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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시장 변해야 한다 - 출판
곪아터진 출판시장,
합리적 유통과 투자정책 시급하다
참여정부 출범을 앞둔 2002년 가을에 출판‧인쇄업계의 단체 실무자들과 학자 몇 명이 문화관광부 직원들과 함께 문화관광부 내의 한 회의실에서 모임을 가졌다. 새로 출범하는 참여정부의 출판‧인쇄 문화산업 발전방향을 설정해 참여정부 인수위원회에 제출할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문화부의 한 책임자는 한 달 안에 보고서에 실릴 원고를 써 줄 것을 요구했다. 출판정책이 이렇게 졸속으로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제기됐지만 그런 의견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나 마음적 여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 다음의 진행은 일사천리였다. 차례가 짜여지고 참석자들 중심으로 각자 집필할 영역이 정해졌다. 원고 검토과정에서는 우스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출판정책방향을 쓰기로 했던 사람이 이미 수년 전에 썼던 글을 아무런 수정 없이 그대로 제출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연도만 바꿔서 실어 보려 했다. 하지만 그게 통할 일인가? 결국 전체를 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그해 12월에 드디어 46배판 크기의 288쪽에 이르는 「출판‧인쇄 문화산업 발전방향에 관한 제안서」가 만들어지기에 이른다.
제안서의 요지는 이렇다. 21세기 출판‧인쇄 진흥정책의 궁극적 지향점은 출판‧인쇄산업을 ‘지식문화 강국 건설’의 기본 인프라 산업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세계 5대 출판‧인쇄국 도약’ ‘동북아 출판‧인쇄 중심(허브) 시장 구축’ ‘세계 전자책 주도국 부상’ ‘독서환경의 제도화로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정책 목표를 세웠다. 이를 U-북 코리아 비전(Ubiquitous Book Korea Vision, 책 중심 한국 발전)의 청사진으로 설정해서 중심과제 등을 추출한 것이다.
출판사 몰락의 징후들
계획은 그럴 듯하지만 과연 이런 정책이 제대로 추진되고 있는가? 그 보고서가 일회성 홍보문구로는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출판시장은 지금 U-북 코리아라는 거창한 비전 창출은커녕 생존마저 우려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로 빠져들고 있다. 무엇보다 출판기업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IMF 시절만 해도 매출 100억 원이 넘는 출판사는 그 수가 미미했으나 지금은 300억 원 가량 되는 출판사가 다섯 곳이 넘는다. 또 100억 원이 넘는 출판사는 30여 곳에 이르며 이들 모두의 매출은 약 5천억 원에 이른다. 단행본 전체 매출을 1조5천억 원으로 보았을 때 3분의 1 정도를 이들 30여 출판사가 점하고 있는 셈이다. 2004년에 단행본 물류회사들의 매출이 전반적으로 30% 정도 감소한 것을 감안하면 이 출판사들의 양적 성장은 눈부셔 보인다. 2005년에도 이들 출판사들의 점유율은 더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질적 성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상위 출판사들의 매출은 대부분 대형 베스트셀러 몇 종으로 이뤄졌거나 홈쇼핑 등에 ‘대한민국 최저가 경쟁’을 일삼으며 혈투 끝에 올린 매출이어서 실제 이익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베스트셀러를 연속해서 내지 못하면 급전직하할 우려마저 있다. 과거에 10억 원에서 50억 원에 이르던 중형급 출판사들 가운데 일부는 30개 출판사의 반열로 올라섰지만 대부분은 급격하게 몰락해가고 있다.
이런 출판사 몰락의 증거는 신생출판사의 증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규 등록한 출판사는 2001년에 1180개, 2002년에 1896개, 2003년에 1647개나 되어 3년 사이에 새로 생긴 출판사가 4723개사(2003년말 현재 전체출판사는 20,782개사)나 되는 기현상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년에 한 종이라도 신간을 펴낸 출판사는 1524여 개사에 불과할 정도로 슬림화되고 있다. 전세계 어디에서 한 종의 신간이라도 펴낸 출판사의 수가 신생출판사 숫자만도 못한 나라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사망 신고를 하지 않으니 대체 얼마나 죽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인데 이런 통계부터라도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한다.
개별 책의 판매에서도 양극화가 치열하다. 몇 종의 베스트셀러는 그런 대로 판매부수를 유지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책이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하고 있다. 학습참고시장은 EBS 수능과외로, 대학교재시장은 복사성행으로 고사하기 직전이며 인문사회과학서적은 평균판매부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대부분의 인문서가 1000부를 넘기기 어려운 수준이다. 소설 시장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른바 본격순수소설은 거의 모든 일간지에 전면 크기로 소개되더라도 초판 3000부를 판매하기 어려운 ‘철벽 시장’으로 전락했다.
한때 가장 유망한 시장으로 평가받던 아동시장도 뒤늦게 뛰어든 출판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안달하는 ‘계륵’ 같은 시장으로 전락해가고 있다. 해마다 몇 종씩 등장하던 밀리언셀러들 또한 실제적으로는 실종되다시피 했다. 2004년에 밀리언셀러에 오른 책은 두 권을 합해 100만 부가 넘은 「다 빈치 코드」(댄 브라운)가 유일하다.
결국 일년에 신간이 4만 종 가까이 출간되긴 하지만 학습‧만화나 아동의 종수가 상대적으로 지나치게 비대하고 경제‧경영 등의 분야에서는 어슷비슷한 책이 많다. 태생이유를 찾기 어려운 책이 너무 많기에 종의 다양성을 찾기는 어렵다. 문화, 특히 출판은 다양성이 생명이지만 우리 출판은 그 다양성이 크게 훼손되고 있다.
붕괴하는 유통시스템
상황이 이렇게 어려워진 가장 큰 이유는 유통시스템이 붕괴됐기 때문이다. 1994년 말 5683개로 정점을 이루던 서점 수는 이제 2000여 개도 남지 않아 3분의 2가 사라졌다. 서점의 폐업이 늘어나는 이유는 더 이상 비전이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온라인서점의 등장, 대형 할인매장의 급격한 증가로 책의 할인판매가 성행하자 도서정가제는 유명무실해져 원칙 자체가 붕괴되었다. 2003년 2월에 발효된 출판및인쇄진흥법은 신간의 경우 오프라인서점은 정가로 판매해야 하지만 온라인서점은 10% 할인 판매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해 어떤 ‘원칙’의 적용을 시도했으나 이마저 온라인서점들이 과도한 마일리지와 경품증정으로 할인정책을 펴는 바람에 법 자체가 유명무실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서점은 더 이상 살아남을 희망이 없다고 보고 한꺼번에 문을 닫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출판계는 손을 놓고 있었다. 자기 살림터가 무너져가고 있는데도 저 혼자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인지 과도한 할인이벤트를 주도하면서 어떻게든 자기만 살아남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출판단체들 또한 현실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통해 전체를 설득할 수 있는 원칙을 세우지 않고 수수방관 했다. 정부 또한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문화관광부는 2001년 11억 원, 2002년 11억 원, 2003년 9억 원 등 모두 31억 원을 출판유통현대화 사업에 지원했을 뿐이다.
최근에는 사단법인 출판유통진흥원까지 설립해 유통현대화 사업을 벌였지만 얻어진 결과는? 문광부 담당자마저도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정도이다. 오닉스 시스템을 구축해 유통현대화를 이룬다고 몇 년간 자금을 투여해왔으나 목록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해서 일선 소매서점들이 이를 수용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결국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듯 혈세를 낭비한 셈이 됐다. 현실을 제대로 읽지 못한 정책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이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호도해보려는 목적인지 출판유통진흥원은 2004년 11월에 국고 3억 원을 지원받아 ‘한국출판포럼 2004’를 개최했다. 그러나 이 행사도 급조됐다. 예산은 진작 배정돼 있었지만 말이다. 어떤 외국인 발표자는 행사 1주일 전에 참가해 줄 것을 요구받았다 하니 얼마나 급하게 추진했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출판유통진흥원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출판유통진흥원을 대표하는 한 이론가는 실제적으로는 주로 도매업체 북센에서 일하고 있으며 월급도 북센에서 받고 있다. 북센이 어떤 곳인가? 온갖 할인업체에 앞장서서 책을 출고하다가 2004년에 줄줄이 도산한 벤더(변칙도매업체)들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곳이 아닌가. 이 사실을 확인한 한국서점조합회가 공개적으로 북센을 공박하는 사태마저 벌어졌다. 결국 정부는 출판유통을 망치는 데 혈세를 낭비한 꼴이 됐다.
어쨌든 유통진흥원이 행사를 치를 만한 능력이 되지 못하니 행사 주관을 경쟁 입찰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행사의 실제적인 주관은 한국출판협동조합이 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러니 행사가 제대로 진행될 리 없다. 한 발표자는 자신이 이미 다른 장소에서 여러 차례 발표했던 것을 재탕하기도 했다. 수준은 그렇다 쳐도 산만한 주제를 지나치게 많이 나열해놓아 심층적인 토론은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런 행사를 치루고 우리가 얻은 것은? 유통은 여전히 붕괴돼가고 있고 출판사들은 불안해 하며 갈팡질팡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행사를 비싼 비용을 들여 열 필요가 있었나 하는 회의가 드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우리 출판의 새로운 가능성, 글로벌 출판비즈니스
다른 한편 우리 출판은 새로운 가능성에 직면해 있다. 최근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우리 출판물의 수출이 크게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상도」(최인호), 「국화꽃 향기」(김하인) 「그 놈은 멋있었다」(귀여니) 등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열풍을 몰고 왔다. 2004년 하반기에는 텔레비전 광고까지 하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나상만의 「혼자 뜨는 달」 띄우기에 나섰다. 2004년 10대 뉴스에 ‘한국소설 붐’이 선정될 정도였다. 또 아동서나 실용서 등의 수출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일본의 <겨울연가> 신드롬이 몰고 온 파장은 또 어떤가? 일본 다이이치(第一) 생명경제연구소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겨울연가>가 2004년 1년간 한국에서 거둔 경제적 효과는 1072억 엔(약 1조720억 원)이나 됐다. 이 드라마 촬영지를 돌아보는 관광상품이 일본의 40-50대 여성에게 인기를 모으면서 2004년 4-10월에 한국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이 18만7000명 증가했고 여기에 간접효과까지 포함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드라마 DVD, 주제가 CD 등 관련 상품과 배용준이 등장한 과자, 자동차 등의 판매호조로 1225억 엔(약 1조2300억 원)의 경제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한·일 두 나라에서 파급된 경제적 효과를 합하면 2004년 1년 동안 총 2300억 엔(약 2조3000억 원)이나 된다.
드라마의 영향은 비단 경제적 효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국 유일의 전국지인 <유에스에이 투데이>는 2004년 11일 ‘욘사마’로 비롯된 일본의 한류 열풍이 아픈 기억을 지닌 양국관계에 새로운 급반전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대중문화에 식상한 대중들의 대안 모색, 아시아 지역의 오랜 적대감 완화, 10년 전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보여줬던 일본인 특유의 광증 재연 등이 일본에서 ‘욘사마 열풍’이 일어난 이유라고 하는데 한류는 이제 미국에서도 주목할 만큼 대단해졌다.
대만에서는 드라마를 소설화한 「대장금」이 베스트셀러 1위를 달린 바 있고 우리 드라마나 영화를 소설화한 책이 없어서 출간하지 못할 정도다. 이런 상황은 일본이나 중국도 마찬가지다. 경쟁이 격화되다 보니 저작권 계약금(어드밴스)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파리의 연인>이나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의 드라마 소설이 일본에 1억 원 이상에 팔렸으니 말이다. 특히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는 국내에서 책이 출간되기도 전에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판권이 수출되는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이 책은 중국에는 1만2천 달러, 대만에는 1만 달러에 수출됐지만 원고도 보지 않고 배팅한 것이어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하겠다.
이런 저작권 거래는 더욱 활발해질 것이며 앞으로는 동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상권으로 본 기획출판이 늘어날 것이다. 또 공동출판도 늘어날 것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각 나라 대중의 공통관심사에 해당하면서 이익의 창출이 확실해 보이는, 실용의 영역에 해당하는 책을 공동 기획해 함께 출판하는 형태였다. 앞으로는 이보다 다양한 형태의 출판이 매우 활발하게 이뤄질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저작권 수출 이상의 의미가 있으며 내수시장의 한계에 처한 우리 출판계가 불황을 탈출할 수 있는 돌파구가 될 수도 있다.
공동 출판 또는 동아시아 전체를 겨냥한 공격적 마케팅이 가능해진 것은, 물론 디지털 기술 때문이다. 지금 세계는 인터넷이 일상화되면서 국경을 초월한 정보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다. 또한 그런 ‘공공의 공간’에서는 ‘특별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다양한 형태의 정치적․문화적 충돌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런 충돌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문화적 노력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는데 우리 출판이 담당하기만 하면 출판 비즈니스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따라서 당장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한자’와 ‘유교’라는 문화적 자산을 공유하는 동아시아 내부의 문자문화를 어떻게 출판이라는 형태로 이끌어 갈 것이며, 나아가 동아시아 시장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한자라는 문자가 지니고 있는 이미지성은 디지털 시대에 더욱 위력을 얻고 있다. 납활자(hot type) 시대에는 활자가 단지 메시지만 전달했다면 사진식자(cold type)와 필름이 활용되던 시대부터는 활자가 스스로의 규약이나 틀에서 벗어나 의미와 이미지를 함께 전달하기 시작했다. 활자 안에 잠재하고 있던 이미지성의 발견은 디지털 시대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활자의 이미지성 측면에서 본다면, 단지 메시지만 전달하는 표음문자인 영어보다는 이미지성이 강한 표의문자(상형문자)인 한자가 더욱 유리하다. 한글은 표음문자이기는 하지만 표의문자적인 특성도 내포하고 있다. 타이포그래피가 21세기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의 키워드가 되고 있는 지금, 동아시아는 새로운 가능성에 직면해 있다. 책의 촉각성과 물성이 중시되는 새로운 아날로그로서의 책의 가능성이 커지는 만큼, 동아시아는 앞서서 그 가능성을 키워가야 한다. ‘왜’ 동아시아인가 하는 원초적 질문을 던지는 수준에서 벗어나 ‘어떤’ 동아시아인가를 책이라는 구체적인 상품을 통해 구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출판비즈니스를 제대로 주도할 때 우리는 비로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며 글로벌 시대에 적응할 수 있다.
우리 출판정책, 무엇이 문제인가
하지만 지난 5년간 문화관광부의 출판 분야 정부 예산이 집행된 내역을 살펴보자면 과연 출판정책이 제대로 존재했으며 우리 출판의 생존을 위한 기초적인 방법론과 장기적인 비전을 찾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문민 3대 정부를 거쳐 오면서 출판정책이 ‘통제’에서 ‘지원’으로 바뀌기는 했다. 하지만 바람직한 지원책이 세워지고 예산이 제대로 집행된 흔적은 거의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시장을 심하게 왜곡할 우려마저 있다.
그렇다면 우리 출판정책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먼저 장기적인 계획에 따른 예산집행이 이뤄지지 않고 단기적인 사안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전자책 육성에 2004년에만 12억 원이 지출됐는데 무엇이 육성되었는가? 몇몇 전자책 업체의 살림을 도와준 것밖에 없어 보인다. 전자책 사업은 국민의 생활과는 유리된 방향으로 진행되어 실제적인 수요를 거의 창출하지 못했다. 결국 전자책은 국민의 세금만 낭비하는 ‘세금산업’이라는 조롱을 받는 수준으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은 ‘즉흥적인’ 사안별 지원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광부의 지원은 해마다 열리는 행사에 대한 ‘그때그때의’ 지원이 대부분이다. 출판시장을 키우려는 장기적인 연구 개발에 대한 지원은 거의 없다. 사단법인인 한국출판연구소가 있지만 최근의 연구소장은 ‘연구자’가 아니었으며 연구원도 한두 명에 불과했다. 이런 수준으로는 문화부의 시급한 연구용역을 ‘해결’하기에도 벅차다. 장기적으로 바람직한 정책적 대안을 얻기 위한 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 하겠다.
둘째, 출판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모든 사안을 업자들의 이해상충으로 보는 단견을 보여주고 있다. 오프라인서점과 온라인서점을 같은 서점으로 보고 같은 원칙을 적용했어야 하는데 이를 구분해 출판및인쇄진흥법에서 다른 원칙을 적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늘 잡지와 단행본, 학술과 교양, 출판과 인쇄하는 식으로 구분해서 보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상식과 원칙의 복원이 매우 시급하다 하겠다. 때로는 업자들의 ‘비위’에 맞지 않더라도 장기적인 비전을 가진 정책이 추진되어야 한다.
셋째, ‘생산업자’들에 대한 직접지원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문광부의 예산지원은 거의 업자들에 대한 직접지원의 형태를 띠고 있다. 가령 우수학술도서에는 2002년에 125억 원, 2003년에 165억 원, 2004년에 110억 원이 지원됐는데 이런 방식은 이제 지양해야 할 때가 되었다. 바람직한 지원도서의 선정이 이뤄져야 했는지에 대해서도 비판이 되어야 하겠지만 보다 근원적으로 우수한 학술도서가 제대로 생산되는 시스템을 구축해 국민이 실제적인 수혜를 받도록 해야 한다. 가령 공공도서관이 활성화돼 일정한 수준에 이른 학술서를 일정 부수 이상 소화해 준다면 이런 식의 직접 지원은 없어도 될 것이다. 업자가 울면 젖을 주는 식의 정책은 앞으로 사라져야 한다.
넷째, 인적 자원을 키우려는 노력이 거의 없다. 출판잡지 전문인력 양성에 6억 원(2003년), 출판아카데미 운영지원에 5억 원(2004년)의 지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수준으로는 결코 전문인력이 키워지지 않는다. 전문 인력은 현장 종사자이면서 장기적인 출판비전을 찾아내는 혜안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는데 우리는 수십 년을 출판단체에서 일한 사람마저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이 거의 없다. 대한출판문화협회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협회나 출판계 내부의 인력을 선발해 파견하기보다는 일간지 기자들을 선발해 보내는데 열중해왔다. 이런 일이 일시적인 홍보효과를 누렸을지 모르지만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주빈국이 되고서도 전문가가 없어 갈팡질팡하는 사태를 자초한 셈이 됐다.
물론 결과만을 놓고 보면 정책당국자를 질책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결과를 몰고 온 것은 출판계 내부의 책임이 더 크다. 출판계 내부에서 출판 비전에 대한 확실한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따르는 형식으로 일을 진행했어야 했지만 늘 ‘부지런한’ 사람이 곶감 빼먹듯 국가예산 따먹기에만 열중했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출판계는 토론과 합의를 통한 비전 있는 정책방안을 제시하려는 시도를 해야 할 것이다. 국가는 그 확실한 계획서에 ‘투자’하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내수시장 붕괴라는 한계와 글로벌 출판의 가능성 실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일이 될 것이기에. <문화예술> 2005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