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남편이 갑자기 뮤지컬 미스사이공을 보자고 했다.
결혼기념일이 얼마 남지 않은 때라서
결혼기념일 날 보기로 하고 예약을 서둘렀다.
고양에서 하는 공연으로, 큰 맘 먹고 거액의 티켓 비를 카드로 긁었다.
주인공들의 신상을 검색하며
행복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볼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아침부터 그에게 늦지 않을 것을 당부하고.
부푼 기대감에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모든 건 순조로웠다.
남편도 일찍 들어왔고, 식사도 미리 챙겨먹고는.
시간이 남을 듯해 홍대부근에 가는 아들을
데려다 주고 가기로 하였다.
여기서 부터 일은 꼬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한없이 많을 것 같은 생각은 착각이었다.
퇴근시간이었기 때문에 차는 속도내기가 만만치가 않았다.
아들을 연신내역에 대충 내려주고
고양어울림극장으로 향했다.
그곳은 예전에 한번 뮤지컬을 본 적도 있었고.
친구 집 근처에 있는 곳이라 너무 자신이 있었고.
편안한 마음으로 공연장소를 찾아갔다.
그런데. 차를 주차하면서 뭔가 야릇한 불안이 몰려왔다.
큰 공연을 앞둔 공연장 느낌이 아니었다.
차도 몇 대 보이지 않고, 어둡고 뭔가 쌔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장소가 다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공연장입구를 가까스로 찾아갔는데 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안은 깜깜하기만 하였다.
순간, 내 머릿속은 노래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114안내 전화를 해서 알아 낸 전화번호로 극장과 통화가 되었다.
"미스사이공 여기서 하는 거 아닌가요?"
헐! 이럴 수가....
고양어울림누리극장이 아니라 고양아람누리극장이란다.
그곳은 고양이 아니라 일산에 있단다.
이런 개뼉다귀 같은 경우가 있단 말인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일산이 행정상 고양은 맞지만, 어찌 일산에 있는 극장을
그리 비슷한 이름으로 지어서 혼동을 하게 만든단 말인가.
어이가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남편과 결혼기념일에 거액의 티켓을 사가지고
세계 4대 뮤지컬로 일컫는 미스사이공을 관람하려는데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이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요즘 집안에 복잡한 일이 있어서
남편이 혹시나 캔슬을 낼까봐 그것이 조바심이 났으면 났지,
이런 엉뚱한 곳에서 뻥 터질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부랴부랴 전화로 불러준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고 갈 길을 서둘렀다.
퇴근시간과 맞물려 도로의 차들은 어둠을 사이에 두고,
엉금엉금 꼬리 물기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평심을 잃은 나는 판단도 흐려져서
길도 잘못 드는 우를 범했다.
외곽도로를 선택했어야 했는데. 일반 도로로 길을 잘못 든 탓에
공연시간을 넘겨서야 도착하고 말았다.
점점 나는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가슴 설레고 잔뜩 기대에 부풀었던 공연을 처음부터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이 마르고, 머리는 쭈뼛거렸다. 오 마이 갓!
아니나 다를까.
입장표를 들고 공연장으로 입장하려 하였으나.
공연이 시작돼서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한다. 흑흑흑.
어쩌면 좋단 말인가.
처음에는 1층 뒷자리로 안내해 준다던 안내자는 다시 말을 바꿔서
3층에서 1부를 보라고 한다. 그 자리에서 졸도할 것 같았다.
맨 앞자리 R석을 나두고, 3층에서 보라니. 내가 흥분할 수밖에..
나는 이미 통제 불능이 되었다.
희로애락의 감정조절력이 미흡한 나는
약간 목소리 톤을 높여가며. 그럴 수 없다고 떼를 썼다.
왜냐구요.
"오늘은 결혼기념일이니까"
나는 무식하게시리 나의 사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도저히 3층에서 볼 수 없다고 버텼다.
몇 분이 흐르고, 공연안내자는 우리를 1층 맨 뒷좌석에 안내해 주었다.
그렇게 앉아서도 억울하고 분함을 삭일 수가 없어서
뮤지컬에 제대로 몰입할 수가 없었다.
내 자신이 용서가 안 되고, 길을 잘못들은 것도 속상했다.
나는 쓸데없이 몇 분 동안 마음의 뒷북을 쳤고,
정신을 가다듬고, 호흡을 고르느라 또 아까운 시간을 그렇게 소비했다.
얼마 후. 평심을 찾고서는 또 내가 한 행동이나. 말들이 부끄러워
후회의 강둑을 오르내리느라 또 시간을 하릴없이 흘려보냈다.
오늘 정말 내가 왜 이러는 모르겠다. ㅠㅠㅠ
2부가 되서야 우리의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그 자리는 무대에서 두 번째 자리였는데 오케스트라 소리도 너무 잘 들리고,
연기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너무 잘 보였다.
공연은 웅장하고, 애절하고, 음악도 좋았고, 정말 명품 뮤지컬이었다.
그러나 또 속상함이 몰려온 것은
1부가 러브스토리였는데. 그것을 모두 놓쳤다는 사실이다.
아름다운 키스신도 많았는데 하나도 못보고, 마이클 리 얼굴도 제대로 못보고.
2부에서 보았기는 했지만, 결국 1부, 1시간30분을 앞에서 보지 못했다.
막이 내리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고 돌아서 나오는 길은
많은 아쉬움으로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말했다. 아니 놀렸다.
“왜! 결혼기념일이라고 말했어, 어쩌라구”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대체 어쩌라구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도 그 때 생각만 하면 손발이 오그라들고 얼굴이 붉어진다.
늘 평심을 지니려고 그리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불쑥 터지는 나의 분노심을
어찌 절제해야 할지 모르겠다.(나무관세음. 보살.
12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배가 고팠던 남편과 나는
점심 때 먹고 남았던 김치찌개에 밥을 허겁지겁 먹고 서는
뮤지컬의 감동과 어이없던 에피소드를 되뇌며
결혼기념일의 막을 내렸다.
첫댓글 많은 아쉬움이 남은만큼...평생 잊혀지지 않을, 에피소드 가득한 결혼기념일이 되었겠슈~~^^
리얼 다큐, 결혼기념일!
몇 년 전 어울림누리에서 싸부님과 몇 달 논 기억이 있는 칸나가 아람누리와의 변별성을 미리 알려줄것을...
무척 속상하셨겠어요~ 저는 설명절 연휴을 잘 보내려고 연극열전 공연을 예매하고 대학로까지 갔다가 입장불가로 다시 돌아온 기억이 떠오릅니다. 상윤이 나이가 어리다고 입장을 시켜주지 않아 결국 다른 날 다른 공연 '에쿠우스'를 봤지요.
에피소드가 있으니 쓸 거리가 생겼네요....길은 착한 놈이지만 믿을 건 못됩니다....이름도 마찬가지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