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난 4월 12, 13일 굴업도에 다녀온 박병상이라는 서생입니다. 환경운동을 하는 생태학 전공자입니다. 양서류와 파충류를 보러 갔지만 아직 이른지 볼 수 없었고, 다녀와서 본 흑염소 이야기를 이 게시판에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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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식동물의 눈매는 대개 선하다. 소를 보라. 사람에게 가혹하게 사육되건만 그렇게 무던할 수 없다. 반면, 육식동물의 눈매는 사납다. 호랑이나 늑대를 예로 들 필요도 없다. 고양이를 보자. 먹이를 놓고 다툴 때 얼마나 앙칼지던가. 흑염소 새끼를 낚아채는 매는 말할 것도 없고 개구리를 노리는 때까치의 눈매도 여간 날카로운 게 아닌데, 예외도 있다. 하늘의 제왕이라는 독수리는 그리 매섭지 않다. 죽은 동물의 썩은 고기를 먹어 그런가. 둥근 눈을 멀뚱거린다.
흑염소는 초식동물이다. 사료 작물은 물론, 소나무와 같이 거친 나뭇잎이나 가는 나무줄기까지 거뜬히 소화시키므로 사육하는데 특별한 어려움이 없다. 한데, 흑염소는 다른 초식동물처럼 눈매가 무던하지 않다. 똑바로 쳐다보며 경계하는 눈매가 공격적으로 보여 가까이 가기 싫거나, 거만해 보여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그런가. 흑염소를 집 가까이에서 사육하는 농가는 드물다. 사람의 왕래가 드문 임야에 풀어놓거나 서해안의 외딴섬에 방목한다.
흑염소에 정이 가지 않는 건 사람만이 아닌 모양이다. 보길도 찻집에서 진돗개를 키우던 시인은 황당한 경험을 했다. 산책 다녀오자마자 버둥거리던 개는 끈이 풀리기 무섭게 줄달음쳐 방목되는 흑염소 중 오직 한 마리만 물어뜯는 게 아닌가. 그 개가 앙갚음을 한 건 우연이 아닐지 모르지만, 그건 흑염소의 처지에서 어처구니없다. 가족과 높은 절벽에 은둔하는 염소를 굳이 잡아와 가축으로 품종개량한 건 사람이다. 흑염소의 의지와 하등 관계없다. 살쾡이도 접근할 수 없는 환경에서 표정이 선하든 험하든 사람이나 진돗개가 신경 쓸 이유가 없는데 흑염소는 치명적인 곤혹을 치러야 했다.
환경이 척박하니 소나 말이 외면하는 거친 풀도 마다할 수 없고, 절벽을 뛰어 넘다보니 근육에 지방이 적은 건 당연한데, 사람들은 신화를 가져다붙인다. “100가지의 풀과 1만 가지의 꽃을 고루 먹는 매우 신비한 동물”이라는 거다. 칼슘과 철분이 많을 뿐 아니라 근육까지 연해 소화흡수가 잘 되므로 예로부터 환자의 보양식으로 애용되는 흑염소는 왕실의 약용동물이었다고 한다. 동의보감에서 ‘양기의 으뜸’으로 치켜세운 만큼 비타민E가 많아 세포의 노화를 늦추고, 불임을 예방하니 임산부에게 이로울 수밖에 없다. 간에 비타민A가 풍부하니 시력감퇴에 효과가 좋다. 하지만 그게 어디 흑염소만의 특징이던가.
2천 년 전 중국에서 들여와 서해연안부터 사육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흑염소는 덕적도 인근의 굴업도에 흔하다. 소득사업을 위해 주민이 일찌감치 풀어놓았기 때문이다. 땅콩 밖에 심을 게 없어 엎드려 일해야 입에 풀칠할 수 있었던 굴업도는 척박한 모래섬이다. 서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굴업도에 주민이 있는 건 국가로서 중요하다. 그래서 국가는 국가 땅에 대한 흑염소 방목을 허용한 것인데, 덕분에 52만 평 굴업도에는 현재 수백 마리의 흑염소가 자유를 만끽한다. 정부가 핵폐기장 설치를 발표한 1994년 이후, 수려한 경관이 세상에 알려진 굴업도에 관광객이 들어오면서 10명 남짓한 주민이 흑염소를 잡지 않아도 생계를 꾸릴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굴업도의 흑염소들이 최근 새로운 생존 문제를 마주하게 생겼다. 굴지의 기업인 CJ가 골프장과 목욕시설을 갖춘 대규모 위락시설을 조성해, 하루 2천명 이상 북적이도록 망쳐놓겠다는 게 아닌가. 핵폐기장의 위협이 사라진 굴업도는 한때 누드해수욕장으로 오염될 위기에 처한 적 있다. 어이없게도, 당시 39세 먹은 개발업자가 외국인에게 나이 제한 없는 누드해수욕장을 열어 40세 이상의 내국인에게 허용하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던 것이다. 다행히 해프닝으로 끝났는데, 골프장이라니. 핵폐기장을 반대하던 시민들이 ‘태평양의 진주’라고 칭송하던 경관을 골프장으로 훼손해도 괜찮은 걸까. 카메라를 들고 굴업도 기슭을 돌아다니며 경관을 촬영하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을 향해 흑염소는 묻고 싶을 것이다.
1998년 한국과학기술원은 사람의 백혈구 증식인자를 젖으로 분비하는 흑염소를 유전자조작 기술로 개발했다고 자랑했다. 이름하여 ‘메디’. 1그램에 9억 원을 호가하는 치료제로 국내외 백혈병 환자의 치료는 물론, 국가 부가가치를 크게 향상시킬 것으로 기대했는데, 지금 그 흑염소는 어디에 있나. 십여 마리 이상으로 복제하겠다고 호언하던 메디는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래도 5세대 후손을 보았다는데, 2001년에 임상시험에 들어갈 거로 장담한 백혈구 증식인자는 여태 감감무소식이다. 분명한 사실은 메디 후손은 굴업도의 흑염소보다 결코 높은 부가가치를 올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몸무게가 40킬로그램에 미치지 못하는 흑염소는 가을에 임신하여 새순이 돋는 봄에 새끼를 두 마리 낳는다. 이때 외딴섬의 흑염소 어미는 하늘을 선회하는 매를 조심해야 한다. 방심하면 순식간에 새끼를 낚아챈다. 인간의 등쌀로 육지를 떠난 매도 제 새끼를 먹여야 한다. 4월 초 굴업도에서 머리와 뼈만 남은 어린 흑염소 사체를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흑염소는 사람 손도 조심해야 한다. 길목에 친 올무에 걸려 관광객의 저녁상에 올라갈 위험도 있지만 사람 냄새 밴 새끼와 생이별하는 비극이 발생할 수 있다. 급히 몸을 피해야할 만큼 다가왔던 사람이 방금 낳은 새끼를 귀엽다고 만질지 모른다. 굴업도 이장 집에는 15일 된 흑염소 ‘깜둥이’가 사람 뒤를 졸졸 따라 다닌다.
충분히 건강한 사람은 흑염소를 약용으로 증탕하거나 불고기, 전골, 수육, 심지어 파인애플과 조려 먹는다. 그렇게 100만 마리의 흑염소가 해마다 세상에 태어났다 등지는데, 봄을 맞은 굴업도에는 천남성이 군락을 이뤘다. 사약 재료인 천남성의 순을 흑염소들이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일 텐데, 흑염소는 그렇게 외딴섬의 생태계를 형성하는데 기여를 한다. 여기저기 흔적을 남긴 흑염소 똥들 옆에 못 보던 들꽃들이 꽃대를 밀고 올라온다.
넓고 깨끗한 모래사장과 오랜 파도로 깎인 암벽 해안선이 경이로운 경관을 연출하는 굴업도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흑염소는 비록 방목된 처지지만 핵폐기장과 누드해수욕장은 물론, 골프장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감탄하는 굴업도를 인천시에서 해양시립공원으로 지정하기를 간절히 원할지 모른다.v
첫댓글 굴업도에서 뛰놀던 사슴과.. 풀을 뜯던 흑염소가 지금도 생각이 나네요..
흑염소에 이러한 깊은 사연이 있었네요. 그네들이 자유롭게 뛰놀고, 가끔씩 사람에게 먹히기도 하고. ㅎㅎ 이게 바로 부가가치란 생각이 드네요.
글을 보고 흑염소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굴업도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누드비치라니 정말 어이가 없네요;; 그나저나 흑염소도 사람냄새가 배면 새끼를 버리는군요... 고양이도 새끼에게 사람냄새가 배면 버리는데;;; 그래서 가급적 야생동물의 새끼는 함부로 만지면 안된다는 얘기가 있는거죠...
흑염소 보는 즐거움을 뺏어가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