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나라 심양에서 10여년의 볼모생활을 끝내고 9년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는
불과 두 달만에 '감기'를 앓다 어의(御醫)의 침을 맞다 급살하였다.
"상의 행희(幸姬) 조소용(趙昭容)은 전일부터 세자 및 세자빈과 본디 서로
좋지 않던 터라,밤낮으로 상 앞에서참소하여 세자 내외에게 죄악을 얽어
만들어서 저주를 했다느니 대역부도의 행위를 했다느니 하는말로 빈궁을
모함하였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지 수일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인조실록 23년 6월 27일>
소현세자의 치료를 맡았던 어의 이형익은 인조의 후궁 조소용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소현세자는 '감기'를 보여 의관 이형익에게
치료를 받다 3일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다.
“왕세자가 창경궁 환경당에서 죽었다. 세자는 자질이 영민하고 총명하였으나
기국과 도량은 넓지 못했다. 청인이 세자를 인질로 삼겠다고 협박하자,
삼사가 극력 반대하였고 상도 허락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세자가 자청하기를
진실로 사직을 편안히 하고 군부를 보호할 수 있다면 신이 어찌 그곳에 가기를
어찌 꺼리겠습니까? (중략) 세자가 10년 동안 타국에 있으면서 온갖 고생을 두루
맛보고 본국에 돌아온 지 겨우 수개월 만에 병이 들었는데, 의관들 또한 함부로
침을 놓고 약을 쓰다가 끝내 죽기에 이르렀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슬프게 여겼다.
세자의 향년은 34세로 3남과 3녀를 두었다.”
(인조실록 권46, 23년 4월 26일)
소현세자의 행장 행간에서도 세자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닌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인조 24년 소현세자가 죽은지 1년도 못돼 세자빈 강빈을 위해하기 위한
'수랏상에 오른 전복에 독을 넣었다는 사건'이 일어났다.
인조는 이 사건의 주모자로 세자 빈 강씨를 지목하여 강빈의 나인 5명과
음식을 만든 나인 3명을 잡아 국문하였다.
결국 모든 혐의는 강씨에게로 돌려졌고, 결국 후원 별당에 감금되고 말았다.
인조는 문에 구멍을 뚫고 그곳으로 물과 음식을 들여보내라 할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소용 조씨는 강빈을 죽여야 한다고 계속 인조를 부추겼다.
마침내 인조는 조정대신들을 불러 모으고 강빈의 사사를 공론화시킨다.
그러나 조정대신들중에서도 강씨의 무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찬동하지는 않고 강씨를 폐해도 좋지만 죽여서는 안 된다고 간언했다.
인조는 강씨를 당장 폐서인시켜 친정으로 돌려보낸 뒤
곧 사사시키라는 명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강빈의 어머니는 처형되고 네 형제가 고문으로 죽었다.
인조는 소현세자와 강빈 사이에 태여난 세 아들과 세 딸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첫째 석철(경선군)은 당시 12살이고, 둘째 석린(경완군)은 8살,
막내 석견(경안군)은 겨우 4살이었다.
인조는 1647년 7월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로 귀양을 보냈다.
청나라의 용골대는 조선을 다녀갈 때마다 소현세자의 묘를 찾아 슬퍼하였고
장남 석철(경선군)을 데려다 기르겠다고 말했다.
그 후 석철이 영문도 모르게 제주에서 죽고 둘째 석철도 이어 세상을 뜨고 만다.
인조로서는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의 큰아들 경선군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자
큰 손자 석철로 인해 자신의 폐위가 염려되어 소현세자의 두 아들을
숨지게 했다는 것이다.
막내아들 석견(경안군)만 겨우 살아 불안한 목숨을 하루하루 유지하였다.
효종은 효종 5년 1654년 재변이 잇따르자 내외에 구언(求言)을 했다.
황해 감사 학주(鶴洲) 김홍욱이 강빈의 신원을 요구하는 응지상소(應旨上疏)를 올렸다.
“가장 듣기 싫은 말을 듣고 가장 크게 의심스러운 옥사(獄事)를 풀어야 재변이 그칠 것”
“역적 조(趙:후궁 조씨)는 안에서 날조하고, 역적 김자점은 밖에서 조작해 서로 모여
옥사를 일으켜 끝내는 (강빈이) 사사(賜死)당하는 지경에 이르고 온 가문의 노소가
남김없이 주륙당했으니 아, 참혹합니다”
“설령 그 어미가 죄가 있어도 어리고 연약한 아이들은 원래 몰랐을 것인데,
하물며 그 어미의 죄가 그리 명백하지 않은데도 갑자기 유배시켜 끝내 애매하게 죽여
영원히 구천(九泉)에서 한을 품도록 만들었다”
김홍욱은 "가믐의 원인은 허물이 없는 강빈을 죽인데 있다"며
금기로 여겼던 강빈사건에 다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효종으로서는 이 사건이 더이상 확대되는 것을 차단해야 했다.서둘러 엄명을 내렸다.
"강빈사건은 선대께오서 다시는 언급하지 말라는 유언이 계셨다.
그런데도 이를 논란하는 신료가 있다니 이는 불충 중의 불충이다.
금부에 알려 압송해오라" 김홍욱은 언관으로 있으면서
효종에 대한 비판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강빈옥사의 조작을 탄원하여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민회빈 강씨의 신원회복과 소현세자의 살아있는 셋째 아들 이석견(경안군)의
석방을 요구한 것이다.
소현세자의 일가의 무죄가 입증되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진다고
판단한 효종이다. 효종은 황해감사 김홍욱을 친국(親鞫)하여
장살로 살해하였다.
"언론을 가지고 살인하여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
그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은 후세인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김홍욱은 일약 사림의 추앙을 한 몸에 받는 명사가 된다.
그의 의성(義聲)은 나라 안에 자자하여 그의 가문은 명문거족으로 떠올랐다.
유림들은 자신들이 죽어야 할 자리에 학주 김홍욱이 대신 의롭게 목숨을 던졌기에
사림들의 영원한 존경의 인물로 추앙하였던 것이다.우암 송시열은 효종과 독대하는
자리에서 김홍욱의 복관작을 요구,명예를 회복하게 된다.
김홍욱의 자손 중 정승 8명 왕비가 1명이 나왔다.
추사 김정희는 그의 7대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