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티카 13호 양효숙 수필>
이야기 임플란트
마법에 걸린 노파처럼 할매는 이빨이 없는데도 잘 드셨다. 식사 후엔 이 뿌리가 들어있는 잇몸을 거즈 손수건으로 닦고 또 닦았다. 내 손으로 뽑은 이를 가져다주면 지붕을 쳐다보며 노래 불렀다. 헌 니 줄게 새 이 물어다 달라고. 지붕 너머의 세계와도 소통했다. 뿌리 없이 빠진 멀쩡한 내 이를 지붕에 던질 게 아니라 할매 입속에 심으면 어떨까. 할매 입안엔 이뿌리가 많으니. 왠지 마법이 통할 수도 있지 않을까.
충치 먹은 이빨을 흐르는 물에 씻어 돌멩이로 깨뜨렸다. 까맣거나 하얀 이빨벌레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마당가에 있던 호두나무의 열매도 깨뜨렸다. 딱딱한 껍질 안에는 부드러운 속살거림이 있기에. 제비 다리 고쳐주고 박씨 심어 박이 차례로 터지면 가슴도 두근거리다 터졌다. 놀부네 박 터지는 소리에 땀이 났었고. 대박을 터트릴만한 게 없을까 하고 이런 저런 보따리를 들고 도회지로 나갔다. 엄마의 가출 보따리마저 뺏어놓고 나왔는데 사다준 가방 대신 망태를 메고 다녔다. 가난한 집의 쥐구멍을 틀어막으며 집을 일으켜 세우기 바빴다. 쥐들이 뚫어놓은 가마니를 쥐띠 할매가 깁고 소띠 엄마가 소처럼 일하며 가마니를 채웠다.
할매 손은 작고 야무졌다. 음식을 만드는 덴 재주가 없었고 바느질쟁이로 살면서 밥을 먹었단다. 농사일에 필요한 새끼를 꼬거나 망태와 맷방석을 잘 만들었고. 품앗이 가는 집 논을 알려주며 젖 먹이러 오라하면 반대편에서 며느리를 찾는다. 엄마의 부푼 젖을 가까이 두고도 빈 젖을 물었다. 이야기 젖이라는 공갈 젖을 물려주며 아마도 달랬을 것이다. 할매는 잠들기 전 손주들에게 젖무덤을 하나씩 내어주며 이야기로 마법을 걸었다.
‘어느 집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머리 하얀 할매가 아들손자며느리와 함께 살았단다. 아기를 낳아놓고 아들 며느리가 논‧밭일을 하루 종일 하러 갔었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머리 하얀 할매가 아들 며느리 배고플 게 마음에 걸려 뭐라도 해놓고 싶어졌단다. 해질녘에 집으로 돌아온 며느리에게 가마솥에 닭을 삶아 놨으니 먹으라 했어. 아기가 안 보인다고 며느리가 말했지…….’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숨죽일 수밖에.
할매 이야기가 반복되어도 재미있었던 나이가 지났다. 라디오 연속극에 귀를 박거나 미닫이문을 열었다 닫았다하는 텔레비전 있는 집으로 마실을 다녔다. 삼대가 모여 살았던 그 집은 텔레비전을 가지고 야반도주를 했다. 서울 어딘가로 갔는데 뿌리내리지 못한 채 잘 못 산다는 말도 들린다.
어느 날 어메어메를 찾으며 노망들도록 살고 싶지 않다고 제발 데려가 달라고 할매가 울부짖었다. 할매가 울면 당산나무 스피커도 울리는 듯 컸다. 귀가 어두워 소리 조절이 안 됐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머리 하얀 할매가 될까봐 두렵고 겁먹은 모습이었다. 할매에게도 엄마가 있었고 할매에게도 엄마가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어릴 적 각인된 기억들 안에 할매가 있다. 엄마가 집에서 막내 동생 낳는 것도 떠오르고 가마솥 솥뚜껑 열리는 소리도 들린다. 정신줄을 놓은 할매가 아랫목 아기 낳은 그 자리에 누워 잠만 잤다. 눈을 뜨면 뱃속에 뭔가 숨어있다고 문지르기 바빴고. 방문을 열면 보이는 산이 북망산천이라고 노래하더니 그 곳에 봉분하나 만들었다. 밥숟가락을 문고리에 걸쳐두고 논일하다가 밥 때 돌아와 문을 열면 엄마의 외출복을 입고 앉아 있었단다. 여자로 돌아갔다가 점점 아기가 돼 돌아가셨다.
치과에서 근무하다 할매 부고 소식을 들었고 태교음악처럼 출산예정일 전날까지 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할매와 엄마처럼 자연분만과 모유수유를 원하면 할 수 있겠지 생각했는데, 죽을힘을 다해 고집 부려도 되지 않는 일이 있다. 3일 동안 촉진제를 맞아도 자궁 문은 뻑뻑하게 열리다 만다. 하혈이 많아 제왕절개를 하러 들어가는데 눈물이 쏟아졌고.
50년 가까이 치과의사로 살면 치아만 봐도 삶이 보인다. 그녀와 스물한 살에 만나 15년을 함께 했으니 할 말이 많은 사이다. 치과의사라고 치아가 좋은 건 아니다. 팔순 넘어 치과 문을 닫고 치매 예방을 위해 가까운 복지관을 드나든단다. 그녀를 보조하다가 환자가 돼 입을 벌리면 너도 내 이처럼 작구나 하시며 만져줬었다. 출산 후 온 몸이 퉁퉁 부어 누워 있는데 아름답다고 말해줬었고. 치과의사이기 전에 엄마요 할머니로 품을 게 많았을 것이다. 어쩌다 안부를 묻고 찾아가면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한다. 늘 처음 듣는 것처럼 반응하며 재밌게 들어주다 온다. 치아뿐만 아니라 몸집 자체가 작은 분인데 더 이상 작은 거인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까봐 두렵다. 소중한 이야기들을 기억하지 못할까봐 두려워 겁먹은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신은 영구치를 한번 한 벌밖에 안 줬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이빨 빠진 자리에 치아를 심기 시작했다.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다는 걸 알고 모이기만 하면 수다 떨기 바쁘다.
어릴 적엔 할매들과 이야기하고 커서는 아이들과 얘기한다. 혼자 사는 앞집 할매 집에서 자고 들어가면 엄마와 아버진 아궁이 불을 하나씩 차지한 채 얘기하다 쳐다봤을 뿐이고. 집집마다 마법에 걸린 할매들이 산다고 상상했었다. 해질녘 앞집에서 빨간 불같은 게 빠져나오는 걸 봤다. 앞 집 할매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했다. 영혼 없이 살 수 없으니 앞 집 할매 죽겠구나. 할매들은 긴 곰방대를 물고 연기를 내 뿜었다. 할매들이 죽으면 그 집들도 흔적 없이 사라지겠지 생각했는데 늙은 자식들이 돌아와 그 집을 차지했다. 개울물을 빠져나오고 골목을 휘돌아 나갔던 애들이 금세 할매가 되는 건 아니겠지 거울을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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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할머니들이 어린이집을 드나드는 시니어 프로그램이 있어요.
이 다음에 그거 한번 하고 싶어 신문 스크랩 해뒀어요.
입담 좋은 작가 할머니로 예쁘게 늙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