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주의(Ästhetizismus)
『……』 은 '소설·작품집·저서', 「……」은 '논문·시·작품집 속의 소품의 제목'을 표기한 것입니다.
심미주의라는 말은 문예학에서 점차 전문 학술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특히 세기 전환기 시대의 유럽문학을 비교해서
연구할 경우에 그러하다. 그것은 주로 '동류(同類)개념
Klammerbegriff'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자연주의와 동시에 나타나던 상대적인 사조들의 특징들로부터 하나의 공통점을 찾아내려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예전의 연구들 중 이 명칭은 대부분 반자연주의적인 예술과 문학 방향들에 대한 명칭과 동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예전의 논문들이 갖는 용어상의
부정확성은 동시대 문학의 기획적인 표어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하나의 개념 차원으로 설정되었던 것에 기인한다. 그 개념은 이미 언급된 시대에서는 하나의 공통적인 경향을 표시하기에 거의 불가능했거나, 혹은 작가 자체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특징적인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의미론적으로 심미주의는 매우
추상적인 상위 개념으로 나타나며, 여러 상이한 그룹의 역사적인 형성을 변별케 하는 본질적인 특성들을 종합적으로 칭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용어의 규명과 정착을 위한 현재의 노력은 바로 이러한 가능성을 이용하려고 한다. 때로는 그 개념이 19세기와 20세기 초의 문화적 흐름의 전체성을 포괄하는데,
그 흐름 속에서는 예술과 창조성이 최상의 인류학적 또는 사회적인 지위를 얻게 되며, 예술의 창조성이 최상의 인류학적 또는 사회적인 지위를 얻게 되며, 예술이 현실에 대한 완벽한 독자적인 대안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부테노브
Wuthenow는 '유럽 심미주의 Europäischer
Ästhetizismus'의 복합체를 비교 문학사의 중요한 장으로 다루고 있다.
심미주의라는 단어는 19세기 말에야 비로소 더욱 빈번하게
마주치게 되는데, 그것은 문예 비평적인 그리고 예술 철학적인
논쟁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그 논쟁은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극단적인 견해와 니체의 영향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 독일은
심미주의의 관념을 규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외국에서도 부분적으로는 역시 1871년에 나온 니체의 주요 저서 중의
하나인 『음악의 정신에서 비롯된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ödie aus dem Geist der Musik』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저서의 마지막 두 번째 장은 하나의 '예술의 형이상학
Metaphysik der Kunst'의 초안으로 고대 그리스 문화와 비극의 근원에 대한 유형적 고찰을 요약하고 있으며, 동시에 하나의 포괄적인 생의 해석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독특한 미학을 통해 세속화된 변신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해석으로서, 공포스러운 것과 증오스러운 것의 관점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으로 제기하는 극단적인 삶의 모순에 대한 해석이다.
그 핵심적인 사상은 "현존재와 세계가 오직 심미적인 현상으로서만 정당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비극적인
신화는 우리에게 추한 것과 조화롭지 못한 것까지도 하나의 유희라는 점을 확인시켜주며, 의지는 그 유희를 자신의 충만된
즐거움 속에서 즐기게 하는 것이다." 그 작가는 의지와 음악의
형이상학이라는 점에서 정신적으로 쇼펜하우어의 제자임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 낭만주의적 사상가가 지니고 있는 경건주의는 하나의 긍정적인 생철학으로 전환되며, 그 생철학의 통일된
결과가 유희 메타포 Die Spielmetapher이다. 니체의 이념은
'세계극장 theatrum mundi'이라는 옛날 연극 메타포의 의미로
이해되기보다는 오히려 모던-실존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연적인 것과 동시에 완전히 무목적적인 것에 대한 생각이 중심점을 이루게 된다. 형이상학적 즐거움의 대상으로서
하나의 절대적 가치를 묘사하는 저 현상들, 즉 미학적인 현상들은 무목적성의 최고의 표현이다. 생은 단지 심미적인 측면에서만 하나의 의미를 낳을 수 있다는 근본적인 명제로써 니체는
심미주의에 하나의 철학적인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같은 장의 니체의 논증은, 예술에 관한 그의 견해가 낭만주의의 근본사상을 계속해서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한다. 니체가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예술은 자율적이다 라고 하는 견해는 그 역사와 더불어 철저한 심미주의적
이념이 부상하는 데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보다 이전의 유럽역사에서는 후기 고대와 르네상스와 같이 심미적 문화와 열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시대나 사회집단이 존재했었으나 예술의 기초 이론적, 인류학적, 역사적인 범주화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사람들이 언제나 이해하고 싶어했던 美라는 이념도 다른
문화 분야의 요구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완전히 독립적인
가치관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자율적인 예술개념을 위한
전제 조건은 18세기에야 비로소 만들어졌다.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의 역사는 대체적으로
1830년대 이래로 프랑스에서 발달된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개념의 발달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1800년에 이미 이론적인 기반이 확실할 뿐만 아니라 당당하게 표명된 이러한 종류의 명제가 발견되는데, 그것은 쉴레겔 A. W. Schlegel이 1801년 베를린에서 『미적 문학과 예술에 관한 강연 Vorlesungen
uuml;ber schouml;ne Literatur und Kunst』의 서문에 쓴
것이다. 예술은 절대적으로 무목적적이며, 이러한 무용성이야말로 자신의 가장 고유한 성질을 묘사하고 있다는 원칙은 특히
고치에 Gautier에 의하여 그 후로는 보들레르 Baudelaire에
의하여 확대되고 대중화되었다. 고티에의 소설 『모팽의 소녀
Mademoeselle de maupin, 1835』의 서문에서는 이 주제에
관한 그의 가장 중요한 진술이 발견된다. 보들레르는 보다 광범위한 문화 비판적인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법칙만을
따르는 예술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즉, 동시대 화가인 콘스탕탱 귀 Constantin Guys에 대한 그의 위대한 에세이는 간접적으로는 루소의 문명 비판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며 또한 인위성, 독특성, 그리고 최후에는 비자연성과 같은 것이 그에게 의미하는 바인 세련된 문화에 대한 하나의 변명서이기도 하다.
문명적인 관습과 인위적인 창작의 넓은 영역 안에 예술이 하나의 특별한 자리를 부여받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예술은
인간의 환상과 창조력에 대한 가장 인상 깊은 증명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들레르의 견해에 따르면 예술에게 자연의 모방을 요구한다는 것은 완전한 잘못이다. 이 점에서 점점 증가되고 있는 양식의 자율성에 대한 바람은 논리적이고 사회적인 자율성에 대한 요구의 결과인 셈이다.
수십 년 후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는 모든 문화 속에서의 예술과 작위作爲의 우위를 노골적으로 공언하는 자신의 에세이를 통해 그 결과를 이끌어 냈다. 『젊은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경구과 철학 Phrases and Philosophies for the Use of
the Young, 1894』이란 격언 모음집은 처음부터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삶의 첫 번째 의무는 가능한 한 작위적이려는 데 있다. 두 번째 의무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
작가는 두 번째 의무로서 분명히 종래의 상투적인 가치질서를
공격하고자 하는 바람을 선언했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종류의
그의 사상들 중 하나는 '근본적인 심미주의 radilkaler
Auml;sthetizismus'의 본래적인 근본 원리로 통용되고 있다.
1890년에 나온 『예술가로서의 비평 The Critic as Artist』이라는 에세이의 사상에 따르면 심미적인 감성은 윤리적인 감성보다 더 고귀한 지위를 수용한다. "어떤 사물의 아름다움을 파악하는 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정선된 정점이다. 색채의 감각조차도 개성의 발전을 위해서는 선과 악에 대한 감각보다 더 중요하다." 전통적인 가치제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터무니없는 이 주장은 그런 식으로 이해된 심미주의에 내포되어
있는 도전적인 잠재력을 인식하도록 한다.
비록 20세기에는 오히려 이러한 종류의 시위적인 공언이 드물기는 하지만, 심미주의라는 표기는 특히 정치적인 문학 비평가 대결 속에 하나의 매력적인 말로 남아 있다. 전체주의 국가,
주로 스탈린식 지배 영역에서 그 말은 무조건 정치적인 배척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종종 '형식주의 Formalismus'의 비난과도 연계되었다. 그러한 적용의 결과로서 저항, 성년, 반독단주의와 같은 언어 외적 의미들이 나타났는데, 그것들은 대개
'보헤메'란 단어에서 드러나듯이, 전혀 다른 조건하에서 근원적인 반시민적인 힘을 독특한 방식으로 변질시킨다. 근원적인
역사적 맥락은 토마스 만 Thomas Mann과 하인리히 만 H.
Mann에게서 예술가의 문제로 나타난다. 하인리히 만의 초기
소설에 등장하는 일련의 인물상은 '르네상스의 인간'을 찬양하는 가운데 심미주의적인 생각을 모델화하는 세기 전환기 시대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 안에서 인식될 수 있는 시민적 전통과의 결별에 대하여 토마스 만은 「비정치적인 자의 고찰
Betrachtungen eines Unpolitischen, 1918」이란 논문의 심미주의에 관한 장에서 논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럼에도 심미주의에 대한 그의 입장은 전체적으로는 양가적 兩可的이다. 독일 문학에서 보다 공격적이고 도전적인 특성들은 고트프리트
벤 G. Benn에게서 가장 뚜렷하게 다시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그를 표현주의적인 오스카 와일드로 부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역사란 실제로는 무의미한 사건, 끝없는 폭력 행위들의 사슬이며, 그 안에서 결국 예술 작품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그의 견해는 직접적으로 니체의 영향을 입은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변형을 보여주고 있는 그의 수많은 에세이적 논문들 가운데 「시인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Können
Dichter die Welt ändern?, 1928」와 「문학은 생을 개선해야
하는가? Soll die Dichtung das Leben bessern?, 1955」라는 글을 특히 그러한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1955년의 강연은 정치적 참여의 무의미성을 제시하려는 메타포가 다시 등장하게 된다. 그것은 니체의 유희 메타포와 연관이 있는 '인형'과
'단역'의 형상인데, 인간은 역사의 순환 속에 그러한 역할을 선고받은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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