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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우리 사회에서 정치는 동네북이다. 어느 때고 정치에 관한 한 긍정적인 평이 나온 적이 없다. 정치는 만악의 근원이요, 정치인이라면 우선 욕부터 하고 볼 일이다. 그러나 정치활동 없이는 사회가 운용되지 않는다. 때문에 정치에 대한 환멸 역시 그리 생산적인 일은 아니다. 정도전이 500여년전 펼쳤던 일종의 ‘정당론’인 위의 글은 지금의 정치적 무관심에 대한 직격탄일 수 있다. 지식인으로서의 강렬한 참여정신을 담은 그의 글은 비록 현대적인 정당론은 아니더라도 그 정신만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정도전은 우리 역사상 정치적 당파간의 권력투쟁이 말 그대로 목숨을 담보로 전개됐던 혁명의 시대에 태어나, 그 정쟁의 한가운데 섰던 인물이다. 한반도 내부의 권력투쟁뿐만 아니다. 당시는 명나라가 중원의 새로운 주인으로 떠오르던 시기로 외교적 대응이 국가이익과 곧바로 결부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격변기에는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돌변하고, 스승과 제자간에도 목숨을 노리는 투쟁이 다반사였다. 정치적 공격과 응전에는 체면보다 살벌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먼저였다. 한 순간의 실착이면 수만명의 목숨이 오가는 상황이었다. 이런 다이내믹한 정국을 주도했던 인물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역성혁명파와 온건개혁파간의 양보할 수 없는 적대적 투쟁은 바로 정도전이 그랜드플랜을 짠 역성혁명의 구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혁명을 기획해 성공시킨 인물이다. 그러나 실패한 혁명가 대다수가 그러하듯 그의 말로 역시 비장했다. 조선 왕조의 기획자이자 설계자였던 그는 동시에 500년 조선사의 역적으로 인생을 마쳤다. 100년 뒤 이탈리아를 무대로 활동했던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역정과 사상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복합적인 이론을 논했던 정도전 이었다.
그를 만난 것은 1398년 8월의 어느 날이었다. 서울 수송동에 자리잡은 그의 집 사랑채에서였다. 정도전은 이즈음 요동정벌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군사들에게 그가 개발한 진법을 익히게 하고, 군수물자를 준비했다. 또 한편 요동 정벌을 통해 독자적인 군사기반을 잠식당할 것을 우려하는 이방원 등 왕자측 세력과의 신경전도 만만찮았다. 당당한 풍채에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정도전은 사랑채에서 책장을 넘기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 요즘도 많이 바쁘시죠?
“늙도록 쉴 틈이 없습니다. 한창 일할 30대를 야인생활을 하며 보내서인지, 환갑이 다 돼가는 지금에 와서도 그 좋아하는 사냥 한번 할 겨를이 없어요. 이제 문물제도의 기초도 어느 정도 다져져 쉴 만도 하지만 요동땅 수복만은 꼭 이뤄야 할 일이 아니겠소. 우리를 그토록 괴롭히던 명 태조도 죽고, 명나라 조정이 제위 계승문제로 복잡한 이때가 바로 적기가 아니겠소.”
요동은 고려말 이성계가 한차례 진격을 감행한 뒤로 방치해 두고 있는 땅이다. 발해 멸망 이후 우리의 역사 무대에서 사라진 요동은 고려 태조 왕건 때부터 수복을 열망했던 민족의 염원이 서린 땅이었다. 고려말의 혼란한 정국 때문에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며 요동정벌을 접어두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무엇보다 정국이 안정되었다. 조선 건국을 전후해 토지제도를 정비해 민생은 안정돼 있고, 왕실의 재정도 고려말에 비하면 상당히 충실한 상태였다. 사병 혁파를 단행해 20만명의 대군이 준비되었다. 군량미도 수년간 준비해 북방의 경계선에 비축해 둔 상태였다.
1396년 이래 지난 3년간은 명의 지나친 간섭으로 태조 이성계가 “명 태조가 나를 어린아이로 아는가”라고 화를 낼 정도로 조선 조정의 자주의지도 강했다. 그러나 사병을 빼앗기면서 권력기반이 축소돼 가던 정안군 이방원 등의 반대세력은 불만이 고조돼 있었다. 이들이 군사들을 빼앗겨야 하는 요동정벌을 반길 리 없었다. 당연히 이들은 요동 정벌에 소극적이었다.
― 정안대군이나 조준 같은 이들은 요동정벌을 상당히 반대하지 않습니까? 대감의 권력강화를 위한 사병 혁파이고, 요동정벌이라는 주장이 비등하고 있습니다.
“정안대군은 야심이 만만찮은 인물이라 그런 경계를 하고 있을 게요. 이들이 요동정벌을 3년에 걸쳐 준비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는 것은 나도 충분히 알고 있지요. 또 반대하는 세력도 많소. 그러나 이들은 대국적으로 보지 못하고 있소. 내가 어디 개인의 권력 욕심 때문에 늙고 병든 마당에 군사훈련까지 직접 관장하겠소. 지난 연간 명 태조가 우리 조정에 어떻게 했습니까. 외교문서인 ‘표전문’에 불손한 표현이 있다고 꼬투리잡아 정총·김약항·노인도 같은 신료들을 압송해 가고, 신덕왕후의 상을 당하여 상복을 입었다고 처형까지 했습니다. 이런 강압이 어디 있습니까. 대국이라도 대국의 풍모가 있어야 섬기는 것이오. 잔학무도하기까지 한 명을 어찌 천자의 나라라고 일방적으로 섬기겠소. 또 어떤 이들은 명 태조가 나를 ‘표전문사건’의 배후라며 압송을 요구한 데 이어 조선의 재앙의 근원이라고 지목해 죽이려 했던 것이 내가 요동정벌을 추진하는 이유라고 하는 것도 압니다. 내가 두려워 요동정벌을 급히 준비한다고요. 이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그 일이 있기 전부터 내가 군사를 훈련시키고, 요동정벌을 준비해온 것을 천하가 아는데, 그런 무고를 일삼고 말이오.
강건한 조선의 기상을 잃어버린 선비가 너무 많소. 한족이 아닌 거란·여진 등의 이민족도 중원을 차지한 역사가 빈번한데, 우리 조선이라고 해서 그런 꿈을 꾸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소? 명 태조가 나의 압송을 요구하는 것도 우리 조선을 두려워해서가 아니오? 3년전(1395) 명 태조가 “만일 조선이 20만 대군을 내어 쳐들어온다면 우리 군대가 어떻게 막겠는가”라며 요왕의 궁실공사를 중지시킨 것을 보면 그도 우리 조선을 경계하는 마음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아요? 더욱이 지금 명은 어린 황제가 즉위해 조정이 불안한 상태요. 지금 저들은 요동 같은 변방에 힘을 기울일 형편이 아니에요. 이 천기를 놓치면 어느 때 고토회복을 이루겠소?”
― 지난번 세자책봉 문제로 정안군(방원)·희안군(방간) 같은 신의왕후 소생들의 불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공도 많은 정안군이나 첫째부인의 소생이며 장자 역을 해온 영안군(방과)이 계승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아니었습니까. 방원 측의 사람들은 대감께서 방석을 책봉할 것을 강권했다며 미워하는 마음이 아주 크지요?
“알지요. 이 사람들이 지금 일을 벌일지도 모르지요. 정안군 같은 왕자는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를 사람 아닙니까. 기미가 이상하다는 보고가 있어 조금 경계는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방석을 세자로 강권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개국에 공이 크고, 나이도 많은 왕자들이 세자로 책봉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정안군을 염두에 두었지요. 그런데 금상(今上, 태조)과 승하하신 신덕왕후께서 방석을 책봉하고자 하는 뜻이 워낙 강해 차마 말릴 수 없었소. 게다가 금상은 정안군을 상당히 꺼리지 않습니까. 고려때 과거에도 합격할 정도로 재능도 있고, 사람이 호활한 데가 있지만 잔인한 성격 때문에 꺼리는 것 같소. 나 자신도 정안군이 포은(정몽주)을 격살했기 때문에 살 수 있었지만, 금상은 존경하는 포은을 잔인하게 죽인 것에 대해 화까지 내지 않았소?”
― 정안군과 가까운 이들은 대감께서 권력 욕심이 커서 정치권만이 아니라 왕가에서 가져야 하는 병권까지 장악하고 있다는 비난을 한 바 있습니다. 재상으로서 대감에게 권력이 굉장히 집중돼 있는데 권력분산을 통해 적대세력과 타협할 의향은 없습니까?
“정안군 쪽의 사주를 받는 변중량이란 사람이 그런 비난을 하다 유배당한 바도 있소. 요즘도 내가 임금의 권한에 속하는 일까지 한다는 뒷공론이 있는 것도 알지요. 하지만 정권과 국권이 어찌 왕가에 있겠소? 내가 일찍이 밝혔듯 군주는 나라에 의존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존합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면서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권력은 오로지 백성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권력을 왕이 마음대로 쓰게 해서는 안될 일이오. 게다가 왕은 세습되는 존재입니다. 그런 만큼 현군이 매번 나온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그러나 재상은 능력이 뛰어나야 발탁되는 자리입니다. 이런 재상이 왕권을 적절히 견제해야 합니다. 그래서 왕은 정책의 대강만 재상과 협의하고, 세부적인 정책집행의 실질적인 권한은 모두 재상에게 속해야 합니다. 이래야 정치가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해집니다.”
遼東 고토회복이 필생의 숙원
거의 입헌군주제를 떠올리게 하는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를 정도전은 이상적인 체제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정도전의 이런 생각은 강력한 왕권 중심의 정치를 지향하는 이방원과는 대척점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실록에 의하면 점쟁이 안식이 “세자의 배다른 형 가운데 왕이 될 사주를 타고난 이가 하나만이 아니다”라고 하자 정도전은 “곧 그들을 제거할 것인즉 어찌 근심하겠는가”라고 말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태조의 요양을 위해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의논하자는 핑계로 왕자들을 대궐로 모은 뒤 이들을 죽이려 했다는 기록도 눈에 띈다. 민감한 문제인지라 넌지시 물어보았다.
― 혹시 정안군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무슨 소리요? 그런 대역을 내가 어찌 생각한다는 말이오? 또 어찌 그런 무리한 일을 저지를 까닭이 있겠소? 사병혁파도 거의 이뤄지고 있고, 요동정벌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어찌 내분에 시간을 버릴 틈이 있겠소? 금상이 방원을 꺼린다 하더라도 아들이오. 어찌 왕손을 신료의 손으로 죽일 생각을 하였겠소? 그것이야말로 대역죄 아니오?”
정도전은 이 대목에서는 펄쩍 뛰며 부정했다. 그럴 것이다. 지금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다. ‘성공한 쿠데타’의 주역들이 벌인 역사에 대한 분칠이다.
― 대감께서는 태조를 한고조에, 스스로를 장량에 비유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느 때부터 새로운 왕조 창업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습니까?
“허, 내가 술자리에서 한 말을 사관께서도 들은 모양이오. 그저 한잔 술로 국사에 지친 마음을 풀어놓을 때 한 말이 다 퍼지니, 어디 마음 놓고 술 한 잔 하겠소. 내가 그런 말을 하기는 했소. 금상이 나를 믿고, 내가 금상을 의지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소이다. 금상을 처음 만난 것은 15년 전(1383)이요. 그때 금상이 동북면 도지휘사로 있을 때였소. 나로서는 10년에 걸친 야인생활의 끝 무렵에 있을 때요. 그때 고생도 많이 했소. 손바닥만한 밭뙈기에서 직접 내 손으로 농사도 지었고, 양식이 떨어져 이웃의 농민에게 빌려 먹기도 했소. 그렇지만 옛 주나라 때와 같은 올바른 정치를 펴 백성이 평안을 누리는 세상을 만들 꿈을 한순간도 놓지 않았소. 10여권의 내 졸저들 대부분도 그때 쓰고 구상한 것이오. 10년간 벼슬살이를 하다 10년을 야인으로 백성 곁에서 지내보니 백성의 삶이 얼마나 곤궁한지 뼈저리게 깨달았소이다. 가난한 농민들은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어 개·돼지만도 못한 생활을 하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소. 내 생활도 그들과 별반 다를 것도 없었소. 그런데 부자들은 땅이 넘쳐 산과 내의 경계가 그대로 그들 전답의 경계가 될 정도였소. 가난한 자 계속 가난해지고, 부자는 점점 더 부자가 되는 형국이오. 이게 어찌 사람의 도가 행해지는 세상이었겠소. 그러나 들려오는 조정의 소식은 어둡기만 했소. 백성들을 위하는 정치는 찾아보기 힘들었소. 이런 선비와 권세가를 지탄하는 백성의 소리를 매일 같이 들었소. 맹자의 ‘민심을 잃으면 천하를 잃는다’라는 역성혁명의 사상이 어찌 가슴 속에 파고들지 않았겠소? 나는 그 가능성을 금상에게서 보았소. 무릇 혁명은 정당성과 함께 그것을 이룰 무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오. 금상은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민을 근본으로 두고 있는 장수라는 것을 동문들에게 들어 익히 알고 있었소. 함흥으로 금상을 찾아가 천하일을 논해 보니 역시 소문과 다르지 않았소.”
― 혁명 과정에서 동문수학했고, 존경해 마지않던 포은도 혁명파에 의해 격살됐습니다. 대감께서는 스승이었던 목은(이색)도 극형에 처하라는 상소까지 올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심정이 참으로 복잡했겠습니다. 스승에 대해서까지 이런 상소를 올려야 했습니까.
“그렇지요. 포은은 나와 다섯 살 차이지만 존경하는 마음이 어찌 컸던지 부모요, 스승과도 같은 마음이 들었지요. ‘하늘이 달가(정몽주)를 낸 것은 참으로 우리 도(道)의 복’이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백성의 삶을 결정지을 정치 앞에서 어찌 사사로운 정을 내세울 수 있습니까. 포은 역시 그가 죽던 해에 나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금상이 말에서 떨어져 부상당해 움직이지 못할 때 공양왕에게 나를 죽이라는 상소를 올리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공양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비밀리에 측근인 김귀련 등을 시켜 나를 고문해 죽이려 했습니다. 정안군이 선죽교에서 포은을 격살하지 않았다면 나는 고문당해 죽었을 것입니다. 이런 포은을 나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길이고, 나는 나의 길을 갈 뿐입니다. 목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목은은 온건개혁파의 입장에서 우리의 역성혁명을 일관되게 반대했을 뿐더러, 토지개혁 같은 백성에게 꼭 필요한 정책 시행에 반대했습니다. 이런 인사들이 새 왕조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선비들을 선동하는 중심적 위치에 있으면 정권 자체가 위태롭습니다. 집권 초창기부터 불안 요소가 있으면 강력한 개혁정책을 펴나갈 수 없습니다.”
― 토지분배 같은 개혁정책을 목은이나 포은 같은 도덕적이고 개혁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분들이 반대했다는 것은 조금 의외입니다.
“아무리 성인의 도를 배우고 익혀도 처지에 따라 정치노선이 갈리는 것 같습니다. 권문세가와 달리 한때 같은 정치노선을 걸었던 우리 이색 문하의 신진 사대부들 역시 마찬가지였소. 목은이나 포은 같은 분들은 일찍부터 관직에 진출해 아무래도 경제적 기반도 튼튼히 닦아 놓았죠. 공민왕이 정치에 의욕을 보였던 즉위 초기에 ‘초야의 신진은 감정을 감추고 행동을 꾸며 명망을 탐하다 귀해지면 집안이 한미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대족과 혼인하여 처음의 뜻을 저버린다’고 신진사대부를 비판한 바 있습니다. 일찌감치 자리잡은 이들이 중심을 이룬 온건파는 아무래도 토지개혁에 미온적일 수밖에 없지요. 우리가 정권을 잡고서도 토지개혁을 이루는 데 3년이나 걸렸어요. 토지문서를 불태우는 데 사흘이 걸릴 정도였고, 대대적인 양전(量田, 토지측량)사업을 벌였어도 애초 계획했던 개혁방안을 다 실현하지 못할 정도였소. 토지란 하늘이 내린 것인데, 권세가들이 다 제 것으로 알고 독차지하려 들지 않았소? 애초는 계민수전(計民授田)이라 하여 사람 수대로 나눠 주려는 것을 관리 중심으로 줄 수밖에 없었소. 일반 백성에게는 한 뼘의 땅도 내주지 못했으니 안타깝소.”
―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식이란 것은 증거도 없는 데 힘으로 밀어붙인 것 아닙니까.
정도전은 이 질문에 좀 곤혹스러워했다. 아무래도 정권의 정통성과 연결되는 질문이어서일 것이다. 조금 망설인 뒤 상대가 후세 사람인 점을 상기해서인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 그렇소. 그러나 창왕이 자라면 우리에게 칼끝을 돌릴 것은 한눈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오. 저들 수구세력들이 어린 창왕의 주위를 둘러싼 뒤 서서히 자신들의 힘을 키워 나가는 것도 확실한 것이었소. 운이 다한 왕씨 일족의 사직은 문을 닫아야 하는 것 아니오. 명군이던 공민왕도 말년에는 얼마나 패륜의 극을 달렸소? 우왕도 계모를 강간하려고 하지 않았소? 이런 왕씨에게 어찌 천하 백성의 운명을 맡기겠소? 피 흘리지 않고 새로 사직을 열기 위해 그랬던 것이라고 이해해 주면 좋겠소.”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자식이란 정치적 조작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식의 명예혁명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배체제가 완전히 뒤바뀌는 대격변인 조선 건국은 이런 정치적 조작이 있었기에 내란 없는 무혈혁명으로 완수될 수 있었다.
― 별로 기분이 안 좋은 얘기일지 모르지만, 외가 쪽에 종의 핏줄이 있어 그 주인 쪽인 우현보 가문의 다섯 사람을 죽였다는 얘기가 돌고 있습니다. 또 이로 인해 도량이 좁고 정치보복을 했다는 말들도 오가고 있습니다. 정말 가문의 내력을 숨기기 위한 모살이었습니까?
“허, 핏줄을 가지고 정말 사람을 많이도 괴롭힙니다. 고려 말에도 정몽주의 사주를 받은 김진양이란 자가 ‘정도전은 미천한 신분으로서 몸을 일으켜 당상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니, 미천한 신분을 가리고자 본주를 제거하려 했다’는 상소를 한 바 있습니다. 정쟁이 치열할 때마다 이 문제가 꼭 거론되니 한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 드러난 사실을 숨기려고 사람을 죽이겠습니까. 물론 대간 직에 있던 우현보 가문의 사람이 내가 관직에 나갈 때 자신 가문의 종의 자식이라며 서명하지 않아 괴롭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원한 때문만은 아닙니다. 내가 포은이나 목은에게 원한이 있어 그들을 죽이려 했습니까. 우현보 가문은 수구파라 언제 반역의 씨앗이 될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죽였던 것입니다.”
자조(自嘲)
외조부 때의 핏줄 내력 때문에 이확 등 쟁쟁한 유신들의 정치적 공격을 받기도 하고, 관직 임용에서도 걸림돌이 되었으니 정도전에게는 이 문제가 연좌제보다 더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의 행동이 원한 때문인지, 정치적 고려 때문인지는 그 자신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 가문의 핏줄에 대한 시비는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 등 태종 측에서 기록한 역사에는 빠지지 않고 나와 있다. 정적에 대한 공격이라 하더라도 당대로서는 엄청난 치부로 여기는 사실을 빠지지 않고 기록하는 것은 너무도 잔혹하지 않은가. 우리 현대사에서도 정적에 대해 핏줄보다 더 무서운 사상 시비와 공산주의 활동 전력을 걸고넘어진 사례가 비일비재하였으니 잔혹한 역사는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 바쁘신데, 너무 오래 시간을 빼앗은 것 같습니다. 가벼운 질문 하나만 하고 끝내겠습니다. 8년 전 호랑이를 잡아 진상하는 것을 반대한 적이 있죠? 귀한 물건인데 왜 반대했습니까.
“허, 그거 한참 오래 된 일인데…. 사관께서는 별일을 다 기억하고 있구려. 고려 공양왕 2년 때의 일인데 큰 범을 잡아 바치는 자가 있었소. 지금도 그런 점이 없지 않지만 당시 공물을 마련하는 일이 보통 번거로운 것이 아니었소. 그런데 조금 신기한 것이 있다 하여 바치는 일이 늘어나면 그것이 관례가 돼 고을 수령들이 백성들을 괴롭힐 것이 분명하오. 더욱이 큰 범을 수십 명이 메고 왔으니 얼마나 번거로웠겠소. 더구나 호랑이 고기는 제사에도 쓰지 못하는 것인데 이런 불필요한 것이 또 어디 있겠소?” 정도전다운 실용주의와 민본주의를 보여주는 특이한 사례다.
이 질문을 끝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그리고 며칠 뒤인 1398년 8월26일 밤 정도전은 방원이 주도한 ‘1차왕자의 난’때 기습받아 참살 당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도전이 살려 달라며 애원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죽음이 있기에 난처한 일을 당해도 바른 길을 잃지 않는다”고 했던 그가 이렇게 비굴한 행동을 할 리 없었다. 그가 1차 유배를 갈 때도 당시 실력자 염흥방이 구해 주겠다며 회유했으나 “나랏일을 주장하다 임금의 명을 받아 유배 가는데 당신이 나설 일이 아니다”라며 당당하게 유배지로 갔던 그였다. 정도전은 비굴한 처신 대신 죽기 전 ‘자조’(自嘲)라는 시를 읊고 당당히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죽음 앞에서도 기개를 잃지 않았던 혁명가 정도전은 그의 최후를 이렇게 읊었다.
"조심하고 조심하여 공력을 다해 살면서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네
삼십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온 사업
송현방 정자 한잔 술에 그만 허사가 되었네 "
유방이 장량을 쓴 것이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쓴 것이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 왕조를 일으킨 정도전이 술에 취하면 가까운 인사에게 종종 했다는 말이다. 유방을 보필해 초·한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한 제국을 건설했던 한나라 역사의 주역은 유방이 아닌 명참모 장량이었다는 정도전의 말은 곧 자신이 장량과도 같다는 말이었다. 이런 정도전의 대단한 자부심은 사실과 부합한 것이었다.
그가 활동했던 고려 말기는 권문세족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고, 고려 왕조의 권력누수가 진행될 만큼 진행된 시점이었다. 이런 시대적 전환기에 새로운 왕조의 창업을 최초로 기획한 인물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이성계가 지존의 자리에 오르기 9년 전인 1383년 정도전은 이성계를 방문했다. 당시 이성계는 남부지방에 출몰하던 왜구를 격퇴하고, 북방에서 침입해 오던 홍건적의 난을 진압하면서 백성들 사이에 스타로 떠오른 유력한 무인이었다.
그와 쌍벽을 이루던 최영이 기득권을 쥔 권문세족의 일원으로서 보수세력을 대표하고 있었다면, 이성계는 변방의 무인으로서 고려의 중앙에는 이렇다 할 줄이 없는 신흥세력이었다. 그러나 최영이 관군을 지휘하면서 사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이 거의 없었던 반면 이성계는 가별초라 불리는 일종의 사병집단이 있었다. 이런 조건을 정도전은 눈 여겨 보았던 것일까. 정도전은 이성계를 만난 자리에서 잘 훈련된 그의 군사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훌륭합니다. 이 정도의 군사로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이성계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정도전은 동남방의 왜구를 치는 것을 말한다고 짐짓 딴청을 피웠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역성혁명을 의미하는 시 한수를 이성계에게 전했다. 정도전이 기획한 혁명의 단초는 이렇게 마련됐던 것이다.
종의 핏줄이란 굴레
정도전은 1342년 외가였던 충청도 단양에서 출생했다. 친가는 경북 봉화에 있었다. 5대조가 이 지역의 아전인 호장(호방)을 지낸 향리 집안이었다. 아버지 정운경은 고려 말에 과거에 합격해 형부상서(법무장관)까지 올랐고, “고려사” ‘양리전’(良史傳)에 기록된 인물이었다.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장관직에까지 오를 정도의 실력과 인품을 갖췄던 것이다. 무난해 보이는 가계인 듯하지만 정도전에게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따라다닌 핏줄의 굴레가 있었다. 바로 외조모가 노비였다. 그의 정적들은 정도전을 공격할 때마다 ‘종의 자식’이라는 비방을 빼놓지 않아, 그의 평생의 한이 되기도 했다.
15~16세때 당대 최고의 학자 목은 이색 문하에서 정몽주·권근·이숭인 등과 함께 공부했다. 이색 문하의 선비들은 고려말 신진사대부로서 개혁세력을 이룬다. 1362년 스무살의 나이로 대과에 급제, 벼슬살이를 시작해 예의정랑·성균관 박사 등으로 일했다. 평탄할 것만 같았던 그의 관료생활은 이인임·경복흥 등 보수파의 친원정책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파란을 맞았다. 신흥강국 명 대신 쇠퇴하는 원나라를 선택하는 것은 국익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지만, 이인임 일파는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공민왕 대의 배원정책 대신 친원정책으로 선회했다. 정도전은 자신을 원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영접사로 지명한 경복흥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영접사로 가면 원나라 사신을 목 베어 버리든지, 그들을 묶어 명나라로 보내겠다.”
정권을 잡고 있던 수구파의 실력자 경복흥과 정면대결을 선언한 셈이었다. 당연히 정도전은 파직되고 전남 나주로 유배되었다. 당시 정몽주·이숭인 등이 같은 입장에 섰다 유배가게 되었는데, 이들은 1년 정도 지나 정계에 복귀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그의 강경한 입장 때문이었는지 3년간의 유배생활을 끝내고도 7년을 더 야인으로 떠돌아야 했다. 일종의 정치규제자로 10년을 묶인 셈이었다. 10년간을 정치낭인으로 떠돌면서 경제적으로 곤궁해 농민들에게 얻어먹고 살 지경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곤궁하고, 정치적 능력을 발휘할 힘이 전무했던 이 시기에 정도전은 백성들 속에서 살며 민초에 기반을 둔 새로운 국가의 틀을 짜고 있었다.
명실상부한 조선 왕조의 설계자
10년간의 낭인생활은 1384년 명나라 사신으로 가는 정몽주의 수행원인 서장관으로 임명되면서 끝났다. 명나라에 다녀온 후 정도전은 종3품직인 성균관 제주를 하사받아 다시금 정치무대에 서게 되었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이성계를 보필해 개혁을 가속화했다. 1391년 조준 등과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단행해 고려왕조 최대의 정치적 과제였던 귀족에 의한 토지 독점과 이중 삼중의 수탈구조를 일거에 혁파했다. 고려 왕조를 지키려는 정몽주·이 색 등의 온건개혁파와 새 왕조 건설을 통해 근본적인 개혁을 이루려는 역성혁명파 간의 권력투쟁은 역성혁명파의 승리로 끝났다.
정몽주 역시 이성계와 정도전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을 만큼 봉합되기 힘든 갈등이었던 것이다. 1392년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가 임금으로 즉위하면서 권력은 개혁파의 손으로 완전히 넘어왔다. 이성계에 의해 1등공신으로 책봉된 정도전은 이때부터 그가 구상해온 민(民)에 기초한 새로운 국가 건설에 혼신의 정열을 바쳤다. 대대손손 권세가의 자제들에게 넓게 열렸던 인사제도를 고쳐 능력 위주로 신진관료를 뽑는 과거제를 새롭게 정비했다. 교육 진흥을 위한 새로운 교육제도도 갖추었다. 그리고 군왕이 자의적으로 통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법전인 “조선경국전”을 편찬했다. 고려 말의 심각한 부패상을 목격했던 그였으므로 부패 방지에 초점을 맞춰 언론과 감찰 기능을 강화하는 정치조직의 틀을 구상했다. “경국문감”이 이러한 구상의 일단을 담은 저작이다.
정도전은 말 그대로 조선 왕조의 설계자였다. 국호인 조선은 고조선에서 따왔다.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한 국명이었다. 수도 한양도 직접 설계했다. 동대문·남대문 등 사대문과 서소문 등 4소문의 이름을 모두 그가 지었다. 5부 49개 방과 경복궁의 전각 이름도 그가 지었다. 스케일이 큰 창업자답게 그는 군사조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잃어버린 요동 땅의 회복과 왜구의 잦은 침탈을 막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조성했다. 고려 말의 권력투쟁 때문에 난립했던 사병을 혁파해 조선 국군으로 일원화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혁파한 사병을 한 군데로 모아 새롭게 대오를 정비하는 진법(陣法)을 개발했다.
끝이 없어 보이던 그의 에너지 분출은 이방원의 급작스런 쿠데타에 의해 끝났다. 강력한 군주제를 지향했던 이방원에게 입헌군주제랄 수 있는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던 정도전은 제거해야 할 걸림돌이었다. 방석의 세자 책봉에 강력한 불만을 품은 데다 사병 혁파 등을 통해 세력기반이 위축되는 데 불안을 느낀 이방원은 1398년 ‘1차 왕자의 난’으로 불리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도전은 사태 초기에 가장 먼저 피살되었다. 500년 조선 왕조의 밑그림을 그리고, 초석을 다져놓은 혁명아다운 최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