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안재오
2004.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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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소외된 교육 개념의 정립을 위하여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필자의 교육개혁 서적 『교육공화국 - 공화주의 교육으로 미친 나라를 바로 세우자』에 나타난 한국의 교육 현실과 정책을 비판하는 개념들을 좀 더 새롭고 근원적으로 정립하기 위한 것이다.
<삽화1> 교육공화국(cafe.daum.net/edurepublic) 홈페이지 첫 화면
그리고 이 책은 『교육공화국』과 비교해 볼 때, 각국의 교육제도 비교보다는 한국의 실증적인 교육현상 묘사와 분석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입시지옥과 학벌주의의 폐해와 더불어 각종 교육기관들의 고유한 모순을 많이 드러내었다.
우선 공화주의 개념부터 다시 시작하려 한다. 필자는 공화주의 교육을 소외된 교육과 서로 대립시킨다. 소외된 교육은 다시 말하면 (집단) 이기주의 교육이다.
이런 근본적인 동기는 필자가 2003년 2학기 명지대학교 용인 캠퍼스에서 미학 강의 시간에 교육개혁을 미학과 연결시키다가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필자는 대학강의의 첫 시간에 항상 한국의 교육 모순과 극복을 강조한다. 그런데 어떤 학생이 미학(美學)과 교육 모순의 관계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길래 나는 즉시 “미(美)와 예술 역시 현재를 모방하고 표현하는 것이고 한국의 현재란 교육의 소외를 통해 규정될 수 있다”라고 대답했다.
필자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를 교육의 소외에서 찾고자 한다. 소외 개념은 맑스의 노동의 소외 때문에 유명해 졌지만 그 이전에 헤겔도 정신의 소외 개념을 말하였다.
소외란 추상적으로 말해 사물의 본질과 현존의 불일치를 말한다. 이는 특히 인간 존재의 해명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면 인간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소외된 인간은 자신의 본질과 현존의 불일치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헤겔의 정신의 소외 그리고 맑스의 노동의 소외보다 더욱 근원적인 소외는 인간의 죄 문제, 다시 말해 기독교 신학적인 소외, 곧 인간이 신으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죄 때문에 인간이 신으로부터 분리된 것이 근원적인 소외 현상이다.
이런 문제를 여기서 모두 다룰 수는 없고 필자는 주로 교육의 소외라는 문제에 관심을 집중해 보려고 한다.
교육의 소외란 한국의 교육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는 자율적인 교육이 아니라 타율적인 교육을 말한다. 인간의 자유와 자율성은 인간의 생명 그 자체이다. 인간 존재는 동물들과는 달리 단순히 먹고 사는 것만으로 만족을 하지 못한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이다. 그의 존재는 우주 전체, 세계 전체와 맞먹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를 흔히 영혼, 정신 혹은 의식, 주체 등의 말로 표현한다. 이런 것이 사라지면 아무리 동물적 생존의 조건이 양호해도 인간은 살아갈 목적과 의미를 잃어 버린다. 이런 존재 양식을 한마디로 자유라고 한다.
1775년 미국 독립 혁명 시기에 당시 미국의 독립 운동가 였던 페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절규를 하여 자유가 생명이나 평화보다 더 소중한 존재임을 밝혔다. 그 다음해에 미국은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현재 한국 사회는 자유를 상실했다. 물론 겉으로는 민주화를 이루어 자유와 평등을 달성했지만 그 내용을 보면 사회 도처에 자유보다는 굴종이, 그리고 양심보다는 치욕적인 삶이 강요되고 있음을 목격한다. 그리고 인간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다시 말해 한국 사회는 그 영혼이 심각한 질병에 걸려있다. 공직자, 정치인 그리고 각종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부패와 탐욕이 악취를 뿜고 있다. 공법과 사회정의는 무시되고 비리와 부조리만 득실거린다. 경제는 침체되어 실업자는 늘어만 가고 신용 불량자와 가계부채, 농가 부채는 늘어만 간다.
한국사회는 박정희와 그를 잇는 군부세력의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와 자유를 쟁취했지만 사회적 불평등은 독재시대보다 더 심화되었다. 민주화가 경제부흥을 가져오지 못하고 국민소득은 10년 내내 제자리 걸음을 하고 그런 사이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심화되었다.
95년이래 한국 경제는 침체에 빠지고 우리나라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다.
이런 경제 침체의 원인은 복합적이나 그 중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경제에 너무 규제가 많다는 점이다. 가령 수도권에는 함부로 공장이나 기업을 세우지 못한다, 왜냐하면 국토의 균등한 발전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수도권 공장총량제'라는 법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수도권 과밀화의 주된 원인은 교육 때문이다, 즉 좋은 대학들이 수도권에 많이 있고 그러니 지방의 인재들이 자연히 서울로 수도권으로 몰린다. 이런 경우 전대학 공영화, 평준화를 통한 인구 분산책을 유도할 수 있다.
따라서 교육공화국 운동은 교육의 평등을 통한 국토와 국민의 균등적 발전 이외에는 모든 국가적 통제를 원칙적으로 폐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결국 노무현 정권 이래의 극심한 경기침체와 청년실업은 IMF경제 위기 이후의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비롯된 부분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국민적 지혜와 창의성의 부족으로 생긴다. 여기에는 결국 교육을 통한 인간의 창의력, 지성, 개성 그리고 도덕성의 연마가 부실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매일 자살하는 사람의 수가 40명에 달한다. 이는 거의 대부분이 신용불량과 부채 등의 경제문제 때문에 생긴다. 인간의 생명과 인격은 무시되고 작은 공포에서 자신과 타인을 죽이거나 괴롭힌다. 生活苦를 비관한 일가족 동반 자살 사건은 더 이상 화제거리가 아니다. 자살률이 세계최고에 달한다. 가족간의 유대와 사랑이 파괴되고 반인륜적인 행위가 극에 도달한다. 젊은이들은 희망을 잃고 허우적거린다. 심지어 아버지가 자신의 간식, 즉 김밥을 몰래 먹었다고 자기 아버지를 죽인 한 청소년이 나타났다. 요즘은 정말 T.V. 뉴스 보기가 무섭다. 백주에 거리에서 부자집 여자를 노리며 명품을 몸에 지닌 여성들을 납치, 금품탈취 그리고 강간하는 강도들이 횡행한다. 아파트에 혼자 귀가하는 여성을 뒤에서 흉기로 치는 이런바 퍽치기가 유행한다.
필자는 이런 사회적 질병의 원인과 대책을 교육에서 찾고 있다. 사회 부조리는 복합적인 요인을 통해 발생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인간의 합리적 노력으로, 예를 들면 제도 개선을 통해,치료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교육이다.
그리고 본문의 신문 인용부분은 모두 허가를 받았음을 미리 알린다. 가령 조선일보의 인용부분의 경우 필자가 그 신문사에 전화를 하니 “출처를 밝히고 인용하면 저작권의 침해가 없다”라고 담당자가 말을 했다. 아무튼 이 책을 쓰는데 필자는 조선일보의 기사를 많이 이용했다. 조선일보, 특히 디지털 조선일보에 많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리고 이 책을 집필한 서울 시립대 인문과학 연구소에 감사를 표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민족의 살길을!
1-2. 노예 교육과 자유인의 교육
위의 맑스의 말처럼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은 입시경쟁을 비롯한 각종 시험을 통해 출세하려는 사람들간의 전쟁 곧 경쟁이다. 이런 현상을 흔히 학벌주의라고 부른다. 이런 시장주의 교육 체계 내에서 학생들은 시험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열심히 공부하라는 사랑하는 부모님들의 충고와 존경하는 선생님들의 간곡한 권유는 모두 동일한 수사학을 구사한다 : “이 모든 것이 너희들 잘되기 위한 것이다”. 학생들 역시 이런 부모와 교사들의 사상에 공감하기 때문에 괴롭지만 더 많이 공부하기 위하여 수면시간을 줄이고 제대로 놀지도 먹지도 못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기계로 자신을 주조해 나간다.
일부 학생들은 훌륭한 상품으로 인정 받고 싶어서 스스로가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동물로 전락한다,
최근 서울 강남 지역의 일부 학원들은 학생들을 때리는 것이 성적을 올리는 좋은 교육 방법이라고 자랑을 했다. 아이들 역시 학원 선생이 두드리는 폭력은 사랑의 매라고 달게 받아 들인다. (거기에 비해 학교 선생이 휘두르는 매는 폭력이라고 당국에 고발한다)
이런 한국의 강제적, 동물적 교육 방식에 비해 고대 희랍인에서는 자유로운 인간의 학습과 교육을 중시했다. 특히 플라톤은 절대로 강제로 배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교육은 억지로 시켜서는 안되네” 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자유인은 노예처럼 강제로 부릴 수는 없다. 특히 배움(학습)같은 정신적인 활동은 더욱이 강요되어질 수 없다고 플라톤은 그의 대저 『국가』에서 선언하고 있다.
“그 어떤 강제적인 배움도 혼(마음)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테니까”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하고 있다. 물론 동물이나 노예처럼 신체의 고통을 통하여 배울 수 있기도 하다. 다른 능력은 몰라도 암기력 같은 하급의 정신능력은 때려서 가르칠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엄밀히 말해서 교육이 아니라 조련이라고 해야 한다. 한국의 학습은 이처럼 훈련 아니 조련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여간 동물처럼 때리지는 않더라도 한국의 학생들은 가정과 학교에서 마치 짐승이 조련되고 사육되듯이 계속 공부하도록 길러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 대학원생은 자신의 사설학원 강사체험을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참을 수 없는 공부의 끔찍함
몇 주 전, 서울의 한 사설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신의 학원 일을 잠깐 도와줄 수 있느냐는 것이 연락의 목적이었다. 중학교 중간고사 기간이 코앞에 닥쳐 저녁에 학생들의 자율학습을 감독할 일손이 학원 쪽에서는 절실히 필요했는데, 사람 구하기가 녹록지 않았던 모양이다. 학원장이 자율학습 감독자 좀 구해달라고 학원 선생들에게 주문을 했던 것 같고, 그런 처지에 놓인 내 친구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에게 어렵사리 부탁을 했던 것이다. 나는 이에 기꺼이 응했다. 물론, 응낙의 이면에는 내가 공적으로 혹은 사적으로 성토해 마지않았던 입시 전장의 한복판에 서서, 이 두 눈으로 직접 그 공간을 목격해보고 싶다는 호기 어린 욕심도 개입되어 있었다. 그렇게 선생님 아닌 선생님으로 지내면서, 내가 그 3주 동안 ‘현장’에서 목격했던 것들을 이 지면에 적어보고자 한다.
저녁 무렵, 학교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은 학원으로 달려왔다. 이제 겨우 십대 중반에 이른 중학생들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그 아이들의 표정이 너무 지쳐 보였다. 학원에 도착하여 자리에 앉자마자 빡빡한 학원의 계획표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사불란한 움직임들. 아이들의 어깨는 언제나 축 늘어져 있었다. 중간에는 15분 정도의 간식 시간이 있었는데, 그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얼마만큼의 생기를 되찾는 듯했다. 그 때서야 나도 ‘아, 이 아이들이 십대구나!’라는 생각을 퍼뜩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 섬광과도 같은 15분의 시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의 귓가에 울려 퍼지는 건 “모두들 제자리로 돌아가서 공부해!”라는 학원장의 단호한 음성이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간식 시간 전에 보았던 참고서와 문제집을 다시 펼쳐들었다. 불과 몇분 전에 넘쳐나던 활기는 그렇게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며칠 뒤, 본격적으로 중간고사 기간이 시작되자 아이들은 더욱 분주한 모습으로 움직였다. 꾸벅꾸벅 조는 아이들도 점점 늘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조용히 다가가 왜 조느냐고 물어보면 모두들 하나같은 대답이었다. 며칠 동안 계속 밤샘을 했다는 것이다. 안쓰럽다는 생각에, 나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책상에 자꾸만 이마를 찧어대는 아이들의 뒤로 가서 어깨를 토닥여주곤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러한 상황을 어색하게 받아들였다. 그 아이들에게 돌아오는 졸음의 대가란 항상 호된 꾸지람이었으니, 어색해 할 만도 했다. 언제나 그렇게 학원의 밤은 여유 없이 깊어갔다. 밤 10시가 되면 벨소리가 울렸고, 아이들은 썰물처럼 학원 밖으로 빠져나갔다. 한 아이에게 귀동냥한 바에 의하면, 자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친구들은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서도 또 몇시간씩 공부를 해야 할 ‘임무’가 주어져 있게 마련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나가고 없는 빈 강의실에 있으면, 나는 마치 잔혹한 전쟁의 광풍이 훑고 지나간 폐허의 땅 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에 젖어들고는 했다. 그러면 걷잡을 수 없는 우울함이 밀려들었다. 강의실에 어지러이 널린 책상과 의자를 정리하다가 문득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면 서울의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은 뿌옇기만 했다. 몇개의 별이 총기 없이 반짝일 뿐이었다. 그럴 때면 ‘별빛이 초롱초롱하다’라는 말은 그저 옛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땅에서 ‘부모’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은 우리 아이들의 ‘인간답게 살 권리’를 너무 쉽게 짓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 이 순간에도 여전히 집과 학교와 학원을 아무런 감동 없이 오가고 있을 대한민국 아이들의 핏기 없는 얼굴을 떠올리다 보면, 나는 몇년 전에 비디오로 보았던 앨런 파커 감독의 영화 〈핑크 플로이드의 벽〉의 한 장면이 자연스레 연상되고는 한다. 컨베이어벨트에 실린 학생들이 차례차례 거대한 믹서기 안으로 떨어진 후 벌건 고깃덩어리가 되어 나오는 끔찍한 장면. 그 끔찍한 영화 속 장면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엄연한 사실로 존재한다는 게 나는 더욱 ‘끔찍’하다.
이휘현 자유기고가·대학원생
“모두들 제자리로 돌아가서 공부해!”라는 학원장의 단호한 음성에 “아이들은 간식 시간 전에 보았던 참고서와 문제집을 다시 펼쳐 들었다”라고 저자는 서술하고 있다.
이는 학습이 학습이 아니라 거의 군사훈련을 방불한다는 것이다. 참고서와 문제지는 군인의 총과 무기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강제적인 학습을 매일 반복하는 아이들은 그러나 대학입학 후에는 그 많은 지식과 암기사항을 깡그리 잊어버린다. 필자가 강의하는 대학 강의에 참석하는 대학생들은 그들이 고등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플라톤의 말이 맞았다. 강제로, 억지로 배운 지식은 머리에(영혼에) 남아 있지가 않다.
플라톤이 말하는 강제적인, 노예적인 배움은 영혼에 머물러 있지 않다면 이는 어디에 머물러 있을까? 이는 신체에 붙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체에 붙어 있는 학습이란 결국 동물적 학습인 조건반사 혹은 자극-반응 이론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자극(Stimulus)-반응(Response)이론 수준의 학습은 인간의 신적(神的) 능력인 창조, 발견 혹은 도덕적 양심적 결단과 같은 고차원적인 수준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강제적 학습을 많이 경험한 사람은 실험실의 동물처럼 점점 조건에 대한 반응이 빨라진다. 다시 말해 이들 노예적 학습을 반복한 인간들은 눈치가 빨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노예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분석, 종합, 비교, 개념, 판단 그리고 추론 같은 고차적인 사유능력은 결코 생성될 수가 없다.
맑스의 말을 빌리면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를 상품으로 전락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1-3. 소외된 한국의 교육이 부패한 정치인들을 생산한다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멈춰버린 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 그리고 그런 소외된 교육의 우등생들은 사회에 진출하여 사회 정의를 일구거나 창조적 활동을 통해 이웃을 돕기는커녕 주어진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항상 자기 이익만 추구만 한다.
스스로를 사물화시켜, 상품이 되어버린 학생들의 빈곤은 그들의 노력과 공부에 비례한다. 즉 열심히 배워 좋은 학교에 가서 많이 배울수록 그들의 정신은 돌처럼 굳어 생산력과 창조력 그리고 비판력을 잃어 버린 동태 눈알처럼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좋은 학교 나오고 사법고시에 붙은 한국 사회의 엘리트들은 기껏 한다는 것이 소신있는 행동보다는 윗사람 눈치만 보고, 우등생들은 그가 속한 조직의 악습에 순응하여 동물적 생존을 유지하고 자기 배를 불리는 것 밖에는 별로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학벌을 가진 자들의 정신과 지성 그리고 도덕성은 공허하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거나 활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썩은 정신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비윤리적이고 이기적이다. 이들에게 나라의 법과 제도는 항상 악용되기 위해 존재한다. 그들은 법의 사각지대를 노리는 상어와 같은 자들이다.
최근(2003년 10월부터 2004년 2월 말까지) 제 16대 대통령 선거 자금에 관련한 정당들의 비리가 속속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한나라당은 각 기업들로부터 총700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거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흥미있는 사실은 소위 차떼기로 부정한 정치자금을 받은 정치인들은 거의 같은 학교 출신들이다; 즉 대선 당시 한나라당 재정국장이었던 최돈웅 의원, 이회창 대통령후보 그리고 이후보의 법률특보인 서정우 변호사 등이 모두 한국의 명문 경기고 동문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외에 차떼기로 한나라당 인사들에게 돈을 건넨 현대 자동차의 최부사장 역시 경기고 출신이었다.
“서정우 변호사가 자금을 요청, 차떼기로 넘겨받았던 현대 자동차의 최한영 부사장은 서 변호사의 경기고 10년 후배이며 최 부사장이 자금요청 사실과 전달을 논의한 김동진 부회장은 7년 후배이다. 대선배의 자금요청을 두 명의 후배가 논의, 전달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삽화 2> 서정우 변호사 구속 2002년 대선 때 LG로부터 불법 대선자금 150억원을 수수한 혐의로 서정우 변호사가 2003년 12월 9일 밤 구속 수감되고 있다.
<삽화 3> 차떼기 수법현대차도 한나라당 대선자금을 100억원이 담긴 박스를 스타렉스 승용차에 나눠 실어 경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에서 서정우 변호사(구속)에게 넘겨주는 `차떼기'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주간 현대 2004.3.4일자 기사에 따르면 최근 대우 비자금에 관한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 때문에 한강에 투신 자살한 대우 건설의 전 사장 남상국 씨 역시 경기고 출신이다.
이렇게 소외된 교육을 받은 자들의 사회는 그 구성원들 사이의 인격적인 상호작용을 상실한다, 다시 말해 소외된 교육은 한 사회를 소수의 부자들과 대다수의 서민들로 전체를 양분하고 그 사이의 다리를 잘라버리고 계급적 적대감을 고취시킨다. 현실적으로 한국 사회의 상류층이란 아파트 및 부동산 투기를 할 줄 아는 자들이고 서민들은 그렇지 못한 자들이다.
위의 한나라당의 차떼기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정경유착이 주로 같은 학교 출신들 사이에서 은밀히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그들 명문 학벌을 나온 사람들이 집단이기주의를 행하기 때문에 조직 폭력적인 암거래가 가능했던 것이다. 한국의 좋은 학벌, 명문 학교 출신자들은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덕목은 없고 오직 특권적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집단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반사회적인 경향을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있다.
서울대를 비롯한 명문 학벌은 부정적인 면이 많다. 그래서 혹자는 『서울대가 없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소외된 교육은 학벌 때문에 생긴다. 그러므로 학벌과 입시위주의 소외된 교육 그리고 사교육을 철저히 뿌리 뽑아야 대한민국은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변한다.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문제는 맑스가 말하는 노동의 소외가 아니라 교육의 소외이다. 이는 한국인들이 교육을 못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교육, 즉 입시위주의 교육, 즉 철저히 수동적이며 타율적인 교육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교육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인간을 주어진 환경의 노예로 만든다. 이런 사회는 진정 사람이 살 곳이 아니라 약육강식, 적자 생존하는 동물의 세계일 뿐이다. 그런 곳에서는 인격과 도덕과 양심은 도무지 사는데 도움이 안 된다. 거기서 약자는 오직 굴종과 아첨과 비열함을 살아야 하고 강자는 불법과 불의와 폭력을 먹고 산다. 정치의 세계에서 흔히 보는 줄서기, 해바라기, 철새 등이 이런 비도덕적인 세상의 특징이다.
2. 교육의 소외
위에서 진술한 청년 맑스의 소외 개념을 토대로 필자는 자본주의 하의 교육, 특히 한국이라는 특정한 사회의 교육 형태를 소외라는 측면에서 한 번 검토하고자 한다. 맑스가 말하는 자본주의 하의 4 가지 노동의 소외는 필자가 보기에 노동보다 교육의 문제에 더욱 적합한 분석의 틀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2-1. 학습의 대상으로부터의 소외
보통은 학습과 교육을 분리하지만 교육은 근본적으로 자기 교육이기 때문에 교육과 학습은 서로 교환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교육과 학습을 분리한다면 교육이 수단이고 학습이 목적이 된다, 즉 교육은 학습을 위한 것이다.
학습의 대상, 즉 학습의 생산물에 대한 학생, 즉 학습노동자의 태도를 한번 살펴 보자.
노동자는 일을 통해 자신의 에너지를 창조적으로 사용하여 노동의 대상, 가령 자동차를 만들어 낸다.
학생 역시 그의 학습과정을 통해 지식을 생산해 내야 한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지식을 스스로 이해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간다는 측면에서 학습을 지식의 생산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전문적인 용어로 동화(同化) 혹은 습득이라고 한다. 그리고 기존 지식의 자기화 과정에서 반드시 자신의 새로운 발견이나 발명이 첨가된다.
그런데 이 나라의 학(습)생들은 기존 지식의 자기화에 실패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공부가 오직 대학입시라는 하나의 목표로 집중되고 있으며 대학생들이나 혹은 다른 학(습)생들 역시 시험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험위주의 공부는 기본적으로 암기식이며, 이는 이해나 소화 그리고 내면화라는 과정은 거의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지식은 겉으로만 맴돌다가 시험치고 난 후에는 깡그리 망각의 쓰레기통 속으로 버려진다.
그리고 학습의 동기가 자발적인 흥미나 관심이 아니라 타율적인 강제이기 때문이다. 즉 교육의 관계자들, 즉 부모나 담임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내적 강제를 행사한다 : ‘너희들 잘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지 엄마 아빠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공부 못하면 생존 경쟁에서 낙오한다’. ‘고등학교에서는 열심히 공부하고 대학가서는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하렴’. ‘공부 못해 좋은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면 고생이 심하다’. 등등.
학생들 역시 이런 기성 세대의 논리에 반대할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그들의 신념을 자의반(自意半) 타의반(他意半)으로 수긍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기성세대 아니 사랑하는 부모들이 자녀에게 강요하는 논리는 자세히 뜯어보면 공부의 목적이 사회적 성공 혹은 물질적 안락이라는 것이다. 혹은 자식에게는 자신이 당한 고통과 가난, 그리고 사회적 무시를 자녀들에게는 물려주지 않겠다는 간절한 꿈이 서려있다. 물론 이런 생각은 그 자체로 보면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2-2. 염려
그런데 문제는 학생 자신, 자녀 자신이다. 그들 역시 나이가 먹으면 그런 정도의 생각은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부모들보다 머리가 나쁘다는 것인가? 부모나 교사가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아이들 스스로가 그런 간단한 사실을 모른다는 말인가? 아이들도 나이 먹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 인생 걱정, 앞날에 대한 염려를 충분히, 아니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한다.
그런데 왜 부모들이 자녀의 앞길을 그토록 염려하는가?
물론 가정에서 좋은 생활 습관과 사회생활의 기초는 배워야 한다. 그리고 자녀와의 충분한 인격적 교류와 사랑을 통한 정서 함양은 너무나 소중한 가정 교육의 과제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부모들은 바빠서 이런 사랑의 상호작용 혹은 공동 생활을 통한 사회성, 도덕성 함양은 소홀히 하면서 반대로 자녀의 지식과 취미생활에는 많은 투자를 한다. 즉 부부가 맞벌이하여 애들은 종일 학원에 살다시피 한다.
잘사는 지역에도 애들은 학원 때문에 가정에 붙어 있을 시간이 없다. 그러나 이런 지식 위주의 교육이 얼마나 자녀의 정신을 황폐하게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는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본질을 염려(Sorge)라고 했다. 불교에서도 인생을 백팔번뇌(百八煩惱)로 보지 않았던가? 이런 염려와 근심 그리고 번뇌는 모두 자신의 삶에 대한 것이다, 즉 자신의 미래와 내일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스스로의 염려만 책임지자. 그 외에 성급하고 주제넘게 남의 염려까지 하지 말자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지나친 걱정이나 염려는 간섭이고 개입이다.
아이들 역시 크면 클수록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계획하고 준비한다.
또 인간의 본질은 자유로운 결단과 자기 책임이다.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이요 주체성이다. 타인이 이를 대신할 수 없다, 설령 부모라고 할 지라도 아이의 자유로운 결정과 판단을 기다려야 한다, 물론 너무 어릴 때는 부모가 전적으로 아이를 대신해서 결정하고 책임지지만 성장에 따라 점점 아이는 그간 부모에게 위임한 결정과 판단을 회수하고 독립을 선포한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지배와 양육은 자녀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이다.
한국의 부모들은 너무 자녀의 성장을 기다리지 않고 앞질러 자녀 대신 걱정하고 고민한다. 결국 그들은 아이의 성장과 (잠재적)독립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부모들은 때로 영원히 자녀를 아기 취급한다, 그러니 아이들이 성숙되고 독립이 안되고 평생 부모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사실 한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큰 아이도 아기라고 부른다. 이는 사랑의 표현일수도 있으나 실은 잘못된 것이다. 아이에게 그의 고유한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합당하다.
자녀 교육에 대한 부모의 올바른 자세는 아이들의 성장과 성숙을 기다리면서 아이들이 성숙의 각 단계에서 제대로 활동하고 즐기게 해 주는 것이다. 인간의 발육의 한 단계 한 단계는 그 때 마다 모두 중요하다, 즉 커서 출세하고 잘사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려서 잘 노는 것 역시 중요하다. 따라서 그 부모는 그 때 그 때 마다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신체와 영혼의 성장과 발육이 결핍되거나 방해되지 않도록 보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혼자서 혹은 어울려 잘 놀지 못하고 늘 우울하거나 불만이 있는 애들은 장래의 사회생활, 개인 생활에서 큰 문제를 야기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어릴 때의 학습은 일종의 오락이어야 한다고” 풀이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교육여건은 다 알다시피 유치원부터 대학시험준비에 돌입하는 전면적인 입시전투 체제이다. 선행 학습이나 조기 교육 등은 어린이의 어린이 다움, 즉 아동성(兒童性)을 파괴한다. 그리고 인생의 각 순간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다. 아무리 미래를 준비하는 성장기라고 하더라도 이 역시 그 자체로서 행복하고 만족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 나라 아이들은 (부모들이나 교사들이 말하는) 소위 밝은 미래 때문에 현재가 파괴된다. 즉 그들의 신체와 영혼에 깊숙이 상처가 생기고 있다. 입시 지옥에 직접 노출된 중고등학생들은 차치하고라도 새벽 6시에 벌써 학원가는 버스를 타고 있는 초등학생들, 혹은 조기 영어학습으로 생긴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과의 치료를 받는 부자동네 꼬마들이나 다들 제정신이 아니다.
이들에게 공부란 무엇일까? 학원이란? 영어란? 논술 지도란?
이는 맑스가 본 바로 소외된 노동 아니 소외된 교육이다. 즉 학습의 대상 , 즉 지식이나 공부는 학습자에게 큰 짐으로 다가올 뿐이다. 필자 역시 고등학교 시절 공부에 대한 공포감으로 심한 불면증과 정신장애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필자가 한 때 돌본 한 알코올 중독자는 예전 대학 시험에 낙방한 것이 그 병의 원인이었고 그 때문에 자신의 귀중한 인생을 망가뜨리고 죽음의 골짜기로 기어들어갔다.
이런 경우 지식은 영혼으로부터 소외된다. 지식은 입시공부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아이들은 시험이 끝나자 말자 공부한 흔적을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참다운 학습 혹은 교육은 영혼의 기쁨이다.
나의 외할머니는 내가 너무 오래 공부하는 것을 보고 “재오, 공부 지겹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즉 남들처럼 적당히 공부 마치고 취업은 하지 않고 대학원까지 하고, 또 더 공부하기 위해 외국에 까지 가서 9년간 공부하는 40이 넘은 외손주의 고생과 자기 딸(나의 어머니)에 대한 염려에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렇게 공부해서 부모님 호강도 못시켜 드리고 아직도 시간강사 처지인 필자는 불효 막심한 사람이다.
그건 그렇고 필자는 아직까지 학문의 열정과 진리에 대한 호기심이 식지를 않는다.필자에게 돈과 시간만 주어지면 무한히 더 공부하고 싶다, 즉 연구해보고 싶은 것들이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지금도 희랍어를 조금씩 배우고 있다. 정말 인간은 죽을 때 까지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
2-3. 지식과 숙련
학습은 지식 습득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이 무엇이지 하는 물음은 철학의 심오한 주제이지만, 여기서는 간단히 ‘지식은 사물의 시초(beginning),원인(cause) 그리고 원리(principle)을 추구하는 것’ 이라고 정의한다. 이를 희랍의 자연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는 아르케(Arche) 라고 불렀다. 이런 희랍의 아르케는 요즘은 법칙이나 본질 등으로 불리고 있다.
지식(Knowledge), 즉 사물의 아르케(Arche)는 인간의 영혼 혹은 정신에 의해 포착되어진다. 즉 사람의 영혼이 사물의 아르케(Arche)를 보는 것이 지식의 생성이다. 그리고 지식의 탐구를 위해서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희랍의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은 여유(leisure)가 학문하기 위한 조건임을 밝혔다. 즉 인간은 시간적, 정신적 여유 없이 학문이나 지식 탐구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여유의 문제는 뒤에 다시 다루겠다.
그런데 한국의 학생들은 모두 극도의 시간적 압박과 심적 강박 상태에서 학문과 지식을 추구한다. 이러니 그들은 전혀 지식의 탐구와 학문의 영역에서 발전할 수가 없다. 지식과 지혜란 충분한 시간적 여유 가운데 즐거움을 가지고 연구하는 데서 비로소 열매 맺는 농산물과도 같다. 빨리 결심을 보려고 식물에 비료를 마구 뿌리거나 줄기를 잡아당긴다면 그 식물은 열매를 맺기는커녕 병들거나 말라 죽어 버릴 것이다. 경작의 결실을 거두기 위해 농부가 인내를 가지고 시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교육자나 부모들은 아이가 스스로 결실을 맺기를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
현금의 한국의 주입식, 암기식, 강제적 교육은 이처럼 아이들의 자연적인 발전을 왜곡하고 병들게 하는 부작용을 가진다.
그리고 대학에서 배우는 지식이나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이나 그 기본은 같다. 양자 모두 아르케(Arche) 곧 사물의 시초, 원인, 원리, 법칙 등에 대해 배우는 것이다. 단지 대학의 지식이 어렵고 초등학교의 지식은 쉬울 뿐이다. 그런데 학습이 이런 사물의 내적 원리나 법칙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시험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때 이는 지식 탐구가 아니라 숙련(skill) 이나 훈련(training)에 해당한다.
지식이 사물의 원인과 원리에 이론적인 학습인데 비해 익숙한 솜씨의 획득하기 위한 숙련이나 기술, 기능 등은 물론 그 자체로서 삶의 가장 소중한 능력 중의 하나가 된다. 가령 청소하는 요령이나 요리하는 방법이 숙련에 해당한다. 혹은 피아노 연습이나 달리기 연습은 그런 실력을 일취월장(日就月將) 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숙련(skill)과 지식(knowledge)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곧 지식은 진리를 추구하고 숙련은 완벽, 완성을 추구한다.
지식은 사물의 본성에 대한 자유로운 탐구이고 숙련은 유용성(有用性)을 목적으로 하는 기능의 연마이다.
그러나 이 둘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똑같이 귀중한 것이고 인간이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 극히 필요한 것들이다.
숙련은 사물의 본성에 대한 연구라기 보다는 하나의 기능적인 훈련이다, 예를 들면 각종 연장이나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이나 혹은 음악의 경우 리듬과 박자 감각을 익히거나 악보를 보고 악기를 연주하는 훈련이 이에 속한다. 숙련은 이처럼 연습(training)이나 훈련(drill) 등을 말하며 이는 기본적으로 어떤 기술을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의 명필 한석봉의 어머니가 불을 끈 어두운 방안에서 떡을 가지런히 썰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바로 이런 것이 숙련을 말한다; 이는 달리 말해 손재주 혹은 솜씨라고도 한다. 이처럼 한 가지 일을 되풀이함으로써 그 일을 완벽히 할 수 있을 때 이를 숙련 내지 기능이라고 한다. 이처럼 숙련은 완벽, 완성을 추구한다.
학교에서 하는 물리, 화학의 실험, 실습 역시 숙련을 요구한다. 가령 교과서에서 설명되는 화학의 실험도 학생이 실험실에서 직접 해보면 제대로 되지 않음을 흔히 경험한다. 물질의 양(量)(quantity)과 질(質)(quality)을 알기 위해서 직접 경험, 실험, 조작해보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학교에서는 학습(learning) 외에도 이처럼 아이들에게 숙련과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영역, 즉 지식과 숙련을 구분하여 각각 따로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 숙련은 학교교육에서 흔히 실기나 실습 혹은 연주, 연습 그리고 만들기 등의 형태를 취한다.
이런 능숙한 솜씨로서의 숙련에 반해 지식은 사물의 원인(cause)과 원리(principle)에 대한 탐구로서 흔히 이론(Theory)이라고 불리어진다. 위에서 말한 아르케(arche)에 대한 지식을 다르게 말하면 이론(Theory)이다.
그런데 한국의 초ㆍ중ㆍ고등학교에서 실습 혹은 실기 교육은 대단히 소홀히 취급된다. 왜냐하면 입학시험과 관련이 없는 실기와 실습 과목은 흔히 무시되고 형식적으로 학습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숙련과 창의력을 중시하는 미술대학의 실기시험 역시 암기식으로 진행된다는 이야기를 한 홍익대 학생으로부터 들었다, 즉 수험생들이 석고상을 스케치할 때, 어떤 이들은 아예 석고상을 보지도 않고 학원에서 배운 공식대로 스케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에서 만들어진 각종 디자인들이 거의 서로 비슷하고 독창성이나 합목적성 등이 없는 베끼기가 유달리 많다. 가령 88 서울올림픽 공식포스터가 일본인의 그것과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의 각종 신문, 잡지 구성이 일본의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사실들이 이런 암기식 교육 때문이다.
입시위주의 교육은 예능계 학생들의 독창성과 재능을 짓밟고 더 나아가 국가 경쟁력을 심각하게 손상시킨다.
아래의 삽화는 한국의 88올림픽 공식 포스터와 일본인 작가들의 유사한 작품을 서로 비교한 것이다. 이를 보면 한국의 암기식, 모방식 교육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다.
그런 반면 한국의 지식 교육, 즉 이론 교육 역시 제대로 취급되지 않고 이를 숙련의 방식으로 아동들에게 주입한다. 즉 이론적, 지식적 내용을 숙련적, 기능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이다; 가령 수학 시험문제 풀이의 요령을 학원에서 가르치는 경우. 이 때 학생은 수학 이론의 원리(아르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면서도 이를 이용하여 응용문제 풀기는 잘한다. 즉 공식을 이용하여 문제 풀이하는 것을 학교 교육의 대강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풀이는 역시 하나의 숙련이고 기능인 것이다.
그리고 지식과 숙련 간의 차이의 하나는 후자는 열심히 시간을 많이 투자하면 할수록 여기에 비례해서 효과가 나오지만 전자는 무리하게 열심히 한다고 잘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식은 철저히 정신의 자발성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즐거움으로 해야 한다. 숙련이나 훈련은 고통스럽게 열심으로 한다면 가시적 효과를 볼 수 있으나 지식이나 이론 학문 등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학문연구를 장려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어릴 때 학문 연구의 흥미를 못 느끼다가도 후일 늦게 학문탐구의 열정이 점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나 국가는 개인들의 그런 학문적 열정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항상 교육 기회를 열어 놓고 있어야 한다.
이런 영역간의 혼동이 한국 교육의 핵심 문제이다. 즉 개념적, 이론적 지식을 기능적, 숙련적으로 가르치고 기능과 숙련을 요하는 과목들을 이론적으로 가르친다. 그리고 예술적 영역 역시 암기식, 기능적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이러니 한국에서 교육 받은 학생들은 이론이나 숙련(기능) 혹은 창작 가운데 제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이 졸업장만 따 가지고 세상에 나가게 되고, 그러니 자연히 그들의 생존능력은 극히 미약해 지는 것이다.
이런 학습 영역의 혼동은 결국 학벌주의, 입시위주의 교육과 학습에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이는 개인의 재능개발을 방해하고 나아가 인력 개발을 저해하며 종국적으로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주된 원인이다. 아래의 그림들을 보면 한국의 그림들이 얼마나 일본이나 다른 나라 그림들의 모방인지를 알 수가 있다.
이처럼 극도의 암기와 모방 만을 일삼는 한국의 실기 교육은 결국 독창성을 키우지 못하고 남의 것을 베끼기에 급급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산업)디자인이 생산하는 부가가치가 대단히 큰데 우리나라처럼 주체적인 사고와 감성을 무시하고 철저히 모방과 암기에만 의존하는 미술 교육과 학습은 국가적 경쟁력을 향상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때 국가 고시(考試)를 3과목이나 합격하여 천재로 칭송받던 박찬종씨는 “고시는 기술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요즘도 이런 종류의 문장들이 수험생의 세계에는 자주 눈에 띤다. 박찬종이 말하는 고시 과목들은 다 나름대로 학문의 영역이다, 예를 들어 헌법학이나 형법이니 모두 이론적 지식의 영역이다. 그런데 사법 고시라는 학습에서는 이런 학문들의 이론적 기초에 대해서 별로 주목해서 연구할 필요가 없다. 단지 그 내용을 요점별로 잘 정리해서 시험장에서 주어진 짧은 시간 내에 답안지에 옮기기만 한다면 좋은 점수를 받는다.
“고시는 기술이다”라는 문장은 그러므로 지식과 기능, 특히 암기력을 혼동하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런 박찬종 같은 사람들이 한국에서는 소위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소위 엘리트이고 지도자인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학교교육은 지식도 숙련도 모두 암기식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이런 암기식의 학습이 바로 소외된 학습이다. 이는 지식이나 이론을 배우지도 못하고 숙련이나 솜씨를 함양하지도 못한다.
소외된 학습은 이처럼 지식을 내면화 시키지 못한다. 그러니 죽자고 공부하지만 아이가 현명해 지거나 사리분별이 생기지 않는다.
대학 입시라는 심적 강박 상태 하에서의 학문과 지식의 탐구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내친 김에 말한다면 한국 사회에서 출세하기 위해 필요한 하는 온갖 종류의 시험들 역시 학문 연구와는 거리가 멀다, 고시 공부, 입시공부는 이처럼 학문과도 관련이 없고 지식과도 관련이 없다. 이는 지식을 기계적, 물리적으로 암기하여 필요한 곳에 적절히 쏟아 붓는 기술을 말한다.
2-4. 학습의 과정으로부터의 소외
지식과 도덕과 아름다운 감정은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내면성이다. 그러나 외부에서 강요된 지식이나 규칙 혹은 정서는 인간의 내면성을 파괴하는 폭력이다. 이런 지식의 폭력을 느끼고 자란 아이들이 창조적인 지성인이 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공부는 하나의 정신적 작용이다. 앞에서 플라톤의 『국가』에서 ‘억지로 학습한 것은 결코 영혼에 남아있지 못한다’라고 했다.
이런 관점에서 또 철학자 헤겔(G.W.F. Hegel)은 ‘정신의 본질은 자유이다’라고 선언한다. 헤겔은 자유가 정신의 한 속성이 아니라 정신 그 자체라고 한다. 그는 또 인류 역사의 발전이 풍요한 물질 생활의 발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확대로 보았다. 여기서 정신이란 의식 혹은 주체성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이런 정신적, 의식적, 주체적 활동으로서의 학습 내지 교육에 강제가 개입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인간에게 자유는 때로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큰 결점이 그 학벌주의에 있다는 것은 다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런 학벌주의를 파괴하지 않으면 강제 학습, 스트레스 학습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 이 주제는 뒤에 다시 토론하기로 하자.
앞에서 우리는 맑스가 소외된 노동의 두 번째 특징을 “생산 활동으로부터의 소외”라고 규정한 것을 공부했다. 이에 대응하는 ‘학습 과정으로부터의 소외’에 대해서 이미 위에서 많이 언급하였다. 이는 집단이기주의 교육의 문제로 규정된다.
입시지옥이라고 불리는 한국과 일본의 교육 환경은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다.
지식의 탐구를 곧바로 사회적 부와 권력의 획득으로 간주하는 것은 시장주의 내지 자본주의 교육의 본질이다. 이 경우 학습은 사회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취급된다. 이런 지식과 출세의 동일시는 또한 유교적 문치주의(文治主義)의 유산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의 과거 시험 역시 현금의 수능시험 못지않게 수험생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었다고 한다.
학문과 지식을 탐구하고 획득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사물의 이치를 잘 이해하는 사람은 실무적으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황금만능주의 하에서는 교육 = 돈 이라는 공식이 통용된다. 즉 좋은 학교를 나온 사람이 돈을 번다는 논리이다. 사람의 지식이나 지혜나 기타 개인적인 능력에 따라 재화가 배분되는 것이 아니라 명문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귀족층이 형성이 되고 이들이 사회적 가치를 독점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부조리에서 소위 빈익빈 부익부 라는 계층간의 위화감과 소외감이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부자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값비싼 교육을 시킴으로 해서 자녀들 역시 그들의 시대에 사회적인 가치를 되찾도록 적극 투자한다. 가령 같은 서울의 초등학교 A 와 B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두 학교 모두 축구부가 있다. 초등학교 A에는 축구부 회비가 월 1만원밖에 안 되는데 인근에 있는 좀 잘 사는 지역의 초등학교 B에는 축구부 회비가 월 24만원이란 것. B학교의 경우 그 축구 감독선생이 프로축구 선수 출신이고 A학교는 그냥 교사가 가르치는 것이다. 이럴 경우 돈 = 실력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지식권력의 사회에서 학습자들은 엄청난 공부의 압력을 받는다. 오늘 날 한국의 가정의 경우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오직 ‘밥 먹어라, 학원 가라’라는 두 문장만을 말한다고 한다.
위에서 헤겔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 정신의 본질은 자유라고 밝혀 졌다. 학습 역시 정신의 활동인데, 이를 강제하면 정신은 자기 모순을 일으킨다. 현대 사회의 가장 비극적인 고통은 맑스가 말하는 자본과 노동의 분리 및 투쟁이 아니라 학습자(학생)의 자기 분열이다. 소외된 노동이 아니라 소외된 학습이 우리 시대의 비극인 것이다. 이것이 한국 현대사의 진정한 비극이다. 이는 진정 6.25 보다 더 큰 비극이요, 모순이다. 왜냐하면 여기서부터 현금의 한국사회의 부조리, 무능력, 실업, 신용불량자 , 자살, 지하철 참사, 정치 비리, 공직 부패 등등의 모든 사회악이 굴러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인용한 맑스의 문장을 패로디(풍자)하여 아래와 같이 만들어 보면 학습 과정으로부터의 소외, 학습 활동으로부터의 소외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따라서 학습자는 그의 학습 속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느끼며, 자유로운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고행으로 그의 육체를 쇠약하게 만들고, 그의 정신을 파멸시킨다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학습자는 학습 바깥에서야 비로소 자기가 자신과 함께 있다고 느끼며, 학습 속에서는 자기가 자신을 떠나 있다고 느낀다. 학습자는 자신이 학습을 하지 않을 때에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학습할 때에는 편안하지 못하다.그의 학습은 그러므로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 강제 학습이다!”
이렇게 소외된 공부, 학습을 하는 것이 오늘 날 한국의 학생들이다.
2-5. 인간의 인간으로부터의 소외
이는 성적 경쟁, 업적 경쟁을 강요하는 학교 분위기 때문에 학생들이 그들의 친구들과 불화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교육의 목적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식의 습득, 기능의 숙련, 예술의 창조를 통한 자기 개발이다. 그런데 한국의 학교교육은 이런 자기 개발, 능력 배양과는 무관하게 오직 좋은 대학, 좋은 학과에 입학하는 것만을 최고의 가치와 목표로 삼는 입시위주의 경쟁 교육을 시행한다. 이러다 보니 일생에 있어 소중한 시절인 학창시절이 즐겁지 않고 고통과 스트레스로 점철된 시절로 각인된다. 따라서 그 시절의 교우 관계 역시 왜곡된다. 학우는 친구 라기 보다는 경쟁자 내지 적으로까지 간주된다.
특히 고교에는 내신이라는 상대평가에 의한 성적 서열이 있어서 나의 좋은 성적은 친구의 나쁜 성적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다 보니 학급, 교실이라는 사랑스럽고 자유로운 배움터가 삭막하고 차가운 배타적 경쟁의 장소로 바뀌게 된다. 내가 좋은 대학, 좋은 학과에 진학하기 위하여 극히 친한 친구를 속이는 일까지 생겨난다. 즉 입시정보, 예를 들면 홍익대 미대 입학시험 전에 그 학교 근처에 있는 입시전문 학원에 들어가면 대학시험에 유리한 정보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래에 소개하는 한ㅇㅇ 이란 학생은 그런 문제로 결국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를 잃게 되는 쓰라린 상처를 입게 된다.
“(…) 가장 소중하고 친한 친구를 꼽으라 하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단연 고등학교시절 친구들을 꼽으리라..
그러나 입시라는 것이 아름다운 내 친구를 앗아갔다.
참으로 같이 고생하며 정으로 사귄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같이 미대 입시를 준비하던 친구였는데 내가 미술을 뒤늦게 시작한 터라 그 친구는 많은 의지가 되고 또 도움을 주었었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미술학원을 다니기가 참 벅찼지만 그래도 꿈을 함께 하는 친구가 있어 나는 그 어려움들을 잘 감당해내던 차였다. 그러나 수능을 치르고 나서 나는 친구를 잃었다. 다시 생각을 하려니 참 고통스럽고 아프다.
그 친구와 나는 목표가 같았다. 둘 다 서울에 있는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과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 과는 그야말로 모든 미대 인들의 최고점이라고도 불리 울 만큼 높은 성적과 실기를 요하는 과였다. 전국의 그 수많은 경쟁자들 속에 30명만이 그 학과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30명... 참 좁고도 잔인한 구멍이었다. 그 30명이란 구멍이 내 친구가 나를 버린 이유가 되었으니,,(…)”.
한ㅇㅇ씨가 그녀의 친구와 불화하게 된 이유는 그 친구가 입시 학원정보를 숨기고 또 거짓된 정보를 그녀에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친구는 전국에서 오직 30명만 뽑는 산업디자인 학과에 입학하는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 친한 친구인 한ㅇㅇ씨를 속이고 따돌린 것이었다. 필자는 제자가 쓴 이 글을 보고 울었다.
그녀는 결론적으로 ‘한국교육은 절대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라고 절규하고 있었다. 이렇게 자기 잘되기 위해 절친한 친구마저 속이고 따돌려야 하는 학창생활! 거기서 우리의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느낀다는 말인가?
거기서 배우고 경험하는 것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 신뢰가 아니라 불신, 신뢰가 아니라 배신, 평화가 아니라 폭력 그리고 화합이 아니라 불화(不和)라는 불미스러운 덕목(德目)들이다.
물론 현재 학교 학생 전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요는 입시위주 그리고 수능(修能) 과 내신(內申)의 경쟁이 커질수록 거기 비례하여 이런 인간의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는 깊어 간다는 것이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참으로 불우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기를 강압적 학습으로 다 보내고 우정과 사랑을 통해 인간성을 폭 넓게 키워 가는 대신 인간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경험하도록 운명 지워진다. 무엇보다 이들이 자유와 여가를 다 빼앗겼다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다.
<삽화 7> 치열한 미대 입학시험
2-6. 순응주의, 기회주의
아이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상처를 주는 이런 입시위주의 경쟁교육의 또 다른 문제는 이런 교육이 열매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일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산출하는 것은 모두 독창성 없는 베끼기나 모조품 등이다. 일류대, 일류학과를 나온 이 사회의 엘리트들이 하는 짓이 도둑질이요 부정부패요, IMF위기인 것이다. <주간 현대 2003년 8월 10일> 자에서 재미(在美) 정치 평론가인 조영환씨는 입시중심의 교육이 어떤 사회적 폐단을 끼치는지를 아래와 같이 신랄하게 비판한다 :
“기존 지식과 정보를 악랄하게 외워야 법대와 의대에 진학하는 교육은 개인 출세의 지름길이 될 지는 몰라도 국가 발전의 방해물이 될 수 있다. 한참 상상력이 높은 학생들을 몇 권의 교과서에 가두는 교육 자체가 곧 망국을 촉진할 수 있다. 입시교육에 필요한 것은 악랄하게 외우는 것이다. 소위 근면과 성실이 입시교육에서 성공하는 길이다. 그러나 근면과 성실은 디지털 시대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학습과정이 인간적 소외와 불신 그리고 인간성의 상실로 이어지는 교육제도, 학교제도가 남아 있는 한 한국의 온갖 사회적 모순, 즉 학벌차별, 지방차별, 정경유착 그리고 부정한 정치자금 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즉 교육에서의 인간소외는 사회적으로 불법, 부정, 비리 등의 이기적인 악덕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삽화 8> 2003.10. 31일 한나라당 의원 지구당위원장 연석회의서 참석자들이 최병렬 대표의 인사말을 듣고있다.
위의 <주간 현대>의 글에서 조영환씨는 또 “한국 교육은 학생들의 문제 해결 능력과 창의성을 제대로 키워주지 못한다. 한국 교육은 체제에 안주하는 순응주의자들을 키워내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살인적 암기경쟁에 의존하는 한국의 입시교육은 인간의 창의성과 즉흥성을 제거한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전적으로 필자의 입장과 일치하는 생각이다.
순응주의자(Conformist)들은 결코 기존의 관행이나 습관을 바꾸지 못한다. 이들은 진정 독자적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 없다. 항상 그가 속한 집단이나 조직의 지침을 순종하고 특히 권력자나 상급자의 말은 비판 없이 수용한다. 이들에게 양심이나 상식 혹은 각종 윤리적, 도덕적 판단은 한갓 관념적인 유희에 불과할 뿐이다. 이들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다. 이들은 주로 한국의 공무원들이나 회사원들 혹은 교수들에게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순응주의자(Conformist)들과 비슷한 타입의 인간형으로 기회주의자(Opportunist)들이 있다. 이들은 우리 나라의 정치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형이다. 이들에게는 흔히 해바라기니 철새니 하는 수식어를 붙인다. 이들의 행동원리는 필요에 따라 수시로 입장이나 원칙을 바꾼다는 것이다. 즉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일구이언(一口二言)을 밥 먹듯이 하며 말 바꾸기, 식언(食言)하기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선에서 몇 번 실패한 후, 다시는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는 또 출마해서 부활한 김대중 전대통령이나 12대 대선 직전 노무현 진영에서 정몽준 진영으로 날아간 김민석 전의원 등이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처음에는 개혁이니 변화니 하고 떠들지만 금방 현실과 타협하고 만다. 가령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대선 직전에 그는 “반미(反美)면 어떠냐?”라고 호방하게 큰소리치더니 미국의 주한미군 재배치 내지 철수라는 협박을 받고 나서는 당장 친미(親美), 찬미(讚美)로 극적으로 전향했다. 그는 또 집권초기에 친노동(親勞動)성향을 보이더니 후에는 반노동(反勞動)로 전향했다. 그리고 선거 공약으로 재벌 구조 개혁을 외치고는 선거 후에는 경제 불안 때문에 못한다고 오리 발을 내민다.
이처럼 한국 정치인들의 약속파기와 말 바꾸기의 예는 끝이 없다.
그런데 이런 거짓된 정치 현상을 두고 국민들은 정치인들을 싸잡아 욕이나 하고 개탄만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관행이었다. 그리고 한참 잊고 있다가 또 정경유착이니 비자금이니 하는 사건이 터지면 다시 한탄하고 ‘정치인들은 다 썩었어 하면서’ 하면서 울분을 터뜨리는 것이 대한민국 사람들의 건망증이었다.
정치인들 스스로 매번 부정부패 없는 깨끗한 선거를 하겠다고 맹서하고 기업가들도 부정한 선거자금 , 정치자금 주지 않겠다고 다짐하건마는 매번 선거 치르고 난 뒤 마다 터져 나오는 엄청난 불법, 부정 금품수수 사건은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싫증나게 한다.
<삽화 9> 노무현 대통령 측근 안희정의 구속
사진설명 : 대통령의 측근인 안희정씨가 2003년 12월 14일 밤 불법대선자금 11억4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수감되고 있다. 소위 386세대라고 하는 한국 정치판의 개혁세대들 역시 부정, 부패의 집단적 비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정치인들 매번 정치 개혁이니 신당 창당이니 하고 들고 나오지만 전혀 불법과 도둑질은 근절이 안 된다. 기업과 정치의 이런 불법 자금의 수수가 IMF 위기라는 일제 식민지 시기 이후 최대의 굴욕적인 경제주권의 상실을 가져온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IMF 위기를 순간적으로 넘기기 위해 발행한 공적 자금 157조원은 자손 대대로 물려주어야 할 노비문서와 같이 한국인들의 어깨 위에 무겁게 결려 있다.
이렇게 불법, 비리를 밥 먹듯이 행하는 현금의 정치, 경제 지도자들에게 스스로 개혁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모순이다. 이들은 다른 세력에 의해 개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온갖 사회적 부정(不正), 비리(非理)의 근본적 원인은 한국의 교육, 즉 소외된 교육에 있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소외된 교육, 노예적 교육이 무능하고 욕심 많고 불법과 불의를 밥 먹듯이 행하는 더러운 인간을 키운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적인 능력은 도덕적인 능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이론적인 능력과 실천적인 능력은 원래 그 뿌리가 같다는 것이다. 사회정의가 없는 곳에 똑똑한 인물도 없고 반대로 무능하고 멍청한 사람들이 어떻게 요령을 부려 권력을 잡으면 반드시 부정부패와 독재로 간다는 것이 역사가 증언하는 법칙이다.
교육 개혁, 공화주의적 교육으로 이 모든 한국 사회의 오래된 악습을 끊어 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