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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창 마을 선돌
요즘 날씨가 정말로 춥습니다요 감기걸리지 않도록 건강에 유의하세요 요즘 카페가 활활 타오르고 있네요 카페로 오셔서 더많은 정을 느껴보세요 왕초 올림(^^)(--)(__)(^^)
♣ 압해도 - 노향림詩 - 최영섭曲 - 바리톤 박정하 ♣
섬진강을 지나 영산강 지나서 가자
친구여 서해바다 그 푸른꿈 지나
언제나 그리운 섬
압해도 압해도로 가자 가자
언제나 그리운 압해도로 가자
창밖엔 밤새도록 우리를 부르는 소리
친구여 바다가 몹시도 그리운 날은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섬
압해도 압해도로 가자 가자
언제나 그리운 압해도로 가자
하이얀 뭉게구름 저멀리 흐르고
외로움 짙어가면 친구여 바다소나
물사잇길로 가자 늘리보다 더 외로운 섬
압해도 압해도로 가자 가자
언제나 그리운 압해도로 가자
♬ Bar.박정하♪
♬ 피아노 정혜경 - 첼로 성소희 ♪
압해 대교
***시인이 마음속에서 언제나 그리워 하는 섬
꿈과 향수가 어린 섬
압해도는 시인의 가슴을 적시는 위로의 샘
전신의 균형을 만들어 주는
아름다운 섬으로 기억되고 있다.
섬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은 작지만 마음속에
고향이란 이름의 섬을 간직하고 있지않은 이가 없다.
이노래는 바로 그 섬을 그리워 하는 사람들의 노래일 것이다.
***봄술에 취한듯 바람은 바다를 잠들게 하고
우수 지난 청둥오리 에게도 낮잠의 여유를 주는
자연의 풍광도, 인간의 노동도 애마르지 않는 압해도
연륙교 보다는, 항상 대지에 순명하는 삶이 좋은.....
마음속의 이상향, 그리운 섬, 외로운 섬 압해도
---벽악(碧嶽)---
압해도 부근 섬들과 일몰
압해도 8 - 노향림
압해도 사람들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이마받이을 하고
문득 눈을 들면
사람보다 더 놀란 압해도
귀가 없는 압해도
반 고호의 마을로 가는지
뿔테 안경의 아이들이 부는
휘파람 소리
일렬로 늘어선 풀들이
깨금발로 돌아다니고
집집의 지붕마다 귀가 잘려
사시사철 한쪽 귀로만 풀들이 피는
나지막한 마을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압해도를 듣지 못하네.
-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1992)-
압해도 앞바다
시인 노향림은 압해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해남에서 태어났지만
장사를 하시던 어머니를 따라 압해도를 드나들면서
이 곳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지 압해도 연작시를 100편 가까이나 남겼다.
고흐의 전원 풍경에서 느낄 수 있는 강렬한 그리움의 공간으로서의
섬(고향)을 독특하고 개성적인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다.
그녀는 전남 해남 산이면에서 1942년 6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난다.
태어나자마자 목포로 나와 살게 된다.
목포시 산정동 산기슭에 딱 한 채가 남은
일인(日人)들의 ‘적산가옥’에서 가난한 유년기를 보낸다.
‘40년대의 유년은 해방 혼란기와 더불어 먹고 살기에 너무 힘든 시절이었다.
식구들이 모두 나가 돈을 벌거나, 먹는 물이 부족해서 물을 길러 가거나
오빠들이 학교 가면 혼자서 집을 지키기도 했다.
몸이 약해, 병은 이미 혼자 다 거친 것 같다.
어린 시절, 유행병이 창궐하던 때 장티푸스 ·
복막염을 앓고 집에서 거의 누워 보낸다.
병들고 쓸쓸한 유년이었지만, 산기슭을 거쳐 뵈는 앞바다,
그 곳에 앉아 있는 섬 압해도가 무한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결국 그 섬과 혼자서 많은 대화를 나눈 셈인데,
이유는 대낮의 정적이 어린 마음에 무섭고 싫어서였다.
아마 이때부터 어떤 침묵하는 사물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할까.
1992년에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문학사상사)를 상재. 다른 시와 함께 압해도 연작시 60여편을 수록했다.
여기에 실린 연작시와 우리 가곡으로 만든 <압해도>란 노래가
압해도 사람들에게 전달되다. 게다가 목포 앞바다에 뜬 섬
압해도 주민들 사이에 모금운동이 일어나면서,
1996년에 시비가 신안 군립도서관 앞에 세워지는 영광을 누린다.
노향림 시인 연혁 :
1942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하여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70년 <월간문학> 시 부문 신인상에 당선하여 문단에 데뷔하게 되었으며,
1987년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연습기를띄우고>,<눈이 오지 않는 나라>가 있다.
압해도의 송공산
삼국시대에는 팔금, 안좌, 도초 등과 함께
아차산현에 속했다가 압해군의 설치로 군이 취소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군이 폐지되면서
나주목에 속하게 되었다가 한때 영광군에 속하기도 하였다.
1896년 지도군 창군으로 이에 속했으며,
그 후 무안군 편입을 거쳐
1969년 신안군 신설로 신안군 압해면이 되었다.
섬의 지세가 삼면으로 펴져 바다를 누르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압해도라 부른다고 한다.
선사시대 유적인 지석묘와 패총이 있고,
구비전승으로는 벼락바위, 역도, 압해도와 기씨,
송공산 도둑골, 벼락바위와 변덕샘,
범바위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특산물로 당도가 높고 육질이 좋은 배와 무화과,
돌김이 나며 섬내 무화과 가공공장이 있다.
동서리 도창마을에서 조천마을로 넘어가는 길목에
구남봉을 못가서 길가에 대형 입석 1기가 있다.
이 입석은 "선돌", "송장수 지팡이"라고 불리운다.
"송장수 지팡이" 라는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관련된다.
송장수가 옛 무술을 연마하던 중 휘하에 있는
한 사병이 죽은 일이 있었다.
송장수는 석곽에 그의 신과 무기를 넣고 매장한 뒤
그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이 선돌을 세웠다.
압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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