의 시화를 전시하여 우리 의령의 문학적 존재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또 10월에는 김양채 시인이 대한문학세계로 두 번째 신인상에 당선되었으며 필자는 월간 엽서문학 시부문 우수상을 받기도 하였다. 이어 초대회원으로 문학회에서 참여하여 그동안 사이버 공간에서 꾸준히 글을 쓰던 장인숙 시인이 첫 시집 “그대가 보내준 바다”를 상재하여 성대한 출판기념회를 여는 등 새천년 초반부터 문학을 통한 의령문우들의 역량과 의령 문협의 몸통이 서서히 불어나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이 글을 쓰면서 “의령문학”이 걸어온 길을 필자 스스로 되돌아보니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창간호를 출판하던 날 가슴 벅차 숨소리마저 죽였던 때를 기억하며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좋은 책을 만들자는 문학지 8호의 편집후기가 선뜻 눈에 들어옴은 왠일일까?
그렇게 또 한해가 가고 드디어 2005년, 의령문학이 태동한지 만 9년 째 되는 해, 다시금 변화를 모색해보자는 측면에서 년초에 새로운 임원진으로 개편하였다. 필자가 너무 오래 회장직에 머물러 있어 자칫 해이해지기 쉬운 문단을 보다 새롭게 하고자 윤재환 시인을 회장으로 선임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우선 문학활동의 기저를 크게 흔들지 않는 선에서 각종 시화전과 문학모임을 개최하였고 불어난 몸통만큼 회계 체계를 보다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돌림식으로 의령신문에 회원의 신작시를 발표하여 의령문인들의 지역사랑과 문학저변 확충에도 기여하였다.
또한 5월엔 장인숙 시인의 한국농촌문학상 시 부분 우수상 수상 소식이 들리는가 싶더니 연이어 정삼희 시인의 문예한국 우수작품상 수상 소식도 들려왔다.
이런 가운데 제83회 어린이날 기념 바램의 글짓기 대회 심사를 우리 문인협회가 맡았는가하면 경남문학관 주최 경남 시낭송 잔치에 이광두, 배종애 회원이 참여하여 낭낭한 목소리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이어 필자도 첫 시집 ”골목길“을 상재하여 의령체육공원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어찌 이것만으로 만족하리요? 문학은 결코 작가만의 전유물이 아니기에 우리는 남산체육공원에서 시와 음악의 선율로 가득 채워 독자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로 결정하고 “한여름 밤의 작은 문학회”를 열어 그동안 무더위에 찌들고 삶에 찌든 사람들의 귀와 어깨를 한껏 다독이기도 하였다.
우리의 이런 활동들이 속속 알려지면서 각종 글쓰기와 관련하여 학교와 사회단체에서 우리협회에 작품심사 및 참여를 요청해와 의령도서관 주관 ”친구의 날 제정 편지쓰기“ 의령문화원의 문화지 작품참여 및 편집 의뢰는 물론 새마을 단체의 ”효“ 편지쓰기 심사 등의 요청으로 문단은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9월엔 이미순 시인 역시 월간 시사문단 신인상 수상으로 시인에 등단하였고 저무는 해가 아쉬웠던지 정삼희 시인이 시집 ”곡비“를 출판하여 우리 문인들이 진주 원정 축하길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2005년의 끝자락인 12월 20일 제6회 의령문인협회 인터넷 시화전은 저물어가는 한 해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사이버 공간에서 뜨거운 희망의 광채를 내 뿜기도 하였다.
5. 문학의 길 꼭 10년, 강산도 변한다는데
드디어 2006년 새해! 의령문학으로 야심찬 첫발을 내 디딘지 꼭 10년이 되는 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는데 정말 의령문학의 강산은 몰라보게 변하였다. 비록 적은 수의 회원이었지만 창립원년의 회원은 필자를 비롯하여 박래녀, 윤재환, 장인숙 문우만 덩그러니 남았으니 어찌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 할만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 노래와는 달리 문학은 곧 기록의 문화인지라 그때그때 사람들의 흔적만은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이 또한 뜻 깊지 않는가? 초창기엔 문인이란 말조차 꺼내기 쑥스러웠고 자신이 쓴 글조차 선뜻 내보이기를 꺼려하던 문우들이 이젠 내 글 한번 읽어주시오 하는 정도가 돼버렸다면 분명 저급한 용기도 용기임엔 틀림없으리라. 그러나 아직도 가야할 길이 먼 우리들이다.
어떤 문인은 말한다. 평생 글을 쓰면서 독자로부터 주목받는 글을 단 한 편만이라도 쓸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그리고 독자들은 말한다. 지천에 널린 것이 작가인데 정말 읽고 싶은 글은 한 줄도 없다고.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 의령문학이 지향해야 할 점은 보다 분명해진다. 강산이 한 번 아니라 천 번을 변하여도 독자가 외면하는 작가라면 무슨 존재가치가 있겠는가라고. 그저 작가 저 혼자 좋아서 중얼거리는 콧노래에 불과할 뿐이라면 설령 문인들이 아무리 많은 일을 했다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몸짓에 불과할 것이다.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 말하고 작품으로 승부해야한다. 그것이 바로 강산을 변하게 하는 진정한 문인의 길이 아닐까.
의령문학의 지난 10년을 회고하면서 크든 작든 그 정점에 있었던 필자가 스스로 자찬 아닌 자찬을 나열했지만 아무래도 최종 평가는 오늘도 의령문인들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독자의 몫일 것이다. 지금 의령문인들이 해야 하는 문학활동은 오로지 독자만을 위해 존재함이 마땅하다. 그저 지역에서 문학이란 거대한 이름 따위를 팔아 무슨 시인 , 무슨 소설가를 칭하며 겨우 지역유지 행세나 할 요량이면 그건 한낱 보잘 것 없는 치부의 수단임을 스스로의 경계로 삼아 삼가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 겨우 문단의 걸음마 단계를 벗어난 우리에게 더 이상의 나아감은 기대할 수 없으며 진정 문학을 통한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2006년 여름, 우리 문인협회는 태풍 에위니아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작년에 이어 또 한 차례 “한여름 밤의 문학회”를 열었다. 독자들이 잔디밭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시 낭송을 감상하고 음악의 선율에 젖어 모기 따위는 하찮게 여겼다. 그런가하면 그동안 소설, 시, 수필,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홈페이지에 수준 높은 글을 선보였던 창립회원 박래녀 작가가 10년 넘게 기다리다 모처럼 수필집 ‘푸름살이“를 출판하여 전국의 독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런 광경과 모습이 있었기에 우리는 아름다운 문학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문인들은 언제나 기억 할 것이다. 문학을 잘 만하면 세상 어딘가에서도 우리의 분명한 역할은 있는 거라고. 그리고 말할 것이다. 독자의 뜨거운 가슴으로 글을 쓰겠노라고. 그래서 10년을 걸어온 의령문학의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가는 길 또한 더는 무겁지 않을 것이며 우리 문학회가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 진정한 의미란 것을!
이 글을 최종 마무리하면서 우리 의령문학에 보이지 않는 손길로 지대한 공헌을 하신 몇분을 그냥 넘길 수 없을 것 같다 여러분들의 깊은 양해를 구한다. 그분들은 바로 어려운 시절 우리 의령 문인들의 문학의지를 기꺼이 살려주신 도서출판 경남의 오하룡 선생님, 서울의 백한이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의령출신 문학선배님들이다. 결코 이분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의령문학은 아마 존재치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대신하여 깊은 감사를 드리며 그 고마움의 자취를 남긴다.
그리고 필자의 기억 용량 상 본 글에서 언급되지 않았거나 표현이 미흡하여 서운한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결코 고의가 아니니 넓은 아량을 구한다. 의령문학은 지난 10년 한결같이 어려움을 함께하며 걷던 분들과 정답게 어깨동무를 하고 오늘도 야심차게 걷고 있기에 아무리 힘든 고개도 거뜬히 넘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이것으로 10살박이 의령문학의 소박했던 발자취에 대한 흔적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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