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704년 신라 성덕왕 2년 서라벌에서 태어난 혜초는 719년 열다섯 어린 나이에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남천축국 출신의 밀교 승려 금강지삼장( 金刚智三臟)의 문하에 들어가 그를 사부(师父)로 모시고 밀교를 사사하다 약관 20세의 나이에 스승의 권유로 723년 광저우(广州) 에서 배를 타고 나신국(裸身国)을 경유하여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난다.
1,300여 년 전 100명이 떠나면 한 사람도 살아돌아오기 어렵다는 그 험난한 고행의 길을 오직 불법(佛法)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4년여를 인도 전역의 불교 8대 성지와 서역의 여러 지방을 순례하며 남긴 기록이 '왕오천축국전'이다.
혜초의 인도 견문록인 왕오천축국(往五天竺国) 전은 불교가 가장 번성했던 인도 중부 갠지스강 유역 16개 대국(大国)중 하나인 마가다국(비하르)에서부터 기록했다. 마가다(Magadha)국은 불교가 가장 왕성했던 지역으로 불교유적이 많은 지방 중 하나로 혜초가 방문했던 8세기 무렵에는 이미 불교는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고 그 빈자리를 토착신앙인 힌두교가 성행하고 있다고 했다.
혜초는 서북쪽으로 발길을 돌려 다비장(茶毘场)과 열반사(涅槃寺)를 참배하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입멸(入滅) 하신 쿠시나가라(카시아)를 방문했다. 다시 남쪽의 `나라바시`에 이르렀는데 여기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설법을 한 녹야원(鹿野苑)이 있는 곳이다. 나라바시 녹야원은 이미 100년 전 서유기의 주인공 당승(唐僧) 삼장법사(三藏法师) 현장(玄奘)도 다녀 가셨다.
나라바시 녹야원을 참배한 혜초는 동쪽으로 발길을 돌려 라자그리하 지방의 왕사성(王舍城)을 향해 떠 난다. 라자그리하는 최초의 불교사원인 죽림정사(竹林精舍)가 있는 곳으로 죽림정사를 참배하고 법화경의설법지인 영취산(靈鷲山)을 방문한 다음, 남쪽으로 내려가 석가세존께서 보리수 아래서 큰 깨달음(大覺)을 이루신 부다가야(Buddahagaya)를 거쳐 북쪽의 중천축국의 수도인 카나우지로 향했다. 중천축국의 수도인 카나우지에 대한 기록에는 이 나라는 대단히 큰 나라로 왕은 900마리의 코끼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아래의 수령들은 200 ~300마리의 코끼리를 가지고 있다고 기록했다. 혜초는 여기서 인도 전역의 기후, 풍속, 문화. 생활 등 국민들의 일상생활상을 서술했는데 특이한 것은 음식으로는 맵쌀로 빚은떡과 미숫가루 우유 소금 등을 사용하며 장(醬) 류는 없다고 기록했다. 또한 이 지역 사람들은 다른 가축은 잘 기르지 않지만 소는 즐겨 기른다고 했다. 다음 여정은 남천축국으로 지금의 대칸 고원이다. 이곳은 과거 불교가 성행했던 곳으로 깊은산속에 용수보살(龙樹菩薩)의 신통력(神通力)으로 세워졌다는 큰 사원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이미 페허로 변해 있었다고 했다. 혜초는 발길을 서북쪽으로 돌려 서천축국을 거치고 북천축국을 지나서 간다라(파키스탄 남부) 지방의 문화중심지역을 차례로 방문했다. 혜초는 북천축에 해당하는 탁사국을 지나 신두고라국에 이르러 나게라타나` 사찰에 한동안 머물게 됩니다. 나게라타나 절에 머물면서 안타까운 소식도 접하게 됩니다, 당나라 출신의 구법승이 중천축을 거쳐 이곳까지 왔다가 풍토병으로 쓰러져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입적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의 일 같지 않는 동병상련을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이어 북쪽으로 카슈미르 지방을 거쳐 대발률(大勃律)과·소발률(小勃律) 을 방문하고, 다시 발길을 되돌려간다라지방으로 내려오면서 스와트, ·길기트,· 페샤와르 등지를 거치고, 북쪽의 오장국(乌长国)과·구위국(拘衛国) 을 차례로 답사했다. 이곳은 모두 투르크족이 지배하는 지역이지만, 불교가 상당히 널리 퍼져있다고 기록해 놓았다 투카라(吐火羅 )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과 러시아 국경지역으로 투카라지방에서 한동안 머물면서 그 지역의 인물이나 풍속, 상업, 지역 정세 등 주변지역의 동정을 세세히 기록해 놓았는데, 특히 이 지역은 실크로드가 관통하는 동서교통의 요충지로 인근 여러 나라에 관한 지식을 얻어 페르시아나 사라센제국과, 동로마 제국까지 언급해 놓았다. 이후 실크로드를 따라 서부 투르키스탄(Turkistan)으로 가면서 그의 오천축국 기행은끝을 맺는다. 중앙아시아 내해(內海)인 아랄해를 지나고 건조한 사막을 걸어 달마 스님의 일화로도 유명한 총련 고개 (파미르 고원)을 넘는다. 혜초는 이 험난한 파미르 고원에서 중앙아시아로 향하는 당나라 사신을 만났습니다, 머나 면 타관 땅에서 비슷한 용모와 말이 통하는 사람들을 만났으니 고향 사람 만나듯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이럴 때 어찌 시 한 수가 없겠습니까? 그대는 서쪽으로 가는 길이 멀다 원망하고 나는 동쪽으로 가는 길이 멀다고 탄식하노라 길은 험하고 눈 쌓인 산마루는 아스라한데 험한 골짜기에 도적떼가 길을 막는구나 새도 높이 날다 가파른 산에 짐짓 놀라고 사람들은 기우뚱한 다리 건너기 어렵네 평생토록 눈물 훔쳐본 일 없는 나였건만 오늘만은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는구나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 장군이 개척하고 한동안 주둔했던 안서도호부(安石都護府)가 있는 쿠차(Kucha)에 도달하는 727년 11월에 왕오천축국 여행기는 끝을 맺는다. 장장 4년에 걸쳐 2만여㎞의 대장정으로 그간의 보고 들은 것들을 세세히 정리한 견문록이 `왕오천축국전` 이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보다 100여 년 앞서 천축국을 여행했던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 나 법현(法顯)스님의 불국기(佛国記) 에 비해 서술은 간략하게 기록했으나 사료적 가치는 그에 뒤지지 않는다. 당 승들이 전술한 여행기는 6~7세기 인도 정세에 관한 자료지만,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 인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전역의 기후, 풍속, 상,공업, 종교, 문화 등 사람들의 일상생활상을 서술한 것으로 세계에서 유일한 기록물이다. 법현(法顯)의 불국기(佛国記)는 육지로 갔다가 바다로 돌아온 여정이었고, 현장(玄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는 육지로 갔다가 육지로 돌아온 기록이며 의정(義淨)의 남해기귀전(南海寄歸傳)은 바다로 갔다가 바다로 돌아온 여정인 것에 비해, `왕오천축국전`은 바다로 갔다가 육지로 돌아온 것이 특징으로 오늘날 사학계의 훌륭한 연구 자료가 되고있다. 혜초는 왕오천축국기행을 마치고 당나라로 돌아온 727년 이후 54년 동안 오대산에 머물렀고, 금강지삼장ㆍ불공삼장(不空三藏) 의 역장(譯场)에서 필수(筆授)를 맡아 정리했다. 혜초는 금강지의 법통을 이은 불공 삼장 6대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당나라에서도 이름을 떨쳤으며 우타이산 건원 보리사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출처] 혜초의 왕오천축국(往五天竺国) 기행.|작성자 mach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