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종언과 식민지 주체의 저항(1)
-일제 말기 근대의 초극론과 동양문화론 비판
1. 들어가면서: 역사의 반복, 반복의 역사
1990년대를 지나 한국문학은 사회주의라는 거대서사의 붕괴와 함께 민족문학론의 퇴조, 신세대 작가들의 급격한 부상,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탈민족주의 논쟁등으로 일대 전환기를 맞은 것처럼 보인다. 한편 한국근대문학사를 돌이켜볼 때, 그 중에서도 특히 1930년대 후반기는 마치 1990년도의 한국문학의 지형도와 매우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 같다. 일본
제국주의의 본격적인 탄압으로 인한 국내 카프주의자들의 전향, 김동리를
위시한 신세대 작가들의 등장과 함께 불거진 신세대 논쟁,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이후 일제가 본격적으로 대륙침략을 감행하면서 제기한 대동아공영권 이론의 세계사의 재구성 문제는 당시 시대적 전환을 맞이한 한국 문인들에게도 동일한 문제의식으로 다가왔다. 1930년대에 한국문인들에게
제기된 문제틀과 비슷한 국면이 어떻게 90년대의 한국문학에도 제기되는가하는 의문은 단지 이 둘 사이의 유사성만으로는 논할 수 없는, 어떤 역사철학적 내용을 필연적으로 요청하는 것만 같다. 물론 1930년대에 일어났던 많은 일들이 1990년대에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반복되는
그것이 내용의 차원이 아니라면 아마도 형태의 차원일 것이다. 형태의 차원이라면, 소위 말하는 역사의 반복에 관한 논의는 무수한 실증적인 사실들을 서로 다른 반사경을 통해 비교하는 작업과는 별개의 것이리라.
한편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의 하나도 위와 같은 문제의식으로부터 제기된 것이다. 이른바 동양에 관한 담론이 그것인데, 이는 1930년대
후반에서 전쟁 말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사상가들에 의해 제기되었고,
그 내용은 '근대의 초극(超克)'이라는 커다란 주제 안에 모아진다. 근대의 초극론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서양의 물질문명에 대한 대안으로 동양정신의 부활에 있었다. 비슷한 경우가 1990년대의 한국에서도 일어난다.
소위 동양문화의 부활이라는 명제 안에서 노자(老子)의 무위(無爲)사상이나 기철학(氣哲學), 단군사상(율려, 律呂)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1930년대 후반의 일본 지식인들(혹은 친일을 한 조선의 지식인들)이 제기한 근대의 초극 논쟁이 서양 문명이나 문화를 극복하려는 차원에서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었다면, 1990년대의 동양문화에 대한 담론들은 대중문화나 매스미디어를 통해 빠른 속도로
대중들의 일상적 삶의 영역으로 침투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근대의 초극론이 대동아전쟁의 이데올로기적 명분을 제공한 것과는 달리 1990년대의
동양담론은 대중들의 사적인 삶의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소비되었다. 공통점은 1930년대(또는 1940년대 전반)와 1990년대의 동양담론이 모두 서구의 물질문명(더불어 정신문화까지)에 대한 극복의 차원에서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논의들은 좁게는 일본과 한국이라는
국가적 특수성을 사상한 한계 안에서 진행된 것이다. 하지만 보다 거시적인 틀에서 보면 1930년대 후반-40년대 전반과 1990년대는, 세계 전체를
국제자본간의 치열한 투쟁의 장소로 변모시키며 그에 따라 민족이나 국가간의 경계가 해체되어 어떤 보편적인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지향을 두드러지게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위와 같은 논의들을 가능하게 한다.
이 글은 전전(戰前)의 일본의 '근대의 초극론'과 같은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함의와 식민지의 조선의 문인들이 이에 반응하는 다양한 양태 중 특히
그 나름대로 명민하게 사유하려 했던 임화, 김기림, 김남천 등의 글들과
관련하여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때 일본이나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내세우는 동양문화론이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간략히 고찰할
것이다. 물론 그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허구성을 드러내는 차원에서 이
글의 논의는 진행될 것이다.
2. '근대의 초극' 논쟁 : 다원주의인가, 일본중심의 특수주의인가
'<근대의 초극>'은 1942년 당시 일본의 교토(京都)에서 열린 후 잡지《문학계(文學界)》에 연재되었던 두 번의 심포지움을 가리키는 말로, 당시
일본지식인들의 정신을 사로잡을 정도로 대단한 유행어였으며 또한 대동아전쟁의 상징적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론적인 뒷받침을 했다고 평가된다.
거기에 참가한 일본의 지식인들은 당시 일본문단을 주도하던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와 같은 문학비평가들과 니시타니 게이지(西谷啓治)등의
교토학파의 철학자들, 그리고 음악, 영화, 역사, 신학, 과학의 제 학문에
걸친 일급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근대의 초극> 회의는 당대 일본 최고의 지성들이 대동아전쟁과 결부되어 떠오르게 된 서양의 문명과 문화제반 문제들과 일본의 세계사적 위치 등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일종의 '지적협력회의'로, 그것은 서유럽에서 1935년에 열린 반파시즘적인 지적협력회의에 대한 패러디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근대의 초극'에서 중점적으로 논의하는 주제는 심포지움의 사회를 맡은
카와카미 데츠타로(河上徹太郞)가 던진 세 가지의 문제 즉, 1) 서양의 근대란 무엇인가, 2) 서양의 근대를 받아들인 일본의 근대화란 무엇인가,
3) 현대의 일본은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가, 로 모아진다. 다시 이는 세분화되어 1) 서양의 근대의 기원은 언제이며, 만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듯 르네상스가 그 기원이라면 르네상스의 정신은 "언제까지 계속되었는가", 그것은 20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가, 2) 1)과 같은 전통을 가진
서양적 근대가 "명치 문명개화의 힘에 의해 일본에" 옮겨졌을 때, "그것이 일본에 대해 어떤 공죄(功罪)로 나타났는가", 3) 일본의 고전이 갖는
현대적 의미, "일본의 현대사가 세계사인 이유", 그리고 "현대 일본인은
어떻게 가능하게 될 것인가"로 나뉜다. 그리고 앞의 세 가지 문제는 토의
내내 병행, 반복되면서 결론적으로 서양적 근대의 비판, 일본의 근대화
비판, 그리고 근대를 초극할 수 있는 일본의 정신, 혹은 동아시아의 문화적 저력을 이끌어낸다.
토의 참가자들에게 먼저 문제시되는 것은 근대적인 것을 유럽적인 것에만
한정시키는 유럽적인 근대, 혹은 그러한 전제아래 세계전체를 지배하는
유럽적인 근대이다.
이때 유럽이라는 것은 유럽인만이 아니고 더욱 세계적인 것이라는 의미의
유럽, 그래서 유럽의 세계 지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유럽의 세계 지배를 초극하기 위해서 현재 대동아전쟁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하나의 근대의 초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카와카미 테쯔타로우(河上徹太郞) 외 12명,「근대의 초극 좌담회」,
이경훈 옮김, 한국문학연구회 엮음, 『다시 읽는 역사문학-현대문학의 연구 5』, 평민사, 1995)
위의 예문은 헤겔 이래로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어온 세계사에 대한 유럽중심의 사고방식이 결코 보편적인 것이 아니며, 유럽적 의미에서 보편이란 "자신을 보편주의라고 생각하는 특수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한다.(사카이 나오키,「모더니티와 그 비판 :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문제」, H.D.하루투니언, 마사오 미요시 엮음,『포스트모더니즘과 일본』, 곽동훈 외 2인 옮김, 시각과 언어, 1996) 서구중심의 일원론적 역사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제출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매우 고무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는 철학자 미키 키요시(三木淸, 1897-1945)가 중일전쟁(1937)의 세계사적 의의를 논하며 신일본의 사상원리를 주창할 때의 논지와 매우 흡사하다.
미키 키요시 역시 "이제까지 '세계사'로 일컬어진 것도 실은 유럽 문화의
역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유럽주의'의 입장에서 본 것이었다"라고
쓰면서, 세계가 점차 일국을 뛰어넘는 한층 큰 단위로 분할·형성되어가는 현상적 흐름에 주목한다. 그 예로 자본주의 경제는 일국이 경제적 단위로서 자족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으며, 민족적 특수주의의 폐쇄적 경향이나 서구 근대의 추상적 세계주의도 이젠 극복의
단계를 맞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1990년대 내내 논의되었던 탈식민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이 주창한 세계의 탈중심화 원리와도 매우 흡사한 미키 키요시의 논의는, 세계 전체의 문화적, 민족적, 역사적 특수성들이 그 자체로 완전히 존중되는 새로운 권력배열로 나아가는 근본적 역사적 변화를 지칭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세계를 일원론적으로
파악, 구상하는 종래의 서구 역사관이 가지는 모델을 그대로 답습하고 만다."동아의 통일은 이제 새롭게 실현되어야 할 과제이다. 동아의 통일이
실현되지 않으면 진정한 세계의 통일도 존재하지 않으며 동아의 통일은
세계로부터 고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가 진정으로 세계적으로 되기 위하여 요구되는 것이다." 미키 키요시가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일군만민(一君萬民)이라는 세계에 비할 데 없는 국체(國體)에 의거한
협동주의를 근저로" 하는 특색을 가지며 또한 "외래 문화를 섭취하는 데에서도 무리하게 일정한 형식으로 통일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것의
병존을 허용할 만큼 포용적인" 일본 문화의 원리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인용은 미키 키요시(三木淸),「신일본의 사상원리」, 유용태 옮김, 최원식, 백영서 엮음,『동아시아인의 '동양' 인식 :
19-20세기』, 문학과지성사, 1997).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서유럽이나 미국이라는 보편주의를 가장한 특수주의의 경우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미키의 동아협동체론의 구상 역시 특수한 일본주의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사카이 나오키가 전전(戰前)의 교토학파를 비판하면서 "다원주의적 세계역사를 도입하여 근대성을 초월한다고
주장하면서 일본국가가 근대화의 이름 아래 획득한 거의 모든 것을 인준한다"(나오키, 같은 글)고 지적한 것은 미키 키요시나 <근대의 초극>에
참석한 논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타당하다. 따라서 <근대의 초극> 논의에서 다루어지는 일본의 근대화의 양상이 "근대성의 극복이란 서양 근대성의 극복이 문제입니다. 일본의 근대성을 극복한다는 것일리가 없습니다"라는 고바야시 히데오의 예외적 조항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의 근대화 체험은 논자들이 말하듯 혼돈 그 자체였지만 한편으로는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맹목이기도 했다. 그러나 심포지움 어디에서도 일본의 근대화를 괄호에 묶는 비판적 입장은 조심스럽게
유보된다. 고바야시는 "서양의 근대는 비극"이라면, 그것을 모방하는 "일본의 근대는 희극"이라고 말하며, 문학비평가로서 "명치 이래의 일본문학사는 서양의 근대문학에 대한 오해사(誤解史)라는 반성"을 하지만, 그렇게 된 희극 또는 오해의 구조에 대해서는 눈감아 버리고 만다. 오로지 문제되는 것은 근대화의 격랑 속에서 "신을 잃어버린 일본인"인 "우리가 갖고 있는 병독(病毒-인용자 주)의 적출"인데, 토론자들은 그 원인을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이때 외부란 말할 것도 없이 서양의 근대, 혹은 근대성이다. "역사를 언제나 변화, 또는 진보라고 생각하는" 서양적 근대성의 규범인 발전의 신화, 세속적 무신론, 전인성(全人性)의 상실체험, 기계론적 인간관 등은 철저히 비판당한다. 끝없는 변화와 발전을 본질로 삼는 근대성의 경험은 원래 그 안에서 안을 초월할 수
없는 혼돈과 소용돌이를 맛보는 체험이다. 근대적으로 된다는 것은 시시각각 역설과 모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모든 견고한 것들이 대기속으로 녹아 사라지는 전율과 공포를 통해서 자신이 서 있는 위치가 대단히
불안정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체험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자신이 디디고
있는 아슬아슬한 발판을 확고부동하게 유지시키려는 안간힘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적으로 된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반근대적임을 스스로 자각하는 아이러니이다.
근대의 초극 심포지움 참가자들이 정의한 근대성의 경험은 위와 같은 변화의 본질을 인정하면서도 한편 실제로 그들이 바라본 근대란 오직 '일본을 위시한 동아시아를 정복하려는 음험한 의도를 가진 서양'에만 한정된다. 그들의 근대이해는 서양적 근대성의 병폐만을 지적하기 위해 동원된
일방적인 수사학으로 치장된다. 심포지움 참가자인 스즈키는 근대인의 시간의식이자 변화의 계기인 "발전의 개념을 초극하는 곳에 역사학에서의
근대의 초극"이 가능하다고 보며, 하야시도 "진화론은 근대의 미신"이라
규정한다. 그런데 고바야시 히데오는 "근대의 사관"이 "역사의 변화에 관한 이론”이라면 "이에 대해 역사의 불변에 관한 이론도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그러한 대안으로 그는 "언제나 조화나 질서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예술문학”, 특히 "일본의 역사와 고전”을 든다. 한편 카메이
카츠이치로우(龜井乘一郞)는 서양적 근대를 "무신앙의 시대”로 진단하고
서양의 근대를 받아들인 현대 일본인을 "신을 잃은 일본인”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발상은 문명화에 대한 그의 시각에서 비롯되는데, 예를 들어 명치 이후의 일본의 가장 큰 특징인 전인성(全人性)의 상실은 전문가가 전문적인 일에 숙달함으로써 어떤 보편자를 잃는 과정과 동시적이라는
것이다. 이때 "일본이 정신의 통일성을 잃게 되었다는”진단은 필연적으로 일본정신의 본래적인 회복을 요청하는데, 카메이는 아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이 혼란과 비참(명치에서 소화에 이르는 문명개화에서 비롯되는,
신을 상실한 일본인의 혼란과 비참-필자 주) 속에서 결국 어떤 서광이 나타났는데, 저 자신은 어렴풋이 신불(神佛)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믿음을 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신앙의 해석이 아니라, 신앙 바로 그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근대의 초극논의는 근대성의 원리에 대한 일반적 비판에서
근대적 주체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게 되며, 주체에 관한 논의에서 근대
비판의 정점에 이르게 된 토론자들은 이젠 일종의 일본회귀라는 하강지점을 향한다. 먼저 논자들은 서양 근대성의 대표격인 아메리카니즘(Americanism)과 모더니즘(Modernism)의 인간관인 기계론적 신체 개념과
정신개념을 문제삼는다. 쯔무라 히데오(津村秀夫)는 미국의 물질문명을
비판하면서 “인간의 정신은 기계를 만들었지만 이제는 그것에 먹혀 버렸습니다”라고 말한 뒤, 기계문명을 제어할 만한 “더욱 높은 문화 이념”을 제시한다. 그러나 토론자들은 이에 대해 기계문명을 초극할 만한 것은
정신이 아니며, 먼저 기계를 만든 정신자체를 문제삼지 않으면 안된다고
역설한다. 근대의 신체가 "기계를 자기의 오르간(기관)으로 하는 오르가니즘”을 특징으로 한다면, 이것을 극복할 만한 또 다른 대안은 있는가.
토론자 중의 한 사람인 시모무라 토라타로우(下村寅太郞)는 "새로운 혼의
성격”,“심신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형이상학”을 요청하며, 요시미치
요시히코(吉滿義彦)도 비슷하게 "영성(靈性)의 로고스적 질서”를 언급하면서 "혼의 공허를 느끼는 곳에서부터 '근대의 초극’이 시작”되는 것이며, "그 때 혼은 문명과 기계에 통어(統御)되지 않으며, 영성이 일체를
제일의적(第一義的) 생(生)의 입장에서 통어”해 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이 "조국의 심오한 종교적 전통”과 연결되리라고 본다.
토론자 중에서 앞에서 논한 서양적 근대성의 인간개념을 돌파할 새로운
출구를 가장 적실성 있게 언급하는 사람은 교토학파의 일원인 니시타니
케이지이다. 니시타니는 위의 예문에서 카메이가 말한 '신불’의 이념과
비슷하게 '불성(佛性)’을 예로 들며 "무아의 주체성”의 원리를 표명한다. 니시타니가 말하는 새로운 주체개념은 "신의 현현이나 계시”를 통해
"'나'라는 것이 부정”되는 '주체적 무(無)’이며, 거기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더 이상 언급되지 않지만, 그가 심포지움에 따로 제출한 논문인「<근대의 초극>사론」에는 주체적 무에 대해 명백하게 정의한다.
보통 <자기(自己)>라고 말해지는 것은 또한 <유(有)>로서 마치 물(物)과
같이 실체적인 것이라고 생각된 자기이다. 그런데 진정한 주체성은 이러한 물이나 심(心) 저쪽의 것, 그것들의 부정, 즉 소위 <심신탈락(心身脫落)>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의식적 자기 부정, 소아를 멸한 <무아(無我)>, <무심(無心>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곳에 진정한 <마음>, 진정한 <혼> 즉 주체에 있어서의 진정한 주체성이 나타난다. 이것은 신체와,
그것에 속하는 자연적인 세계, 마음과 그 문화세계에 대한 절대적 부정,
절대적 초월을 포함한다. 거기에 또한 세계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종교적인 자유가 있다. 우리가 현세에 있을 때도 우리는 주체로서의 실존의 근거에 언제나 이 주체적 무의 입장과 자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자각하지 않을 뿐이다.
니시타니가 목표를 삼는 적수(敵手)가 데카르트 이후 지속된 심신이원론을 바탕으로 한 근대적 주체라는 것은 분명하며, 한편 그러한 서양적 주체가 실천윤리에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삼기 때문에 이를 초극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예문은 우선 무아의 주체를
논하는 사실확인적인 발언이면서 동시에 서구적 윤리학의 안티-테제로서
무의 철학에 입각한 새로운 주체성의 윤리를 대안으로 요구한다는 점에서
행위수행적 발언이기도 하다. 따라서 주체적 무의 철학의 원리는 먼저 한
개의 자아가 멸사봉공의 정신을 통해 개인 내부의 소아(小我)와 자의성(恣意性) 및 이기주의를 타파하고, 그 다음 공동주관성의 영역에서 언제나 대의와 타자를 위해 자기를 버리는 기술적 훈련과 실천적 윤리를 통해
드디어 국민정신을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의 숭고한 영역을 체험하게 되는 단계로 나아간다. 이 때 주체적 무의 원리를 가능하게 하는 종교란, 앞서 살펴본 미키 키요시의 글「신일본의 사상 원리」에서도 언급한
'일군만민(一君萬民)이라는 세계에 비할 데 없는 국체(國體)에 의거한 협동주의를 근저로 한다.’결국 <근대의 초극> 논쟁은 아시아의 해방이라는
명분 하에 영, 미를 상대로 한 대동아전쟁의 이데올로기적 원천이라는 점을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서양의 근대성을 극복한다는 미명하에 일본을 중심으로 한 또 다른 보편주의와 지배논리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극복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1940년대를 전후로 한 <근대의 초극>류의 일본 사상계의
전환이 당시 서구의 제국주의의 위협을 경험한 적이 있는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도 대단한 호소력으로 다가왔다는 점이다. 일단 영, 미의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한다는 일본의 명분은 근대성을 체험한 식민지 지식인들에게는 새로운 시대의 정신적 원리로 등장하며, 이때 조선의
지식인들은 식민지의 근대성 경험에서 일본을 제외시키고 근대성의 모든
폐단을 서구전체로 돌리게 된다. 마치 서구의 것을 열렬히 추종하던 일본인들이 근대성을 비판할 때 일본의 근대성이 아닌 서구의 근대성만을 문제 삼았던 것처럼. 한편 서구의 근대성에 대항하면서 동양적 원리를 모색하는 일본 지성계의 노력에 식민지의 작가들은 열렬한 관심을 보내게 된다. 적어도 동양의 정신만은 아시아의 일원이었던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으로서도 충분히 시선을 돌릴 원천들이 풍부하리라고 가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일단 의문의 눈길을 보내지 않으면 안된다. 도대체 서구적 근대성 일체를 포기할 만한 사상적 명분으로 주어질 동양의 정신, 혹은 그 매혹의 원리란 무엇인가. 이때 분명히 전제해야 할 것은 '동양’혹은 '동아시아’라는 통합적 명칭이 결코 각기 상이한 아시아의 민족 혹은 국가에서 자율적으로 구상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본 역시
아시아적 원리의 구상 역시 외부의 영향 없이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외부란 서양의 열강이며, 이러한 문제는 또 다시 서양 열강이 식민지를 놓고 각축전을 벌이며 비서구세계를 발견하던 과정인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의 동아시아의 사정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해결하기가
곤란하게 된다. 미리 말해두지만 일본의 아시아적 동일성의 구상이란 19세기 후반 서양이 일본을 서구적 근대성의 한계를 돌파할 출구인 자포니즘(Japonisme)의 나라로 만든 후 동양전체의 이미지를 떠맡게 된 일본이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치르면서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강력한 근대국가의 원리를 실현해 나가던 역사와 일치한다. 이때 일본은 서구의 열강과
대등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서양적 보편성에 저항하게 되고 일본의 범아시아주의는 서양적 보편성에 대항하는 나름대로의 사상적 원리를 형성해
나간다. 마찬가지로 서양의 보편성이 침략과 지배의 역사를 통해 식민지로 전파된 것처럼, 일본의 아시아주의도 동아시아 각국에 대한 침략과 외관상 전혀 구별이 되지 않았다.(Karatani Kojin,「History as Museum :
Okakura Tensin and Ernest Fenollosa」)
그러나 대부분의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결코 이러한 점들을 통찰하지
못했다. 한편 우리는 다음장에서 신체제론이나 대동아공영권의 시대적 요청에서 한 걸음 물러나 사유하고자 노력했던 임화와 김기림 등의 글을 통해 1940년대의 식민지 지식인들의 힘겨운 사유의 여정을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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